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발주기업 선정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평가경제계 우려..“기업 최고의 덕목은 이윤추구와 고용창출”시정(市政)과 비시정(非市政) 혼동..독선적인 행정력 남용 지적도
  • ▲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 당시의 박원순 서울시장(자료사진).ⓒ 연합뉴스
    ▲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 당시의 박원순 서울시장(자료사진).ⓒ 연합뉴스

     

    서울시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발주계약의 주요지표로 적극 반영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시의 방침에 따라 빠르면 올 하반기부터 시가 만든 ‘사회적 책임’ 평가지표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기업은 발주기업 선정이나 입찰에서 불이익을 받을 전망이다.

    발주기업 선정에서 ‘사회적 책임’을 평가지표로 반영하는 것은 서울시가 세계에서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정부도 아닌 자치단체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나선 것은 그 자체로도 이례적이다.
    더구나 시는 이런 방침을 단순한 캠페인이나 권고에 그치지 않고 실제 시정에 도입했다.

    이처럼 과격한 정책을 들고 나온데 대한 시의 설명은 간결하다.

    기업의 무분별한 이윤추구가 부의 양극화를 초래했고, 이로 인해 소외계층이 양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기업들이 사회적 경제적 갈등을 부추기고 있어, 폐단을 막기 위한 제도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시는 발주기업 선정에 있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평가항목으로 반영하는 제도를 도입해 폐단을 없애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란 기업활동으로 인한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기업이 상응하는 사회적, 윤리적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국가와 기업마다 처한 현실이 달라 국제적으로 통일된 정의는 아직 없으나 일반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기업이 이윤추구 이외에 법령과 윤리를 준수하고, 소비자를 비롯한 이해관계자의 요구에 적절히 대응함으로써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책임 있는 활동.

    구체적으로는
    ① 경제적 책임(이윤극대화와 고용의 창출),
    ② 법적인 책임(회계의 투명성, 성실한 납세, 소비자 권익 보호),
    ③ 윤리적 책임(환경 및 윤리경영, 제조물 책임, 여성ᆞ·장애인 소수인종 등에 대한 공정한 대우 등),
    ④ 자선적  책임(사회공헌 또는 교육ᆞ·문화·ᆞ체육 활동 등에 대한 기업의 지원)
    으로 나눌 수 있다.

    평가를 위한 구체적인 로드 맵도 이미 나왔다.

    시는 지난해 말 기업의 CSR 계약방안 마련을 위한 연구용역을 발주하고, 사업자 선정작업에 들어갔다.

    시는 대기업, 중견기업 등 기업의 규모와 특성을 고려한 CSR수치를 계량화한 지표(안)을 올 상반기 안에 만든다는 계획이다.

    이어 시는 평가지표 개발을 마무리하는 대로 하반기부터 실제 발주기업 평가에 적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결국 앞으로 서울시 발주 사업에 참여하는 기업은 ‘환경 경영’, ‘윤리 경영’, ‘사회공헌’, ‘소비자 및 소수자 권익보호’ 등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시의 이런 행보를 바라보는 눈길이 곱지만은 않다.

    당장 “기업이 참여연대냐” 라는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시가 우월적 지위를 앞세워 행정권을 남용하다는 쓴소리도 있다.
    이윤추구와 고용의 창출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기업의 본질을 시가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도 거세다.

    중앙정부 못지않은 싱크탱크와 태크노크라트(technocrat)를 보유한 서울시가 상식 밖의 발상을 들고 나온 것은 박원순 시장과 시민단체에 대한 눈치보기 때문이란 목소리도 적지 않다.

    시민단체 출신인 박원순 시장이 취임하면서 시는 유독 ‘사회적 책임’, ‘사회적 경제’를 강조하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발주기업 평가에 반영하겠다는 구상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문제는 시가 시정(市政)과 비시정(非市政)을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권고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규제의 대상일 수는 없다.
    어느 나라도 행정력에 터 잡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제도화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사회복지 체계가 가장 잘 갖춰진 북유럽의 국가들에서도 이런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세계최초로 CSR을 제도화 한 지방정부’라는 것을 자랑하기에 앞서, 왜 북유럽의 복지선진국들이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는지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시의 CSR 평가가 오히려 자본력이 취약한 중견기업 이하에겐 ‘역차별’로 작용할 수 있다는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본력이 약한 중·소기업들이 CSR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시가 정책의 방향을 변경하지 않는 한 사상 초유의 CSR 평가는 하반기부터 시행될 가능성이 높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않은 새로운 규제항목이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시정(市政)과 기업의 본질을 망각한 서울시의 막가파식 행정에 대한 경제계의 우려가 더욱 깊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