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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표는 21세기 한국 정치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장했다. 그녀의 역경을 이기며 살아온 삶의 역정이 대중에게 어필했고, 위기의 대한민국호(號)를 선진 한국의 올바른 방향으로 항해할 선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티 박정희를 줄기차게 외치며 ‘독재자의 딸’이라는 점을 부각시켜온 정치세력들은 모두 실패했다. 5공과 6공,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심지어 참여정부의 실정(失政)까지 모두 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덮어씌우는 친북좌파들의 준동에 절대다수의 국민들은 미동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 9월 30일에 태어난 분으로 올해 탄생 90주년이 되는 ‘한국 근대화의 아버지’이다. 가난한 농부의 9남매 중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한다’는 말 대신 ‘가난은 나라만이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신념으로 안고 살다간 지도자이다. 그는 재임 기간 18년 동안 한국 경제를 부흥시킨 역대 최고의 지도자였다.
그가 취임했을 무렵 회사의 재정 상태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보릿고개를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시절이라 직원들의 월급은 형편없이 적었고, 생산성이라고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회사의 신용은 처음부터 없었지만 최선을 다해 자본을 끌어들여 공장을 짓고 생산량을 늘렸다. 직원들을 열사의 나라와 정글의 나라로, 광부로 간호사로 파견했다. 결국 그가 CEO를 그만둘 무렵 직원의 월급은 20배(1인당 국민소득 82달러에서 1,636달러), 매출은 370배(연간 수출액 3,300만 달러에서 125억 달러)가 늘었다.
그가 취임할 당시 업계 순위 72위였던 회사가 퇴임할 무렵에는 17위로 올라섰다.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연평균 경제성장 9.3%의 ‘한강변의 기적’은 이렇게 이뤄졌고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팽배한 직원들의 중심에는 CEO 박정희가 있었다. 그가 이끌었던 기업의 이름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이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지도자 덩샤오핑은 박정희의 경제 개발 모델을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며, 말레시아의 마하티르 총리 또한 박정희 경제 모델을 연구한 ‘동방정책’으로 말레시아를 중진국 대열로 끌어올렸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도 박정희 경제 모델을 연구, 정책을 실시한 결과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의 아시아 허브국가로 만들었다.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도 박정희 경제 모델을 탐구하여 후진국인 파키스탄을 중진국 대열에 올려놓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필자는 인간 박정희에게서 지난 시절의 아버지를 본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자신의 삶이 아니라 자식들과 후세대를 위한 삶을 살았고, 자신은 굶주리는 대신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병원에 실려 간 고 박정희 대통령을 의사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워낙 싸구려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는 순간까지 검소했던 그는 “자식을 위해 좋은 밭을 사지 않는다”는 자신의 말처럼 훗날 자식들에게 어떠한 유산도 물려주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박정희는 사심이 없는 청렴한 대통령이었다.
우리는 ‘그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안다’는 말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는다. 자식은 부모가 이 세상에 남긴 거울이다. 박 전 대표를 보면 그 부모의 삶의 철학과 실천윤리를 그대로 배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에게서 근면과 검소, 어려움에 처했을 때의 인고와 과단성, 원칙을 지키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용기를 발견한다. ‘호랑이는 결코 고양이를 낳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부녀간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노 대통령이 아무리 고 박정희 대통령을 비하하고 박 전 대표를 독재자의 딸이라 폄훼(貶毁)해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리면 된다. 모진 광풍 견디고 핀 눈부신 백합처럼 지도자도 춘하추동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으며 성장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