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골은 한 덩어리 아냐~ 봉합선 있다!..흉기로 원형 구멍 낼 수 없다!

  • 장준하 선생의  죽음에 대해 실족사네 타살이네  이야기가 떠들석하다. 그래서 나는 문득 타임머신을 타고 37년 전 장선생이 돌아가셨던 시절로 되돌아 가게 됐다.

     

    1. 나는 왜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생생히 기억하나?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정치적으로 조숙한 아이였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형이 넷인데 모두 경기고를 나왔고 그 중 둘이 서울대였다. 누나가 셋인데 둘이 경기여고를 나왔고 그 중 둘이 서울대였다. (나는 삼류 고등학교를 나왔다. 또한 서울대를 나오지 않았다. 경기를 다니지 않았다는 것, 서울대를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다. 경기-서울대를 나왔다면 나는 틀림없이 좀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아, 물론 이 말은 나에 대해서만 적용된다. 경기-서울대를 나온 다른 사람들이 좀팽이인지 아닌지는 나로서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당시 공부 좀 하는 대학생들은 대부분 박통에 대해 염증을 느끼는 통기타 리버럴들이었다. 집에는 장준하 선생이 발간한 ‘사상계’가 빠짐없이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고…. 내가 소설가 이호철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사상계에 실린 그의 중편을 읽고 나서였다.

    당연히 손위 형제들은 죄다 맹렬 리버럴 들이었다. 지금도 기억이 선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나? 장기표 선배가 검거될 당시 장기표, 이신범, 고 조영래 선배가 가지고 있던 마르크스의 ‘자본’ 번역본 한 질(세 권? 네 권?)이 우리 집으로 흘러 들어왔다. 약간 촌스런 짙은 자주색 양장 커버. 기억이 맞다면 1946년 판본이었다. 형님이 그 책을 마당에 있는 장작 아궁이에서 태웠다. 형님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경기동창(고 조영래)이 관련되어 있는 책이어서 받아서 보관하다 태운 것이었다. 그것이 독재에 대해 염증을 느끼는 리버럴의 자연스런 행태 아닌가?

    어렸을 때부터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조숙한 아이는 당연히 정치적으로도 조숙해질 수 밖에 없다. 만 열여섯이던 1975년에 천관우 선생(박통에 의해 핍박 받았던 반공 자유민주주의자)의 강연을 따라다녔다. 아침 저녁으로 김지하의 시 오적을 읽었다.(<대화>란 잡지에 실렸었나?) 창작과비평 75년 봄 호에 실린 김지하 시 열댓편을 달달 외우고 다녔다. ‘타는 목마름으로’란 시도 그때 거기에 실렸다. 그때는 김지하가 잠시 석방되었을 때였다. 그 무렵 친구 집에 가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 잤는데, 다음날 아침에 친구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께 전화했다.

    “댁의 아들, 큰일 낼 녀석이니까, 우리 애랑 못 놀게 해 주세요. 우리 집에도 오지 말도록 해 주세요.”


     

    2. 나는 ‘1975 버전 음모론’을 또렷이 기억한다

    정치적으로 조숙했기 때문인지 나는 장선생의 죽음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형제들이 수근거리던 루머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같이 등산하던 사람이 절벽에서 밀었데…”

    그렇다. 1975년 판 음모론은 이렇다.

    “같이 등산하던 사람이 절벽에서 밀어 추락사했다”

    나는 1990년대에야 다음과 같은 사정을 알게 되었다.

    1)     ‘같이 등산했던’ 사람은 김용환이란 교사였다. (나중에 교감선생님으로 퇴직)

    2)     김용환은 장선생의 제자였다.

    3)     김용환은 사고 당일에 얼결에 버스 대절 단체관광에 따라 나섰다.
            (당시는 버스대절이란, 무지하게 드물고 호사스런 대대적 행사였던 시절이다)

    4)     일행이 모두 계곡에서 밥짓는 상황에서 장선생이 돌연 “산 한퀴 돌고 오겠다”고 나섰다.

    5)     우연히 김용환이 장선생을 따라 나서게 되었다.


    고백하자면 나도 음모론을 좋아한다. 그래서 희대의 암살자 라몬 머카더(Ramon Mercader)와 김용환을 비교해보았다. 

    머카더는 1940년 8월 20일 멕시코에서 트로츠키(레닌의 계승자. 스탈린의 천적)를 피켈(ice ax, 빙벽등반에 사용됨)로 찍어 죽인 사람이다. 머카더는 원래 스페인에서 활동하던 맹렬 스탈린주의자였다. 스페인 내전이 끝나자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다 트로츠키의 신임을 받던 젊은 여인 실비아 아젤로프(Sylvia Ageloff)를 유혹해서, 그녀를 이용하여 트로츠키에게 다가갔다.

    머카더는 주도면밀하게 1년여에 걸쳐 트로츠키와 사귀어 완벽한 신임을 얻었다.  마침내 트로츠키 집의 서재에서 단 둘이 있게 되자 책장 속의 피켈을 꺼내 뒤통수를 찍어 죽였다. 당시 트로츠키의 집은 여러 명의 보디가드들이 지키고 있는 작은 요새였다. 한마디로 '접근이 어려운 타겟에 대해 오랜 시간을 두고 접근하여 신뢰를 쌓은 다음에 암살을 집행한 것'이다. 머카더는 멕시코 감옥에서 20년을 복역한 후에, 1961년 소련에서 소비에트 영웅 훈장을 받았다.

  • 만약 김용환이 암살자라면 다음 의문이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1)     급변하는 상황을 자유재재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날 등산을 가자고 청한 것도, 현장에 도착해서 홀로 ‘산에 오르겠다’고 이야기한 것도 모두 장선생이다. 따라서 김용환이 암살자라면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을, 순간 판단에 의해서, 100% 활용할 줄 아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암살자’이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일개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아무런 히스토리 없이 느닷없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암살자’가 될 수 있을까?

    2)     장선생은 일상 생활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던 분이었다. 이런 분을 암살하고자 한다면 그냥 시간, 장소를 골라 저지르면 된다. 잘 가던 술집 안에서 싸움이 붙어도 되고 귀가길에 뒤통수 퍽치기를 해도 된다. 이런 분에게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암살자’를 배정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일상생활이 고스란히 노출된 사람을 제거한다면 ‘세계 최강의 암살자’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의문에 대한 답은 둘 다 ‘아니다’였다. 그래서 나는 아쉽지만, 입맛을 다시며 ’1975 음모론’을 포기했다.

     


    3. ‘2012 음모론’은 너무 허접하다

    37년이 지나 이제 새 버전의 음모론이 나왔다. 그런데 진화한 것이 아니라 퇴화했다. 너무 허접하다.

    우선 근거가 지나치게 물질적이다. 훌륭한 음모론은 물질적 증거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음모론의 생명이 오래간다. 예를 들어 천안함 폭침 때, “파란색 1번 매직이 불타지 않았으므로 어뢰 파편은 조작이다”라고 주장했던 음모론이 있었다. 그런데 어뢰가 폭발할 때에는 그 주변부가 열이 올라가기는커녕, 단열팽창 법칙에 의해 순간적으로 영하 수십 도까지 떨어진다. 따라서 이 음모론은 우스꽝스런 무지에 지나지 않음이 밝혀졌다.

    이번 ‘2012 음모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머리 뒤통수 쪽에 생긴 직경 6센티쯤(찐빵 크기의 직경) 되는, 거의 완벽한 원형으로 생긴 실금이 ‘타살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이 정도 크기에 그 위치라면 반드시 해골의 봉합선(grove)을 지나서 생겨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게 왜 문제냐고? 

    해골은 한 덩어리가 아니라 여러 개의 판이 모여서 구성되어 있다. 해골을 흉기로 내리치면 봉합선을 따라 깨질 뿐 봉합선을 넘어 완벽에 가까운 원형 모양으로 깨지지 못 한다. 이 같이 봉합선을 넘어서는 원형의 실금은, 땅에 묻힌 지 오래 되어 완전히 딱딱하게 경화된 해골에 충격이 가해졌을 때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막말로, 이장하러 유골을 수습하다 생긴 것일 수도 있다.

    또한 해골을 검안한 서울의대 법의학 교수 이윤성은 “추락 충격인지 흉기 충격인지 모르겠다”고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야권 및 가짜진보 진영은 “타살 혐의가 짙다”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이윤성은 법의학자로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지난 1997년 이태원에서 한국계 미국 청소년 두 명이 아무 이유 없이 재미로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다. 미군 CID는 두 명 모두에 대해 ‘공동정범’(2인 이상이 공동으로 저지른 범죄)을 적용하여 깔끔하게 정리된 수사보고서와 함께 이 두 명을 한국에 넘겼다. 이윤성에게 부검이 맡겨졌고, 그는 “키가 큰 사람 한 명에 의한 범행이다”라는 엉터리 결론을 내렸다. (본인은 “여러 가지 가설 중 하나였을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바보 검사가 이윤성의 결론에 따라 단독 범행으로 기소하는 바람에, 다른 한 명은 빠져나갔고, 기소된 사람 역시 ‘단독범행으로서의 증거 불충분’으로 빠져나갔다. 이윤성은, 대한민국 법의학계 전체를 개망신시킨 ‘이태원 살인 사건’에서 왕바보 주연 놀음을 했고, 검사는 이윤성의 꼭두각시 놀음을 한 셈이다.

  • 이런 엉터리 법의학자가 “추락 충격인지 흉기 충격인지 모르겠다”라고 횡설수설을 하자, 야권과 가짜진보는 이를 부풀려서 ‘2012 음모론’을 만들었다.

    “장준하의 머리를 흉기로 내리쳐 죽였다. 어쩌면 다른 데서 죽이고 시체를 옮겨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4. 잔대가리를 굴려서 퇴화를 선택했다

    엉터리 법의학자를 내세워서 원형 실금 하나를 증거랍시고 들이대는 ‘2012 음모론’—이는 퇴화이다. 그런데 이 퇴화가 일부러 선택한 퇴화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잠깐, 선택이라고? 그렇다 선택이다.

    “장준하의 죽음이 암살이다”라고 주장하고 싶으면 가장 강력한 음모론은 “마지막 순간의 동반자 김용환이 절벽에서 밀었다”라는 것만큼 확실한 주장이 없다. 아무도 증명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매우 세밀하게 (예를 들어 트로츠키 암살범 머카더와 비교하여) 추론하기 전에는 반박할 길이 없다. 그런 추론은, ‘음모론’을 환장하다시피 좋아하는 나 같은 매니아들이나 수행하고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추론에 관심조차 없다. 그러니 막무가내로 “절벽에서 김용환이 밀었다”라고 주장하는 편이 낫다. 그 주장이 바로 ‘1975 음모론’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 소리를 수근거렸었다.

    그런데 왜 그런 주장을 하지 않을까? 그 주장은 김용환에 대한 중대한 명예훼손이 되어 지독한 법률적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흉기로 머리를 내리쳐 죽였다”라는, 주어, 장소, 시간이 표백된 애매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무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음모론을 주장하는 비열한 작태이다.

    ‘2012 음모론’이 더 흉악한 것은 사실상 “김용환이 장준하의 머리를 흉기로 내리쳐서 살해한 후 추락사로 위장한 과정의 공범이다”라는 것을 의미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김용환의 명예를 하나도 훼손하지 않은 것 같이 보인다는 점이다. 김용환은 장선생의 추락을 목격하고 그 정황을 증언한 사람이다.

    만약 ‘2012 음모론’대로라면 김용환은 ‘흉기 살인’을 실행한 살인범 혹은 그 진실을 은폐한 위증 공범임이 자연스럽게 추론되면서도, 김용환의 명에를 직접적으로 훼손한 것은 아니게 된다. ‘2012 음모론’은 김용환이라는 한 명의 개인을, 지근지근 밟아서 버러지로 만드는 주장이다. 그래서 매우 폭력적이고 흉악하다.

     

    5. 음모론 떠들기 전에 장준하 선생의 사상을 공부해라

    그런데 장준하 선생이 언제부터 가짜진보의 아이콘? 당신들, 가짜진보들! 똑똑히 새겨 들어라. 장선생은 맹렬 반공 자유민주주의자였다. 그래서 5.16에 반대했고, 박정희의 남노당 연관 전력을 대대적으로 비판했었다. 제발 사상계에 실렸던 그의 주옥 같은 평론을 몇 개라도 읽어 보도록.

    틈만 나면 북한을 역성들고, 틈만 나면 종북과 함께 ‘진보 빅텐트’ 속에서 뒹구는 너희들은, 장준하 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박멸시켜야 할 바퀴벌레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데 갑자기 장준하 선생을 아이콘으로 받들어 이렇게 외치는 것 아닌가?

    “우리 장선생님은 타살당하셨다. 장선생님의 원혼을 풀자. 촛불을 들자. 이 불의하고 부패한 시스템을 불질러 버리자!”

    이것은 아무 개념이 없는 미친 폭도와 같은 행태이다. 그렇다 너희의 정체는 바로 폭도다. 이미 너희에게는 아무런 일관된 정치사상도 없고 역동적 정치전략도 없다.

     

    6.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내가 왜 이렇게 열 올려 야권 및 가짜진보의 허접한 ‘2012 음모론’을 비판하고 있을까? 박근혜를 찍든 말든, 나는 관심이 없다. 나는 박근혜를 위한 백기사가 아니라,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과에 관한 진실]을 옹호하는 백기사이다. 그렇다. 나는 [과거에 관한 진실]을 위해 싸운다.

    왜? 나는 폭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 과거를 조작해서 현재의 정치투쟁에 사용하는 존재—이것이 바로 폭도이기 때문이다. 나는 폭도가 아닐 뿐 아니라, 폭도를 증오한다. 그래서 나는 과거에 관한 진실을 옹호한다.

    정치 투기꾼들과 폭도는 현재에 집착한다. 철딱서니 없는 욕심쟁이 어린애가 ‘지금 당장, 지금 이곳’에 집착하듯.

    하지만 현재란 무엇인가? 끝없이 뒤로 뻗은 과거와, 끝없이 앞에서 밀려드는 미래가 만나는 접점—그 인터페이스가 바로 현재이다. 현재의 절대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착각일 뿐이다. 현재의 의미는 오직 “과거와 미래의 접점이다”라는 데에만 있을 뿐이다.

    상상해 보라. 인류 최초로 알곡 재배의 이치를 발견해 내었던, 여릿여릿하고 수줍고 가냘펐던 여인을! 지지난 해 가을에 영글었던 씨앗이 떨어져 겨울을 지나 지난해 봄-여름에 자라서 지난해 가을에 한 웅큼 알곡이 되었다는 [과거를 기억한 여인]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 알곡을 심으면 오는 가을에 한 웅큼이 된다는 [미래를 상상한 여인]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간음 중이다. 1만년 전의 그 여인과 운명적 사랑에 빠져 있다. 그 여인이 나의 팡므 파딸이다. 그래서 나 역시 그 여인의 지혜를 따라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래서 나는 [과거에 관한 진실]을 왜곡하는 너희, 가짜진보를 증오한다. 참된 사랑은 피비린내 나는 증오를 수반해야 마땅한 것 아닌가?

  • 박성현 저 술가/뉴데일리 논설위원.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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