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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표의 역사 앨범> 사진으로 보는 반세기전 시간 여행④
존슨 美대통령, 전용기를 김포에 보내 '국빈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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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해외순방은 국민의 세금이 상당히 수반되는 최고의 외교행위이자, 고도의 정치행위다. 따라서 대통령은 해외순방 시 국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하며, 반드시 순방후에 국민에게 그 성과를 보고해야할 책무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오늘까지 해외순방의 이런 외교적·정치적인 중요한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책무를 가장 성실히 수행한 국가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 대통령’으로 표기 통일)이다. 박 대통령은 1961년 11월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방
문할때부터 1968년 9월 호주·뉴질랜드 방문까지 7차례의 공식 해외순방 내용을 모두 최소의 경비를 들여 책자로 제작토록 했다. 그 결과 6차례는 국문으로 1000부씩 제작됐으며, 그중 2차례는 영문으로도 500부씩 제작됐다. 그리고 1차례는 영문으로만 500부 제작됐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기록된 이 간행물을 언론사, 여야 지도자, 공공도서관 등 주요 기관에 배포하여 역사의 기록으로 남도록 했다.
한편 공식 정부간행물이외에 박 대통령은 순방기록을 시판용으로 발간하도록 허가했는데, 이는 국민에게 순방성과를 간접적으로 보고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정부의 자료지원을 받은 동아출판사는 정부간행물보다 몇 개월 후에 내용과 사진이 풍부한 책을 4차례 발간했다. (박 대통령 해외순방 책자 총 13권 목록: 최종회 참조)
이를 감안해 보면, 박 대통령은 국민에게 봉사하고 소통하려는 점에서 소위 선진국의 국가원수들보다도 더 민주적이고 선진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민을 존중하고 소통하려는 이런 유산이 뉴미디어 시대에 맞게 변용되어 박근혜 정부에도 이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사진 중심으로 반세기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현장 시리즈<4> 1965년 5월 미국 국빈방문
월남 파병의 결단! 이미자 '동백 아가씨' 눈물 참다
우리 국가원수의 수많은 해외순방 중에서 대한민국의 국격(國格)을 높이는데 가장 크게 기여했던 사례는 1965년 5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 대통령’으로 표기 통일)의 미국 국빈방문이 아닐까 한다.
왜 그럴까?
우선 1960년 초반, 미국과 소련이 주축이 된 극단적인 냉전구조 아래에서
미국과 한국이 당면했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1961년 취임한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 위기 해결과 베트남 파병에서 보듯이 소련의 팽창정책에 강력히 대응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1963년 11월 흉탄에 맞아 서거하고, 부통령이던 존슨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이어 받은 후 베트남전쟁은 본격화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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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은 1964년 11월 3일, 골드워터(Barry Goldwater, 1909~1998) 공화당 후보를
큰 표 차로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박 대통령은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얼마나 울었던가”로 시작되는 ‘동백아가씨’가
한국의 방방곡곡을 울리던 1964년 12월, 독일 국빈방문을 성공리에 마쳤다.
그 시절 그 노래를 오리지널 녹음으로 우선 들어보자.
http://www.youtube.com/watch?v=zqsbeK-mxiU -
‘동백아가씨’를 타이틀곡으로 1964년 발표된 LP음반은 무려 100만장 판매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1965년 1월 20일에 취임식을 끝낸 존슨 대통령은 한 달 남짓 후인 3월 1일,
아래와 같은 초청서한을 박 대통령에게 보내왔다. -
짤막한 서한이지만, 존슨 대통령은 “두 나라의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될” 국빈방문을 준비하고 있었고,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국격을 업그레이드 시킬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박 대통령의 국빈방문의 연결고리가 된 베트남전쟁과 우리의 참전에 관해서 간략히 살펴보자.
월남 파병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이뤄졌으며,
1964년 9월, 이동외과 의료 병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 파견이 시초였다.
1965년 2월에는 2,000여 명의 후방군사원조지원단 비둘기 부대를 파병했다.
전투병력 파병은 박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 직후인 1965년 7월 2일 결정되어
그해 10월 9일 해병 청룡부대가, 10월 22일 육군 맹호부대가 파병되고, 십자성부대, 백구부대 등도 파병됐다. 1966년 혜산진부대와 백마부대가 이어짐으로써 파견병력수가 4만 8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후 1973년 3월 완전철수 할 때까지 8년 동안 미국 다음으로 많은 총 34만 명이 참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반면에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는 적지 않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그런 고귀한 희생으로 많은 외화를 획득할 수 있었고 이는 우리 경제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또한 군사기술 및 군장비 등의 현대화와 한·미 군사동맹 관계를 증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존슨 대통령의 초청을 받은 박 대통령은 1965년 5월 16일부터 27일까지
육영수 여사와 미국을 국빈방문했다.
공보부는 1965년 7월, <박정희 대통령 방미록> 국문책자 1000부를 발간했다.
(세로 26,6cm x 가로 19.7cm, 14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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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발
5.16군사혁명 4주년인 1965년 5월 16일 오후 2시 25분, 박 대통령 내외는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입법, 사법, 행정부 요인들과 외교사절의 인사를 받고, 21발의 예포가 울리는 가운데 의장대를 사열한 후,
박 대통령 내외는 존슨 대통령이 보내온 미국 대통령 전용기 보잉 707 제트기에 트랩에 올랐다.
공식·비공식 수행원 25명은 이미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가 내려서 출국인사말은 하지 않고 기자들에게 자료를 제공했다. -
로이드 핸드(Lloyd Hand) 미 국무부 의전장이 박 대통령에게 전용기는 ‘날으는 응접실’이라며 세계 어디와도 통화가 가능하다고 보고한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와 연결을 지시하며, 박근혜 당선인(당시 13세)이 전화를 받자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전화기를 육영수 여사에게 넘겼다. -
워싱턴 DC에서 멀지 않은 랭글리(Langley)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박 대통령 내외는 버지니아주의 옛 수도 윌리엄스버그의 알렌버드 하우스에서 1박을 한 후
5월 17일 오전에 헬리콥터 편으로 워싱턴에 도착했다.
2) 워싱턴 일정
백악관 남쪽의 엘립스(Ellyse) 공원에서 내린 박 대통령 내외는 승용차로 갈아타고 백악관으로 이동했으며, 존슨 대통령은 박 대통령을 아주 반갑게 맞았다. -
첫 번째는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존슨은 부통령으로 공항에서 박 의장을 영접했었다.
두 번째는 케네디가 1963년 11월 서거했을 때, 당시 민선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당선인 내외가 장례식에 참석하여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 대통령을 을 만났다.
세 번째 만남은 1964년 11월 대선에서 승리하여 1965년 1월 취임한 존슨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대해 이뤄졌으며, 이때 두 정상은 한·미관계사에서 최상의 우의를 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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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대기 중이던 월터 토브리너(Walter N. Tobriner, 1902~1979) 워싱턴 시장이 박 대통령에게 ‘자유의 열쇠’를 증정하고, 5월 17일을 ‘박 대통령 내외의 날’로 선포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하자, 수많은 군중이 환호했다.
박 대통령은 “토머스 제퍼슨이 말한 자유의 물결이 워싱턴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를 휩쓸 것을 확신한다. 이 열쇠가 북한 공산주의 감옥의 자물쇠를 여는데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박 대통령 내외는 러스크 국무부장관 내외가 국무부 귀빈실인 벤자민 프랭클린 룸에서 베푼 오찬회에 참석했는데, 한·미 고위인사 120여명이 참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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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회 시작 전에 두 정상은 선물을 교환하고 만찬장으로 향했다. 만찬에는 미국 상하원 지도자, 대법원 판사, 주지사, 저명 신문발행인 등 언론인, 존슨 대통령의 딸도 참석했다.
만찬장에서 줄리아드 음대교수이며 저명한 비올라 연주자인 월터 트램플러(Walter Trampler, 1915~1997)가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연주했으며, 존슨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의 제1악장을 세기의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로 감상해보자.
http://www.youtube.com/watch?v=GN6XCbu7Sj8 -
한·미 현안에 관해서 협의했다.
이날 박 대통령은 미국 기자협회(National Press Club)의 오찬회에 초청을 받아 연설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했다.
연설에서 그는 “월남의 상황은 15년 전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에서 시도했던 전술의 복제품”이라면서,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자유세계 국가들이 보여줬던 것과 같은 단호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내게 ‘친일’이냐 ‘반일’이냐를 묻는다면 주저 없이 ‘반일’이라고 말하겠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한국인의 가슴에 잊을 수 없는 원한을 심었다. 그러나 대국적인 견지에서 한·일 관계정상화의 의지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질의응답에서 박 대통령은 일본 식민지배와 미군 주둔의 차이가 뭐냐는 질문에 대해 “일본은 도둑질하기 위해 한국에 있었고, 미국은 친구로서 있는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답변해서 박수를 받았다. -
케네디 대통령 묘에 헌화했다. 잠시 묵념하는 동안 박 대통령은 5.16혁명 후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주고 초청하여 격려해주던 동갑내기 친구에 대한 감회에 젖었을 것이다. -
1) 양국이 당면한 공동목표달성을 위해 계속 긴밀히 협력하며, 월남지원에 있어서 긴밀하게 협조할 의도를 재확인한다.
2) 한국의 안전을 위해 미국은 군사원조를 계속하며,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한다.
3) 한국의 경제자립을 위해 미국은 1억 5천만 불의 장기차관을 제공한다.
4) 한·일 국교정상화 후에도 미국의 대한(對韓) 군사지원은 변치 않는다.
5) 한·미 행정협정체결에 원칙적으로 합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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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오전, 뉴욕에 도착한 박 대통령 내외는 카퍼레이드를 벌였으며, 100만 인파의 환영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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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박 대통령은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자, 한국군의 증강에 크게 기여한
밴 플리트(Van Fleet, 1892~9992: 외아들이 한국전쟁에 공군 중위로 참전해 사망) 장군과 조찬을 함께 했다. 이날 10시 30분, 박 대통령 내외는 우주시대의 ‘10억불짜리 박람회’라는 뉴욕 세계박람회를 참관한 후,
오후 1시부터는 한·미 재단이 주최한 오찬회에 참석하여 했다.
오찬회에서는 우리 정악(正樂)이 연주됐으며,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벅 여사와 <순교자>의 저자 리처드 김도 참석했다.
오후 4시 30분, 박 대통령은 유엔본부를 방문하여 우탄트 사무총장과 한반도 문제와 국제정세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
오찬회에서 박 대통령은 “나는 어린 시절부터 록펠러 일가를 알고 있습니다. 특히 록펠러 총재의 선친이 평생 보여준 덕목 중에서 절약정신에 감명을 받아 나의 생활신조로 삼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극장 구경할 돈도 주지 않을 정도로 검소하고 엄격한 생활을 하는 록펠러 가문이 인류의 복지 증진에 헌신하여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록펠러 재단을 탄생시킨 것을 알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
이어 박 대통령은 형벌을 받고 있는 생도를 외국 국가원수가 방문하여 특사(特赦)할 권한을 이용하여 사관생도 250명의 형벌을 사면해줬다,
이렇게 애교스럽고 유머러스한 미국의 관례를 체험한 다음, 박 대통령은 생도식당에서 램퍼트 교장과 생도들과 점심을 함께 한 후, 교직원과 2600명의 생도들을 대상으로 아래 요지의 연설을 했다.
“본인은 세계평화와 자유의 사령탑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가장 소중하며 진정한 힘의 원천은 바로 웨스트포인트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웨스트포인트가 그 어떤 첨단과학의 가공할 만한 파괴의 힘, 또는 그 어느 물리적인 힘보다도 더 귀중한 지혜와 정의와 용감성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우주를 정복할 수 있는 힘을 가졌더라도 만약 이 정의라는 샘이 고갈된다면, 모든 것은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
5월 22일 오전, 박 대통령은 존스 로린 철강회사(Jones & Laughlin Steel Corporation)의 알리퀴파 공장을 시찰했다. 박 대통령은 헬멧을 쓰고 세심하게 공장을 두루 살폈으며, 시찰 도중 근로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그들이 내민 수첩에 서명해주기도 했다. -
이어 디버스 소장이 주최한 오찬회에 참석한 다음,
외국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로켓 발사실황을 직접 목격했다.
박 대통령은 성공리에 끝난 로켓 발사 광경을 보고 감동을 받아 즉석에서 특별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
5월 24일, LA로 이동하기 위해 케이프케네디 공항에 갔을 때, 박 대통령과 이름이 같은 한국여성이 찾아와, 미국에 입양된 후 미국인 남편과 결혼해 낳은 2개월 된 아기를 대통령 내외에게 자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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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회에는 로스앤젤레스 시의 저명인사들과 밥 호프(Bob Hope, 1903~2003), 셜리 맥레인(Shirley Maclaine, 1934~), 론다 플레밍(Rhonda Fleming, 1923~) 등 한국에도 이름이 알려진 할리우드의 명배우들도 참석했다.
5월 25일, 박 대통령 내외는 로스앤젤레스 교포 및 유학생 300여명과 조찬을 함께 했다.
조찬회에는 안창호 선생의 미망인과 그분의 아들 안필립, 그리고 왕년의 독립투사들도 많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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