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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0代, 그 30년 前의 모습
《월간조선》 1984년 7월호: ‘20대 국민이 안은 문제점’ 全文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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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2월12일, 제12대 총선 전에 한국사회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2·12총선에서 민주화를 갈구하는 민의가 대폭발하게 된 것은 20대의 젊은 열정이 유세장을 누비며 국민들의 가슴속에 쌓인 분노를 터뜨리는 뇌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민주화의 시한폭탄’ 역할을 해낸 우리 젊은 세대의 울분과 고민을, 인구학적 접근 방법으로 2·12총선 이전의 시점에서 조명해 본 것이 이 기사다. 1984년 7월호 《월간조선》에 ‘20대 국민이 안은 문제점’이란 제목으로 실렸었다. (편집자 註)--------------------------------------------------------------------------------
20代의 불만: 베이비 붐 세대의 대폭발
폐허 딛고 성장한 최강 집단6·25 전란이 휩쓸고 간 폐허 속에서도 생명들은 솟아났다. 총칼이 솎아낸 수백만 명의 목숨들을 서둘러 보충하려는 듯 주렁주렁 태어난 그들에게 인구학자들은 ‘다출산(多出産) 세대’, 또는 ‘베이비 붐 세대’라는 학명을 붙여 주었다. 그들은 한국 역사상 출산율이 가장 높았던 1955∼1961년 사이에 난 사람들이다. 지금 나이 만 23∼29세의 청년들이다. 84년 1월 1일 현재 약 567만의 머리수를 가진 인구 집단이다. 全 국민의 약 14%, 전체 유권자의 약 24%를 차지하는 막강한 그룹 파워다.
‘23∼29’라는 이정표에 이를 때까지의 歷程(역정) 속에서 그들은 숱한 팽창, 홍수, 적체 현상을 일으켰다. 무리하게 삼킨 음식 덩어리가 밥줄을 지나면서 불뚝불뚝 팽창하듯, 소나기가 홍수되어 강을 범람시키듯 그들은 우리 사회의 통로를 넓히고 새로 뚫고 때로는 틀어막거나 부수면서 청년으로 자랐다. 폐허 속에서 태어나 어느 선배 세대도 맛보지 못했던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라나면서 주체 못할 잠재력을 키워온 그들은 오늘날, 드디어 대폭발의 임계점을 넘어갔다.
체력, 욕구, 정열, 도전심, 문제의식 등 모든 부문에서 절정에 도달한 이 집단은 이동과 활동이 가장 격렬한 생활단계에 접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취직·결혼·출산·면학의 적령기에 도달한 이 거대 인구 집단의 용트림은 우리 사회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멀지 않아 그들은 대한민국이란 수레를 끌고 달릴 준마가 될 것이다.
문제는 이 수레가 너무 가볍고 고삐는 너무 약하다는 점일 것이다. 보다 더한 중대사는 베이비 붐 세대의 대폭발이 한국 사회를 엄청나게 변화시킬 것이란 점이다. 지금까지는 사회 변혁의 한 인자가 되었던 그들은 이제부터는 변화의 주체 집단이 될 것이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베이비 붐 세대가 주류인 20대는 전체 유권자의 약 36%를 점하게 된다. ‘표의 힘’에서도 그들은 이 사회의 최강집단이다. 그 힘을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은 한국의 정치 기상도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의 진로를 결정할 ‘태풍의 눈’이 이들이라면 과장일까?
인구 폭탄의 뇌관 구실
인구 정책가들에게 베이비 붐 세대는 참으로 거북한 존재다. 한국의 인구 폭발을 제어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곧 베이비 붐 세대의 출산율을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이시백 교수(서울대 보건대학원)는 말한다. 결혼한 베이비 붐 세대의 여성들이 ‘제2의 베이비 붐’을 일으킨다면 한국의 인구 계획 목표는 달성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전문가들 사이에 감돌고 있다. 1984년 현재 약 600만에 이르는 우리 나라 可姙(가임) 부인들(20∼44세) 중 약 29%가 25∼29세의 베이비 붐 세대다.
요즘 한 해에 태어나는 아기들의 약 81%(약 72만명)는 20대 여성들이 낳은 생명들이다. 모든 연령층 중 가장 왕성한 출산력을 보이고 있는 베이비 붐 세대는 다행히 가족 계획에 대한 매우 높은 이해심을 갖고 있다. 그래도 워낙 인구 집단이 크기 때문에 “둘도 많다”는 ‘두 자녀 이하 낳기 운동’이 주로 이들을 겨냥해서 새로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베이비 붐 세대의 여성들이 80년대에 가임 연령층으로 대거 편입됨에 따라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부인들은 1990년에 가면 80년보다 약 200만이 불어난 약 713만 명에 달할 것이다(한국 인구 보건 연구원 추계). 앞으로 10년간 우리 사회는 줄곧 베이비 붐 세대가 일으키는 인구 가중 압력을 받게 되어 있다. 불길한 징조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인구 증가율의 감소 추세가 최근 들어 크게 둔화된 것이다.
1955∼60년의 다출산 시대에 연평균 3%에 달했던 한국의 인구 증가율은 지난 80년에 와선 1.57%까지 급격히 떨어졌으나 베이비 붐 세대가 출산을 시작하자 ‘제자리 걸음’에 들어갔다. 경제기획원 추계에 따르면 82년엔 증가율이 1.58%로 오히려 높아졌고 제2의 출산붐이 한 고비를 넘기는 86년에 가서야 1.49%까지 떨어질 것이라 한다. 가임 부인들의 인공 임신 중절 경험률도 지난 76년∼79년 사이엔 39%에서 48%로 대폭 늘었으나 그 뒤 3년 동안엔 2% 밖에 증가하지 않아 정체 상태에 있다.
정부의 인구 계획은 오는 88년까지 출산율을 한 부부 당 2.1명 수준, 즉 인구 대체 수준으로 떨어뜨린다는 것이다(산술적으로는 부부당 2명이라야 대체 수준이지만 성장 과정에서의 사망률을 고려하면 2.1%가 그 수준). 88년에 출산력의 브레이크를 정지 상태로 밟는다 해도 기존 인구의 큰 규모가 관성에 따라 60여년간 계속 증가, 인구가 6131만 명이 되는 서기 2050년에 가서야 증가율이 제로가 된다.
이 목표를 이룩하기 위해선 우선 베이비 붐 세대의 출산력을 눌려야 하는데 워낙 덩치가 큰 죄(?)로 해서 “이들에겐 ‘한 가정 한 아이 낳기’를 권장하지 않을 수 없다”고 조남훈 연구관(한국인구보건연구원)은 말했다. 그들을 이번에 단단히 잡아두지 않으면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20∼30년 뒤엔 세 번째의 베이비 붐을 또 일으켜 인구 계획을 망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후의 결혼 붐이 다출산 유발
55∼61년의 베이비 붐은 한국전쟁 뒤 일어난 이산 부부의 재결합·결혼러시·장병들의 제대 등 요인들을 바탕으로 일어났다. 50∼53년의 전쟁동안 억제되고 적체된 출산력이 이 기간에 증폭된 것이었다. 출산력의 급증과 함께 영아 사망률의 격감은 인구 증가를 부채질했다. 조선 왕조 후반기 한국 인구는 高출산·高사망률의 균형으로 2백간 약 600만 명의 선을 맴돌았다. 일제 시대부터 영아 사망률이 낮아지면서 인구는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1927년의 영아 사망률은 1천 명 출산 당 287명이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영아 사망률은 55∼60년에 오면 1000명 당 16명 선으로 뚝 떨어져 베이비 붐을 촉진하는 것이다. 84년 현재의 인구 추계에 따르면 55∼61년 사이 출생자는 48∼54년 출생자보다 약 1백80만 명이나 많다. 6·25가 터진 50년도 출생자는 약 50만인데 61년 출생자는 근 두배나 되는 약 91만 6000명이다. 이 베이비 붐의 불길을 끈 것은 62년부터 군사정부가 추진한 가족 계획 사업이었다.
우리 여성들은 지난 20여 년간 얼마나 적극적으로 산아 제한을 수용했던가? 지난 62∼83년 사이 가족 계획 사업에 의해 ‘출산이 방지된’ 머리수는 부산과 인천시 인구의 합과 맞먹는 약 480만 명이다. 83년 한해에 출산이 예방된 수는 약 62만 7500명으로 거의 대전시 인구다. 대전시 규모의 인구 출현을 예방하는 데 든 돈은 약 330억 원에 불과, 가족 계획의 높은 투자 효율을 증명하고 있다. 한 사람의 머리수를 줄이는 데 5만 3000원 밖에 먹히지 않았다는 얘기다.
82년 현재 가임 부인들의 피임 실천율은 57.7%, 피임 경험률은 81%, 인공 유산 경험률 50%, 1인당 평균 인공 유산 회수 3회, 불임 수술 실천율은 세계 최고인 36%다. 유교 전통이 아직 뿌리 깊은 사회에서 이런 성과가 가능했다는 것은 한국인의 놀라운 현실 적응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교리상 인공 유산을 반대하는 가톨릭 교인들의 임신 중절률이 어느 종파보다도 높다는 통계도 있어 종교가 가족 계획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가족 계획 사업이 없었다면 84년의 인구는 4000만이 아니라 4500만이었을 것이다. 산아 제한의 경제적 효과는 실로 크다. 에너지 부문 하나만 보더라도 산아제한으로 지난 20년간 약 2억 달러의 연료비가 절감됐다는 보고서도 나와 있다. 베이비 붐 세대는 말하자면 이러한 인공적 출산 통제를 받지 않았던 마지막 한국인 이었던 것이다.
흐르는 곳마다 범람, 과밀, 경쟁
그들이 우리 사회를 통과하면서 일으킨 가장 큰 문제는 과밀·과잉·과외 교육 현상이었다. 이들 집단이 쏠리는 곳마다 시설·교직원·정원 부족의 문제가 빚어졌다. 이런 부족은 경쟁을 조장했다. 경쟁은 교육의 과열을 유발했다. 학생들을 시험 선수로 만들었다. 베이비 붐 세대가 국민학교로 몰렸을 땐 3부제 수업, ‘콩나물시루 교실’이 등장했다. 대학문으로 밀어닥쳤을 땐 재수생 누적과 과외 수업 문제는 절정에 달했다. 과외 금지, 폭포수 같은 베이비 붐 세대의 흐름을 통과시키기 위한 流路(유로) 확장 공사였다.
유로를 트지 않을 때는 우리 사회가 그 홍수에 휩쓸릴 지경이 됐던 것이다. 베이비 붐 세대의 주류가 국민학교를 빠져 나와 중·고·대학으로 흘러든 지난 10년 동안(73∼83년) 국민학생수는 줄고 고교생은 2.4배, 대학생수는 다섯 배로 늘었다. 베이비 붐 세대는 ‘콩나물시루 교실’을 국민학교에서 대학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지난 70년엔 대학 교수 1인당 학생수가 18명이던 것이 83년엔 34명으로 늘었다. 83년 현재 인하대학교의 경우, 교수 1인당 학생수는 53명으로 국민학교 수준의 밀도다. 지도 교수 1인당 학생수는 전국 평균이 100명을 넘는다. 3년 사이 재학생수가 두배로 늘어난 고려대학교의 경우, 경제사 한 과목의 수강생이 581명이다. 300명 이상이 듣는 강좌수는 15개나 된다. 한 교수가 한 단과 대학의 재학생수와 맞먹는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강의는 강연일 뿐이다. 출석 부르는 데만 20∼30분 걸리니 불시 점검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고 질문이 있을 수 없다.
“내리고 탑시다” 강의가 끝난 뒤 강의실을 나가는 학생과 먼저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려는 학생들 사이에 자주 오가는 말이다. 강의 뒤의 복도는 인파가 흐르는 강으로 변한다. “하루하루의 학교 생활이 그저 사람의 물결 속에서 떠밀려 흘러가는 것 같다”고 박흥식 씨(59년생·고려대 사회학과 4학년)는 말한다. “자리 잡았니?”가 학생들의 인사다. 그렇다. 베이비 붐 세대는 그 생애를 통해 ‘자리다툼의 생활화’를 체득한 집단이다.
지난 4월 하순의 중간 시험 기간에 고려대 도서관 앞에는 새벽 5시의 개관 시각을 기다리는 행렬이 늘 2백m 이상 이어졌다. 자리를 잡으려고 새벽 4시께부터 몰려든 학생들이었다. 2천 석 규모의 중앙도서관에 8백명만 들어가도 자리는 몽땅 점유된다. 가방 속에다 비닐 봉지 두서너 개를 넣어와서는 재빨리 옆자리에다 소유권의 물증으로 놓아두는 식의 ‘대신 자리잡아주기’풍조가 일으킨 가수요 때문이었다.
4년 동안 한 반인 줄 몰라
도서관에 늦게 오는 학생들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돼야 한다. 점심·휴식 등으로 잠깐씩 비는 자리를 20∼30분씩 돌아가며 앉아 공부하는 것이다. ‘괴로운 줄서기’나 ‘피로의 대열’은 식당에서도 연출된다. 고려대의 도서관 지하식당은 오전 10시 30분부터 점심 시간이다. 그만큼 일찍 가지 않으면 자리에 앉을 수가 없다.
“음식물 찌꺼기의 더미 속에서 식사를 해요. 한 구석에선 먼지를 내면서 청소가 진행되고, 그래도 열심히 먹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 가슴이 찡해요. 어느 날 오후인데 학생들이 식사를 하는 중인데도 식당 관리인이 전등을 꺼버렸어요. 어느 누구도 항의를 하지 않고 식사를 계속하는 거예요. 할수 없이 제가 대들었지만…”
이것은 이화여대 대학원 재학생 김경순 씨(57년생)의 말이다. 과밀 상태의 학생들 사이엔 대화가 빈번할 것 같으나 실제는 정반대다. 대화란 타인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내 한몸 가누기도 벅찬 경쟁 속에서 남에게 신경쓸 만큼의 여유가 우러날 리가 만무하다. 서울대 사대 정원식 교수는 “사은회에서 같은 과 학생들끼리도 서로 인사를 시켜야 알아 보는”풍토를 어느 신문 기고문에서 개탄했다. 최근 고려대의 어느 학과 4학년생 180명 가운데 40명이 여행을 갔다. 같은 여관에 들어서서야 한 반 학생이란 걸 알고 서로 인사를 한 사람들도 있었다. 4년 동안 같은 과 소속임을 모르고 지내 왔다는 얘기다. 과의 규모가 수백명 단위로 커지고 이 강의실, 저 강의실로 매일 우루루 몰려다니며 보낸 4년이었으니까. 교수·학생의 대화도, 선후배 사이의 관심도 전과 같지 못하다.
“장학금이나 학점 문제가 아니면 말을 걸어오는 학생들이 없다”고 어느 교수는 말했다. 한때 금품이 오갈 때도 있었던 학생회 간부 선거는 어느 새 정족수 미달로 유산되는 꼴이 돼버렸다. ‘군중속의 고독’은 먼 서양의 사회학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백사장의 모래알로 남아 있으려 한다. 모래알이 모여서 뒤엉키고 돌이 되어 굴러가는 기쁨을 그들은 외면하고 있다. 아니 외면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하는 제도속에서 그들은 살고 있다.
‘오늘의 술 친구는 내일의 학점 라이벌’, ‘탈락하여 울지 말고 내가 먼저 울려 놓자’는 우스개가 그들의 신조요 구호가 돼 가고 있는 대학, 그래서 멀티버시티, 매스버시티라 한다던가?
카투사 입시 학원까지 등장
해마다 80∼90만 명의 베이비 붐 세대 청년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베이비 붐 세대의 주력은 지금 대학을 빠져 나와 군이나 사회로 흘러들고 있는 단계다. 이 흐름에 따라 문교부는 내년부터는 대학 정원을 동결할 방침이다. “군 입대나 진학자 등을 제외하고도 매년 50∼55만 개의 새 일자리를 이들 베이비 붐 세대에게 제공해야 된다”고 이시백 교수는 말한다. 그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상표인 과밀과 경쟁을 사회로 옮겨 놓기 시작했다. 그 징조는 최근 들어 부쩍 치열해진 취직 시험 경쟁률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4월에 치러진 9급 공무원 공개 시험엔 1410명 모집에 5만 9805명이 응시, 약 42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세무직은 1백 대 1. 83년도 7급 공무원 공개채용 시험은 58.6대 1이었다. 학생들이 ‘記試(기시)’라고 부르는 언론사 수습 기자 시험은 보통 100∼150대 1의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미군부대 근무사병(카투사) 모집 시험은 ‘카試’(카시)라고 하는데 경쟁률이 200 대 1에 이른다는 소문이다. 그래서 카투사 시험 전문 학원까지 등장했다.
취업률도 떨어지고 있다. 취업정보지인 월간 <코리아 리크루트>가 조사한 전국 30개 종합 대학교의 올해 취업률은 평균 76.7%. 지난 해(1983년)보다 3.9%포인트가 낮아졌다. 여기서 대학원 진학자(12.7%)와 군입대자 등을 빼면 순수 취업률은 47.6%에 불과했다. 대졸자의 취업 사정은 내년부터 더욱 악화될 듯하다. 대학 정원이 크게 늘었던 81년도 입학생들이 내년부터 사회로 진출하기 때문이다. 내년 봄의 4년제 대학 졸업생은 올해보다 40%가 많은 약 14만 명이나 될 것이다. “정말 심각한 취직난은 87∼88년부터 일어날 것이다”고 삼성 그룹의 어느 인사 담당자는 말한다. 군과 대학원이 대졸자 홍수에 대해 2∼3년 간은 어느 정도 완충 작용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문대학 졸업생의 취업은 4년제 대학생보다도, 실업계 고교생보다도 더 어렵다. 83년도 전국 평균 취업률은 36.1%로 집계되었으나 기업체 취직은 22%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가족이 경영하는 사업체나 자영 사업장에 종사하게 된 경우다. 베이비 붐 세대의 불운은 그 덩지에 있다. 워낙 머리수가 많으니 사람값을 제대로 못 받는 것이다. 교육에서 그랬고 지금은 취직 전선에서 그렇다. 70년대의 인구 증가율을 연령 계층별로 분석하면 베이비 붐 세대가 대부분이었던 15∼24세가 연평균 4%로 최고였다. 이 풍성한 ‘인력 풀’(Pool)을 바탕으로 해서 봉제·섬유·신발 등 노동집약적 저임금 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다.
필자는 77년에 세계 최대의 단일 신발 공장이라는 국제상사 사상 공장에 근무한 적이 있다. 약 2만명의 종업원 중 약 80%가 베이비 붐 세대(당시 16∼22세)였고 그 가운데 약 70%는 여자였다.
베이비 붐 세대가 나이를 먹음에 따라 80년대에는 25∼34세 연령층이 가장 급속도로 팽창, 인력 과잉 현상을 빚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더구나 80년대에는 70년대와 같은 경제 성장이 어려울 것이므로 일자리 부족은 70년대의 교육 문제처럼 80년대의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것이다. 베이비 붐 세대의 취직난은 통계로도 뒷받침된다. 경제기획원이 조사한 지난 80∼83년 사이의 실업자 변동 추세에 따르면 다른 모든 연련층에선 실업자의 절대수가 줄었는데도 25∼29세의 베이비 붐 세대 연령층에서만 실업자가 늘었다(80년의 10만 7000명 → 83년의 11만 8000명). 이것은 이 세대가 가장 격심한 취직 경쟁을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접대부도 절반이 고졸 이상
베이비 붐 세대에 속한 어느 미혼 여자는 기자에게 이런 농담을 했다. “남자에게 군대가 취직난의 완충작용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에게도 그런 작용을 하는 게 있다. ‘지하의 性(성)’산업이 바로 그것이다” 윤락녀나 접대부 숫자가 군인처럼 많을 리야 없겠지만 그런 여자들의 태반이 베이비 붐 세대 소속이란 건 확실하다.
고려대 최재석 교수가 최근 발표한 서울지역 접대부에 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약 64%가 베이비 붐 세대였다. 놀라운 것은 이들의 학력이었다. 전문대 중퇴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 약 10%, 고등학교 졸업 또는 중퇴자가 약 50%였다. 이 통계는 고학력자가 많은 베이비 붐 세대 여성들의 취직난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80년대의 취직난은 남자보다도 여자들에게 더 큰 타격을 줄 것이다. 제한된 일자리가 남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돌아갈 것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한국 여성개발원 조사(83년)에 따르면 약 35%의 기업체는 신입 사원 모집 대상에서 여자들을 아예 제외시키고 있다. 막대한 투자로 애써 키워놓은 고급 여성 인력에 대해 정당한 시험 기회조차 주지 않는 오늘날의 사회 제도가 어떤 부작용을 빚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고등교육 확대와 가족 계획에 의해 자녀 양육의 굴레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는, 풍선처럼 잔뜩 팽창한 양질의 여성 잠재력에 배출구를 만들어 주지 않을 때 그 풍선은 터질 수밖에 없고 무질서하게 쏟아진 잠재력은 이 사회의 고름으로 변하여 향락의 장소에서 탕진될 위험이 있다. 여성개발원 조사에 따르면 으뜸 가는 여성의 취업 동기는 ‘능력 발휘에 의한 자아 실현’(46%)이었다. ‘윤택한 생활’의 동기보다 거의 두배나 높았다.
지난해 롯데 상사는 시간제 근무의 기혼여성 판촉 사원들을 모집했다. 경쟁률은 약 4대 1, 1주에 5일, 하루 7시간 근무하면 한 달에 10여 만원을 손에 쥔다. 이런데 자가용을 모는 서울 영동의 젊은 주부가 취직했다. ‘돈이 목적이 아니고 무료한 시간에 뭔가를 해 봐야겠다’는 조바심이 그녀를 몰아붙였던 것 같은데 몇 달 뒤 그만두었다. 최근 대우, 삼성이 실시한 기혼 여성 사원 모집 시험은 15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병역필 남자를 모집하듯 기혼 여성을 모집하는 이런 현상이나 시간제 취업 여성의 증가는 자선책일지는 모르지만 근본 대책은 될 수 없을 것이다.
40만이나 모자라는 신랑감
취업뿐 아니라 결혼 시장에서도 베이비 붐 세대 여성들은 크게 불리한 입장이다. 남녀간 수급 구조가 보통 불균형이 아니다. 25∼29세의 여자들은 약 191만 명인데 그들이 주로 신랑감을 구하는 30∼34세 연령층의 남자는 42만명이나 적은 약 148만 명이다. 20∼24세의 여자보다 25∼29세 남자는 약 23만 명이 적다. 이런 인구학적 불균형은 베이비 붐 세대 여성의 신랑감들이 6·25 전쟁중 태어난 소집단 남성이기 때문이다. 신부감은 남아돌고 신랑감은 태부족인 오늘날의 결혼 시장 구조는 새롭고 심각한 사회 풍속도를 그려 가고 있다. 우선 남녀간 결혼 연령차가 좁아지고 있다.
베이비 붐 시대(55∼60년)의 평균 연령차(초혼 中位 평균 연령 비교)는 남자가 4.6세 위였는데 요즈음은 2세 이하로 뚝 떨어졌다. 동갑나기 결혼이 많아지고 年下(연하)의 남자와 결혼하는 현상도 보인다. 옛날처럼 3∼5세의 연상 남자를 구하기가 힘들어진 여성들의 기민한 상황 적응이 이런 초혼 연령의 변화를 부른 것 같다. 부부의 연령차가 좁은 가정은 비교적 대화가 잘 되고 위계질서가 약한 대신 민주적이라고 한다. 가정의 민주화가 사회의 민주화에 밑거름이 된다는 가설이 사실이라면 이런 현상은 바람직한 일일지도 모른다.
연령차가 좁아진 과정을 보면 남자의 초혼 나이는 25세 남짓(中位 평균)까지 낮아졌고 여자는 23세 남짓까지 높아졌기 때문이다. 여성의 결혼 연령 상승은 가임 기간의 단축을 뜻해 인구 대책엔 유리하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한국에선 ‘별무 효과’라고 인구학자들은 말했다. 60년대 초엔 신혼 여성이 결혼한 뒤 1년 안에 첫 아기를 낳는 비율이 25.8%였는데 요즈음은 약 80%나 된다. 이것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에서는 혼전 관계가 많이 이뤄져 임신 상태에서 결혼하는 비율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상담소를 통한 결혼이 많아지고 있다. 어떤 시장에서도 수급 구조의 불균형이 클 때 그것을 조절하는 창구로서 소개업이 번창하기 마련이다. 전국 결혼 상담소 협회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3백10여 군데의 상담소를 통한 결혼은 약 2만5천 쌍으로 82년보다 3천 쌍이 늘었고 전체 결혼수의 약 6%라고 한다. 이들 결혼 상담소에 중매를 신청한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다. 약 4천 명이 신청한 안네스 결혼 상담소(서울 종로 3가)의 경우, 여자가 7대 3 정도로 많다. 영락교회, 순복음 중앙교회 등 큰 교회에서는 자체적으로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신청자수는 역시 여자가 훨씬 많다.
교육 시장에서 정원과 시설에 비해 학생들이 불리한 입장에 빠지자 그 불리度(도)에 비례하여 과외 공부가 과열된 것처럼 결혼 시장에서 여성의 입장이 불리한 만큼 호화 혼수 문제가 심각해졌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불리를 대등으로 전환시키는 저울추가 ‘혼수’라는 ‘미끼’란 것이다.
여자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40여만이란 신랑감 부족분을 감안한다면 베이비 붐 세대 여성들 중 수많은 노처녀나 독신자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교사, 간호원 등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미혼 여성들 가운데 “혼자 사는 것도 괜찮다” 는 의식이 강화되는 것 같다. 건국대 재학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는 조사 대상자의 58%가 “경제적 능력만 있다면 혼자 살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결혼을 서두르지 않다가 혼기를 넘긴 직장 여성들의 부모가 딸 몰래 상담소에 중매 신청서를 내놓는 사례가 허다하다.
이런 경우엔 상담소와 부모가 짜고 자연스런 중매인 것처럼 위장, 맞선을 보이는데 성사가 되면 비로소 상담소를 통한 결혼이었음을 알린다고 한다. 안네스 결혼 상담소 대표 김용현 씨는 “최근엔 결혼을 단념한 많은 노처녀들이 수녀나 승려의 길을 택하든지 사회복지 시설에서 봉사의 길을 걷는 걸 볼 수 있다”고 했다.
결혼 위해 위장 취업하는 농부들
베이비 붐 세대의 여성보다도 결혼이 몇 배나 더 어려운 동 세대의 남성들이 있다. 농촌 총각들이다. 경기도 화성군 마도면 김 모 씨(57년생)는 5만여 평의 고등소채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지난해 그는 서울의 어느 도금 공장에 말단 공원으로 취직해 올라왔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 결혼 상담소에 신청서를 냈다. 몇 달 뒤 상담소를 통해 한 살 많은 노처녀 조모양(56년생)과 선을 보고 곧 사귀게 됐다. 농촌에선 꿈꾸기 어려운 행운이었다.
그가 서울행을 결심한 목적도 사실은 취직이 아니라 결혼이었다. 농부라고 하면 아예 선도 볼 수 없는지라 위장 취업을 한 것이었다. 김 씨는 사귐이 깊어지자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처지를 설명하고 조양을 데리고 고향에 갔다. 조 양은 농촌에서 같이 살겠다고 했지만 부모가 완강히 반대했다. 김 씨는 농장 경영을 임시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서까지 계속 서울에 머물면서 조양 부모가 딸의 농촌행을 허용해 주기만 기다리고 있다. 김 씨처럼 결혼을 위해 서울 등 대도시로 임시 위장 취업해 오는 농촌 젊은이들이 퍽 많다.
서울 종로구의 어느 상담소에는 40여 명의 그런 농부들이 중매를 신청해 놓고 기쁜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상담소에선 이들이 반기지 않는다. 어느 상담원의 얘기이다.
“도와 주고는 싶지만 농부란 걸 알게 되면 판판이 깨져요. 신청비로는 전화비도 안빠져요” 농촌 총각들은 “학력이나 용모는 무용, 오로지 몸 튼튼하고 농사를 같이 지을 생각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도시나 농촌 처녀들은 “차라리 엿장수하고 결혼하겠다”는 태도다.
전남 함평군의 어느 마을에선 한 총각이 고물장수라고 거짓말했더니 선 보자는 농촌 처녀가 처음으로 나타나더란 농담 같은 진담도 있다. 서울 을지로 2가에서 결혼 상담소를 운영하는 신혜영 여사는 미혼 농부와 도시 처녀 사이의 집단 맞선을 열 한번이나 주최, 약 50쌍을 결합시킨 사람이다. 지난 4월 하순엔 경남 밀양 청년회의소에서 집단 맞선 모임을 가졌다. 서울 처녀 25명을 전세 버스에 태워 내려가 현지 농촌 총각들과 ‘미팅’을 시킨 것이다. 짝이 있는 미팅이 아니라 무작위 추출식의 자유 미팅이었다. 여덟 쌍이 즉석에서 교제를 일단 약속했다. 서울 처녀들이 떠날 때는 밀양 총각들이 과일 등 특산물을 버스에 잔뜩 실어 주는 흐뭇한 정경을 보였다고 하는데 총각들의 속은 애타고 있었을 것이다.
경남도청은 행정력을 동원, 미혼 농어촌 후계자 770여 명에게 짝을 지어주는 운동을 펴고 있다. 총각들의 신상 카드를 이 고장 출신 기업인이 경영하는 도시 사업장으로 보내 처녀들을 모집하는 방식이다. 농협 중앙회도 청실홍실 상담실과 ‘월간 새농민’의 결혼 복덕방난을 통해 농촌 총각들을 돕고 있다. 당연한 현상이지만 베이비 붐 세대의 결혼 적령이 진입은 주택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
83년의 결혼건수(미신고 포함)는 약 43만 건이었다. 약 43만의 새 가정이 탄생했다는 얘기다. 이 가운데 약 80%는 새집을 필요로 한다. 건설부에 따르면 75∼80년 사이엔 주택 수요의 증가율을 年 3.2%로 잡았는데 81년이후엔 3.5%로 잡고 있다고 한다. 주택 수요에 영향을 주는 것은 결혼건수와 핵가족화이다. 핵가족화가 강화될수록 주택 수요는 늘어난다. 베이비 붐 세대는 이 두가지, 즉 결혼 건수의 증가와 핵가족화의 강화를 동시에 초래, 주택 수요를 폭발시키고 있다. 81∼86년 사이의 家口(가구)증가수는 年 평균 약 29만으로 76∼80년의 연평균 약 26만을 크게 웃돌고 있다.
올해 한국에서는 27만호의 새 주택이 건설된다. 여기에 드는 자금이 약 4조원. 그래도 주택 부족율은 줄지 않을 것이다. 10대와 20대 초반에서 교육수요를 급팽창시켰던 베이비 붐 세대는 20대 후반에서부터는 주택수요를 급증시키고 있는 것이다.
맨 정신으로 춤출 수 있는 세대
여자 이름에 ‘子(자)’가 거의 없는 세대, 라면 선호도가 가장 높은 세대, 음주율(약 86%)이 가장 높은 세대, 맛과 멋의 선택이 까다로운 세대, 여성의 55%가 살빼기에 신경 쓴다는 세대, 스포츠 중계 시청률과 음악 프로 청취율이 가장 높은 세대, 송창식과 양희은의 세대별 인기도가 가장 높게 나타나는 연령층, 그러나 남녀 다같이 조용필을 가장 좋아하고 ‘두만강 푸른 물에…’보다는 ‘옛 시인의 노래’를 더 즐겨 부르는 세대, 그러나 마이클 잭슨보다는 사이먼 앤 가펑클에 더 마음이 놓이는 세대, 반 이상이 주일학교에 다닌 경험이 있고 지금도 기독교(개신교·천주교) 신봉률이 약 25%(불교의 약 3백)나 되는 세대….
이런 것들은 갤럽, 리스피아르 등 여러 여론 조사 기관의 작업을 통해 통계학적으로 검증된 베이비 붐 세대가 주축인 20대의 단면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더 잘 안다. 골치아픈 숫자를 통해서 보다도. 무엇보다도 그들은 맨 정신으로 춤을 출 수 있는 세대다. 술 한 잔 걸쳐야, 누가 억지로 끌어내야 어둑한 무대에서 어색하게 몸을 흔드는 우리 세대(나는 45년생, 그러니 해방 세대다)와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대낮의 태양 아래서도, 남이 보는 데서도, 술의 힘을 빌지 않고서도 그냥 즐기기 위해 춤을 출 수 있는 세대다.
‘춤’이란 ‘보디 랭귀지’를 마음대로 구사한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내용이 형식에 의해 빚어진다’는 일면을 받아들인다면 춤이란 ‘자유 행동’은 ‘자기 표현의 과감성’이상의 더 기본적인 사고(思考)체계를 보여 준다. 서구인과 동양인의 차이를 설명하는 한 가지 요소로 춤을 들 수 있다면 베이비 붐 세대는 서구 쪽으로 몇 걸음 가깝게 다가가 있는 셈이다.
그들은 활자 매체에 못지 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TV 등 전자 매체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내가 만난 많은 ‘그들은’가장 잊지 못할 날로서 합격자 발표일과 함께 집안에 처음 TV가 들어온 날을 꼽았다. 사람을 논리적이기보다는 감각적이고, 옥외적이기 보다는 실내적이며, 적극적이기보다는 피동적으로 만든다는 TV의 영향권에서 자라온 그들이 ‘삼국지’를 되풀이 되풀이 읽으며 커 온 기성 세대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해방 세대는 대체로 동질성에 파묻혀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대해 그들은 남들과의 차별화로 自我(자아)를 확인하려 한다. 우리 세대는 새옷을 사 주면 놀림을 받을까 두려워 일부러 헌옷으로 닳게 한 뒤 입고 등교하곤 했던 소년시절을 보냈다. 베이비 붐 세대는 ‘남과 같지 않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철학을 일찍부터 생활화하였다. 그런 생각이 옷에서부터 직장·생활방식·정치 성향 등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독자들은 곧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열병처럼 앓은 ‘자유’
나는 이제부터 숫자나 개념이 아닌 실체로서의 베이비 붐 세대를 만나러 간다. 그들의 상황 조건-과밀과 경쟁이 개개인의 인간됨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송지나. 여자, 59년생, KBS에서 스크립터로 일한다. 몸은 연약하지만 얼굴은 깔끔하고 야무지게 다가온다. 할아버지가 이탈리아 배우 지나 롤로 브리지다를 닮으라고 ‘지나’란 이름을 지어주었다니까. 여섯 딸 가운데 맏딸로 났다. 두 오빠가 있었는데 6·25 전쟁중, 그리고 직후에 파상풍 등에 걸려 잇따라 죽었다. 송양의 아버지는 육사 8기 포병 장교였다. 전쟁중 부상으로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송양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군부대 주변을 수십 군데나 이사다녔다. 송양 어머니는 마흔여섯 번째 이사간 것까지만 세었다. 송양은 철모와 총기를 노리개처럼 만지작거리며 자랐다. 국민학생 무렵의 희망은 국회의원, 그것도 대통령보다도 더 힘센 국회의원이 되는 거였다. 정치 하면 선명하게 그림처럼 연상되는 장면이 있다.
아버지는 교문 앞 공터 한가운데서 고독하게 서 있었다. 교문 너머에는 경찰 진압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뒤에는 대학생 데모대가 버티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 사람도 못 나가고 한 사람도 못 들어온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60년대 어느 날의 부산대학교 교정. 당시 송양 아버지는 학훈단장(대령)이었다. 아버지는 가난하고 강직한 군인이었다. 송양이 부하가 사온 빵을 먹으려 하면 빼앗아 돌려주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장성 진급에서 탈락하자 자진해서 제대했다. 서울로 올라간 송양 집은 더 가난해졌다. 아버지는 정치에 손을 댔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송양은 건방진 소녀로 자랐다. 중3년 때는 반장 선거에도 출마했다. 투표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제주도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뒤 이화여대 신문방송과에 들어갔다. 공부도 열심히, 야학도 데모도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했다. 사랑은 ‘무지무지’ 해보았다.
‘…한동안 허덕이며 격정을 다한 뼈골 깊은’ 사랑도 했다. 싸움도 열심히 했다. 남녀 평등 문제로 다투다가 남학생에게 막걸리를 끼얹기도 했다. 열병처럼 ‘자유’를 앓고 다녔다. 이런 일기도 썼다. ‘수백 권의 책을 읽고 수십 권을 지어낸들 뭣하랴… 그토록 총명한 선배님들, 그들의 결과는 오늘인가? 이념은 있으되 신앙이 없고, 뜻은 있으되 사랑이 없다. 무엇을 위한 인내며 증오인가?’ 자신이 ‘민주’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그리고 사르트르의 말처럼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되지 않으면 자신도 자유를 얻지 못한다”고 믿었기에. 아버지는 송양의 시국관을 못마땅해 했다. 정권의 부정 부패엔 통탄을 금치 못하는 아버지였지만. “우리가 다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데”라고 하며 데모란 항의방식을 나무랐다.
졸업. 송양은 어느 방송국의 스크립터로 취직했다. 한 달에 60만∼70만 원을 거뜬히 벌었다. 속은 괴롭기 시작했다. 민주, 자유, 언론… 생각할수록 골치가 아팠다. 모래알을 사이에 접착제가 되어 시멘트를 만들어 내려 했는데… 골치가 아팠다. 동생이 대학 입학 시험에서 떨어졌다. 동생 등록금으로 준비했던 백만 원을 들고 유럽으로 떠났다. 온 유럽을 싸돌아다녔다. 히피, 거지 같은 젊은이, 그리고 진짜 거지들과 함께. 열차나 창고 안에서, 역전 광장에서 노숙을 하기도 했다. 서독에서 미국 신사를 만났다.
“나는 독일과 독일인을 가장 좋아한다. 1년의 반을 여기서 보낸다. 사람이 한번 태어나서 저 살고 싶은 데 살아야지…”하면서 그는 송양더러 독일에 남기를 권했다.
“대한민국은 날 필요로 해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귀국했다. 82년 여름이었다. 송양은 KBS로 옮겼다. 필름을 편집하고 화면에 맞는 해설·대사를 정리하는 게 지금 그의 일이다.
“왜 변화를 두려워하죠?”
송양은 조직 안에서 열심히 싸운다. ‘여자이기에’, 싸워야 사람대우를 받는다는 걸 알았다. 싸우는 법도 익혔다. 처음엔 격한 감정으로 몸이 덜덜 떨렸다. 지금은 자료와 논리를 정리한 뒤 차분히 싸운다. 제 힘으로 남성 사회에서 서기 위해선 실력부터 쌓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밤샘을 밥먹듯 하며 악착같이 배우고 있다.
- 송양의 눈에 비친 조직 속의 남자들은?
“내시 같아요. 자신이 비굴하다는 데 대해 부끄럼조차 없어요. 명예심이 없어요. 독재가 나쁜 건 인간을 비굴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어른들의 젊은이를 보는 눈은?
“왜 변화를 두려워하죠? 효도심이 약해진다고 개탄만 하지 말고 노인들이 편하게 지낼 좋은 양로원을 만드는 게 빠르잖아요? 요새 젊은이들 건강하고 너무 너무 똑똑하다고 생각해요. 가만히 버려두면 잘 될 거예요. 걔들이 아무리 문란하다 해도 어른들이 음지에서 하던 일을 젊은 층이 양지에서 하는 차이밖에 더 있어요? 강남의 어느 여관 주인을 인터뷰했는데요. 그 사람이 그래요. 40대 남녀손님은 죄짓듯 하는 표전인데 20대 남녀는 태연하게 출입한대요. 왜 그런지 아세요? 후자는 서로 사랑하니까요. 디스코가 뭐 나쁘다고 그래요. 어른들은 자신들이 어둑한 카바레에서 하던 일을 연상해서 디스코도 그렇게 보는 모양이지만…”
-아직도 ‘민중’ 좋아해요?
“요즈음은 시민이란 말이 좋아요. 피 냄새가 안 나거든요. 우리 세대는 세 가지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철저한 현실 적응형, 다른 유형은 이데올로기를 우상 숭배하는 쪽, 세 번째는 적극적인 현실 참여에 의한 개량주의. 사회 생활을 하면서 보니까 대학에서 데모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이 크게 달라요. 같이 날씨 스케치를 해도 안 한 사람은 벚꽃 지는 걸 찍는데 한 사람은 공해에 시달리는 가로수를 찍어 와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죠. 데모 정신은 뚜렷한 세기관과 문제 의식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값지다고 생각해요”
-송양이 사는 지역구 국회의원의 이름, 기억해요?
“몰라요”-전번 선거 때는 누굴 찍었는데?
“그것도 모르겠는데… 모르는 게 뭐 창피한 일이에요?”
태반이 지역구 국회의원 몰라
대통령보다도 센 국회의원을 꿈꾸었고 민주·자유를 위해 데모도 감행했고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문제 의식을 지닌 송지나 양은 그를 대표하여 국정에 참여하고 있는 국회의원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부끄럼없이 말하였다. 나는 이번 취재를 위해 열다섯 명의 베이비 붐 세대를 면담했다. 두 가지 질문을 늘 던졌다.
“당신 지역구 국회의원을 아는가?”
“국회의장, 국무총리, 민정당 대표위원 이름을 아는가?”
첫 번째 문제를 맞힌 사람은 김선주 양(60년생·이화여대 대학원 2학년 재학)뿐이었다. 서울 도봉구에 사는 그는 불과 며칠 전에 알았다고 했다. ‘호○○ 배 경로대회’ ‘김○○ 배 축구대회’ 현수막이 한꺼번에 여기저기 걸려 있었기 때문에 절로 알게 됐다는 것이다. 김 양도 두 번째 문제에선 걸렸다. 국무총리와 국회의장 이름은 맞추었지만 민정당 대표위원을 “거… 권 뭐라는 이가 아닌가요?”라고 했다. 따라서 두 문제를 다 맞힌 이는 한 사람도 없더란 얘기가 된다. 반 이상은 자신의 지역구 국회의원을 아무도 몰랐다. 둘 중 한 명을 알아도 소속 당을 혼동하는 이들이 많았다.
총리 이름은 거의가 알지만 국회의장과 민정당 대표위원을 많이 혼동했고 특히 대표위원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전부였다. 반 이상은 전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권, 나머지도 자신이 누굴 찍었는지 몰랐다. 임덕용 씨(56년생, 코오롱 근무)는 “찍긴 찍었는데… 아마도 멋지게 생긴 X한테 찍었겠죠”라고 했다.
모두 대학을 나온 똑똑한 사람들, 더구나 사회 문제에 대해선 예민한 문제 의식을 가진 이들이 왜들 이러는가? 홍미숙 씨(60년생·코리아 리크루트 기자)는 이렇게 풀이했다.
“이름을 기억할 수 있게끔 하는 실마리나 이미지가 잡히지 않아요. 자신의 목소리나 자기류의 표현 같은 것, 그게 없거든요. 봉두완 하면 퍼뜩 외무위원장 하고 연상이 되는데…” 그래도 납득이 가질 않는다. 관심만 있다면 그런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 리가 없다. 열 자가 넘는 영어 단어도 외는데. 그러니 “왜 정치에 관심이 없는가?”를 물어야겠다. 홍미숙 양은 말했다.
“학교 다닐 때는 대통령 하면 박정희밖에 연상되지 않았고 정권이 바뀌는 것도 못 보았고 그렇다고 호국단 설립 이후 학생 대표를 내 손으로 뽑은 기억도 없고… 대학에 들어가 비로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허상이었던 것 같아요”
김선주 양은 “우리가 무관심한 것은 현실 정치에 대해서지 정치나 이념, 그 자체에 무관심한 건 아닐 것이다”고 반박했다. 15명의 베이비 붐 세대에게 “다음 선거에선 투표를 하겠느냐?”고 물었다. 태반은 “그날이 휴일로 되면 기권하고 놀러 가겠다”는 반응이었다. 정치에의 무관심은 무관심에서 끝나지 않고 ‘투표권의 포기’로 구체화되는 법이다. 민주 사회에서 투표권의 포기는 참정권의 포기를 뜻한다. 시민이 정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투표다.
베이비 붐 세대의 ‘정치 무관심’은 이 집단이 가장 많은 표를 가진 연령층이란 데서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한다. 지난 81년 국회의원 선거 당시의 유권자수는 20대가 전체의 33.8%, 30대가 23%, 40대가 18.9%, 50대가 12.9%, 60대 이상이 11.4%였다. 다음 선거에선 20대의 비중이 36%로 더 높아진다. 민주적 정치 권력을 표수로 치환할 수 있다면 20대(70%가 베이비 붐 세대)야말로 최강 정치 집단이다. 그들의 마음먹기에 따라선 정권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힘을 행사할 수도 있다(이론상). 표수를 놓고 본다면 그들은 기성 세대에게 요구, 항의, 또는 투석을 할 게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현실 정치를 바꾸면 된다(이론상).
기권이나 부동표로 흐를 위험
물론 20대의 정당한 투표권 행사를 방해하는 요인이 있어 왔다. 이런 자리에서 인용하기가 뭣하긴 하지만 유치송 민한당 총재의 말이 생각난다(《월간조선》 1984년 4월호 대담).
“그러나 적어도 자유당과 박 정권이 자기들한테 표 안 찍었다고 보복한 건 없지 않은가? 기껏해야 나무 하는 것 단속하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창피하게 꾸부리고 앉아 막걸리다, 고무신이다, 요즈음은 단위가 높아져서 관광이다, 이렇게 하는 모양인데 속여먹는 놈도 문제지만 속는 사람도 문제에요. 백성이 튼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화적 정권 교체니 뭐니 할 필요도 없어요. 벌써 그게 됐을 겁니다.… 국민들은 야당만 나무라고 텔리비전만 보고… 표 하나 제대로 찍지 못하면서 뭘 그러냐 말이야”
큰 덩치 때문에 늘 손해를 보아온 베이비 붐 세대가 그 ‘규모의 정치성’을 제대로 살리려면 바닷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어선 될 리가 없다. 이웃, 사회, 정치에의 관심과 사랑을 접착제로 하여 돌이 되어야만 파도도 막고 장벽도 부술 수 있다. 증오보다 더 나쁜 건 무관심이란 말은 그들에게 적용될지 모른다.중앙대 김영모 교수(사회학)는 말한다.
“20대는 정치적 학습이나 훈련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교육은 기술주의로 흘렀고 입시·취직 경쟁과 핵가족화, 도시화는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들었다. 이것들이 모두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기에 이르렀다. 70년대까지 우리 나라 선거에서 당락의 결정표 역할을 한 것은 지연·학연·혈연 등에 좌우된 부동표였다. 약 40%가 부동표였다는 분석도 있다. 20대의 무관심표가 부동표로 변할 가능성도 있다”
“잘생긴 사람 찍었다”느니 “사람됨은 전혀 모르니까 무조건 경력 화려한 사람을 골랐다”느니 하는 베이비 붐 세대의 농담같은 진담은 기권율과 부동표의 증가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미국 같은 선진국일수록 기권율이 높고 국민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위안은 한국의 베이비 붐 세대에겐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선진국에선 국민 생활에 미치는 정치의 영향력이 매우 적어 누가 집권을 하든지 일상 생활은 큰 변화를 겪지 않는다. 한국처럼 정치가 생활과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나라에서의 정치 무관심을 ‘현대화’로 해석하는 건 착각일 것이다. 더구나 사회의 현실엔 관심이 많으면서도 현실 정치에 관심이 적다는 건 의도적 외면이나 도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베이비 붐 세대는 자가 당착에 빠지게 된다. 현실 정치를 통하지 않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량할 수 있나? 있다면 현실 정치 이외의 새로운 정치 세력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들의 행동은 그 믿음을 따르고 있는가?
베이비 붐 세대가 가진 높은 정치 의식과 현실 정치에의 낮은 관심, 이 2중성의 한 이유는 현실 정치에 대한 거듭된 실망과 좌절일 것이다. 이런 2중성은 거꾸로 하나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의 정치의식이나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대중 정치가가 나타난다면 현실 정치에 폭발적 관심을 쏟을 것이란 가설이 그것이다.
2차 대전 뒤 태어난 미국의 베이비 붐 세대가 ‘하트 돌풍’의 지지 기반이 됐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문제는 베이비 붐 세대가 자신들의 엄청난 정치력(표수)을 확인, 그 잠재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일 것이다. 임덕용씨는 “조용필처럼 정치를 하면 관심을 갖겠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목소리 하나로 수백만의 마음을 한 군데로 모으는 기술, 그런 공감대 형성이 바로 정치란 것 아닙니까?”
대중 가수 같은 정치가. 텔리비젼 화면에 잘 맞고, 개성이 있고, 독특한 분위기를 몰고 다니는 정치가, 정견보다는 스타일이나 감각에 뛰어난 정치가가 이 세데에게는 잘 먹혀들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정치가는 대중매체의 操作(조작)에 의해서 탄생하는 법이다. 선거 운동에 광고기획 회사가 끼어들어 정당이나 후보의 이미지 부각에 노력하는 서구의 방식이 다가오는 총선거에서는 일반화될 듯하다.
1960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서 닉슨-케네디 후보의 토론이 있었을 때, 라디오로 중계를 들었던 사람들은 닉슨이 이겼다고 생각했고 텔리비전을 시청했던 사람들은 케네디가 이겼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텔리비전의 마사지를 많이 받아온 베이비 붐 세대에게는 닉슨과 같은 오디오적 정치가보다는 케네디와 같은 비디오적인 정치가가 더 환영을 받을지 모른다. 기존 선거 방식보다는 전파 미디오적인 광고기법의 선거 방식이 베이비 붐 세대의 감각에 잘 맞을 것이다.
한국의 정치 발전사에서 1984∼88년의 의미는 엄청나다. 평화적 정권 교체, 민주화의 가능성이 시험받는 시기이며, 86 아시안게임, 88올림픽과 주변 정세는 우리 사회를 부산하게 만들 것이다. 정치적 도전이 잇따를 이 시기에 우리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집단인 베이비 붐 세대가 정치를 망각할 때 극 결과는 역사에 대한 책임 문제로 비화될지 모른다.
‘신화 없는 세대’의 프론티어는?
60년 전에 죽었던 사람이 부활하여 오늘의 베이비 붐 세대를 본다면 모두가 ‘수퍼맨’이나 ‘원더우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14세 한국 남자의 평균 키를 비교하면 1919년엔 140cm였는데 80년엔 160cm였다. 25세의 여자 평균 키는 1910년의 147.5cm에서 80년의 1백57cm로 커졌다. 국민 1인당 평균 섭취 열량은 62년의 1943 칼로리에서 80년엔 약 2600 칼로리로 늘었다. 시력만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질병률도 격감했다. 20대 여성의 반이 살빼기에 고민하고 있다는 통계는 베이비 붐 세대가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를 상징하고 있다.
지난 4반세기의 고도 성장에서 한국인들이 도달한 가장 핵심적인 철학적 각성은 ‘물질적 풍요만으로는 인간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도 성장과 함께 인간 욕망의 크기도 성장했고 욕망과 현실 사이의 상대적 격차(불만도)는 별로 좁혀지지 못했다.
고도 성장의 가장 큰 수혜 집단인 베이비 붐 세대의 불만은 그러한 상대적 빈곤에서 오는 것이리라. 그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과밀과 경쟁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개인의 욕구 충족도는 그가 속한 집단의 머리수와 대체로 반비례하는 법이다. 지금 직장에 들어간 베이비 붐 세대는 그 전처럼 급행 승진을 못할 것이다. 30대 이사는커녕 30대 고장도 어렵게 될 것이다. 신입 은행원은 지점장으로 퇴직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가슴을 죌 것이다.
지금 40대의 숫자는 20대의 반도 안 되니 승진에서 얼마나 유리한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70년대의 신화-율산, 제세, 원기업 같은 벼락 재벌도 이들 세대에선 옛이야기로 빛바랠 것이다. 세상이 합리화돼 가면서 한탕주의가 통용될 수 있는 여지는 좁아질 것이다. 합리가 지배하는 속에서 신화가 창조될 수는 없다. 그들은 벌써 스스로를 ‘신화가 없는 세대’라고 규정하고 있다.
도전의 場(장)도 좁아질 것이다. 60∼70년대의 종합상사, 해외 시장, 혹은 민주화나 고통받는 자들이 젊은이들에게 정열을 불태울 프론티어로 제공되었다면 80년대의 프론티어는 무엇인지 아직 뚜렷하지 않다. 이런 환경에서 그들의 욕망과 관심이 먼 데서 가까운 데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옮겨갈 것임은 명백하다. 출세나 승진으로 명예욕을 충족시킬 수 없다면 하루하루의 인생을 즐기는 것으로 보상받자는 심리 발동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미국에서도 2차 대전 후 10여 년 간 베이비붐이 있었다. 이들을 보통 ‘나 혼자만의 세대’(Me Generation)라고 부른다. 모든 관심을 ‘나’에게만 쏟는 세대란 뜻이다.
일본의 베이비 붐 세대도 탈정치, 다양성, 개인주의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민족과 전통은 다르지만 베이비 붐 세대의 공통 필수 조건인 과밀과 경쟁은 거의 같은 현상을 결과하고 있는 것 같다.
싹트는 다양한 가치관
‘나에 대한 관심의 증대’는 양날 칼이다. 좋은 방향으로 휘둘러질 때는 가치관의 다양성, 개성화, 인간화를 낳는다. 나쁜 방향으로 칼날이 돌아가면 타인에의 무관심, 이기주의, 향락주의로 흐르게 된다. 우리의 베이비 붐 세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올봄 대학가의 데모 현장을 부지런히 쫓아다녔던 <마이니찌 신문> 서울 특파원 시게무라 씨는 “학생들의 데모관이 크게 바뀌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학교 내의 데모가 자율화되어도 80년 봄의 擧校的(거교적) 데모와는 달리 학생들의 행동이 통일되지 않고 그 불통일, 즉 행동의 다양성을 서로가 존중하는 것 같더라고 그는 말했다. 데모에 참여 않는 학생들이 참여파에 대해 느꼈던 죄책감이나 참여파가 비참여파에게 던졌던 경멸감 같은 게 거의 사라졌다는 데는 내가 만난 모든 베이비 붐 세대 젊은이들도 동의했다.
“데모해도 잡아가지 않으니 데모하는 애들에게 미안할 필요가 없지요. 이제는 데모가 용기의 증명은 아니니까 그들도 순교자와 같은 도덕적 우월감을 가질 수 없게 되었죠. 또 솔직히 말해서 취직 생각하면 데모할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전엔 데모하는 학생들의 유형이 고정돼 있었는데 요즈음은 그렇지 않아요. 놀때는 놀고 공부할 땐 하고 데모할땐 또 열심히 하고. 짙게 화장한 여학생도 데모를 하고. 도식적으로 참여, 비참여파를 가를 수 없게 됐어요”
어느 교수는 “차라리 몽땅 데모에 가담하면 휴강이라도 하겠는데 데모하는 학생도 있고 공부하는 학생도 있으니 강의를 안할 수가 없다”고 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통용되던 도식으로 오늘날의 대학생들을 분류할 순 없게 되었다. 획일적 행동 양식이 그만큼 각양각색으로 분화된 때문이리라. 고려대 4년 김돈 씨는 “우리끼리의 대화에서는 요즈음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 퍽 자주 쓰인다”고 했다. “그래선 안된다”느니 “그래야만 한다”는 여유 있는, 남의 입장을 인정하려는 말투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보기에 따라선 자기 주장을 회피하려는 자세로도 받아들여지겠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사고 방식은 생활양식에선 “저 잘난 맛에 산다”는 개성화, 차별화로 나타나고 있다. 컬러 텔리비전의 방영과 교복 자율화는 젊은이들의 패션을 다채·다양하게 변모시켰다. 한국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해마다 추적 조사하고 있는 여론조사 회사 리스피아르의 분석 담당 박지선 씨는 “세대차가 크게 나타나고 그 차이가 해마다 커지는 부문이 의복 선택시의 디자인·색감 선호도다”고 했다. 의복의 스타일이나 감각을 중요시하는 20대지만 질기고 값싼 실용성도 기성세대 못지 않게 중시하는 타산적 일면도 보이고 있다. “멋을 좋아하니까 씀씀이는 헤플 것이다”는 도식도 베이비 붐 세대에겐 잘 들어맞지 않는 것 같다.
“책임지라”는 말 없어져?
서울 외국어 대학의 40대 교수 ㅈ 씨(46)는 이런 경험담을 털어놓는다. “퇴근길인데 나의 과 남학생이 여자 친구와 허리를 껴 안고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앞질러 가자니까 마주칠 것 같아 일부러 느릿느릿 걸었다. 가게 쇼윈도 앞에 오더니 두 남녀는 멈춰서서 안을 기웃거렸다. 이 때다 싶어 발걸음을 빨리하여 스쳐 지나가는데 그 놈이 ‘선생님!’하고 아는체하지 않는가? ‘선생님, 왜 모른 척하고 지나가십니까?’ 이런 농담을 던지는 제자의 얼굴 보기가 민망스러워진 것은 바로 나였다” 나는 앞에서 베이비 붐 세대가 ‘맨 정신으로도 춤을 즐길 수 있는 첫 세대’라고 규정했다. 과학적 데이터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나는 춤을 자유롭게 출 수 있다는 것과 性的(성적)행동 사이엔 상관 관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몸놀림으로 의사를 표시하는 점에선 같으니까.
그렇다고 이 시대의 성의식이 기성 세대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성의식이란 것은 아마도 가장 느리게 변하는 관습일 것이다. 다만 베이비 붐 세대에 와서 성의식의 변화가 두드러지는 건 인정할 수 있겠다. 그렇게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이들의 숫자가 워낙 많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신혼 부부의 결혼 후 1년내 출산율이 20년 전의 약 3배나 된다는 것은 ‘약속한 사이의 혼전 관계’는 거의 보편화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약속에 관계없이 ‘초야의 순결’을 중요시했던 전통적 성의식과는 크게 달라진 현상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좋아하는 사이라면 그것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나 두 걸음쯤 더 나아가 성 자체를 일종의 레저로 여기는 태도도 일부 20대 사이에선 나타나고 있다.
60년생의 어느 직장 여성의 얘기를 들어보자.
“옛날엔 그런 일이 있은 뒤 여자가 ‘이젠 책임을 져라’고 남자를 얽어매곤 했다는데 요사이는 거꾸로 ‘그랬다고 해서 날 자꾸 따라다니지 말라’고 면박을 주는 여자도 있다. 어느 남학생은 이런 말을 하더라. ‘우리가 한 일을 생각 않고 첫날밤에 신부가 처녀이기만을 희망하는 건 비겁하다. 순 총각수와 순 처녀수는 비례하는 게 아닌가.”
“성의식에 있어선 10년, 20년 선배 세대보다도 3∼4년 뒤의 후배들과 더 큰 생각의 차이를 느낀다”
어느 인구학자는 “자세히 밝히긴 곤란하지만 우리가 어느 공단의 미혼 여공들을 조사했더니 30%가 관계를 가진 경험이 있고 10%는 인공 유산경험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이들에 대한 성교육과 산아제한 홍보가 강화돼야겠다”고 했다.
건강하고 보수적인 세대
미국 유럽 등 외국 베이비 붐 세대의 공통된 특징은 ‘안티[反]의 입장’이었다. 반전·반체제·반문화 운동을 통해 그들은 현대 기계 문명의 어두운 면을 고발했고 새로운 생활 양식을 창조하려 했다. 기성 세대는 또 그들의 고발과 도전을 하나의 충고로 수용, 사회를 개선하는 데 노력했다. 미국에선 60년대의 히피 사조가 70년대엔 사라졌다. “왜?”라는 질문에 미국인들은 “우리 모두가 히피가 되었기 때문이다”고 답한다.
한국의 베이비 붐 세대에선 그런 안티의 성향이 퍽 약한 것 같다. 종속 이론이나 해방 신학 등 비교적 선명한 주장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사상은 파격성이 없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보수적인 내용들이다. 문제는 이런 보수적 주장마저도 수용할 수 없는 우리의 상황 조건이다.외국 베이비 붐 세대는 마약·섹스·폭력이란 부정적인 풍조를 사회 속에 퍼뜨렸다. 데모가 안티의 적극적 표현이라면 마약은 퇴영적 표현이었다. 한국처럼 근대화된 나라에서, 6·25 베이비 붐 세대처럼 숫자가 많은 집단에서 마약 오염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건 유례가 드문 일이다. 가까운 일본의 베이비 붐 세대가 본드와 히로뽕에 젖어든 것과도 큰 대조가 된다. 최근 서울대학에 유학온 재일동포 여자 소설가 이양지 씨(29)는 한국의 젊은 남자들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덜 세련된 것 같지만 건강하고 활력과 박력이 넘친다. 특히 일본 남자와 비교하면” 많은 문제도 가진 우리의 베이비 붐 세대이지만 현재의 도덕 기준으로 재어볼 때 ‘보수·건강’이란 일반적 판정은 거뜬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보수·건강이 과연 장점이냐 하는 데는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기성 세대의 입장에서 보면 “우선 안심이다”고 하겠지만 젊은이들의 생각이 ‘애늙은이’같아서야 장래에 희망이 있겠느냐고 개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청년들이란 기성 세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새로운 생활방식이나 사고 방식의 가능성을 제기해야 하는 세대라고 믿는 이들이다. 문제는 베이비 붐 세대의 에네르기가 계속 발산되도록 배출구를 터 주는 일일 것이다. 경제 성장이 정체되면 이들의 에네르기는 안으로 잠복, 우리 사회를 화농시키기 쉽다. 이들 젊은 활력은 어느 쪽으로 쏠릴 수 있을 것인가? 한 사람의 특수한 모델을 놓고 사례 검토를 해보자.
도전·죽음·또 도전
임덕용. 56년생, 늘 신선한 분위기를 몰고 다닌다. 완강한 뼈대를 근육질로 얇게 포장하고 있는 몸집이지만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다.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암벽 등반가다. 미혼. 체육 훈장을 두 개나 받았다. 지난 80년엔 알프스의 마터호른, 그랑드 조라스 암봉을 올랐다. 81년엔 히말라야의 미답봉 바인타 브락2봉에 도전했다가 정상 도달 직전에서 동료 이정대를 잃었다. 정상 공격조였던 이정대·유한규 두 사람은 자일로 몸을 묶고 철수도중 조난을 당했다. 이 씨가 유 씨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자일을 풀고 빙벽 아래로 떨어진 것으로 원정대에선 해석하고 있다.
임 씨가 속한 악우회는 지난해 여름 바인타 브락2봉에 재도전했다. 3캠프까지는 순조로왔다. 해발 6500m의 3캠프에서 눈과 바람을 만났다. 대원들은 텐트 속에 15일간 갇혔다. 그 부근의 다른 나라 원정대는 모두 하산했다. 그들만은 이정대 씨를 생각하며 버티었다.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루 두끼만 먹었다. 체력소모를 막기 위해 종일 식물 인간처럼 누워 지냈다.
천막 안에서 먹고 자고 배설해야 했다. 임 씨에게는 환청이 오기 시작했다. 민방위 훈련 사이렌 소리가 들리곤 했다. 환각도 나타났다. 텐트는 노란색이었다. 그 색깔이 자꾸만 정신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임덕용 씨는 여자 친구가 선물한 ‘아리’란 인형의 머리를 다듬어 주면서 15일을 기다렸다. 7월 14일 저녁에 대원들은 결정했다. “내일엔 날씨에 관계없이 죽어도 ‘고우’다” 더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식량도 동이 났고 7월 15일은 이정대 씨가 숨진 2주기이기도 했다.
정상 공격조는 임덕용, 유한규 팀. 오전 9시에 악천 후 속에서 출발, 6천8백m 지점에 이르러 빙벽에 얼음굴을 팠다. 두 사람은 굴속에 틀어박혀 밤을 새웠다. 침낭은 가져 오지 않았다. 입은 그대로 서로 껴안고 비비고 노래 부르며 죽음을 뜻하는 잠을 쫓았다. 너무 추워 카메라를 깔고 앉는 바람에 망가뜨려버렸다.
캠프에서 후방 대원들은 워키토키로 노래를 불러주고 “목욕탕에 콜라 부어 놓고 마시자”고 소리를 질러 주면서 두 대원들을 격려했다. 달빛으로 빙벽과 암벽이 푸르스름한 기막힌 밤이었다. 임 씨는 문득 “교향곡을 한곡 들었으면”하는 생각을 했다. ‘여기가 가장 좋은 무덤’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거기에 없었다. 다음날 오후 1시 50분 둘은 정상에 섰다.
세계최초의 등정. 식인봉이란 별명을 가진 해발 6960m의 칼날 같은 봉우리에서 그들은 이정대 씨의 사진을 눈속에 파묻었다. “이정대 대원에 대한 의무감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일찌감치 포기했을 것이다”고 임 씨는 말했다. 임 씨는 이 정상 등반도중 발에 동상이 걸렸다. 지금도 치료중이다. 그 후유증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것이라고 한다.
“안 되면 될 때까지”
나이로 보면 베이비 붐 세대의 제1파에 해당하는 임덕용 씨는 부모와 학교가 덮어씌우는 과외 공부에 반발, 그 도피처로 산을 선택했다. 일요일엔 부모의 눈을 속이기 위해 고무신을 신고 집을 빠져 나와 도망치듯 산을 올랐다. 미친 듯 산을, 계곡을, 바위벽을 올랐다. 밤에 인수봉에 올라 도회의 불빛을 내려다볼 때는 “너희들 두고 보자”고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77년에 서라벌 예대 서양미술과를 졸업, 육군에 입대했다. 특수부대에 뽑히기 위해 군용 백을 입에 물고 선착순 1위를 했다. 그는 입대 첫날부터 ‘고생을 사서 하기로’결심한다. 군복무 3년간은 등반 기술 연마를 위한 체력 단련 기간이라고 스스로 선언했다. 특수부대 지원, 사역 자원, 외출 포기 등 모든 육체적 고통을 ‘내가 좋아서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하니 즐겁기만 했다.
제대 뒤 80년에 알프스 원정을 하고 돌아와 그는 그 체험기를 ‘알프스의 꿈’이란 단행본으로 펴냈다. 위계 질서가 굳은 산악계에선 그런 ‘자기 과시’가 금기처럼 돼 있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알프스에서 그는 ‘전율할 만한 감동’을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 거기서 그는 산을 오르는, 등산을 즐기는 서구인들의 진정한 자세를 보았다. 그는 이 감동을 인생의 추진력으로 삼기로 했다. 무턱대고 코오롱 상사의 스포츠 사업본부장을 찾아갔다.
등산 현장에서 느꼈던 등산 장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산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고 있으니 그 모양이다”고 욕했다. 이런 당돌한 면담이 계기가 되어 임 씨는 즉석에서 코오롱의 스포츠 상품 디자이너로 특채됐다. 그는 자신이 등산장비 디자인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설계, 산행에 의한 시험이 가능할 뿐 아니라 성야화를 전공한 덕분으로 일러스트레이션도 잘 한다. 이런 점에선 독일의 鐵人(철인) 등반가 메스너보다도 자신이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얼마 전 춘천 구곡 폭포에서 60분짜리 암벽 등반 비디오도 만들었다. 후배 등산인들을 위한 교육용이다. 알프스 등반 때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도큐멘터리를 당시의 TBC에서 제작, 방영하기도 했다. “그런 짓들이 치졸하게 보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도!’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한다. 어린이 잡지에서 원고 청탁이나 인터뷰 요청이 오면 거절 않는 이유도 그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어서다” 2년 전엔 동아 세계 마라톤 대회에도 참여했다. 비록 등수에는 못 들었지만 완주했다. 참가 이유는 자기가 디자인한 운동복을 입은 선수들이 어떻게 뛰는가를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임 씨와 같은 사람은 사생활은 다소 무질서하다는 것이 기자가 가진 도식이다. 그런 도식은 여기서도 들어맞지 않았다. 그는 인생에 대해서나 일상생활에 있어서 컴퓨터처럼 계획적이고 타산적이다. 산에서 익힌 습관이란다. “극지 등반을 할 땐 두 달 뒤 어느날 몇 시에 원정대가 고도 얼마에 있어야 하고 그날 점심은 어떤 것, 열량은 얼마짜리라는 거리 미리 계획해 놓아야 한다. 내 인생도 그렇게 설계하고 있다”
“내가 왜 떨어요?”
요사이 그는 2년제 대학 졸업이란 학력 핸디캡을 보충하기 위해 퇴근 후엔 개방 대학 산업미술과에 다닌다. 자가용도 샀다. 자가용 사는 게 경제성이 있다는 셈을 해 본 뒤 산 차다. 타산적인 사람은 이기적이란 도식도 있다. 지난해 4월3일 인수봉에서 큰 조난 사고가 났다는 걸 아침 밥상 앞에서 라디오를 통해 듣자 그는 회사엔 “오늘 출근 못한다”고 알리고 어머니에겐 “따끈한 꿀물을 보온병에 넣어달라”(꿀물은 탈진한 조난자에게 즉효가 있다)고 부탁한 뒤 등산 장비를 챙겨 조난 현장으로 달려가 구조작업을 도왔다. “그런 건 등산인이면 당연하게 하는 거다”고 임 씨는 가볍게 말한다. 시내 버스를 타면 소매치기를 유혹하기 위해 일부러 바지 뒷 호주머니에 돈지갑을 찔러 넣기도 한다. 물론 소매치기를 잡아 혼내주기 위해서다.
지난 해(1983년) 8월 초 일요일, 임 씨는 여자 친구와 함께 용인 민속촌에 놀러갔다. 가지고 온 라디오를 통해 “경인 지역에 적기가 공습중이다”는 다급한 방송을 들었다. 이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옳지 잘됐다. 너희 새끼들 이제 맛좀 봐라”였단다. “공산군을 쳐죽일 기회가 생겨 잘 됐다”는 생각이 조건반사적으로 날 수 있었다니 그는 “이산가족이 되면 어쩌나”부터 생각했던 나 같은 사람과는 다른 정신 체계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느 소설가가 “모험이란 건?”하고 그에게 물었다.
“‘신난다!’ ‘재미있다!’ 그런 거예요”
이런 그의 즉답처럼 그는 등산을 우선 즐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점 그는 선배 등산인들과는 크게 다르다. 산행에다가 실존, 자아 확인 등 철학적이기까지 한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는 선배들과는 화사한 대조다. 그는 산행에서 체득한 노우하우를 사회 생활에서 절묘하게 활용하고 있다. 그는 사회와 조직과 인간 관계까지도 바인타브락 미답봉처럼 차례차례 정복해 가고 있는 느낌이다. 등산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 생각난다.
“여기 봉우리가 있다. 오르자. 여기 바다가 있다. 건너자. 여기 부정이 있다. 바로잡자.
-이런 것들은 각기 다른 행동 같지만 같은 마음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임덕용 씨는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두 번 훈장을 받았고 두 번 식사 대접을 받았다.
“떨리지 않더냐?”고 했더니
“내가 왜 떨어요? ”란 반문이 돌아왔다.
“초대받아 간 손님인데 당연히 대접을 받아야죠. 떨긴 왜 떨어요?” 그를 이토록 당당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주의 정신에 입각한 직업의식일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산을 잘 타는 사람, 그리고 스포츠 디자인 분야에선 세계 최고가 될 사람이다”는 자랑과 정열이 천진난만한 그의 표정 밑에 단단히 깔려 있다. 그런 프로페셔널리즘이 있기에 소시민이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개인 중심이되 이기적이지 않고, 철학적이지 않고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선행을 하며, 화내야 할 때 화낼 수 있는 것이리라. 물론 임덕용 씨는 매우 특출한 예로서 베이비 붐 세대의 전형은 아니다. 그들이 모두 임 씨를 닮는다면 그 집단은 ‘수퍼 제너레이션’이 돼버릴 것이다. 나는 임 씨를 베이비 붐 세대가 창출할 수 있는 하나의 인간형, 하나의 가능성으로 설정했을 뿐이다.
80년대의 의미체계는 ‘인간화’
베이비 붐 세대의 우울-도전할 프론티어가 없다는 고민에 대해서도 임덕용 씨는 하나의 가능성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좁은 분야를 깊게 파고드는 것, 즉 수직적 프론티어의 발굴, 그리하여 개인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것이 새로운 ‘도전의 장’(場)이란 말이다. 지나친 전문화는 인간소외로 달리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전문화, 직업의식, 장인의식은 보편적 가치로 가는 길이 된다. 괴테가 말했듯이 참다운 특수성은 보편성으로 통한다. 쇼비니즘이 아닌 건강한 향토성과 민족적 특성은 국제성이나 보편성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인간존중이란 보편적 가치는 개인주의의 천착으로 획득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일제 시대의 우리 젊은이들이 지향했던 의미 체계가 ‘독립’, 6·25이후가 ‘반공’, 70년대가 ‘근대화’였다면 80년대는 ‘인간화’여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사회학자도 있다.
80년대의 주인공인 베이비 붐 세대는 ‘인간화’를, 살아가는 보람으로 삼기에 가장 적합한 경험을 해왔다. 비인간화의 풍토를 헤쳐온 자기성찰에서 비로소 ‘인간화’에의 열망이 우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를 읽을 때마다 받는 감동이 있다.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그릇은 너무나 크고 넓고 따뜻하다. 왜소해진 현대인의 눈에 비친 그 시대 인물들은 모두가 영웅 같다. 그러나 그런 위인들의 삶을 80년대를 사는 베이비붐 세대가 복사해 가져다 놓고 본받을 수는 없다. 우리는 시대를 거스르지 않고 새로운 인간형을 모색해야 한다. 베이비 붐 세대만큼 새로운 한국인상을 빚어내기에 적합한 집단도 없을 것이다.
가장 많은 한국인을 대표하고, 가장 건강하고, 폭 넓은 동질성과 공동 체험을 갖고 있고, 대중 문화의 본격적 수용충이기도 한 그들이기 때문이다. 고도 성장의 혜택과 그 재앙을 아울러 경험하면서 우리 사회를 충격, 변화시켰고 스스로도 변화해 간 ‘근대화의 장남’이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정과 나라의 희망이었던 세대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한국인像(상)의 창조는 베이비 붐 세대의 역사적 사명일 것이다. 한국 사회의 주류는 어차피 서구화로 향해 달리고 있다. 베이비 붐 세대가 보여 주기 시작한 개인주의, 다양성, 전문화, 정치적 무관심의 추세는 다른 인구 계층으로 확산될 것이다.
베이비 붐 세대는 그 덩지로 해서 한국을 서구화로 몰고가는 가장 강력한 견인차가 될 것이다. 전통의 단절이 없었던 일본보다도 허물어진 전통을 뒤로 하고 새출발한 한국이 훨씬 더 빨리, 더 비슷하게 서구를 닮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학자들도 있다. 물론 서구화와 발전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서구화가 반드시 인간다운 삶의 진전을 약속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인구 구조면에서 한국은 수십년의 인구학적 후진성을 가졌다고 한다. 15세 이하의 연령층 인구가 전체의 약 32%나 돼 경제 활동 인구의 부양 부담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서기 2천년에 가면 15세이하 연령층의 비율이 26%로 떨어져 그 짐이 가볍게 될 것이다. 이런 인구 구조의 선진화도 사회 중견층을 보다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나는 어릴 때 대통령 이름도 모르는 미국인이 많고, 일본 소년의 희망이 주로 야구 선수라는 기사를 읽고는 “무슨 이런 나라도 있나?”하고 의아해 했던 걸 아직 기억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20여년 뒤 나는 지금 그런 나라에 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시 20년 뒤엔 지금의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한국에 내가 살고 있을까?
남이 걸어간 길을 뒤쫓아 가는 건 안전한 일이지만 미리 다 알아버린 추리 소설처럼 재미나 보람은 덜할 것이다. 좀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길, 새로운 삶의 방식, 즉 새로운 문화, 가치관, 인간상을 창조할 순 없을까? 우리의 근대화는 인간 소외의 서구화가 아니라 인간 중심의 서구화일 수는 없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베이비 붐 세대는 갖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