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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생각한다
종북(從北) 패거리들이여! 피 맺힌 부모들의 절규가 들리는가?
崔應杓 (뉴욕에서)
6월은 우리에게 너무나 잔인하다. 수백만의 死傷者(사상자)와 수십만의 전쟁 미망인과 20만에 가까운 전쟁고아를 내며 全국토를 잿더미로 만든 1950년 6월 25일의 6ㆍ25전쟁, 1999년 6월15일의 제1연평해전, 2002년 6월 29일 우리 ‘참수리호’와 함께 6명 장병의 목숨을 앗아간 제2연평해전, 모두가 붉은 악마 김일성, 김정일의 기습공격에 의한 민족의 참변이었다.“내 아들아,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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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연평해전에서 온 몸이 총탄과 파편으로 벌집이 돼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된 뒤 3개월 가까이 치료를 받다 끝내 하늘로 간 아들 고(故) 박동혁 병장 어머니의 이 절규는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허리는 끊어졌고 왼쪽 척추에 큰 파편이 있고 화상으로 인해 푹 패어 밑에 인공항문. 오른쪽 다리엔 신경이 다쳤는지 감각이 없고 여기저기 파편조각들이 상처를 내고 오른쪽 어깨에 총알이 들어있다. 뱃속에는 파편 쪼가리가 100개가 더 있다고 하더라. 다리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왼손으로 엉덩이 쪽을 만지면서 흐느낀다.”
“엄마, 내 다리 어디로 갔어. 저리고 아프다. 잠에서 깨어났는데 내 다리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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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실 속에서 너와 우리 가족은 피눈물을 토했다. 네가 왜 총을 맞고 병원에 누어있어야 하냐고,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다.
6월은 힘들다. 내 아들의 흔적을 찾아 여기저기 다녀본다. 마음이 편치 않다. 여러 사람들 중에 해군이 보이면 눈이 번쩍인다. 혹시 내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아들아 잘 지내고 있니. 오늘도 엄마는 너의 이름을 불러본단다. 네가 너무나 아파했기에 쓰리고 저미어 오는 가슴 가눌 길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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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從北) 패거리들이여! 피 맺힌 부모들의 절규가 들리는가?
좌파정권에서 국정원 기조실장을 지낸 서 모 교수는 ‘서해교전은 김정일 책임이 아니다’라는 요지의 주장을 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 죽었단 말인가. 많은 상처를 안은 부모 마음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올라 청와대 민원실로 전화했다. 이런 자를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뽑으면 안 된다고 항의했다. 국방부에도 했다.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엄청난 고통 속에 하늘로 간 아들에게 부치는 편지, 엄마의 가슴 찢어지는 이 편지의 슬픈 메아리가 김대중, 노무현, 박지원, 종북(從北) 패거리들의 귀에도 들리는가. 무덤 속에서라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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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란 대통령, 나라를 지키다 인생의 꽃도 미쳐 피워보지 못하고 숨져간 장병들의 영결식에 묵념은커녕 일본으로 날아가 축구 구경하고 앉았는데, 이런 피맺힌 절규가 왜 안 나오겠는가.
“내 아들아,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니?”
이제 6ㆍ25전쟁 62주년, 제2연평해전 10주년을 맞으며 아직도 아물지 않은 역사의 아픔과 민족의 상처에 또 다시 생채기를 내는 슬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6.25전쟁에서 군복이 아닌 학생복으로 낙동강 전선을 지켜 전쟁의 물줄기를 되돌려 놓고 숨져간 어린 학도병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2년 전에 실었던 영화 <포화 속으로>의 감상문을 다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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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최 응 표 (뉴욕 거주)적(敵)이 대구(大邱)로 들어온다면 여러분은 신뢰할만한 몇 명을 데리고
싸우는 내 모습을 보게 될 거요. 여러분도 그렇게 할 준비를
갖추시오. 그러면 모두 사단(師團)으로 돌아가서 싸우시오!
棺(관)에 들어가지 않는 한 일선(一線)에서 되돌아 올 생각은 마시오.-낙동강(洛東江) 전투를 앞둔 미(美) 팔군사령관(八軍司令官) 워커 중장(中將)의 훈시 중에서-
윈스턴 처칠은 그의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 서문(序文)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나는 과거를 깊이 돌이켜 살펴보는 것이 다가오는 내일의 본보기가 되며, 새로운 세대들에게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말고 다만 인간의 필요와 영광을 좇아 장래의 무서운 장면이 전개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런데 전후(戰後)의 역사와 세계질서는 처칠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사르트르가 “사람의 그림자가 드문 굶주린 빠리에는 전쟁은 끝났지만 평화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말한 대로,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아직 지평선 너머에 있고, 우리는 여전히 전쟁공포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기록된 6.25를 겪었고 지금도 그 한 복판에 서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몇 년 뒤, 애치슨이 “세계 최고의 전략가들에게 저주받은 전쟁을 치르기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최악의 장소를 물색해 보라고 한다면 만장일치로 한국을 선택 했을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최악의 전쟁을 치렀지만, 분에 넘치는 자유와 풍요 속에 그 아픈 기억을 까맣게 잊은 채, 자유 분망하게 살고 있다.
사람은 흘린 눈물만큼 인생의 깊이를 알게 된다고 했다. 민족도 민족이 겪은 앞은 역사의 깊이만큼 성숙해지기 마련인데 우리민족은 그렇지가 않다. 6.25를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처럼 참혹하고 잔인했던 그 6.25, 우리의 인간 본성마저 송두리째 앗아간 그 전쟁의 잔인성을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우리는 분에 넘치는 자유와 풍요에 취해 동물적 삶을 살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참혹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지 오래다. “민족의 서사시(敍事詩)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언젠가는 반드시 망한다”는 경고도 무시한 채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재한 감독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학도병들의 숭고한 희생을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포화 속으로>를 만들었다”며 잠자는 영혼들을 깨우고 있다.
“오랜만에 영화를 본 뒷맛이 개운 합니다. 어설픈 민족주의로 북한군(北韓軍)을 편들고 미군(美軍)과 국군(國軍)을 비난한 영화들이 많았는데, 이 영화는 소년들의 순수한 애국심을 손상시키지 않고 그대로 전해주니 나부터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 영화 <포화 속으로>를 본 어느 일본 기자의 말그의 말처럼 나 또한 고맙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60년전, 나는 영화 <포화 속으로>의 주인공들처럼 중학교 학생이었고 그들보다 한두 살 많은 18살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경, 한국전쟁 의시작부터 지켜 본 나로서는,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6.25 전쟁의 진상을 양심적으로 보여준 영화 <포화 속으로>에 감사할 뿐이다.
영화는 우선 재미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속에 담김 메시지가 유익해야하고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포화 속으로>는 6.25라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이 가져온 우리 민족의 삶과 죽음의 인간 드라마를 사실 그대로 보여 주었다는 데서 감독과 제작진의 양심을 보았고, 불쾌한 전쟁, 잊혀진 전쟁으로 치부됐던 역사의 현장을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는 점에서 유익한 영화였고, 때 묻지 않은 학도병들의 신성한 분노와 순수한 애국심이 관객 모두에게 감동을 준 살아 숨 쉬는 영화라는 점에서 역시 뒷맛이 개운하고 교훈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전쟁은 외국 참전군인들 사이에서는 “비기기 위해 죽어야 하나(die for a tie)라는 냉소적인 표현으로 기록되기도 했지만, 우리에겐 민족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절박하고도 잔인한 전쟁이었다.
그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우리와는 상관없는 지나간 역사일 뿐이라며 잊고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누리는 자유와 풍요가 공짜로 얻어진 것처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아직 이념(理念)이나 야망 같은 것을 모르는 순수하고 순진한 이장범 학도병의 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전쟁의 잔인성에 대한 물음은 우리를 당혹케 하며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왜냐 하면,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아직도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최악의 이념갈등에 찌들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학생은 나이가 어려 실제 나이를 속이고 참전 했고, 어떤 학생은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들 전쟁터로 나가는데 나만 그냥 있을 수 없다”며 전쟁터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 71명의 학도병들은 전쟁의 흐름을 뒤바꿔놓은 11시간의 전투를 벌이며 조국을 위해 죽어갔다.
오늘의 한국 젊은이들은 군복이 아닌 교복을 입고 전쟁터에 뛰어든 성스럽고 감동적이며 숭고한 학도병들의 정신을 담은 실화영화 <포화 속으로>를 보고 어떤 감동을 받았고 또 무엇을 느꼈을까.
부끄러움을 느꼈다면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며, 우리는 그 부끄러움에서 희망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흔히 있는 전쟁영화 쯤으로 보아 넘긴다면 그들의 미래에서 어떤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정신이 썩은 젊은이들에게 과연 민족의 장래와 국가의 운명을 맡겨도 괜찮은 것일까. 고민해야 할 문제다.
군에 입대하는 아들 앞에서 통곡하는 부모들, 군대에 안 가려고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한심한 젊은이들, 군대에 안 가고도 대통령, 고급 공무원, 국회의원 되는 사람들, 돈 주고 군 면제 받는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71명 학도병들의 숭고한 정신을 배워야하지 않을까. 지금 누리는 자유와 풍요, 그리고 권력과 사치는 모두 그들의 희생에서 왔다는 사실을 가슴 속에 새기면서 말이다.
<한국전쟁>의 저자, 페렌바크가 “한국전쟁은 힘을 시험한 전쟁이 아니라 의지를 시험한 기묘한 전쟁 이였다”고 말한 것처럼, 71명의 학도병들은 그 엄청난 인민군의 화력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굳은 의지와 낙동강 방어선을 위해서는 반드시 포항을 사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11시간을 버텼다.
어린 학도병들의 의지와 사명감은 부산으로 치닫는 거대한 전쟁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았고, 낙동강 방어전의 성공은 서울탈환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학도병들의 ‘의지(意志)의 무기(武器)’는 탱크보다도 강했고 대포보다 강했다.
<화려한 휴가>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종북세력(從北勢力)을 대변하는 영화라면, <포화 속으로>는 자유 대한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영화다. 종북세력의 영화가 천만 관객영화로 성공했다면 대한민국 세력의 영화는 보다 많은 3천, 4천, 5천만 관객영화로 우뚝 서는 성공작이 돼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살아남은 우리의 몫이고, 그것은 곧 종북세력을 이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군대기피증 환자들에겐 이것이 국가에 빚을 갚는 좋은 계기가 되길 바라며, 어린 학도병들의 죽음을 통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가치 중심의 삶을 사는 인생이 되었으면 한다.
60년 전 학생들의 숭고한 희생을 다룬 영화 <포화 속으로>가 3천만, 5천만의 관객영화로 우뚝 서 잠자고 있는 영혼들을 깨우는 선지자적 역할을 해 주기를 하늘에 빈다. (2010. 8.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