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주도권이 국력! 종북 키우더니 日 무력간섭 끌어들일 셈?
  • 싸움꾼과 정보감각...처칠의 '전쟁 리더십'

    한일 군사정보 협정은 안된다
     
    허문도/ 전 통일부 장관

  • ▲ 허문도 전 통일부 장관ⓒ
    ▲ 허문도 전 통일부 장관ⓒ

    「테러와의 전쟁」을 치루었던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2차대전의 천재적인 싸움꾼이었던 영국의 처칠한테서 한 수 배우고자 했다. 집무실에 처칠의 흉상이 있었다. 미국이 탈레반 정권과의 아프간 전쟁을 시작한 지 몇 달 안되는 2002년 2월은 후세인과의 전쟁을 준비해 들어가고 있던 때였다.
    처칠의 공식 전기 집필자이자 역사가인 마틴 길버트를 화이트 하우스로 초대하여 사적 강의를 들었다. 제목은 「처칠의 전쟁 리더십」이었고, 대상은 부시대통령 외에도 미국정부의 요인들이었다. 강의는 2년뒤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Martin Gilbert, Continue to Pester, Nag and Bite. London. Pimlico)

     우리 정부가 일본과 북한 정보를 공유하는 군사협정을 맺으려 드는 시점에서, 처칠 관련 백악관 강의에서 절대로 요긴해 보이는 두 가지 점에만 우선 주목해 보겠다.

     「일반적으로 전쟁지도자는 정보가 손에 닿는 만큼, 그리고 그 정보를 활용할 능력이 있는 만큼만 강력하다.」고 한다. 처칠의 전쟁리더십의 중핵적 요소는 톱-시크릿 정보의 철저한 활용 그 자체 였다. 처칠은 기밀정보의 수집, 활용에 스스로의 지력을 직접 쏟았다. 독일군의 무선교신을 암호해독해서 얻은 정보를 처칠은 「황금의 달걀」이라 했고, 이들 정보로서 적의 전략사고와 전술적 의도에 대해, 근대 전쟁사에 특유한 통찰력을 구사할 수 있었다. 전쟁에서 정보가 무엇인가를 처칠의 「전쟁 리더십」만큼 알게 해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모든 전략 주체는 정보주권을 지향한다. 그리고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라는 것은 요새는 아무라도 하는 얘기다. 그렇다면 일본과 우리가 휴전상태의 북한에 관한 군사정보를 공유한다 하면, 우리는 대전제로서의 일본과 정치목적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한일간은 일년에 500만명이 내왕하고 서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글로벌 무역상대이다. 그렇지만 한일관계는 바탕이 없다. 모든 관계의 출발점일 수밖에 없는 강제합방의 무효선언을, 일본은 알면서도 끝없이 미루고 있는 것 아닌가.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일본 우익들은 요즘 와서 더욱 여론의 동원을 하고, 저들 정부는 교육을 통해 미래세대의 여론까지도 발을 묶고 있다. 저들 우익들은 한국의 실효지배를 군사력을 써서라도 배제하자고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MB정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인가.

     미국과의 관계가 있으니까 우리가 아무리 정치목적을 일본과 같이하고 싶어도, 같이 못할 사연을 그들이 정리하지 않는데 무슨 수가 있나! 미국의 전략당국의 역사적 사고의 결핍이 중국대륙을 공산당에게 내어주고, 전쟁에 이기고도 일본에 당하고만 진짜 이유라는 것, 미국은 아직도 모른다는 것인가.

     일본이 최근엔 핵무장의 의향을 드러내고 수순을 밟으려 드는 것은 우리가 모른 척하면 그만인가.
     정보협정 맺는다고 서해 바다에 일본 이지스함이 북한 군사정보 잡으러 들어가게 하면, 핵미사일 정보가 북한것만 잡히겠나, 바로 코앞에 중국 대륙인데.
     이렇게 얻게 될 핵미사일 정보를 일본은 핵무장을 위한 명분 축적과 국민여론 동원에 사용할 것이 너무도 뻔한데, 우리정부는 정말 일본을 도울 생각인가.

     보도에는 일본 측이 군사정보 협정을 서둘렀다고 하는데 북 김정은이 공갈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일본 측 목적의 전부라고, 청와대의 안보 참모들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전쟁리더십」강의에서 주목하는 두 번째 사안은 처칠의 패배주의에 대한 투쟁이다. 다 싸워보지도 않고, 질것이라고 지레 짐작하여, 이리 저리 머리를 굴리는 것을 패배주의라 한다. 대전때 영연방의 한 수상은 「처칠의 가슴속에는 패배가 존재 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쟁 초반, 히틀러의 무력은 압도적으로 강대했고, 미국의 여론은 고립주의로서 유럽의 사단에 끼어들기를 꺼려했다. 패배주의, 공포, 불확실성, 그리고 협상과 타협으로 평화를 얻고자 하는 유혹이 온 영국의 조야를 괴롭혔다. 처칠이라고 이렇다 할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처칠은 전체적인 추세가 되어있는 패배주의 경향과 싸웠다.
     미국은 오지 않고 프랑스가 두 달 만에 항복한 가장 전망 없던 1940년의 여름, 처칠이 두려워 한 것은 독일의 전차 군단이 아니고 따로 있었다. 그것은 영국정부가 패배의 가능성에 대비하여 계획할 수도 있는 증거의 꼬투리라도 국민들 눈에 뜨일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영국외무성은 이미 왕족과 정부의 대영제국내의 해외영토에의 이동안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처칠이 직접 챙겨 철저히 파기해 버렸다. 이런 중에, 「내셔널 갤러리」의 미술품들을 런던에서 캐나다로 옮기겠다고 처칠에게 재가를 요청했다. 처칠의 대답은 지체가 없었다. “안돼, 그것들을 동굴과 지하실에 묻어, 아무도 가서는 안돼. 우린 저것들을 때려부술꺼야.” 전쟁내각 자체가 히틀러와의 타협을 모색하자는 유화론으로 심각하게 갈라져 있었으나, 처칠은 끝내 영국 한나라만 남아도 철저항전의 방침으로 각내의 정치 의사와 국민 여론을 통일해 냈던 것이다.

     휴전 체제를 북은 핵과 미사일의 개발로 전력증강에 이용해 왔다. 남쪽 내부에는 국가반역을 획책하는 종북도당이 무더기로 생겨나 국회에까지 진출했다. 정부는 반역조직의 실체가 드러났는데도 격리시킬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이판에 간단치 않은 일본까지 끌어 들여 대북 군사대응에 일조를 얻겠다 한다면, 아니라도 전쟁 싫어하는 여론 앞에 정부 스스로 약세를 보이고 패배주의 무드를 깔리게 할 뿐이다.

    천안함 폭침 대응에서 드러난 MB정권의 유화주의는 종북도당의 발호 앞에서도 변함이 없고, 일관된 유화주의는 패배주의에 확신을 얹어, 더 한층의 종북도당의 창궐을 예비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존립코자 한다면, 오늘의 도달점을 누구보다도 대통령이 직시해야 할 것이다. 외교관료나 국방관료나 유능한 참모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임을 「처칠의 전쟁 리더십」은 알려주고 있다. (2012.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