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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가끔 거대한 사기를 칠 때가 있다. 왜 사기라고 부르냐고? 진실인지 아닌지, 해야 할 일인지 안 해야 할 일인지 빤히 알면서도 큰 사고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알고 저지르니 사기이다.
지금부터 한 20년 전쯤에 <조선일보>는 대형 사기극을 벌였다. 이 무렵 이곳 대한민국에는 전세계 주류 정치학계에 존재한 적 없는 진보-보수(progressive-conservative)란 구분틀이 등장했다. <조선일보>는 냉큼 이 구분틀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민족 정통 보수 언론’이라고 흐뭇하게 부르고 한겨레 류의 종친초(종북, 친북, 떼촛불) 거짓말에 ‘진보’라는 면류관을 손수 씌워줬다. 이 덕분에 20년이 지난 지금껏 가짜 진보와 자칭 보수들이 서로 자기 자신에 대해 “나, 진보여! 진보! 개념 있지?” 혹은 “나, 보수여! 어때? 폼 나지?”라고 으스대는 해괴망측한 “정치사상 집단 자위행위”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력이 쇠진하면 혼자서는 자위행위도 잘 수행하지 못 한다. 그래서 대딸방 비즈니스가 이뤄진다. “유서 깊고 장중한 보수가 되는 것”을 로망으로 삼고 있는 천박한 주류 제도권의 허영심—그 성감대를 기분 좋게 자극하는 것—이것이 바로 <조선일보>의 비즈니스 전략이었다. 우리같이 입이 험한 사람들은 <조선일보>의 이 같은 행태를 “정치사상 대딸방 사업”이라고 부른다. (아, 참, ‘대딸방’이 뭐냐고? 경찰은 이를 ‘유사 성행위 서비스 사업’이라고 부른다.)1.
이왕 말 나온 김에 진보-보수 프레임이 왜 거짓말인지 좀 자세히 살펴 보자. “진보를 믿는다”는 이야기는 “인류 역사가 특정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믿는다”는 소리이다. 따라서 진보의 반대말은 보수가 아니라 반동(reactionary, 역사 발전 방향에 대해 거스르는 행태)이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자부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보수’라 부르면 안 된다. ‘반동’이라 불러야 한다. 바로 나 같은 사람이 그들 눈에는 ‘극악한 반동분자 쉐이’에 속한다. 제발 그렇게 불러주기 바란다. 내게는 더할 수 없는 명예이다.
진보의 반대말이 반동이라면, 보수의 반대말은 리버럴(liberal)이다. 과거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과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보수이고, 변화와 혁신을 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태도가 리버럴이다.
나? 물론 보수이다. 내가 보수라는 증명을 대겠다.
첫째, 30년 넘도록 아내가 한 명이다.
둘째, 내 아이들은 한 명의 여자로부터 나왔다.
셋째, 54년이 되도록 아파트에서 산 적이 없다.
넷째, 54년이 되도록 태어난 집 반경 3킬로미터 안 쪽에서 살고 있다 (그 중 50년은 태어난 집 및 그 옆 집에서 살았다)
다섯째, (최근까지) 검은 구두, 짙은 곤색 수트, 검은 양말, 흰 와이셔츠, 소매 달린 흰색 런닝만 입었다.
여섯째, (이 점이 특별히 중요하다) 사각 트렁크 빤스만 입는다.
이렇게 고리타분한 희귀동물로 살아 온 내 관점에서 보면 대한민국에는 보수가 없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이 아파트—지극히 현금성 높은 투자 대상물—인 사람들이 어떻게 보수란 말인가? 집값 오르면 얼른 팔아서 다른 동네, 다른 도시로 옮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들은 유목민(nomad)이다. 유목민이 보수가 되는 것보다는 노새(수탕나귀와 암말의 교잡종, 쓰임새가 많음)가 버새(암탕나귀와 숫말의 교잡종,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음)로 변하는 편이 쉽다.
그러나 “어떡하지? 보수가 될 수 없다고?”라며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보수가 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수가 아니라, 공화주의자(republican)가 되어야 한다.
보라! ‘공화’란 말에 가짜진보들이 두드러기를 일으키는 모습을! 가짜 진보들, 종친초들은 겁먹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말하는 공화는 루소(Rousseau)와 쟈코뱅(Jacobin)이 말하는 피비린내 나는 공화가 아니다.
루소 공화주의는 ‘다수결 공화주의’이다.
루소는 다수결에 의한 결정을 ‘일반의지’(general will)라고 불렀다. “다수결, 즉 일반의지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 이것이 루소가 말한 공화이다.
쟈코뱅은 이 공화를 실천해서, 다수결에 따라 수십만 명을 목 잘라 죽였다. 다수결에 따라 마리 앙뜨와네트 왕비에게, “여덟 살 짜리 아들 샤를(Charles) 왕자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추잡한 누명을 씌워 죽였다. 이 불쌍한 어린 아이에게는, 다수결에 의해, 알코올을 억지로 먹여 넣어 알코올 중독에 의한 영양실조, 간경화, 폐렴으로 죽게 만들었다.
우리가 말하는 공화주의는 ‘다수결 공화주의’가 아니라, 그 정반대의 공화주의이다. ‘다수결을 뛰어넘는 공화주의’이다.
그렇다. 우리는 다수결, 즉 민주주의를 신성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욕망, 선동, 어리석음이 떼를 움직이는 강력한 에너지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그나마 민주주의를 소중하게 여기는 까닭은 투표용지(ballot)가 총알(bullet)보다 낫기 때문이다. 투표로 결판 내지 못 하면 총알로 결판 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총알보다는 투표용지를 선호하는 평화스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We are peace-loving people who prefer ballots to bullets.다수결, 즉 민주주의가 개판으로 타락하는 것을 막는 것이 바로 공화 가치(republican values)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 갈 수 있도록 주춧돌과 기둥 역할을 해 주는, ‘한 사회의 근본 가치’가 공화 가치이다.
감히 다수결로 흔들거나 뒤바꾸려고 불장난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공화 가치이다.
링컨은 “노예제를 둘 것인지, 말 것인지 다수결로 정하자”라는 해괴망측한 주장에 대해 ‘공화 가치를 뒤흔드는 불장난’이라고 보았다. 겁대가리 없는 불장난이 계속되자 남부로 쳐들어가서 이 싸가지 없는 세력을 정벌했다. 무려 60만 명이 죽었다. 당시 미국 전체인구가 3천 만 명이었으니까 2%가 죽은 셈이다. 지금 우리로 환산하면 1백 만 명이 죽은 참혹한 내전이었다.
링컨은 미국인을 가장 많이 죽인 미국인이었다!
공화 가치는 이렇듯 엄정하고 엄숙한 가치이다.
“한 사회에는, 다수결로 흔들거나 뒤집어서 안 되는 근본 가치가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
— 이 믿음이 바로 링컨 공화주의다.그렇다. 우리는 공화주의자들이다. 링컨 공화주의자들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혼란은 “공화 가치가 이미 존재하고 있음에도 사회 담론이 이를 공화 가치로서 조명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태” 때문에 생겨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고 있는 공화 가치는 무엇인가?
개인, 자유, 인권, 재산권을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가 그 하나이며, 글로벌문명(세계시장)에 대한 개방성이 그 둘이다.
이 두 개의 가치를 일관되게 지켜왔기에 건국 60여 년 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날아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이 두 가치는, 우리 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의 근본 원리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공화 가치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자, 다시 20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그 무렵 소련이 붕괴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주장하던 세력이든, 주체사상에 함몰된 세력이든 스스로를 더 이상 혁명세력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 그 이전엔 민중민주주의혁명(PDR-이를테면 지금의 진보신당)이든 민족해방혁명(NLR-이를테면 민노당)이든 스스로를 혁명세력이라고 불렀었다.
민중민주주의 는 인민민주주의 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흔히 ‘PD’라고 부른다.
민족해방은 주체사상이며 종북이다. 흔히 ‘NL’이라고 부른다.20년 전에 사회주의권이 붕괴함에 따라, 이들은 ‘혁명’ 혹은 ‘급진’이라는 단어를 내려놓아야 할 처지로 몰렸다.
그때 이들은 마땅히 골방에 들어 앉아 사상을 검증하고 인생을 반성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검증과 반성 대신에 꼼수와 잔재주를 택했다. ‘진보-보수’라는 해괴망측한 구분틀을 만들어 스스로를 ‘진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 <조선일보>는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어야 하나?
대한민국의 정치사상, 사회담론을 이끄는 언론이라고 자부했다면 마땅히 이렇게 외쳤어야 한다.
“진보-보수라고? 지금 무슨 생무식한 소리야? 진보의 반대는 반동이야! 보수의 반대는 리버럴이야.
다음 두 길 중의 하나를 택해!
첫째 길은 지금까지의 급진 혁명 노선을 계속 고집하는 것. 이 경우에만 니들은 스스로를 진보라고 부를 수 있지.
그리고 이 경우엔 우리를 보수라고 부르지 마! 대한민국은 변화와 혁신의 땅이야! 이승만과 박정희야 말로 가장 많은 변화와 혁신을 일으킨 지도자들이잖아!
니들! 급진 혁명 지지자들! 우리를 보수라 부르지 말고 반동이라고 불러줘! 혹은 지금까지처럼 ‘팟쇼 매판자본’ 이라고 불러줘!
- 60년대에서 80년대말까지 30년 동안 내내, 운동권은 제도권에 대해, ‘팟쇼 매판자본’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스스로 쪽 팔리는지 이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둘째 길은 니들이 진정으로 급진 혁명 노선을 내려놓고 철저히 반성하는 것. 이 경우엔 스스로 변했다는 점을 증명해야 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맹렬히 비판해 봐! 평양것들을 맹렬히 비판해봐! 자유민주주의를 찬양해 봐! 글로벌 문명에 대한 개방을 찬양해 봐!
제발 좀 해 봐! 이를 할 수 있다면 니들은 우리와 함께 공화주의자가 될 수 있어!”
20년 전, <조선일보>는 이 같이 각을 세우지 않았다. 공화 가치를 역설하지 않았다. 대신, 냉큼 ‘보수’를 자처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는 ‘진보’라는 면류관을 씌워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가짜진보와 자칭보수가 기괴하게 얽혀서 공생하게 되었다. 20년 전 조선일보가 진보-보수 구분틀을 가장 앞장서서 받아들인 행태를 좋은 말로 ‘사기’(詐欺, fraud)라고 부르고 험한 말로 ‘정치사상 대딸방 사업’이라고 부른다.2.
20년 전의 대딸방 사업이 성공해서 <조선일보>는 조중동 중에 부동의 1위를 지켜올 수 있었다. 근데 이 ‘진보-보수 구분틀’이 이제 약발이 다했다.
요즘 담론을 보라. 불과 1년 사이에 ‘정통 보수’ 혹은 ‘애국 보수’를 자처하는 소리는 쏙 들어갔다.
이 때문인지 <조선일보>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사상 대딸방 사업을 내놨다.
이른바 ‘자본주의 4.0’(Capitalism 4.0)이 새 업소의 간판이다.이 섹시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나는, <조선일보 편집국>과 논설실 전체가 유태교회(synagogue)로 개종한 줄 알았다. ‘자본주의 4.0’은 국제 금융계를 장악해 온 유태인들이 내놓은 자기 변명이기 때문이다.
아, 참, 대한민국에 살면서도 유태교회에 다닐 수 있다. 용산 미8군 안에 유태교회가 하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가면, 수염을 근사하게 기르고 빵덕 모자를 쓴 랍비도 있다. 그리고 유태교회를 열심히 다니면 진짜 유태인이 될 수도 있다. 예전에는 그 엄마가 유태인인 경우에만 유태인으로 인정되었다. 지금은 유태교를 믿으면 유태인으로 인정된다. 지난 1960년대 이후, 동구권의 유태인들이 무수히 많이 이스라엘로 이민해 밀려 들어오자 ‘엄마의 족보’를 따질 방법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일어났다. 아무튼.
‘자본주의 4.0’은 국제 금융계의 거물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tsky)가 쓴 설레발이다. 1952년 모스크바 출생인데 이름이 ‘-sky’로 끝나면 폴란드 계통이다. 아니나 다들까 유년 시절을 폴란드에서 보냈다. 폴란드 계통 러시아 인으로서 러시아와 폴란드를 오가며 산다? 틀림없이 유태인이다.
폴란드는 20세기 초까지 러시아의 일부였다. 폴란드 출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러시아 공산당(SD)을 만들었다. 볼셰비키든 멘셰비키든 초기의 고위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 하나 빼고는 거의 모두 유태인이다. 레닌조차 외할아버지가 유태인이다. 트로츠키(Trotsky, 레닌 시대의 제2인자), 마르토프(Martov, 멘셰비키의 최고 지도자), 스베르들로프(Sverdlov, 공산당 중앙위 의장), 지노비에프(Zinoviev, 전세계 공산주의 혁명 운동 책임자) 등등 그 이름을 거론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비밀경찰 체카를 만든 재간둥이 드제르진스키(Dzerzhinsky)는 공식적으로는 유태인이 아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유태인일 가능성이 높다. 관상을 보면 유태인과 몽고인의 피가 섞여 있는 얼굴이다.
아무튼 러시아 공산당의 초기 고위 간부들은 거의 모두 폴란드 유태인이거나 혹은 (폴란드 유태인들이 19세기에 이민 가서 개척한) 우크라이나 유태인들이다. (레닌의 외할아버지는 우크라이나 유태인이었다) 칼레츠키는 유태계 공산당 간부 집안 출신일 것이다. 어렸을 때 폴란드로 집안이 이사를 갔다.
폴란드의 유태계 공산당원들은 1960년대에 대대적으로 서방으로 빠져 나왔다. 그 무렵 폴란드 안에서 유태계 고위 공산당원에 대한 숙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표적인 인물이 바우만(Baumann)이다.
그는 폴란드 유태계 공산당원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우크라이나에 투입되어 유태계 반공세력을 체포, 고문, 처형하는 특수부대의 장교로 근무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유태계 반란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폴란드 유태계 공산주의자들을 투입했다. 말하자면 6촌, 8촌끼리 잡아죽이도록 만든 것이다.)
제대한 다음에 바르샤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공산주의 사회에서 철학은 정치적으로 ‘잘 나가는’ 젊은이들만 전공할 수 있다.) 바르샤바 대학에서 교수를 하다가 1960년대에 유태계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자 영국으로 튀었다.
지금은 좌파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 행세를 하며 ‘윤리’에 대해 운운한다. 자기 친척을 체포, 고문, 처형했던 인간이 이제 좌파 포스트모더니즘의 윤리성을 떠드는 사람이 된 것이다.
놀랄 일 없다. 좌파 포스트모더니즘이 원래 이렇게 야릇한 사람들이 많다. 마치 우리 사회의 종친초(종북, 친북, 떼촛불 혼합체) 거물 지식인(이를테면 남한 좌파세력의 거두 박원순 서울시장)들처럼.
칼레츠키 집안의 움직임도 바우만과 비슷하다. 이들 역시 1960년대에 폴란드에서 서유럽으로 튀어 나왔다. 1970년대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다음, 런던 금융계와 직결된 잡지—<이코노미스트>에 입사했다. 그 후 런던 금융계와 직결된 또 하나의 신문인 <파이낸셜 타임즈>로 옮겼다가 드디어 <더 타임즈>의 경제부장이 되었다.<더 타임즈>가 무엇인가? 최초의 산업혁명을 일으켜 자본주의를 발아시킨 영국 최고의 신문 아닌가? 그래서 이름도 <브리티시 타임즈>가 아니라 <더 타임즈> 아닌가? 영국의 <더 타임즈>를 제외하고는 '타임즈'가 들어긴 전 세계 모든 신문은 '타임즈' 앞에 지역을 넣었다. <뉴욕 타임즈>가 그랬다. 한국의 영자신문도 <코리아 타임즈>다.
영국의 오만함이 물신 풍겨나오는 세계 최고의 신문 <더 타임즈>,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미국에 내준 뒤에도 금융에서만은 아직도 세계를 주름 잡는 영국 런던의 고색창연한 신문의 경제부장이라면,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쯤인지 상상할 수 있지 않는가.
칼레츠키는 1996년에 투자 자문 회사를 차렸다. 지금은 런던 금융계에서 잘 나가는 투자 자문 사업을 하면서 <더 타임즈>의 칼럼니스트로서 2주에 세 번 씩 기고한다. 그의 예측은 그다지 정확한 편이 아니다.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씨니컬하게 말한다.
“나는, 영국 소비자들의 경제 공황에 대한 불안감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 온, 몇 명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
칼레츠키의 ‘자본주의 4.0’에 대한 평을 좀 살펴 보자.
그의 친정집이라 할 수 있는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평한다.
“소프트웨어 버전을 표기하는 방식을 따르기는 했지만, 칼레츠키의 시대 구분은 큰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번 금융 공황에 대한 분석에는 논란의 여지가 아주 많다.
칼레츠키는 이번 금융 공황이 금융자본가들의 탐욕 및 과다한 신용대출이 빚어낸 필연적 결과라는 점을 부정한다.칼레츠키는, (정부 및 가계의) 부채가 지나치게 커졌기 때문에 금융 공황이 발생했다는 입장을 정면으로 부인한다. 오히려 부채의 증가(과다 소비, 과다 지출)는 세계화 및 무(無)인플레 시대에서는, 당연하면서도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
칼레츠키는 ‘정부의 적절한 개입에 의해 충분히 제어될 수 있던 위기가, 미 행정부가 리먼브다더즈를 파산시킴으로써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라고 주장한다.그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 정부가 리먼 브라더즈를 파산시킨 정책은 레닌, 스탈린, 모택동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자본주의를 해쳤다’.”
이번 금융 위기는 정부와 가계의 부채 증가 (과다 지출, 과다 소비) 때문에 발생했다.
서브 프라임이 무엇인가? “1가구 1주택”이라는 달콤한 정책을 내걸고 건설사의 주택건설 채권에 대해 정부가 지불을 보장했기에 발생한 사건 아닌가?
한편으로는 정부 지불보증이 붙으니까 유동화된다. 금융 기관들이 서로 눈알이 팽팽 돌 정도로 이 채권을 팔고 사며 뜨거운 감자 돌리기를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 기관의 주택담보 대출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너도 나도 주택을 사는 버블 현상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미국에서 이 거품이 빵 터지니까 그 동안 세계 선진국 거의 모든 나라의 과다 지출, 과다 소비 구조가 모두 함께 붕괴했다. 그래서 지금은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까지 주저 앉고 있다. 프랑스까지 번질 가능성도 있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칼레츠키는 “왜 미국 정부는 리먼 브라더즈에 정책 자금을 부어 넣어 구해주지 않았나?”라고 불맨 소리를 한다. 그러면서 “정부 지출을 늘여서 재정 적자를 유지해 가면 된다”라고 태평한 소리를 한다.
한마디로 <조선일보>가 추켜든 ‘자본주의 4.0’은 유태인들이 지배하는 국제 금융자본의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
MB 정부 최대의 실책은 이번 금융위기의 실상을 국민에게 충분히 알리지 못 한 점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마치 “정부가 잘못해서 못 살게 됐다”라고 생각한다.
천만에. 우리는 잘 해 왔다. 엄청 잘 해왔다. 살만한 나라 중에 지난 4년간 꾸준히 잘 해 온 나라는 우리와 독일, 둘 밖에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 “잘 했다”는 것은 “엄청난 재난 속에서도 비교적 선방했다”는 뜻이지 “화끈하게 더 잘살게 됐다”는 뜻이 아니다.
MB 정부가 지난 4년 동안, 이 금융 위기가 얼마나 살벌하고 위험하며 장기적인 것인지를 국민에게 정확하게 전달했다면 “MB 정부의 경제 실책”이라는 엉터리 소리가 지금처럼 극성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잘 해 왔나? 본격적 구제금융 없이 건설업과 제2금융권의 구조조정이 끝났다. 별다른 긴급 지출 없이 (낮은 수준이지만) 경제가 꾸준히 플러스 성장하고 있다. 남들은 마이너스이다.
우리는 별로 실감하지 못 하지만 다른 나라는 지금 난리가 아니다. 미국의 경우만 해도 금융업과 자동차 산업에 정부의 긴급 수혈이 어마어마하게 쏟아 부어졌다. 그 결과 미국은 금융 산업과 자동차 산업 자체가 국유화(공기업화)되다시피 한 실정이다. 정부가 최대주주가 되었기 때문에.
독일과 우리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선진국은 이번 금융위기 때 정부 돈을 여기저기 퍼부은 것에 대한 뒤치닥거리를 해야 할 암담한 신세에 놓여있다. 이번 정부 투자/지출에서 생겨난 엄청난 재정적자는 앞으로 두 세대(60년) 이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이 나오고 있다.
칼레츠키는 이 참혹한 상황에 대해 달콤하고 무책임한 말을 속삭인다.
“괜찮아. 원래 그런 거야. 정부가 그때 그때 대처하면 끄덕 없어. 이번 상황이 이토록 악화된 것은 모두, 리먼브라더즈를 파산시키는 멍청한 정책을 취했기 때문이야!”
칼레츠키는 이렇게 부드럽게 짖어대는, 유태계 금융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악한 개일 뿐이다.
칼레츠키의 자본주의 4.0은 유태인들이 지배하는 국제 금융자본의 자기 변명이며, 너무나 고통스럽고 당혹스런 상황에 대한 긴급 모르핀(터무니없는 낙관적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
케인즈는 1925년에 <처칠이 초래한 경제적 재앙>(The Economic Consequences of Churchill)이라는 팜플렛에서 처칠의 고지식한 재정 운영을 비웃었다. 그 시대의 시류는 케인즈의 손을 번쩍 치켜들어 주었다. 케인즈의 경제학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었다. 소련의 경제적 성취가 너무나 찬란하고 너무나 기적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소련의 전체주의 계획 경제가 시장경제를 압도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믿기 때문이었다. 케인즈 경제학은 바로 전체주의 계획 경제의 ‘소프트 버전’(soft version)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었다.
유태인들이 지배하는 금융자본의 개—칼레츠키는 자신의 책에서 케인즈 흉내를 냈다. 한 챕터의 제목을 <폴슨이 초래한 경제적 재앙>(The Economic Consequences of Paulson)이라고 달았다. 폴슨은 2008년 당시 미국 재무장관이다.
폴슨이 아무리 멍청한 정책을 폈다고 하더라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 살벌한 금융 위기는 폴슨의 대처 실패에 근본 원인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칼레츠키가 폴슨을 콕 집어서 공격하는 이유는 “괜찮아. 괜찮아…정부가 돈 찍어서 경제를 잡아 돌리면 돼…원래 그런 거야. 원래 그런 거야..”라는 달콤한 거짓말을 만들어내기 위함일 뿐이다.
4.
선진국은 한국의 경제적 성취에 대해 거의 기절할 정도로 경악하고 있다. 이번의 살벌한 금융 위기 와중에서도 굳건하게 재정건전성을 유지하고 꾸준히 경제성장을 이루어 왔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국민의 근검-절약-자조 정신과, 기업의 결사적인 노력과, 정부의 안정적 정책 운용이라는 3박자가 맞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는 자랑스런 일이다. 요즘 한류가 엄청나게 뜨는 것도 그 배경을 따지자면 한국 경제의 이 같은 성취이다.
우리에게는 국제 금융자본의 개가 짖는 사악한 소리가 필요 없다. 그 소리는 암담한 처지에 빠져 있는 선진국 경제를 위한 고농도 아편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을 위한 터무니 없고 무책임한 낙관….
”괜찮아. 정부가 돈 마구 찍고 국채 마구 발행해서 경제를 잡아 돌리면 돼. 원래 그런 거야. 원래 그런 거야…”
<조선일보>는 우리가 피땀으로 성취해 낸 기적적 결과—재정건전성 및 경제성장을 유지하며 이 살벌한 금융 위기를 헤쳐나가고 있다는 자랑스런 결과를 멸시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조선일보>는 대신, 유태인 금융자본의 사악한 개가 짖는 소리에 대해 “저 개소리를 본받자! 저 개소리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자!”라고 선동하고 있다.
자긍심을 가져야 마땅한 자기 자신의 성취를 멸시하고, 유태인들이 지배하는 국제 금융자본에 봉사하는 사악한 개를 본받자고 주장하는 것—이것이 대한민국 주류 제도권을 이끈다고 자부하는 <조선일보>의 행태이다. <조선일보>여! 됐다. 그만 따라 짖어라. 얼마나 미련한지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따라 짖어라.
5.
남의 개소리를 카피해도 그냥 하면 세련미가 떨어진다. 무엇인가 좀 알고 하는 소리인 척해야 한다. 말하자면 추임새를 넣어가면서 개소리를 따라 짖어야 하는 법이다. <조선일보>가 이번에 유태인들이 지배하는 국제 금융자본의 개 짖는 소리를 카피할 때에도 추임새가 들어갔다. 어떨 때에는 오리지날 개소리보다 추임새가 훨씬 더 흉악한 법이다.
<조선일보> 경제부장이 이 추임새를 넣는다.
그는 요즘 다자고짜 “유효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 하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이야기한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15/2012071501299.html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케인즈가 90년 전에, 마르크스의 케케묵은 헛소리를 본 따서 떠들었던 이야기 아닌가! 이들의 논리는 이런 식이다.
첫째, 상품, 서비스, 사업을 구분하지 않는 막무가내 ‘총수요’를 상상해야 한다
둘째, 그 ‘총수요’가 만성적으로 ‘공급’보다 작을 수 밖에 없다
셋째, 수요와 공급 사이에 이러한 차이가 바로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다
넷째, 그러므로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때려 부수든가(마르크스), 혹은 정부가 돈을 찍어 경제를 잡아 돌려야 한다(케인즈).
이건 완전한 착각이다.시장은 시간 속에서 변해가는 생태계이다. 총수요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블루 오션(급성장 부분), 레드 오션(경쟁이 빡센 부문) , 데드 오션(생명이 다한 사양 시장)이 중첩되어 있는, 복합적 생태계이다.
어제의 블루 오션이 오늘의 레드 오션이 되고 내일의 데드 오션이 된다.정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경제 정책은 공정 시장(Fair Market)에 관한 규칙을 진화시켜 주는 일이다. 수요자와 공급자 사이의 정보와 물류의 소통을 보다 원활하게 도와주는 일이다.
2008년 미국의 금융시장 붕괴는, 주택건설 채권에 대해 정부의 지불보증이 끼어듦으로써, 자본 시장의 공정 경쟁이 무너졌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 위기가 전세계로 퍼진 것은, 그 동안 선진국 정부들이 세입보다 세출이 훨씬 많은 과다지출, 과다소비 구조를 인위적으로 부양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개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원망만 할 일은 아니다.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번 글로벌 조정기가 끝날 무렵, 가장 찬란한 승리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케인즈나 마르크스와 같은 정태적 분석(static analysis)은 시장경제와 전혀 맞지 않는다. 특히 우리와 같이 글로벌시장과 완전히 합일체가 되어서 돌아가는 경제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대한민국 주류 제도권의 정신세계를 주도한다고 자부하는 <조선일보>의 경제부장이 망해가는 영국 <더 타임즈> 경제부장 출신 칼레츠키의 허명에 주눅 들어 ‘자본주의 4.0’을 선전한답시고 “자본주의는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구조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라는 소리까지 하는 것은 너무 비참한 일이다.
유태인 금융자본에 봉사하는 사악한 잡종 개의 발바닥을 핥다 못 해, 런던 하이드파크에 묻혀 뼉다귀마저 흙으로 돌아간 마르크스의 망령에 접신한 것인가?
6.
어둠이 가장 깊을 때 새벽이 온다. 지금은 먹물같이 짙은 어둠이다.
<오마이뉴스> 발행인 오연호와 서울대법대교수 조국이 명명한 이른바 진보빅텐트에서 종북과 함께 껴안고 뒹굴던 사람들이 이제 갑자기 이석기, 김재연을 제명시키고, “내가 언제 종북과 어울렸냐?”는 듯 양처럼 순결한 어린양으로 둔갑하고 있다. 순결하기는 개뿔! 뻔뻔스런 모르쇠일 뿐이다.
안철수는 천연덕스럽게 이 모르쇠들의 왕노릇 혹은 얼굴마담을 하겠다고 숟가락을 걸치고 있다.
이들 중에는, 평양것들과 종북을 맹렬하게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자신들이 저질렀던 진보빅텐트 쌩쇼에 대한 고통스런 자기 성찰을 하는 정직한 사람 역시 단 한 명도 없다. 그래서 이제 칙칙한 어둠이 가장 깊어진 시점에 이르렀다.
이럴 때 일수록 정신의 힘이 팔팔하게 살아 숨쉬어야 한다. 정신은 먼저, 말과 글로 나타난다.
만약 <조선일보>가 조금이라도 “우리야말로 주류 제도권의 건강한 가치와 사고방식을 주도하는 신문이다”라는 자존심이 있다면 소중한 가치, 원칙, 성취를 폄하하거나 멸시하는 것을 선동해서는 안 된다.
<조선일보>가 조금이라도 정신이 똑바르다면 공화주의 가치를 번쩍 치켜들어야 한다.
하나는 개인, 자유, 인권, 재산권이 그 핵심을 구성하는 정치체제—자유민주주의!
다른 하나는 글로벌 문명의 발전, 즉 세계시장의 발전에 대한 믿음과 개방성!
금융자본의 사악한 개 칼레츠키는, 처칠에 대한 케인즈의 조롱을 흉내내어 폴슨을 조롱함으로써 다시 한 번 처칠을 모욕했다. 그러나 우리 공화주의자는 처칠의 담백함과 정직함을 존경한다. 그래서 처칠이 했던 말을, 이 깊은 어둠 속에서 고스란히 따라 외친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피와 땀을 흘리는 것이다!”
박성현 저술가/뉴데일리 논설위원.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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