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는 언어를 능욕-하이재킹하고 있다"...대한민국 국민 모독 중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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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철수! 국민 그만 팔고 인민을 팔아라


    요즘 ‘국민’이 대세다.

    문재인과 안철수는 ‘국민 참정권’ 신장을 위해 ‘투표시간 연장 캠페인’을 벌이고 새누리는 ‘국민’이란 말에 질려 이 캠페인에 제대로 대응조차 못 한다. 



  • ‘국민’이란 이름으로 무슨 황당한 짓이 저질러 지고 있는지 한 번 살펴 보자.


    당신들의 로망은, 온 국민을 상스런 조급증 환자로 타락시키는 것인가?


    불과 9개월 전인 올해 2월 27일 여야 합의로 투표법을 고쳤다.
    박지원, 정동영 등 막강한 민주당 의원 36명이 찬성했다.

    골자는 이것.

    “2013년부터 투표일 이전에, 아무데서나 사전 투표를 할 수 있다”

    직장인이나 학생들이 투표일 이전 ‘부재자 투표기간’ 중에 잠깐 아무 투표소에나 들러 투표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뱀발:
    지금도 이미 OECD 회원국 중에 투표일이 공휴일인 나라는 우리와 이스라엘 뿐이다.


    ‘신성한 참정권’을 내세워서 투표시간을 연장하자는 주장은, 이렇게 좋게 법을 고쳐 놓고도 또 고쳐서 당장 시행하자는 것.

    1년에 투표법을 2번 고쳐서 당장 시행하자고?

    이왕이면 매달 한 번 1년에 12번 고치자고 하시지?

    ’국민’을 앞세운 ‘신성한 참정권’ 운동은, ‘상스런 국민, 상스런 나라 만들기’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문재인, 안철수!

    당신들의 신성함은, 우리 성실하게 살아가는 시민에겐 개상스런 짓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들의 로망은, 온 국민을 상스런 조급증 환자로 타락시키는 것인가?

    새누리는 새가슴이다.
    아마 조만간에 당명을 새누리당에서 새가슴당으로 바꾸어야 할지도 모른다.

    ‘국민’이라는 두 글자에 바짝 졸아서 이 개상스런 캠페인에 대해 당당하게 맞불 지르지 못 하고 있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100억 듭니다”라는 울먹임 뿐.

    이는 돈의 문제가 아니다.

    일년에 투표법을 두 번 고친다는 것과, 당장 시행한다는 것—이 두 가지가 문제의 핵심이다.

    법률—특히 주권의 행사 방식에 관한 법률은 시간을 두고 차분히 고쳐야 할 뿐 아니라, 그 시행시기도 멀찌감치 두어야 한다. 당장의 유리-불리를 벗어날 때에만 냉철한 관점에서 ‘주권의 행사방식에 관한 규칙’을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2월에 법을 고치고도 그 시행을 10개월 뒤인 2013년부터 시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한 해에 두 번씩이나 투표법을 고쳐서 당장 시행하자는 운동은 개상스런 추태에 지나지 않는다.

    새누리가 만약 새가슴이 아니라면 당당하게 이렇게 맞불을 질러야 한다.

    대한민국은 한 해에 투표법을 두 번씩이나 고치는 상스런 나라가 아닙니다.
    올해 2월 말에 “내년부터 투표일 이전에, 아무데서나 사전 투표” 방식으로 훌륭하게 법을 고쳐 놓았습니다.
    또한 OECD 회원국 중에 투표일이 국가 공휴일인 나라는 우리와 이스라엘 밖에 없습니다.
    투표법을 또 고쳐야 한다면 차분하게 논의해서 치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투표일을 한 달 남짓 앞두고 투표법을 고치자는 주장은 온 국민을 조급증 환자로 타락시키겠다는 천박한 선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투표시간 연장 주장에서 보듯이 이제 ‘국민’이라는 단어는 신성불가침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 이 막강한 단어를 가장 즐겨 사용하는 사람은 안철수.
    지난 9월 19일 대선출마 선언 이후 11번의 연설에서 무려 212번 국민을 팔았다.
    연설 한 번에 평균 19.3회.

    아마 조금 더 국민을 찾다간, ‘국민’의 ‘ㄱ’자를 발음하느라 안철수의 연구개(軟口蓋-입천장 뒷부분. ‘ㄱ’자 발음 때에 숨결이 마찰을 일으키는 부분)가 닳지 않을까,
    엄청 걱정된다.

    귀가 닳도록 ‘국민’ 소리를 들을 바에야 ‘국민의 족보’(The Genealogy of Kook-Min)를 본격적으로 따져 보자.

    이 단어는 한국과 일본에서 널리 쓰이는 특이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국민’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가짜진보'는 아주 오랫동안 ‘국민’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았다.
    애국주의, 국가주의의 상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몇 개 들어 보자.

    첫째, YS 정부 때인 1996년, 일제 총독부 건물(경복궁 근정전 앞의 ‘중앙청’)을 철거하는 것과 때를 맞추어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꿨다.

    목적은 “일제 군국주의(침략적 국가주의) 색채를 깨끗이 씻어낸다”는 것.

    뱀발:
    일제는 1941년 ‘소학교’라는 명칭을 ‘국민학교’로 바꾸었다.


    ‘학교’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으니까, 그 사람들은 ‘국민’이라는 단어 자체를 죄스러운 것으로 보았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

    둘째, 박정희 유신 체제 시절의 대표적인 반정부 사건으로 꼽히는 광주 지역 지식인 십여 명의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1978). 

    이들은 ‘국민교육헌장’ ‘국가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 나중에 '가짜진보'는 한걸음 더 나가서 “국민교육헌장은 메이지 일왕의 ‘교육에 관한 칙어’를 베낀 것”이라고 거짓 선동을 했다.

    이 모두 ‘국민교육’의 ‘국민’을 겨냥한 비판이다.

    실제로 메이지 일왕의 칙어와 국민교육헌장을 비교하면 전혀 다르다.
    국가주의적이지도 않고 침략적이지도 않으며 (일왕의 교칙처럼) 시혜적이지도 않다.

  • 국민교육헌장은 당대의 석학 박종홍 교수가 만든 명문이다.

    국민교육헌장에 대해 비판하고 싶다면 다음 두 가지를 꼬집었어야 했다

    왜 초중등학교의 국민의례 때마다 주문 외우듯 모든 사람이 이 헌장을 암송해야 하는가?
    이 기괴한 의식은 없애야 한다.

    왜 마지막 부분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까지 암송해야 하는가?
    헌장은 그 자체로서 소중할 뿐이다.
    그를 공포한 대통령의 이름까지 암송할 필요는 없다.

    위와 같은 비판은 건전한 저항이다.

    그러나 1978년 광주 지식인들 십 여명과, 그 이후 '가짜진보' 진영은 ‘국가주의적’이라는 둥, ‘일왕 교육칙어의 짝퉁’이라는 둥 해괴망측한 비판을 했을 뿐이다.

    그 사람들에게는 ‘국민’이라는 두 글자가 싫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국민’이라는 단어는 일본의 발명품이다


    서양 말에는 ‘국민’이 없다.

    예를 들어 영어의 ‘National’ 혹은 ‘Citizen’이란 단어에는 ‘국적보유자’ 혹은 ‘시민권 보유자’라는 차디찬 법률적 의미가 존재할 뿐, ‘국민’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감성적 여운이 없다.

    프랑스 혁명의 폭도들이 루이 16세의 목을 잘랐을 때, 왕을 ‘시민 까페’(Citoyen Capet)라고 불렀다.
    까페는 부르봉 왕조의 성씨이다.
    ‘시민’은 법률적 자격이었던 것이다.

    뱀발:
    몇 년 후 루이의 아내 마리 앙또네와뜨에게 여덟살 짜리 친아들 샤를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스캔들을 씌워 목을 잘랐을 때에는 ‘까페 집안의 과부’(Veuve Capet)라고 불렀다.
    당시 기준으로는 여자는 시민이 될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폭도들은 꼬마 샤를에게 술만 먹여서 간경화, 영양실조, 폐렴으로 죽게 만들었다.


    또한 우리는 ‘시민 단체’라고 하지만 영어에서는,‘시민’이란 단어에 아무런 애틋한 감정이 실려 있지 않기 때문에 ‘비정부기구’(NGO)라고 부른다.

    서구에서는 독일어에서만 ‘민족’ 혹은 ‘겨레’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요즘 골프, 파사트 같은 모델로 인기를 끌고 있는 자동차 회사 폭스바겐 ‘겨레(Volk) 자동차(Wagen)’란 뜻이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한 단어(folk) ‘겨레’를 나타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겨레를 ‘민족 그룹’(ethnic group)이라는 뭉칫말로 나타낸다.
    이런 표현은 국가겨레가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는 사정을 보여준다.

    ‘국민’이란 말이 우리와 일본 사람에게 감정적 호소력을 가지는 이유는 둘 다 단일민족이 중심이 된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 두 나라에서는 민족이 곧 국가 단위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국민’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국민’이란 말에는 간절한 열정이 깃들어 있다.

    서양 문명이 성난 파도처럼 밀고 들어오는 상황에서 이렇게 선언하는 것이 바로 ‘국민’이라는 단어의 숨은 뜻이다.

    “우리 단일민족, 한 핏줄의 겨레는 이제 근대국가를 만들었다.
    마침내 ‘근대국가를 가진 겨레’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국민’이라 부른다.”


    ‘국민’‘국’은 근대국가를, ‘민’겨레를 뜻한다.

    ‘국민’이라는 단어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룩한 에너지를 담은 단어이다.
    이 단어에는 후키자와 유키치, 사카모토 료오마,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같은,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영웅적 지식인들의 염원—일본인에게 잠재된 에너지에 불을 당기겠다는 염원이 담겨 있다.

  • 박정희는 우리 한국인에게도 이 같은 에너지가 있다고 통찰했고, 이를 용솟음치게 만든 리더이다.

    그래서 그의 시대에 ‘국민’이라는 단어가 유달리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요즘 초중고 과정의 도덕 혹은 윤리 과목은 ‘국민윤리’라고 불렸다.
    최초의 소형자동차 새나라는 ‘국민차’라고 불렸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배가 아프고 눈이 시었던 사람들—요즘 '가짜진보'의 정신적 선배들—은 그래서 ‘국민’이라는 단어에 진저리를 쳤다.

    그들은 우리에게 근대화 에너지가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고, 애국심 ‘식민지 팟쇼 체제의 구역질 나는 아지프로(agipro, 선전-선동)’라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비전, 희망, 도전 자체가 위대한 것이다”라는 진실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곧 삶을 믿지 않았다는 뜻이다.
    비전, 희망, 도전이 없는 삶은 사실상의 죽음일 뿐이다.

    그들은, ‘죽음을 설교하는 사람들’이었거나 혹은 그런 설교에 병든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안철수는 언어를 하이재킹하고 있다


    ‘국민’의 ‘국’은 곧 근대국가이다.

    안철수가 입천장이 닳도록 ‘국민’을 찾으려면 국가관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공화가치(Republican values, 다수결로 흔들거나 훼손해서는 안 되는 근본가치)에 대한 확고한 관점과, 정부가 해야 할 일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과 개념 없이 ‘국민’이라는 단어를 마르고 닳도록 반복한다면 이는 언어를 능욕하는 짓에 다름 아니다.

    언어의 능욕언어의 하이재킹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행위 중에 가장 질이 나쁜 죄악이다. (이때 ‘죄악’법률적 범죄(crime)가 아니라 도덕적 죄악(sin)을 가리킨다.)

    언어야말로 사람과 사람을 묶어 사회를 구성시켜 주는 연결고리(bond)이기 때문에, 언어의 하이재킹은 사회를 근본부터 해체시키는 매우 심각한 죄악이다.
    이는 언어철학자들의 말이기도 하며, 위대한 사회사상가이자 경영학을 만든 학자인 드러커(P. Drucker)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역사에는 언어의 능욕, 언어의 하이재킹이 여러 번 있었다.

    가장 비근한 예 몇 가지만 들어보자.

    첫째, 인민.

    이 단어는 원래 ‘사람들’ 혹은 ‘무리’란 뜻이다.

    링컨은 민주주의에 관해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치'(for the people, by the people, of the people)라고 말했다.

    서구 언어(예, 영어의 people)에서는 인민, 사람들, 무리 등이 모두 하나의 단어로 나타난다.

    이 단어를 하이재킹한 범인은 스탈린의 충직한 개 노릇을 하다가 1948년에 의심쩍게 죽은 즈다노프(A. Zhdanov).

    그는 ‘인민민주주의’(PD, people’s democracy) 노선을 만들고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이란 정치체제를 만들었다.

    막무가내로 사회주의 혁명을 하면 저항이 심하니까 우선 최상위 계층을 제거하고 다음에 차상위, 그 다음에 차차상위…이런 식으로 진행하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좌파 전체주의체제가 된다는 것이 곧 인민민주주의 노선이다.

    이 노선을 따라 만들어진 나라가 곧 인민공화국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에스토니아 하나만 곧바로 과격한 소비에트(노동자-농민 조직단위) 체제로 이행했을 뿐, 나머지는 죄다 인민민주주의 노선을 따랐다.

    뱀발:
    에스토니아는 소련과 바로 붙어있기 때문에 스탈린은, 하루라도 빨리 소련과 동질적인 체제를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래서 에스토니아는 하루아침에 소비에트 체제로 바뀌었다.
    이 과격한 이행과정에서 인구의 1/10 쯤을 잡아 죽였다.

    즈다노프 덕분에 우리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참으로 좋은 뜻의 단어였는데 그만 흉악한 능욕과 하이재킹으로 걸레가 되어 버렸다.

    둘째, 동무.

    이 단어는 우리 고유어로서 ‘아주 친한 벗’을 뜻한다.

    일제 시대에는 이 단어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에, 좌파 전체주의자들이 워낙 심하게 ‘동무’ 타령을 하니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 단어를 쓰지 않게 되었다.

    이 같은 사정은 서구 언어의 ‘동무’(캄리드, comrade, kamerade)에서도 동일하다.

    원래 ‘캄리드’ ‘룸 메이트’—서로 프라이버시를 공유할 정도로 친숙한 사람을 뜻했다.

    그러나 좌파 혁명 세력이 워낙 요란하게 이 단어를 사용하니까—심지어 고문, 처형할 때에도 이 호칭으로 부른다—능욕과 하이재킹에 의해 더렵혀진 단어가 되었다.

    셋째, 착취.

    이 단어는 서구 언어의 익스플로이트(exploit)에서 왔다.

    원래는 “자연자원(광산, 삼림 등)을 개발해서 그 부를 획득한다”라는 뜻이다.

    ‘착’(搾)이라는 한자 역시, ‘익스플로이트’의 뜻과 조응되도록, “동물의 젖이나 식물의 즙을 짜내는 행위”를 뜻하는 글자가 선택된 것이다.

    이 단어를 하이재킹한 사람은 마르크스이다.
    그는 ‘경영자의 이윤 창출 및 획득 활동’ 자체를 착취라고 규정하고, 이를 자못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경제학 체계를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 ‘자본’ 제1권의 절반쯤이 이런 사악한 거짓말로 채워져 있다.

    넷째, 소외.

    원래 이 단어는 헤겔 철학의 ‘엔트프렘둥’(Entfremdung—영어의 alienation)에서 왔다.
    ‘근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세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존재로 느끼는 상태’(요즘 용어로는 ‘실존의 심리’)를 뜻한다.

    이 단어를 하이재킹한 사람 역시 마르크스이다. 그는 ‘소외’ ‘노동자가 만들어낸 이윤이 자본으로 바뀌어 노동자를 지배하는 상태’로 규정했다.
    그의 매혹적 표현을 빌리면 ‘어제의 노동이 오늘의 노동을 지배하는 상태’.

    다섯째, 참교육.

    전교조에서 잘 사용하는 이 단어는 일본 공산당 산하의 교사조직이 70년대에 만들었다.
    당시는 일본 공산당이 세계에서 가장 과격한 집단이었을 때였다.
    사람을 납치해서 닛뽄도로 처형하는 적군파 조직이 만들어지던 시대.

    그들은 ‘참’(truthful)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틀었다.
    “삶과 세상을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기르는 교육”
    참교육이라고 불렀다.

    비판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하는 마음에서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랑하지 않으면 비판해서는 안 된다.
    비판하는 대신에 그냥 버려야 한다.
    삶과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한 최상의 구원은, 삶에 대한 저주 혹은 세상에 대한 앙심(ressentiment)이 아니라, 자살이 되어야 한다.

    여섯째, 혁신학교.

    전교조 성향 교육감들이 잘 사용하는 이 단어 역시 일본 공산당 산하의 교사조직이 만들었다.
    그들은 ‘혁신’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틀었다.

    기존의 학교들이 “학생들을 세상에 순응하는 사람으로 타락시키고 있다”라고 자기 멋대로 규정한 다음에, 이에 반대되는, “삶과 세상을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기르는 학교”혁신학교라고 불렀다.

    공화가치에 대한 이해정부 역할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지 않은 채 말끝마다 ‘국민’을 찾는 안철수의 행태는, 조금만 더 진행하면, 위에서 예로 든 여섯 개의 끔직한 하이재킹버금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국민’이라는 단어가 너무 더럽고 부끄러워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올 수 있다.


    안철수에게 간청한다.

    당신이 무슨 행보를 하든, 제발, 제발 ‘국민’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능욕하지 말라!

    그 말에는 ‘번영을 향해 전진하는 근대국가를 이룩해 낸(이룩해 낼 수 있는) 단일 핏줄 겨레’라는 간절한 염원이 배어 있다.
    우리의 소중한 희망과 에너지가 담겨있다.

    당신은, 이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는 단어를 더럽혀서 하이재킹하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당장 중지해야 한다.


    권력투쟁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럴듯한 단어를 쓸 수 밖에 없다고?


    그렇다면 차라리 ‘인민’이란 단어를 써라.

    무시무시하고 파워풀하다.
    이미 능욕하이재킹 덕분에 백만년을 써도 헤지지 않는 튼튼한 걸레로 완성된 단어다.

    발음도 부드럽다.
    당신의 입천장 연구개가 닳아 빠지는 참혹한 일도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제발 ‘국민’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고 ‘인민’을 쓰도록! 



  • 박성현 저 술가/뉴데일리 논설위원.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웹사이트 : www.bangm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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