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딸 / 내 기록 속의 朴槿惠(1)

    최초 인터뷰-"오죽하면 딸이 나서겠어요"

    趙甲濟     

      

  • '오죽하면 딸이 나서겠어요'
    내가 박근혜 씨를 공식적으로 인터뷰한 것은 1988년 말이었다.

    한 전직 대통령(전두환)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사이에 또 다른 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운동이 딸에 의하여 시작되었던 것이다.

    고(故)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朴槿惠)씨(당시 38) 가 朴正熙 대통령과 육영수(陸英修) 여사 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켜, 전기 간행·기념관 건립 등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1980년대에 주로 잡지에 의해서 진행된 朴대통령 시절의 정치비화(秘話)보도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 「폭로저널리즘」이란 말을 들었다.
    朴대통령 시절에 제대로 알리지 못했던 어두운 면을 주로 부각시키게 되었기 때문이다.

    추가 오른쪽 왼쪽 사이를 몇 번씩 왕복한 끝에 중앙에 멈추듯 朴대통령에 대한 인식도 호(好)와 불호(不好) 사이를 몇 차례 왔다갔다 했으니 제자리를 잡아갈 수 있는 시류(時流)를 타고 있었다.

    내가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근혜(槿惠)씨는 자신이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하고 있는 것은 『아버님을 바로 알리기 위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고 했다.

    『딸이 나서서 아버지를 변호하는 것이 어색하다는 말도 듣고 있지만, 제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아버님의 은혜를 입었던 분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비극을 두 차례나 겪은 사람답지 않게 밝은 표정에 깔끔한 옷맵시를 보인 朴씨는 『지난해 8월 아버님에게 누명을 씌운, 정인숙(鄭仁淑) 피살 사건 이야기가 영화화 된다는 소식을 듣고 입을 연 것이 이렇게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사건에 대해서는 아버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적은 없고 어머님과 그 사건을 다루었던 분으로부터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고 했다.

    陸英修 여사는 朴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딸에게 이렇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사표를 써 가지고 와서 대통령께 울면서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그 여자와 관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건, 즉 살인과는 관계가 없다고 호소했다는군. 나는 그 사람을 내 보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근혜(槿惠)씨는 이렇게 말했다.

    『5공화국 시절에 그 사람이 아버님 묘소에 참배하러 왔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백번 참배하면 뭣하나. 아버님의 누명을 벗겨드려야지」라고요.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는 그 사람이 혐의를 받았지 아버님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는데 돌아가시니까 아버님이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을 시켜 정인숙(鄭仁淑)을 죽인 것처럼 소설을 쓰더군요.
    동생 지만(志晩)이도, 「아버님을 살인자로 몰고 있잖아」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아버님의 누명을 벗겨드리자면 자신이 매장돼야 하니까 어렵겠지요.
    그러나 진실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지…』



    정인숙(鄭仁淑)사건 누명 벗겨드려야


    「그 사람」의 이름을 朴씨는 직접 대지는 않았으나 이미 사회적 상식이 돼 있는 전직 고위공직자가 「그 사람」이었다.

    이날 朴槿惠씨를 만나러 오기 직전에 나는 전 공화당 의원을 만났다.
    내가 朴씨를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그 전 의원은 『이 말씀을 꼭 전해주십시오. 제가 鄭仁淑 양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아는데 朴 대통령께서 지독한 누명을 쓰고 있습니다. 鄭仁淑 아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제가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朴 대통령은 그 사람을 곤경에서 건져주었다가 누명을 쓴 겁니다. 제가 언젠가는 진실을 증언하겠다고 따님에게 꼭 전해주세요』 라고 간곡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박근혜(朴槿惠)씨는 김대중(金大中)씨 납치사건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혀둘 게 있다고 말했다.

    『그 날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였어요.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서 앉아 있었죠.

    아버님이 신문을 펼치시더니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놀라시면서 신문을 어머님에게 넘겨주시더군요. 어머님도 놀라시더니 두 분께서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하고 이야기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버님은 북괴가 金씨를 납치해 놓고 우리 소행으로 덮어씌우려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니, 집무실로 서둘러 내려가셨습니다.
    아버님은 이 사건으로 뒤에 누명을 쓸 것을 걱정하셔서인지 검찰 고위간부를 불러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해두었다고 합니다』


    5공화국 시절에 朴대통령과 관련 한 기사를 가장 많이 쓴 기자들 중의 한 사람인 나에게 근혜(槿惠)씨는 이렇게 부탁했다.

    『박정희(朴正熙)라고 존칭없이 꼭 써야 합니까. 장군, 대통령, 씨라고 붙이면 안 됩니까.
    외국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동양적인 예절도 있지 않습니까.
    교육상으로도 그렇지요』


    朴씨는 아버지에 대한 그 수많은 기사들을 죄다 읽었다고 한다.
    때로는 『고문 받는 느낌』이었고 『피가 역류하는 듯한 울분』을 가누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읽어내려가다가 어처구니없어 중단해버린 적도 많습니다.
    요사이는 이렇게 기자님들에게 이야기도 하고 하니까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기자라면 남의 가슴에 못박는 기사를 쓰지 않겠어요.』



    김형욱(金炯旭)은 왜 달아났나


    朴槿惠씨는 1988년 하반기부터 주로 여성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아버지를 변호하고 알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朴씨는 아버지에 대해서 쓴 기사가 있으면 꼼꼼히 읽어두었다가 필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감상을 말하곤 한다.

    내가 최근에 '신민주공화당보'에 「朴대통령의 제자 노릇 똑똑히 하라!」는 제목의 글을 쓴 것을 잘 읽었다면서 전화를 걸어온 朴씨는 『그런데 공화당을 「朴대통령의 嫡子(적자)」라고 표현한 데 대해서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고 했다.

    그 말에는 공화당과 김종필(金鍾泌) 총재가 朴대통령을 제대로 옹호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 데 따른 불만이 깔려 있었다.

    박근혜(朴槿惠)씨는 기자들을 활용하는 방법에서 아주 능통하였다.
    기사거리를 잘 만들어 제공해주고 朴대통령이 남긴 다섯 권의 일기(1972∼79년)를 조금씩 조금씩 공개하여 달마다 기사거리의 메뉴를 바꿔주었다.
    경쟁관계에 있는 언론매체들을 공평하게 대우해주려고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내가 『그러지 말고 朴대통령의 일기를 묶어서 출판합시다』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면 작살을 내겠다고 위협하는 곳이 많다』면서 웃었다.

    나는 1988년 12월, 이듬 해 2월, 3월에 걸쳐 네 차례 약 10시간쯤 朴씨를 인터뷰하고 월간조선에 기사를 썼다. 

    1974년 8월15일에 陸 여사가 문세광(文世光)의 총탄으로 타계한 뒤에는 朴 대통령이 딸을 말동무로 삼았기에 朴씨는 대사건의 비화를 많이 알고 있었다.

    예컨대 김형욱(金炯旭) 실종사건.

    『아버님이 여러 차례 김형욱(金炯旭) 문제에 대해 언급하셨어요.

    아버님은 金씨가 미국으로 달아난 것은 정보부장 시절에 권력을 남용하여 못된 짓을 많이 했는데, 물러난 뒤 보복을 받을까 불안해하였고, 유신 선포 이후 국회의원도 못하게 되니까 보호받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십디다.

    金씨가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나자 미국 의회에 나가서 증언을 했는데 그때 아버님은 金씨를 귀국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셨어요.
    성사가 될 뻔했는데 金씨가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다고 안타깝게 생각하십디다.

    「나를 욕하는 것은 그렇다치고라도 우리 나라 전체를 욕되게 할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 고 하시더군요』



    朴대통령의 김형욱(金炯旭)실종사건 분석


    1979년 10월초 김형욱(金炯旭)이 파리에서 실종된 데 대하여 흥미를 갖고 있었던 기자는 몇년 전 그 金炯旭 자서전 출판 봉쇄 공작에 관계하였던 한 재미 동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김재규(金載圭) 정보부장의 직접 부탁을 받고 金炯旭이 자서전 출판을 단념하는 조건으로

    ① 150만 달러 제공
    ② 한국여권 발급
    ③ 서울에 있는 김형욱(金炯旭)의 토지(당시는 압류상태)의 반환을 제시, 金炯旭의 승락을 받았다고 했었다.

    그러나 金炯旭이 여권을 뉴욕총영사가 직접 자기 집에 가져다 줄 것을 고집함으로써 (金載圭는 총영사관에 와서 가져가라고 했는데 金炯旭은 납치를 걱정하였던 것 같다)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것이다.

    김재규(金載圭)는 그 뒤 파리에 오면 150만 달러를 주겠다고 김형욱(金炯旭)을 꾀어 파리에 온 金炯旭에게 50만 달러를 먼저 주어 안심시키고 나서 잔금 100만 달러를 미끼로 金씨를 불러내 납치, 살해했다는 것이 이 중계자의 얘기였다.

    朴槿惠씨는 1979년 10월 중순, 그러니까 金炯旭 실종이 보도된 뒤 식사시간에 아버지로부터 이런 설명을 들었다고 한다.

    『金炯旭이는 미국에서 북한 돈을 받아서 反정부 활동을 한 것 같다.
    이번 실종사건은 金에게 돈을 대주던 북한 조직이 그 사실의 탄로를 막기 위해서 그를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朴씨는 『아버님이 정보기관의 보고』를 받으시고 그것을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다』고 했다.

    김형욱(金炯旭) 납치·살해를 김재규(金載圭) 당시 정보부장의 지령으로 보는 측에서는 이후락(李厚洛)씨에 의한 김대중(金大中)씨 납치사건과 비교하기도 한다.
    즉, 李후락 당시 정보부장이 朴대통령의 심기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스스로 알아서 한 일이 김대중(金大中)씨 납치였듯, 김재규(金載圭)는 김형욱(金炯旭) 자서전으로 朴대통령이 골치를 앓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 스스로 그런 일을 지시했다는 해석이다.
    그랬을 경우 김재규(金載圭)는 朴 대통령에게도 이 공작을 보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10·26 사건 때 김재규(金載圭)피고인의 변호인이었던 모씨는 『김재규(金載圭)가 방아쇠를 당긴 데는 김형욱(金炯旭)납치 사건의 지휘체제가 들통 나 朴대통령으로부터 문책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작용하고 있었을지 않을까』라고 추리하기도 했었다.

    박근혜 씨는 『아버님은 人命을 가볍게 보는 분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이탈리아에서 모로 전 수상이 납치되었을 때 납치범들이 구속된 동료의 석방 등을 요구했지요.
    제가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으니까 아버님은 두말 없이, '우선 살려놓고 봐야지' 라고 하십디다. 鄭仁淑 피살사건, 金大中씨 납치사건, 金炯旭 실종 사건 같은 것은 아버님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朴槿惠씨는 공산권과의 문제에 있어서도 朴대통령이 인명(人命)을 중히 여기는 정책을 써 왔다고 강조했다.

    1978년 봄에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령 무르만스크에 불시착했을 때는 우리 정부가 불시착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선수를 쳐서 미리 「소련당국의 우호적 처리에 감사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하여 소련의 환심을 사도록 했다는 것이다.

    1975년에 월남이 적화(赤化)되었을 때 탈출하지 못하고 사이공에 남아 있던 이대용(李大鎔) 공사의 귀환을 위해서도 朴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무척 신경을 썼다고 한다.
    외국을 통해서 송환 교섭을 벌이면서 공산 월남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비난성 성명 등을 자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 10·26 밤의 청와대 


    1979년 10월26일 아침에 박근혜(朴槿惠)씨는 여느 때처럼 청와대 2층에서 朴 대통령과 식사를 함께 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경북 문경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있을 때 제자였던 사람이 보낸 족자 선물을 받아 벽에 걸어 보고는 대견해 하면서 1층 집무실로 내려갔다.

    朴대통령은 『오늘 삽교천에…』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朴槿惠씨는 『말씀을 분명히 끝맺으시는 아버님이 그날따라 흐리시는 것이 지나고 보니까 이상하게 여겨지더군요』라고 했다. 이것이 생전의 마지막 대화였던 것이다.

    『그날 오후에 청와대 헬기 착륙장 쪽에서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 아버님이 돌아오셨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후에 저는 손님을 맞고 있었습니다.
    손님을 보내고 나와 보니, 아버님이 저를 여러 번 찾으셨다고 비서가 말하더군요.
    끝내 통화를 못하신 아버님은 나가시면서, 「오늘은 저녁 먹고 올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식사하라」고 일러두셨더군요』

    10월27일 이른 새벽에 박근혜(朴槿惠)씨는 아버지의 비보(悲報)를 김계원(金桂元) 당시 비서실장으로부터 듣는다.

    『너무 기가 차서, 「아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라고 했지요.
    金실장은 차(車)실장과 김(金)부장이 싸우다가 金부장이 쏜 총탄을 맞고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제가 '휴전선은 안전합니까'라고 물으니까. 金실장이 비상계엄이 선포돼 문제가 없다고 하더군요.

    조금 있으니까 아버님의 屍身(시신)이 하얀 천에 덮여서 들어오시고….

    아버님은 舊約(구약)의 모세처럼 이 민족을 가나안 땅이 보이는 곳까지 인도하시기는 했지만 그분 자신은 그 땅을 밟지 못하실 운명이었던가 봐요』


    섬뜩했던 김재규(金載圭)의 눈매


    김재규(金載圭)가 범인으로 밝혀지자 근혜(槿惠)씨는 문득 10·26 사건 1주일 전쯤의 어느 광경이 떠올랐다고 한다.

    『청와대 복도에서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 및 노재현(盧載鉉) 당시 국방장관과 마주쳤어요.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는데 뒤따라오는 차지철(車智澈) 실장과 김재규(金載圭) 부장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어요.

    두 사람은 굳은 표정인데, 눈매가 모두 살기등등한 거예요.
    가슴이 섬뜩합디다』


    1979년 10월 24일, 朴 대통령이 부마사태의 수습에 바쁘던 때, 근혜(槿惠)씨는 저녁식사를 끝내고 아버지에게 몇 가지 건의를 했다고 한다.

    『제가 청와대 출입기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따로 수집한 여론을 종합해서 아버님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측근들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어 있었고, 우선 정보부장을 갈아야 한다는 여론을 전해드렸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아무 말씀 안하시고 들어주시더군요.
    중간에서 전화가 왔는데, 아버님께선 '무슨 일을 그렇게 해!' 하고 역정을 내십디다.
    그러고는 또 '이야기해 봐', 하시면서 재촉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의 분위기로 봐서 아버님께서 정보부장을 경질하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곧 발표가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10·26 뒤 청와대를 비우고, 서울 신당동 사저로 물러난 박근혜(朴槿惠)씨는 고 朴대통령의 생일인 1979년 11월14 일에 계엄사합동수사본부에서 가져 온 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포장을 풀어보니 스위스에서 만든 최고급 파텍 회중시계였다.
    금으로 만든 것인데, 생일을 축하한다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 시계는 김재규(金載圭)부장이 주문한 것이었다고 한다.

    『10·26 사건 전에 아버님으로부터 정보부장이 너무 강경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시계를 주문한 사람이 법정에서는 자신을 미화하더군요.
    세상이 바뀌니까. 아버님에게 유신을 찬양하는 글을 새긴 붓통을 선물했던 사람이 나는 유신에 반대했다고 나섭디다』


    朴槿惠 씨는 아버지에게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에 대한 나쁜 여론도 귀띔한 적이 있었으나 朴대통령은 車실장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더라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미워하며 그 야심을 경계하고 있었던 車실장을 朴대통령이 왜 그토록 편애를 했는지 수수께끼다.
    인간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출중한 朴대통령에게도 사각지대가 있었다는 얘기다.

    『아버님은 말년에 가셔서 최규하(崔圭夏) 총리를 후계자로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님과 단 둘이서 식사를 하는 자리가 많았는데, 崔총리를 밀겠다는 취지의 말씀들 더러 하셨어요.

    아버님이 부처순시 때 서정쇄신을 강조하셨는데, 崔총리께서 우선 내 주변부터 정화하겠다는 말을 했대요. 아버님은 흐뭇해하시면서, 崔총리를 옹립하는 방안에 대해 구체적인 말씀도 하셨어요.

    우선 80년대에 들어가서는 유신헌법을 고치겠다고 하셨어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도 대통령 경선이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일찍 후계자를 발표하면 그쪽으로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아버님은 임기가 끝나기 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실 생각이셨던 것 같아요』


    내가 『崔대통령이 12·12사태 때와 80년 봄에 한 행동을 보면 그 분이 난세에는 국가지도자감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朴槿惠씨는 동의하지 않았다.
    『朴대통령이 崔씨에게 대통령자리를 넘겨주더라도 뒤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지 않았을까?』라고 계속 의문을 제기했더니 근혜(槿惠)씨는 『아버님은 퇴직 후의 낙향(落鄕)생활을 꿈꾸고 있었다』고 했다.

    『아버님은 퇴직 뒤의 생활을 꿈꾸듯 이야기하시곤 했습니다.
    못쓰는 땅을 개간하여 나무도 심고, 젖소도 키우고, 그림도 그리고 하시겠다고 벼르셨습니다.
    후계자에게 정권을 넘기시고 후견인 역할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으셨고, 순수한 마음으로 낙향생활을 하실 생각이었습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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