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는 이렇게 하는 거야“

    -나의 정치 스승, 나의 아버지 유진산 -

     유한열(柳漢烈)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 5선

  • 우리민족의 희망은 자주독립국가에서 신명나게 살아보는 것이었다.
    그런 세상을 열기 위해 우리의 선각자들은 일신의 안위와 행복을 구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을 광영으로 알고 초개같이 목숨을 조국의 제단에 바치고, 투쟁에 왔는데, 부지기수이다.
    그 가운데 나의 아버지 유진산도 해방 전후 신산(辛酸)의 세월속에 역사의 족적을 남겼으나 오늘날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불효를 참회하며 낙루(落淚)속에 희미해지는 옛일을 회상해본다.

     “정치는 이렇게 하는 거야 ” 1.

     남부군 사령관으로 유명한 빨치산 이현상(李鉉相)은 아버지 경기고보 동기생이다. 이현상은 금산면 군북면 출신이고, 아버지는 금산군 진산면 출신으로 이웃지간으로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그랬지만 두 분의 인생의 걷는 길은 달랐다. 이현상의 안목은 공산당 종주국 소련과, 중국 공산당이 조선을 공산화 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안목에는 머나먼 미국이 조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현상은 박헌영, 김구처럼 미국을 직접 견학하지 못한 것이다.

     이현상은 공산당원이긴 하지만, 항일운동에는 아버지와 의견이 같았다. 이현상은 가끔씩 집으로 아버지를 찾아와 나라와 민족의 장래에 대해 토론하기를 좋아했는데, 당시 금산군의 대지주인 나의 조부께서는 아들과 잘 지내는 것을 보시고 기분이 좋아 언제나 이현상에게 용돈을 두둑히 주었다고 한다. 그것이 이현상의 활동자금이었다. 그 후 이현상은 서울에서 계속 아버지를 찾아와 용돈을 빌려갔다.

     아버지는 이현상에게 장차 중국, 소련의 공산주의가 한반도를 장악할 수 없다는 것에 일일이 예를 지적하며 역설했다. 공산당을 버리고, 자유민주주의로 정치 사상과 철학을 바꿀 것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이현상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이현상이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조부의 5천석 토지문서를 꺼내와 불태우면서 놀란 표정을 짓는 이현상에게 “정치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말을 강조했다. 이것은 러시아의 대문호(大文豪) 톨스토이가 농노(農奴)를 해방하고, 농노들이 경작해먹는 토지를 보장해주기 위해 토지문서를 불태운 것과 무엇이 다를까. 정치는 알확천금(一攫千金) 하는 것이 아닌 힘없는 백성에게 돈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누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는가?

     나의 아버지 유진산은 앞서 언급한대로 금산군의 대지주의 1남1녀의 외동 아들이다. 일신의 안일과 행복만을 위했다면 나라와 민족을 위한 험한 길을 애써 걸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가파른 생애는 경기고보에서 시작되었다. 고보 2학년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극렬히 운동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퇴학 당했다. 아버지는 낙담하여 귀향하지 않고 보성고보로 전학하여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早稻田)대학 예과를 거쳐 1926년 봄 동(同)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조부께서는 도쿄의 번화가인 신주쿠(新宿)에 집 한 채를 사주었다. 아버지는 집에 ‘太白家’라는 당호를 붙이고, 조선 유학생들의 집합소를 만들었다. 함상훈(咸尙勳), 전진한(錢鎭漢), 김광섭(金珖燮), 홍양명(洪陽明), 고유섭(高裕燮), 한림(韓霖) 등의 인재들이 모여 조국의 장래를 토론했고, 학술잡지 발간을 통해 대한독립의 뜻을 펴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대학 3년 때, 항일조직을 주도한다는 죄목으로 이치가니형무소(市谷刑務所)에 투옥되어 대학교도 중퇴해야 했다.

     일본 감옥에서 온갖 고통을 받다가 풀려나 귀국한 아버지는, 농촌 계몽 운동에 뛰어들었다. 쌍엽농민회(雙葉農民會)를 조직하고 ‘농민독본(農民讀本)’이라는 계몽서적을 발간하여 반포하기도 했다. 일제 경찰의 요시찰 인물로서는 국내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1933년 아버지는 중국으로 망명했다. 아버지는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에서 중경(重慶) 임시정부의 국내 자금모집을 하여 전달하는 연락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후 아버지는 일제 경찰에 수차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감격의 해방을 맞았다. 아버지는 이승만박사의 대한민국 건국을 지지하고 대한민국을 망치려는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하였다. 아버지는 야당의 의원, 당수를 역임하면서도 언제나 반공이요,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확신했고, 자녀들에게 조국 대한민국에 헌신하고, 충성할 것을 훈육하였다. 작금에 야당 일부는 종북정치인으로 활약하는데, 아버지가 알았다면, 불호령으로 각성을 촉구했을 것이다.

     “정치는 이렇게 해라” 2.

     나의 아버지의 소신은 불변하였으니, 일제가 공갈, 협박하여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했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거절했다. 아버지는 해방 후에는 대한민주청년동맹(大韓民主靑年同盟)을 만들어 최고위원이 되었고, 백의사(白衣社)등 비밀 우익 단체에서 반공투사(反共鬪士) 활동을 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도왔다. 또 아버지는 친일파를 척결하기 위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를 만들어 특위 위원들과 친일파 검거활동을 지휘했다. 1949년 당시 노덕술 등 친일파들은 아버지를 일위의 암살표적으로 삼은 것이 드러났다.

     역사 드라마 야인시대(野人時)에서도 보여 주듯이, 아버지는 우익청년단체를 지휘하여 좌익의 최대단체였던 건청(建靑)을 해체시키고,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의 인민대표자회의를 강제 해산시켰다. 1946년 4월 9일, 반공주의 우익 최대 청년단체인 대한민주청년동맹(大韓民主靑年同盟))을 조직, 결성하고 회장에 피선되었다. 아버지가 회장으로 지휘하고 김두한씨가 주먹으로 행동하는 해방직후 반공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세인의 인구(人口)에 신화적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운명의 날이 왔다. 아버지는 1974년초 유신헌법개헌투쟁(투쟁維新憲法改憲鬪爭)을 선언하고 나서 앞장 섰으나 결장암이 발생하여 그해 4월 28일에 운명했다. 아버지는 죽는 최후의 순간까지 대한민국을 걱정하고, 번영을 축원하고, 이승만대통령과 같은 사상, “반공만이 자유대한이 살 길이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해 5월에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만석군의 외아들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소유한 재산은 토탈 서울 상도동에 작은 집 한 채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집은 2천만원 가까운 부채로 은행에 저당 잡힌 상태였다.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집안이 거의 폐가가 됐으니 정치인의 말로가 너무 허무하지 않느냐” 며 자신부터 성금을 내어 모금을 주선했다. 전경련 등 3개 경제단체와 여,야 의원들은 총 3천만원을 모와 돈을 전달하여 저당 잡힌 집을 찾아 주었다. 아버지는 나라와 민족에게 헌신하는 정치인일 뿐, 일확천금(一攫千金)의 뇌물을 받아 사복(私腹)을 채우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만석군의 재산은 어디로 갔을까?

     아버지의 정치는 평생 야당 생활이었다. 하지만, 여당에게 협조할 것은 하고, 투쟁할 것은 하되, 당파싸움으로 대한민국 망치기는 하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는 불변의 반공 야당 당수였다. 김일성, 김정일에게 파리 앞발 부비듯 손을 비벼 만나주기를 애걸하는 매국역적(賣國逆賊)같은 작금의 일부 야당 당수들과는 천양지차의 야당정치를 지휘한 것이다. 아버지는 가난한 야당 정치인들을 위해 자신의 돈은 물론이요, 자금을 얻어와 호구지책(糊口之策)을 도운 이야기는 부지기수이다.

     나라일을 위해 집안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나는 만석군의 손자라는 말만 들었을 뿐 집안경제가 여러워 연세대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해서 루즈벨트 대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미국에서 학비를 벌기위해 무거운 집을 나르는 인부노릇을 오래해서 한쪽 어깨가 주저앉았다. 나는 막노동을 하고 있을 때, 부친을 원망하고 대든 적이 있었다. “제게 해준 것이 뭡니까?” 아버지는 아들 앞에 고개를 떨구고 묵묵부답(黙黙不答))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불효를 했다는 깨달음에 항상 가슴 아파 한다.

    아버지의 늘상 지엄한 분부는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청렴한 정치인으로 헌신하여 대한민국으로 한반도 통일을 하는데 기여 하라고 말씀했다. 나는 늘상 아버지께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인생을 살면서 아버지의 교훈을 망각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아버지와 국민 여러분께 깊이 머리숙여 참회의 인사를 드리며, 아버지의 유언대로 남은 생, 아버지의 조국,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 하고자 한다.

     조부가 아버지에게 물려준 만석군의 돈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것은 항일투쟁운동자금, 독립운동자금, 친일파 척결자금, 반공운동자금, 경제가 어려운 동료의원 돕기 등과 자유대한을 위해서 아낌없이 척전(擲錢)하고, 정작 아버지는 작고 저당 잡힌 집에서, 결장암의 고통을 인내하며 대한민국의 번영을 기원하면서 운명했다.

     柳漢烈(前, 5선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