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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12년 6월 15일. 대다수 언론들은 12년 전 수 억 달러를 평양 것들에게 갖다 바친 뒤 맺은 ‘종북선언’ 기념식에 대해서만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 1년 전 진짜 기념할만한 일이 있었다. 바로 1차 연평해전이다.
젊은 장병들의 ‘패기’ 보여준 승전
1999년 6월 15일 80톤급 북한 경비정 2척이 인민무력부 소속 꽃게잡이 어선 20여 척을 끌고 NLL 남쪽 2km 해역까지 침범했다. 이어 북한군 어뢰정 3척도 NLL 남쪽으로 기어 내려왔다.
6월 6일부터 북한의 ‘간보기 도발’을 살피던 우리 해군은 고속정과 초계함 등 10여 척을 인근에 배치해놓은 상태였다. 참다못한 해군은 참수리 고속정을 출동시켜 오전 9시 7분과 9시 20분, 선체로 북한 경비정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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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방귀 낀 놈이 성낸다’고 북한 경비정이 우리 고속정을 향해 소총으로 선제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어 25mm 기관포까지 쏘았다. 주변에 있던 북한 어뢰정 3척도 공격에 가담했다.
우리 해군은 즉각 주변에 대기 중이던 초계함의 76mm 함포와 고속정에 장착한 40mm 기관포로 응사했다. 결과는 우리 해군의 ‘대승’이었다.
짧은 교전이었음에도 북한 어뢰정 1척이 침몰하고, 420톤급 경비정 1척이 대파됐다. 나머지 4척의 북한 경비정도 선체가 크게 부서졌다. 이 ‘응징’으로 북한군은 20여 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우리 해군 함정이 피격되기는 했지만 전사자는 없었다. 부상자는 11명이었다. 그 중 7명은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됐다.
까불다 코가 깨진 북한군은 교전 직후인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열린 유엔군 사령부와의 장성급 회담에서 “한국 해군이 먼저 도발했다”며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억지를 부렸지만 소용 없었다.
국민들의 환호성과 격려, 그리고 정치인의 배신
당시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국민들은 처음에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다 우리 해군이 큰 피해 없이 북한군 경비정과 어뢰정을 ‘박살’ 냈다는 소식을 듣고선 환호성을 질렀다. 북한군과의 교전임에도 겁먹지 않고 대응한 어린 해군 장병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도 쏟아졌다.
반면 종북세력들은 ‘X씹은 표정’이 됐다. 한호석 같은 해외거주 종북주의자는 “연평해전에서 한국 해군은 패전했다”며 ‘정신승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김정일은 ‘패전보고’를 듣고선 분노를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2000년 4월 연평해전을 일으킨 부대를 찾아 복수할 것을 지시했다. 함장도 새로 임명하고 무기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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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 흐른 2002년 6월 29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월드컵 4강전을 보기 위해 일본으로 날아갔을 때 북한 경비정들은 우리 해군 참수리 357을 향해 기습공격을 퍼부었다. 이 ‘도발’로 아까운 우리 해군 장병 6명이 숨지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김정일과 '평양것들'은 이 ‘도발’을 ‘승리’라고 자축했다고 한다.
이제는 왜 이렇게 됐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에서 승리한 박정성 당시 해군2함대 사령관은 ‘승전’의 책임을 지고 다른 보직으로 발령받았다. 그는 진급도 못하고 군문을 나섰다.
교전수칙은 더 황당하게 바뀌었다. 제1연평해전 당시 ‘교전수칙’은 먼저 경고방송을 한 뒤 이를 듣지 않으면 바로 ‘차단기동’으로 밀어내기 버리는 것이었다. 이는 1997년 YS정부 시절 만들어진 것이었다.
2002년 제2연평해전의 ‘교전수칙’은 경고방송 후 ‘시위기동’을 통해 ‘위협’을 한 뒤 그래도 안 되면 ‘차단기동’을 하도록 한 단계를 더 넣었다. 결국 ‘새로운 교전수칙’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다 북한군의 선제공격을 당한 것이었다.
이 일에 대한 반성으로 2004년 ‘교전수칙’은 경고방송 후 경고사격, 타격으로 간단하게 바뀌었고, 그 결과 2009년 제3연평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13년 된 ‘해전’은 기념할 가치가 없는 걸까?
‘연평해전’에서 승리한 지 13년이 흐른 오늘, 언론보도를 한 번 살펴보자. 어느 언론에도 ‘1999년 연평해전 승전 기념’ 소식은 없다. 보도자료도 안 나왔다. 2011년만 해도 해군 각 함대는 ‘제1연평해전 승전 기념식’을 가졌다. 이 승전기념식도 사실 '연평해전'이 일어난 지 7년 뒤에야 처음 열린 것이었다. 이 점이 이상해서 해군 관계자에게 물어 봤다.
“한동안 승전 기념행사를 하다 제2연평해전(서해교전)으로 우리 장병들이 숨진 뒤 초점이 옮겨갔다. 올해 승전 기념식은 부대 자체 행사로 바뀌었다.”
그랬다. '자칭 애국자'라는 정치인들은 우리 장병들이 숨지거나 다친 ‘열받는 일’에는 앞장서도, ‘통쾌하게 이긴 일’에는 별 관심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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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5일자 보도를 보면 ‘종북선언’에 대한 새누리당과 민통당의 논평이 눈에 띤다. 논평 속에도 ‘남북의 항구적 평화를 위한 남북공동선언’이라고 양당 모두 ‘종북선언’에 대한 비판은 않고 있다(종북세력에게는 기대 않는다. 미군 장갑차에 숨진 여중생 팔아 대규모 시위를 벌인 이들은 당시 숨진 서해교전 장병 이름을 아무도 몰라 미국 정부에게 망신 당하지 않았나).
이렇게 ‘국가 지도부’를 자칭하는 사람들부터 ‘승리’ 보다는 ‘패배’에 젖어 있으니,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알루에트Ⅲ’ 헬기의 ‘킬 마크(Kill Mark. 적을 파괴, 격추 또는 격침했을 때 새기는 표시)’를 해군 장병들이 ‘실수’로 지우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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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기념관에 전시된 ‘알루에트Ⅲ’는 1983년 8월 울릉도 동북방에서 북한의 간첩모선을 추격해 격침한 기체다. 어떻게 여기에 새긴 ‘킬 마크’를, 그것도 해군이 지울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 당사자는 우리 해군의 ‘승전사(勝戰史)’를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
'평양것들'의 끊임없는 협박과 도발에 대해 주의하는 것은 당연하다. '복수의 칼'을 가는 것도 좋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룬 ‘승리’를 소홀히 해선 안 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연평해전'의 주인공들을 찾아 떠받들어 주자. 그게 바로 호국보훈이요 '안보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