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북한 첩보 액션스릴러!


  • <3>진술실의 사내

    외부의 빛이 완벽하게 차단된 국정원의 진술실은 하나의 어둠덩어리다.
    그리고 침묵으로 꽉 찬 심해(深海)다. 그런데 그 차갑고 캄캄한 심해 한가운데에 신기하게도 해수면과 이어진 빛의 통로가 있었다.
    진술실엔 마지막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는 노인과 손님을 태우고 갈 젊은 뱃사공이 마주하고 있다.
    뱃삯은 ‘진실’이다. 뱃삯을 받기 위해 흥정을 하는 뱃사공은 국정원 해외파트 산하 특수작전팀 팀장 최정원이고, 배를 타려는 사람은 며칠 전 베트남을 거쳐 망명한 북한의 고위급 인사다.
    아무튼 최정원은 깊고 담담한 눈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의 박철진은 희끗희끗한 귀밑머리로 경험과 노련미가 풍겼다. 물론 이 어색한 상황을 바라보는 네 개의 눈이 더 있었다. 한 사람은 입사 5년차 유재국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입사 3년차로 진술녹화실에서 비디오녹화를 담당하는 서유진이었다.

    “성함과 나이, 그리고 고향 및 출신학교 등 선생님의 기본적인 인적사항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름은 박철진이고, 나이는 45세입니다. 고향은 평양직할시 대성구역 고산동 46번지입니다.”
    “대성구역의 서쪽에 사동구역이 있든가요?”
    “아닙니다. 사동구역은 남쪽에 있습니다. 서쪽엔 모란봉구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대외경제학과를 졸업했습니다.”
    “현재 김일성종합대학 제1부총장이 경제학부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데, 혹시 잘 아는 사람입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입학할 당시 신입생 대표로 선서를 한 백혁철 동무입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그렇게 하십시오.”
    “선생님이 중국에서 담당하신 업무와 직책은 무엇입니까?”
    “외형적으로는 주하이(珠海)에 있는 조선광업개발무역(KOMID) 산하의 고려무역 주재원입니다. 그러나 실제 담당업무는 북한 최고 권력자의 통치자금 관리입니다.”
    “현재 국가운영과 관계된 통치자금과 최고 권력자 개인의 비밀자금 관리가 이원화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과거 김정일과 이후 김정은의 개인 비밀자금과 그들이 사용하는 사치품의 관리는 노동당 38호실이 전담합니다. 그리고 노동당의 행사비용 등 통치자금의 관리는 39호실이 맡고 있습니다. 물론 2008년 이후 1년 안팎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두 부서가 합쳐진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행정부가 제재대상에 39호실을 추가하자 곧바로 다시 분리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외화자금은 어떤 방법으로 획득합니까?”

    “38호실 산하엔 각 도(道)의 외화벌이 사업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업소를 관장하는 모란지도국, 낙원지도국, 묘향산지도국 등이 있습니다. 또한 39호실 산하엔 주요 금융기관인 대성은행, 고려은행 등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금·아연 등을 채굴하는 강원도 문천금강제련소, 연간 2억 달러어치나 남한에 농수산물을 수출하는 원평대흥수산사업소, 대성타이어공장, 조선광업개발무역 등 알짜배기 공장 및 기업소가 100여 개나 있습니다. 평양의 외국인 전용호텔과 외화상점들도 39호실이 관리합니다.”

    “좋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조선광업개발무역, 즉 ‘조광무역’이 어떤 곳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조광무역의 조직체계말입니다.”
    “조광무역은 원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의 35호실 3과 소속이었습니다. 그런데 2009년 35호실이 작전부와 더불어 기존의 인민군 총참모부 산하의 정찰국과 통폐합됐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최고 권력기관이라 할 수 있는 국방위원회 직속의 정치총국으로 확대·개편 됐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국방위원회 산하의 정찰총국 5국 소속입니다.”
    “35호실의 인적 구성은?”
    “5국에는 부장과 5명의 부부장 밑에 해외 담당부서와 대남사업부서, 그리고 지원부서가 있습니다. 물론 동남아 지역도 5국에서 관리합니다. 거기다가 38호실, 39호실의 통제하에 외화벌이사업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39호실이 해외에 숨겨둔 최고 권력자의 통치자금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게 된 시점은 언제입니까?”
    “1992년에 추가된 업무입니다.”
    “갑자기 선생님께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이유가 궁금하군요. 망명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무엇입니까?”
    “제가 지금까지 본 ‘주체의 사회주의’는 한마디로 외눈박이 거인이 산다는 바닥없는 소금호수였습니다. 그리고 그 소금호수는 본심을 숨긴 위선과 상대를 속이는 기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박철진은 대답을 끝내자마자 어색한 표정으로 담배를 찾았다. 정원에게서 담배를 건네받은 박철진은 불이 붙자마자 두더지를 잡는지 연신 연기를 뿜어댔다. 박철진은 TV를 통해 자주 보아온 호전적인 격한 말투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에 대한 배려까지 느껴지는 전형적인 외교관스타일의 말투였다. 어느새 담배는 재가 되어 허리를 아래로 구부렸고, 박철진은 다소 몽롱한 시선으로 다시 정원과 마주했다.

    “이제 선생님이 왜 소환대상자 명단에 올랐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건 어느 날 갑자기 38호실에서 관리하던 과거 김정일의 비밀통치자금이 증발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비밀통치자금도 앞서 말씀하신 방법으로 조성된 겁니까?”
    “그렇습니다. 거기다가 ‘국민의 정부’가 추진한 ‘햇볕정책’과 ‘참여정부’의 ‘포용정책’, 그러니까 근 10년간 대한민국의 좌파정부와 민간기업이 경제지원금 명목으로 북조선에 갖다 바친 외화도 비밀자금으로 일부 흡수됐습니다.”


    “가만! 그런데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방금 전 말씀하신 내용은 분명 39호실이 전담부서라고 판단되는데, 또 선생님도 그렇게 설명하셨고요. 그런데 왜 갑자기 김정일의 비밀자금을 관리하는 38호실이 통치자금의 관리를 맡은 것입니까?”
    “예리하시군요. 2010년 김정일의 사(私)금고인 노동당 38호실이 다시 부활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즉 미국의 금융제재와 유엔의 대북제재를 피하고 비밀통치자금을 추적당하지 않기 위한 술수였습니다. 그것은 또한 2005년 마카오 BDA(방코델타아시아)은행의 동결이 북한에 준 충격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비상시에는 자금의 관리주체와 성격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물론입니다. 그래서 제가 앞서 ‘비밀자금’이 아닌 ‘비밀통치자금’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과거 김정일이 운용한 비밀통치자금의 전체 규모에 대해 아시는 바는 없습니까?”
    “솔직히 그건 제 능력 밖의 일입니다. 아무튼 저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의 비밀자금엔 김대중 정부 때, 그러니까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전에 국정원이 홍콩에 있는 중국은행을 통해 조광무역으로 송금한 2억 5천만 달러 중 일부가 분명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사실만큼은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일부라면?”
    “노동당 39호실은 남한에서 보내온 경제지원금을 다음의 두 가지 목적에 우선적으로 사용합니다. 첫 번째는 캐비어를 비롯한 고급식료품과 양주·고급자동차 등의 기호품 구매입니다. 물론 그것은 모두 김씨 일가와 북한 지도층을 위한 호화사치품입니다. 두 번째는 핵무기 개발을 위한 고농축 우라늄(HEU·Highly Enriched Uranium) 등 대량살상무기의 장비 구매입니다. 그렇게 쓰고 남은 외화를 비밀통치자금으로 조성합니다. 물론 그 비밀통치자금도 안전을 위해 수십 명이 나누어 철저히 관리합니다. 아무튼 전 그 비밀자금을 마카오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2005년 중국의 주하이로 조광무역을 옮긴 뒤에도 직접 관리했습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언제까지입니까?”
    “2010년 8월까지입니다.”

    정원은 단순한 재단미가 돋보이는 쓰리버튼의 클래식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는 긴장이 되는지 화이트셔츠의 단추 하나를 풀었다. 그리곤 짙푸른 색상의 타이도 거칠게 잡아당겨 침이 잘 넘어가도록 여유 공간을 넉넉하게 만들었다. 진술실 밖에서 방송국에서나 사용하는 고성능 비디오스위처(Video-Switcher)를 조작하던 유진도 갈증을 느끼는지 옆에 있던 생수병을 급히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 비밀통치자금이 어떻게 증발된 겁니까?”
    “어느 날 총대표의 갑작스런 지시가 있었습니다.”
    “지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전까지 북조선의 해외금융자산 대부분은 마카오와 홍콩의 중국계 은행에 몰려 있었습니다. 압록강개발은행, 대동신용은행, 동북아은행, 조선합영은행 등 말입니다. 그런데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도발로 밝혀지자 남북관계가 급속히 냉각됐습니다. 그래서 북한 지도부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남한과 미국이 후속조치를 취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북한은 폐쇄성으로 인해 어느 면에서 금융제재에 아주 취약할 수도 있습니다. 즉 다른 나라엔 그 영향이 미미할지라도 북한에겐 체제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당시 북한 권력층의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결국 북한 수뇌부는 보다 안전한 곳으로 금융자산을 이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투자자금으로 위장해 말레이시아의 다른 계좌로 관리하던 통치자금을 이체시켰습니다.”
    “그럼 마카오와 홍콩의 북한계좌에서 자금이 본격적으로 인출되기 시작한 시점은 2010년 여름이겠군요. 북한의 핵무장과 무력도발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금융제재로 인해 받게 될 피해를 최소화시켜야 되니까 말입니다.”
    “아닙니다.”
    “예? 아니라고요. 그럼 언제…….”

    “그보다는 한참 전입니다. 사실 김정일과 북한 군부는 남한에 친미·우파정부가 들어설 때부터 이후 벌어질 한반도와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비했습니다. 그래서 은밀성이 높은 다른 곳으로 비밀통치자금을 조금씩 빼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제 기억이 맞는다면 2009년 6월, 그러니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제1874호 결의안>이 통과될 무렵부터 시작됐을 겁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관리하던 통치자금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왜 사전에 옮기지 않은 것이죠?”
    “김정일 개인의 비밀자금과 달리 통치자금은 이란·시리아·쿠바 등 무기수출국과 연관된 자금이라 그 성격상 쉽게 옮길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당시 제가 관리하던 자금은 ‘무기수입예비비’로 상부의 지시에 따라 언제 지출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직접 관리하던 통치자금의 정확한 규모는 얼마입니까?”

    “제가 관리하던 자금은 총 5천만 달러입니다.”
    “5천만 달러면 대략 오늘 환율로 한화(韓貨) 550억 정도가 되겠군요.”
    “대충 그렇습니다. 그 5천만 달러 중 남한에서 송금한 경제지원금 50억 원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앞서 말씀드린 방법으로 대외무역사업과 외화벌이사업으로 긁어모은 겁니다. 물론 국가보위부 해외반탐국 총책인 김정남의 관리하에 있는 마카오 카지노를 통해 깨끗하게 세탁한 돈입니다.”

    “그럼 2010년 8월에 통치자금을 송금한 대상은?”
    “말레이시아를 거점으로 하여 동남아 일대의 김정일 비밀자금을 관리하던 38호실 소속의 리재경입니다.”
    “그럼 바로 그 리재경이 증발된 통치자금을 갖고 있겠군요?”
    “아닙니다. 언젠가 회식자리에서 총대표가 통치자금의 관리에 대해 어느 동무에게 대답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술에 취한 총대표가 무심코 평양의 38호실이 직접 관리하기로 했다는 소리를 했습니다.”
    “평양에서 직접! 그렇다면 김정일의 통치자금이 리재경을 거쳐 38호실의 수중에 있다는 뜻입니까? 그건 증발이 아니라…….”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렇죠.”
    “하긴, 비정상적인 상황이니까 앞서 ‘증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거고요.”
    “맞습니다. 만약 정상적으로 처리됐다면 총대표의 대답이 있고 한 달 후, 그러니까 2010년 10월 초, 리재경이 시체로 발견될 이유도 없었겠죠. 거기다가 북조선의 국가안전보위부까지 직접 나서 벌써 1년이 넘도록 리재경이 관리하던 비밀통치자금의 행방을 추적할 이유도 없고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무역기관에 있는 여러 명의 자금관리 총책으로부터 송금을 받은 리재경이 39호실의 허가도 받지 않고 비밀통치자금을 인출했답니다. 그리고 그 후 일주일간 잠적을 했다가 수도 외곽에 있는 카지노 지하의 나이트클럽 화장실에서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사망 원인은?”
    “말레이시아 경찰이 밝힌 바로는 헤로인 과다투여로 인한 심장마비였답니다.”
    “비밀통치자금의 감쪽같은 증발이라. 그래, 리재경이 증발시킨 비밀통치자금은 얼마나 됩니까?”
    “극비라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송금한 사람들의 머릿수만 가지고 어림잡아 짐작해도 10억 달러는 족히 될 겁니다.”

    “흠, 10억 달러라. 만약 찾지 못하면 38호실과 39호실은 그야말로 깊은 ‘숙청의 늪’에 빠지게 되겠군요.”
    “그 때문에 현재 해외에 나와 있는 무역일꾼과 기관원들은 하루하루 살얼음판 위를 걷는 심정으로 살고 있습니다. 사상검증과정에서 나쁜 점수를 받게 된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상부에서 거동이 조금만 수상하다고 판단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최악의 상황 발생 시 북한을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즉시 소환령을 내립니다. 심지어 상사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도 곧바로 본국에 소환됩니다. 말이 좋아 소환이지, 소환령은 정치범수용소나 노동교화소에 끌려가 짐승처럼 살다가 굶어죽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물론 저 역시도 인민무력부 산하의 보위사령부와 39호실에 수차례 소환되어 며칠씩 예심(조사)을 받았습니다.”

    정원의 눈에 비친 박철진은 우상화의 놀음에 놀아난 원죄로 말라죽는 나무 같았다. 그리고 그 원죄를 씻기 위해 매서운 눈보라 속을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튼 박철진은 말하는 내내 평상심을 잃지 않았다. 물론 대화술도 노련하고 뛰어났다. 모든 내용을 핵심적이면서도 간략하게 정리해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박철진일지라도 자기 가족의 불안한 미래와 다가올 공포와 마주하면 목소리가 무섭게 흔들렸다.

    “그 비밀통치자금과 관련하여 더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2002년 봄으로 기억합니다. 이건 평양에서 떠돌던 소문입니다. 당시 상하이의 대외무역사업과 외화벌이사업소의 총책은 윤일현 대표였습니다. 그런데 윤일현 총대표가 바로 조광무역과 김대중 정부 사이에서 진행되던 밀거래를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미국중앙정보국)에 밀고한 쁘락지(프락치)로 의심받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정말 윤일현 총대표가 국가전복죄로 숙청됐습니다.”
    “미CIA에. 음…….”

    “또 하나. 제가 평양의 39호실에서 조사를 받을 당시 보위부 요원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얼핏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리재경이 인출한 비밀통치자금이 필리핀에서 한 번 더 돈세탁을 거친 것 같다고 했습니다.”
    “흠! 필리핀이라. 코스타리카·말레이시아·우루과이와 더불어 최근 불법자금의 조세피난처로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는 곳인데.”
    “스위스·덴마크·헝가리·폴란드·이탈리아·독일·벨라루스 등 유럽권에서 돈세탁을 하면 곧바로 미국의 자금추적이 들어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겠죠.”

    정원은 갑자기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말이 생각났다.
    ‘김정일 체제가 지금껏 유지된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문이다. 그리고 햇볕정책은 북한 인민들을 더 큰 고통 속에 몰아넣고 김정일만 살린 반역정책이다.’ 그리고 햇볕정책에 따른 경제지원으로 한국은 북한에 철저히 농락당했고 북한을 더욱 오만하게 만들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문제의 비밀통치자금이 현재 필리핀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씀이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남한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라. 무척 재미있군요.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무슨 근거라도?”
    “그렇지 않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뭐가 말입니까?”
    “중국과 북한의 추적을 뿌리친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리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아니, 어느 면에선 그 비밀통치자금이 가장 유용하게 사용될 곳으로 남한만큼 적당한 곳도 없죠.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리재경은 우리 민족을 위해 정말 위대한 일을 한 겁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북한으로 옮길 수 있는 종잣돈을 만든 것이니까 말입니다.”
    “!”

    “그런데 제가 그렇게 판단하는 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남한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점 때문입니다. 즉 조세정책이 느슨해서 적당히 자금을 굴리다 세금 한 푼 안 내고 곧바로 조세피난처로 달아나기에 더없이 좋은 나라가 바로 남한입니다. 그건 저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 자산운용을 전문적으로 하는 펀드매니저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박철진의 눈엔 야심이 없었다. 박철진은 흡사 무덤 안에 홀로 잠들어 있는 것처럼 정원을 의식 밖에 세워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상태는 곧 그의 직설적인 대답으로도 확인됐다. 사실 박철진의 말은 모두 진실이었다. 진실은 그만큼 완벽해서 그 힘 앞에 누구나가 머리를 숙여 굴복하는 것이다.

    “그럼 돈세탁을 한 필리핀은?”
    “그거야 유인책이겠죠. 미국과 연결시켜 추적에 혼선을 주기 위한…….”
    “판타지작가 못지않은 상상력을 가지고 계시군요.”
    “글쎄요. 리재경이 죽던 날. 왜 주머니 속에서 상하이행 중국동방항공 비행기표가 나왔을까요. 그것도 왕복이 아닌 편도로.”
    “…….”
    “상하이 푸둥(蒲東)공항에 내려서 리재경은 과연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요? 또한 상하이에서 가장 가까운 국제도시는 어디일까요? 물론 미국이나 유럽국가로 탈출하기 위한 환승공항으로 상하이의 푸둥공항을 선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여러 정황상 가능성이 매우 희박합니다. 더구나 다급한 상황이라면 추적자에게 시간을 벌어줄 이유가 없겠죠.”

    “그러니까 리재경이 푸둥공항에서 내려 다른 제3의 이동수단을 이용해 한국으로 들어오려고 했다는 말씀입니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더구나 리재경은 김정일의 경호부대인 ‘호위총국’ 출신입니다. 머리가 아주 좋고, 일 처리 능력이 탁월해서 38호실에 발탁된 인물입니다. 때문에 리재경을 제거한다는 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장애물이 많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국내에서 10억 달러를 안전하게 운용할 만한 전문딜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죠. 더구나 탈북자나 귀순자들 중에 그 정도의 능력을 인정받는 외환전문가가 아직까지 없습니다.”
    “…….”


  • <4>조사보고

    설유리는 패션 테러리스트였다.
    그녀는 옷을 파는 직원인지 아니면 자신을 파는 길거리의 그렇고 그런 싸구려 여자인지 도저히 구분이 모호했다. 심지어 그녀에게서 나는 향수냄새조차 자극만 있고 기품이 없었다. 아니, 또 하나의 악취였다.
    마침내 현우가 실사를 통해 손에 넣은 건 설유리의 부정한 ‘치부책(置簿冊)’이었다. 현우 일행은 설유리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서둘러 차에 올랐다. 사이드미러에 비친 설유리는 팔짱을 낀 채 시퍼렇게 날이 선 의미심장한 웃음을 날렸다.

    “팀장님도 그냥 못 이기는 척 한 번 넘어가 주시지.”
    “홍 대리님도 아까 로스 폭 보셨잖아요?”
    “그렇긴 해. 여자가 간도 커. 2억 4천이 뭐야. 원인을 알 수 없는 분실사고 때문에 회사가 암묵적으로 인정해주는 손실액의 무려 120배잖아!”
    “거기다가 그 호스티스 같은 요사스런 옷차림과 목소리는 어떻고요. 완전히 불여우처럼 우리 팀장님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잖아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생존을 위해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는다.
    우리는 흔히 그 과정을 진화라고 부른다. 하지만 기막힌 사실은 그 진화의 방향이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고귀한 가치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진화는 우리가 사전에 전혀 인지하지 못한 우연이라는 돌발변수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승부가 결정된다. 그렇게 보면 성공만을 바라보고 질주하는 인간의 노력도 부질없어 보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 작은 돌발변수가 이름 없는 누군가의 아주 작은 노력과 하찮은 행동에 의해서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팀장님. 이 살벌한 실사내용을 위에 그대로 보고 하실 겁니까?”
    “홍 대리.”
    “예, 팀장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건은 내 재량 밖인 것 같아.”
    “사실, 그래서 저도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좀…….”
    “왜요? 홍 대리님. 뭐가 문제인데요?”
    “눈치 하고는. 그렇게 눈치가 코치라서 이 험한 경쟁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냐. 쯔쯔쯔. 너도 생각 좀 한번 해봐라.”
    “뭘 말입니까. 홍 대리님?”
    “이 바닥은 수시로 세일을 하잖아. 그리고 그것에 맞춰 전국매장의 물량이 단기간 내에 이동되고 말이야.”
    “그런데요?”
    “따라서 사전에 제품의 입·출고현황 파악만큼은 확실하잖아. 때문에 여자 혼자서 단기간 내에 그 많은 돈을 혼자 꿀꺽 하기가 말처럼 그렇게 쉽겠어.”
    “아하! 그럼 누군가 저 설유리 지점장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 이 말씀이로군요.”
    “이 답답한 후배야, 이제 이해가 좀 되냐!”
    “예, 후후후.”
    “팀장님, 말이 나온 김에 우리 다시 돌아가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보는 건 어떨까요?”
    “합의요?”
    “그래! 서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선에서 말이야. 일 열심히 하고 우리가 피박에 광박, 거기다 쓰리고로 두들겨 맞을 필요는 없잖아.”

    현우는 라디오볼륨을 높였다.
    분명 인간관계를 복잡하게 엮지 않고 쉽게 풀면서 사는 건 개인에게 있어 엄청난 지혜이며 자산이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인간적 욕심’과 ‘도덕적 본성’을 함께 갖고 있다. 제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적 욕심이 꿈틀대며, 제아무리 아둔해도 양심과 도덕적 본성이 흐른다. 이때 라디오에서 새뮤얼 바버(Barber, Samuel)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Adagio for Strings, Op.11)>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즈음 국정원의 브리핑룸은 입체영상관 같았다.
    스위치 소자와 구동칩 모두 투명한 산화물 트랜지스터로 구성된 대형 디스플레이가 매순간 환상적인 빛으로 각종 정보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것은 실내의 모든 시선을 단숨에 빨아들였다. 차세대 디스플레이인 투명스마트 창은 터치패드와 무선으로 관련 정보를 입력하고, 투명회로를 통해 신속한 정보처리가 가능한 최첨단 제품이었다. 마치 ‘허구’를 ‘사실’처럼 가장시킬 수 있는 기술로도 보였다. 아무튼 120인치짜리 투명스마트 창을 중심으로 양편에 해외파트의 고위급 실무자 전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하나같이 도약을 위해 웅크린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것은 흡사 먹잇감을 중간에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맹수들의 탐색전 같았다.

    “최 팀장이 브리핑 준비를 아주 많이 했나보군.”
    “감사합니다, 차장님.”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과연 박철진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 아니겠어?”
    “국장님, 다음 화면을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저건 미국이 슈퍼노트(Supernote·100달러짜리 초정밀 위조지폐)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 발행한 100달러짜리 지폐가 아닌가. 최첨단 위조방지 기술을 채택한 것으로 아는데.”

    이 국장이 콧등을 타고 흘러내린 검은색 뿔테안경을 손가락 끝으로 미간에 바짝 갖다 붙였다.
    그것은 분명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또한 자신의 믿음이 무너지는 것을 수수방관하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방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외파트 최고 책임자인 심수창 제1차장은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고 한결 여유로웠다. 그러다 간간이 기대치가 충족되면 정원을 향해 엷지만 흐뭇한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정원은 곧바로 쏟아질 질문들에 대한 모범답안을 나름대로 작성해 다시 한 번 차근차근 검토했다.

    “지금 보고 계시는 이 지폐는 외환거래 시 실제로 사용이 가능한 위조지폐입니다. 일명 뉴 슈퍼노트(New Supernote), 뉴 벤자민(New Benjamin)이라고 불리는 위폐입니다. 위폐감식기로는 식별해낼 수 없지만 적외선감별기와 특수확대경을 활용하면 위폐 감식이 가능합니다.”
    “최 팀장, 신권의 가장 큰 특징은 지폐 앞면, 그러니까 한가운데 있는 파란색 세로 줄무늬의 3D 기술 아닌가?”
    “맞습니다, 국장님.”

    “분명 오른쪽 하단에 자유의 종이 갈색 톤으로 그려져 있잖아. 그리고 위조방지 역할을 하는 수천 개의 가느다란 렌즈로 구성된 청색 리본도 위아래로 인쇄되어 있고. 내가 보기엔 진짜 지폐 같은데 그게 정말 슈퍼노트란 말이야?”
    “그렇습니다, 국장님. 다시 한 번 제 손에 들려 있는 지폐를 봐주십시오. 이것 역시도 위조지폐입니다. 그런데 화면 속의 위조지폐와 달리 이 위조지폐는 적외선감별기와 특수확대경으로도 식별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한마디로 전문가들조차 감별이 불가능할 만큼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초정밀 위조지폐입니다. 물론 미국 연방준비은행(FRB) 산하의 조폐청(BEP)에서 발행한 진짜 지폐는 더더욱 아닙니다.”

    “새 지폐의 발행을 통해 위조지폐범들보다 미국 정부가 확실히 앞서 가게 됐다고 자신하던 미 재무장관의 말이 무색하게 됐군.”
    “지폐에 숨어있는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그림이 선명하게 보이는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거기다가 지폐를 전후좌우로 움직이면 줄무늬 안에 새겨진 100과 자유의 종 이미지가 전후좌우로 흔들리며 서로 바뀝니다. 물론 지폐를 움직이면 일부 색깔이 바뀌는 것도 똑같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중요한 부분도 위폐 감별 매뉴얼에 따라 확인했으나 진짜 화폐와 똑같았습니다. 한마디로 ‘위폐(僞幣)’가 아닌, ‘진폐(眞幣)’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자넨 그 지폐가 뉴 슈퍼노트인지 어떻게 알았나?”
    “바로 박철진의 진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슈퍼노트를 제작하려면 지폐제작용 특수용지가 필요합니다. 말이 특수용지지 사실은 면입니다. 남미에서 생산된 면화 75%에 리넨(Linen), 즉 아마(亞麻)를 25%의 비율로 섞어서 제작합니다. 이 특수기술은 현재까지 단 한 차례도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습니다. 미국만이 알고, 미국만이 가지고 있는 기술입니다. 그래서 미국 조폐청에 의뢰한 결과 진짜 화폐와 기본적인 성분비가 같았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보안을 이유로 밝히길 꺼려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그 부분에 있어서는 극히 미세하지만 분명하고도 엄연한 차이가 있답니다.”

    “그럼 그 지폐를 박철진이 가지고 들어왔다는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 위조지폐는 최근 북한의 인민무력부 산하 정찰총국이 전면에 나서 극비리에 제작한 것입니다. 제작장소는 평안남도 평성시에 있는 인민보안성 예하 926공장입니다. 물론 북한에서 위조지폐를 만들 때는 통상 인쇄판과 복사판이 사용됩니다. 그리고 다시 인쇄판은 A, B, C등급으로 나눕니다. A급은 앞서 보신 바와 같이 전문가들조차 식별이 불가능한 최상급 슈퍼노트입니다. 지폐종이도 진짜 달러와 거의 똑같습니다. 다음으로 B급은 종이가 중국산으로 질이 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C급은 일반인이 음성적으로 제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제가 들고 있는 이 위조지폐는 A급을 넘어 S급에 해당하는 초정밀 위조지폐입니다.”

    순간 브리핑 룸을 덮친 건 갑자기 일어난 큰 소란이었다.
    그 소란은 지진해일처럼 단번에 실내를 휩쓸었다. 급기야 그동안 흥미롭게 지켜보던 심 차장까지 몸을 일으켜 세워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그러자 마법에 취한 세상처럼 브리핑룸에 고요가 다시 찾아왔다. 물론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충격과 놀라움이 곳곳에서 보였다. 그런데 그들과 달리 정원의 입가엔 어느 틈엔가 엷은 미소가 봄날의 햇살처럼 살포시 번졌다.

    “최 팀장, 그런데 말이지.”
    “예, 엄기호 처장님.”
    “아까 북한의 인민보안성 산하 926공장에서 제작한 뉴 슈퍼노트가 망명한 박철진의 손에서 나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나는 말이야. 사실이 그렇더라도 그게 곧바로 박철진의 진실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무슨…….”
    “그러니까 내 말은, 박철진이 조광무역에서 대외무역사업과 외화벌이사업을 하던 종사자잖아. 더구나 김정일의 비밀통치자금까지 관리했던 인물이고. 그렇다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이런 위조지폐쯤은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저…….”
    “왜, 생각을 안 해봤나?”
    “솔직히 그렇습니다.”
    “생각을 안 해봤다는 건 박철진에 대한 최 팀장의 확실한 믿음인가, 아니면 오만인가?”
    “…….”
    “만일 내 우려가 사실이라면 박철진은 탈북자가 아니라 특수한 목적을 띠고 남파된 공작원이잖아.”
    “그 부분과 관련해서 저희도 나름대로 철저한 조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뚜렷한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최근에 박철진의 한국행이 위장탈북이 아니라는 신빙성 있는 첩보도 입수했습니다.”

    “그래? 첩보내용은?”
    “현재 중국의 안전국과 공안국(경찰)의 도움을 받아 반체제 사범 단속을 전담하는 북한의 인민보안부(경찰청 해당) 산하 특별기동대가 박철진의 행방을 쫓고 있습니다.”
    “좋아! 그건 그 정도로 하고. 또 하나. 그 뉴 슈퍼노트를 정말 북한이 제작했다고 인정하더라도 이득을 보는 국가가 단지 북한뿐이라고 생각해? 물론 외형적으로는 당연히 인민무력부 정찰총국에서 제작했으니까 북한 군부가 일차적인 이득을 보겠지.”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소말리아의 해적만 보더라도 실제 배후는 따로 있으니까 말입니다. 실제로 피해를 당한 선주가 지불한 몸값의 상당액이 영국으로 흘러들어갑니다. 어느 면에선 소말리아의 해적과 영국의 전문변호사, 그리고 브로커, 게다가 국제해운사와 보험사는 비윤리적인 비즈니스로 얽힌 공생관계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북한의 슈퍼노트 제작도 국제적인 범죄조직과 얽혀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즉 인쇄기를 판매한 스위스와 기타 장비를 제작한 일본 회사들, 그리고 슈퍼노트 제작에 사용하는 특수용지를 수출한 홍콩과 잉크를 판매한 프랑스까지 말입니다.”
    “최 팀장, 그건 극히 제한적인 이득이고.”
    “?”
    “단순히 그런 가시적인 경제이득 말고 그러니까 내 말은 미래전략 차원에서의 국익을 말하는 거야. 최 팀장의 말처럼 박철진의 진술이 단서가 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슈퍼노트 제작의 주범국(主犯國)으로 북한을 지목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이후의 파장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 않아?”
    “물증의 결정력이 약하면 추후 좀 더 완벽하게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고립화가 더욱 심화되겠지. 그리고 그 결과로 북한의 붕괴도 가속도가 붙을 테고. 그렇다면 현시점에서 북한의 붕괴로 이득이 되는 국가가 과연 있을까. 당연히 통일준비가 덜 된 우리나라는 거기서 제외지. 더구나 북한의 붕괴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면 그것은 장차 복(福)이 아니라 화(禍)가 될 거야. 한마디로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된다고. 최 팀장, 내 생각이 지나친가?”
    “…….”
    “엄 처장, 최 팀장이 머리가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쯤 했으면 됐어.”
    “알겠습니다, 차장님.”
    “음, 내가 보기에 오늘 브리핑은 비교적 괜찮았어. 최 팀장의 남다른 열정도 봤고 말이야. 아무튼 수고했어. 자, 결론은 이미 난 것 같으니까 오늘은 이쯤 하자고.”

    정원은 마치 450도로 달군 오븐을 연 것 같았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심 차장이 애써 테이블을 돌아왔다. 그리고 고개를 떨군 정원의 우울한 어깨를 다독였다. 그런데 심 차장과 이 국장이 브리핑룸을 빠져나가자마자 엄 처장이 득달같이 뛰어왔다. 엄 처장의 얼굴도 이미 페페로니피자처럼 울긋불긋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엄 처장이 턱과 코끝을 치켜들고 비스듬히 쏘아보았다. 심지어 한심하다는 듯 혀까지 찼다. 분명 엄 처장의 눈빛은 사막처럼 건조하고 극지처럼 차가웠다. 사실 평소에도 사사건건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었으며,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냉정했다. 그야말로 부하 직원들에게는 최악의 상사였다.

    “넌 CSI(과학수사대) 같은 드라마나 영화도 안 보냐?”
    “예?”
    “케이블마다 틀면 나오잖아?
    “주말에 가끔 집에서 보기는 합니다.”
    “그걸 보는 놈이 그래! 드라마나 영화에서 너처럼 단순무식한 놈이 주인공하는 거 봤냐?”
    “!”
    “주인공이 처음부터 국가나 국민을 위험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모두 쏟아내는 거 봤냐고?”
    “그건 극의 구성상 흥분을 고조시키기 위한 고도의 테크닉이 아닌가요?”
    “뭐?”
    “발단이나 전개단계에서 주인공이 너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면 클라이맥스에서 높아진 시청자들의 기대치를 맞추기가 어려우니까.”
    “지랄 염병하고 있네! 너 임마. 드라마작가 해도 되겠다.”

    “예?”
    “그건 바로 자살행위이기 때문이야. 임마! 최소한 진실의 범위는 정확히 파악하고 덤벼야 상황에 맞게 적절히 적과 대응할 것 아니야. 그래서 가장 먼저 사실을 왜곡시키는 거짓정보의 출처를 찾아내고, 그다음 이중첩자를 속이잖아! 그리고 마지막엔 비로소 주인공이 가진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주적(主敵)을 제압하고.”
    “죄송합니다, 처장님. 미처 거기까지는…….”
    “여기가 무슨 고등학교 학예회 발표장인 줄 알아! 돈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북한 정보장사꾼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그럼 처장님은 박철진의 정보가 가치를 부풀린 엉터리 정보라는 말씀이십니까?”
    “넌 느낌도 없냐? 최소한 내 느낌은 그래.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너의 행동은 국익에 반하는 행동이야. 만일 정보에 대한 엄격한 검증을 하지 않아 국익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다면 값싼 너 하나의 목숨으로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아?”
    “…….”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건 너의 큰 착각이고 교만이다. 최소한 우리 국정원은 그렇게 허접한 곳이 아니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철저하게 재조사하겠습니다.”
    “이해했으면 더 이상의 재조사는 필요 없고. 이제 박철진 건에서 너의 팀은 이만 손을 떼!”
    “예! 그게 무슨……?”
    “이 순간부터 너희 팀이 그동안 수행해온 특수임무를 철회한다고. 너 우리나라말 몰라?”
    “…….”
    “이미 다른 파트로 이관하기로 결정됐어. 그렇게 알아. 그리고 앞으로는 S(Super)급엔 얼씬도 하지 마. 이제부터 너희 팀은 ‘특수’라는 이름표를 떼고 H(High potential)급 주요 인물들의 보호·관리와 과거 미제사건의 재수사를 맡아. 그리고 다른 팀이나 청와대에서 인물경호 등 지원요청이 들어오면 즉각 달려가 도와주고.”
    “헉! 그건 한마디로 국정원 도우미가 되라는 말씀처럼 들리는데요.”
    “유진 씨, 왜 싫어? 능력이 없으면 최소한 자존심은 버릴 줄 알아야지. 안 그래?”
    “음…….”
    “그것마저 싫으면 이번 기회에 아예 세 사람 모두 책상정리를 하던지. 언제나 정의와 진리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좋은데, 단순무식이 국정원 평생직원으로서의 긍지가 되어선 곤란하겠지. 그건 민폐(民弊)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내부의 적(敵)이야. 적!”
    “…….”

    말이 끝남과 동시에 브리핑자료가 엄 처장의 머리 뒤로 날아올랐다.
    뒤에 남겨진 정원은 낮술을 먹은 것처럼 휘청거렸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 천당에서 순식간에 지옥으로 급전직하(急轉直下)를 한 하루였다. 정원은 재국과 유진의 도움으로 간신히 버려진 브리핑자료를 수거했다. 그리곤 도망치듯 브리핑룸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오늘따라 사방으로 뻗어나간 복도가 춥고 음습하게 느껴졌다. 정원은 이전에 미처 느껴보지 못한 북극의 한기가 자신을 에워싸고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

    “어쩜! 저리도 잔인하실까. 처장님은 직원윤리헌장의 첫 번째가 동료애라는 것도 모르시나 봐. 팀장님, 엄 처장님 지시대로 그냥 이대로 덮으실 거예요?”
    “그럼 어쩌겠어. 처장님의 추상(秋霜)같은 명령인데.”
    “유진아, 너도 봤잖아. 아마 모르긴 몰라도 명령을 어기면 그 즉시 정직시킬 거다.”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그냥 덮기엔 박철진이라는 인물의 비중이…….”
    “흠! 아쉬워도 일단은 조직의 명령이니까 덮어야 되겠지.”
    “저희는 팀장님의 결정에 따라 덮을 수 있다지만 팀장님은…….”
    “조직의 명령이 있고 나서 내가 있는 것이지, 내가 있고 나서 명령이 있는 건 아니잖아.”
    “하긴, 제아무리 날고 기는 팀장님이라도 준엄한 조직의 명령 앞에선…….”
    “가만! 지금 팀장님의 그 능청스런 표정은. 혹시……. 아무도 몰래 들쥐처럼 야금야금 파먹겠다는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죠?”
    “후후후. 재국 씨 말이 맞아.”

    “우~아! 그런 기발한 아이디어가.”
    “만약 박철진의 정보가 거짓이거나 조작된 것이었다면 당연히 그 정보는 북한 정보에 목마른 미국이나 일본 정보기관으로 흘러들어 갔겠지. 미국이나 일본 정보기관은 탈북자들이 내놓은 거짓정보에 속을 가능성이 아주 크잖아. 더불어 박철진은 정보를 넘긴 대가로 많은 돈도 챙겼을 테고.”
    “맞습니다, 팀장님. 우리는 정보의 진실성을 확인해줄 2만 5천 명의 탈북자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박철진이 우리에게 건넨 정보는 거짓정보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아.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박철진이 불순한 의도를 갖고 왜곡하거나 조작한 정보가 아니라는 반증이겠지.”
    “솔직히 어째 포기가 너무 빠르다 했어요. 팀장님은 한 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잖아요. !”
    “그 대신 평상시 하던 업무와 병행하면서 조사를 진행해.”
    “물론이죠. 그래야 엄 처장님이 눈치채지 못하실 테니까요.”
    “그럼 팀장님과 재국 선배도 필요하시겠네요?”
    “뭐가?”
    “정직서류 말이에요. 전 미리 갖다놓으려고요.”
    “멍! 멍! 멍!”

    순간 재국이 꼬리도 없는 엉덩이를 흔들며 장난스럽게 개 짖는 소리를 냈다.
    사실 재국의 별명은 진돗개, 삽살개, 그리고 풍산개와 더불어 우리나라 명견 중 하나인 ‘동경이’였다.
    물론 조선 현종 10년에 출간된 『동경지(東京誌)』에 의하면 동경이는 꼬리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놀라운 점은 극히 정상이라는 사실이었다. 재국도 그의 별명처럼 뛰어난 후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온순했다. 하지만 오지랖이 너무 넓어 아무 일에나 참견을 잘했다.

    아무튼 정원의 눈가에는 이제야 된서리가 녹고 파릇파릇한 봄날의 생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커다란 눈은 주변의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했으며, 튼튼한 심장은 온몸에 엄청난 양의 혈액을 빠르게 공급했다. 그런데 갑자기 재국이 정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주위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동경이였다.

    “팀장님. 요새 감청팀은 난리도 아니랍니다. 완전 초비상이에요.”
    “초비상, 무슨 일로?”
    “최근에, 그것도 지방이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압축송수신이 급증했답니다.”
    “그래?”
    “예, 어쩌면 그것 때문에 엄 처장님의 심기가 더 불편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