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첩보 액션스릴러!

<89> 카람빗

| 최종편집 2013.03.08 09: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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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89> 카람빗


“아까 말한 주재자의 특혜가 그것이었나 보군?”
“그래, 이건 카람빗이라고 하지. 그런데 크기에 비해 꽤 쓸 만하더라고.”
“어쨌든 좋아.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당신 그거 알아?”
“!”
“카람빗을 꺼내는 순간, 이 게임의 승자가 이미 결정됐다는 거.”
피오기가 마침내 주머니에서 카람빗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피오기의 경고성 눈빛과 함께 카람빗의 검광이 허공에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카람빗이 부리는 귀신의 조화는 어지러울 정도로 눈부시고 몽환적이었다. 피오기는 주변 상황을 이용해 모든 힘을 실어서 현우의 얼굴을 직선으로 공격했다. 현우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위험요소를 감지하자마자 방어기술과 공격기술을 활용해 신속하게 위기를 벗어났다. 하지만 살짝 빗나간 카람빗의 흔적이 옥수수 수염처럼 광대뼈 부근에 길게 남았다.
“이거, 어쩌지. 미시리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으니. 크크크.”
“신경 쓰지 마. 타투를 했다고 생각하지 뭐.”
그 모습을 본 피오기가 신선한 고기냄새를 맡고 달려가는 하이에나처럼 다시 냉혹한 살인마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곤 곧바로 2차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카람빗이 쇄골 위 움푹 파인 자리를 향했다. 그곳은 외과의사들이 기관절개술을 시행할 때 자르는 부위로 강한 근육이 전혀 없어 예리한 칼날에 쉽게 손상될 수 있었다. 현우는 다시 침착하게 공격 범위를 벗어나며 이미 손상된 피오기의 약점을 재차 공격했다. 이번에는 무릎의 옆을 차 내측 측부인대를 파열시켰다. 순간 피오기가 심장마비를 일으킨 듯 숨을 멈추며 카람빗을 떨어뜨렸다.
“으으으.”

현우는 피오기가 허리를 굽히자 재빨리 무방비상태인 그의 한쪽 팔을 움켜잡았다. 엎어치기로 피오기를 갑판 위에 메다꽂으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오히려 피오기가 현우의 양 어깨를 잡고 끌어당겼다. 동시에 제자리에서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무에타이의 무릎차기로 정확히 현우의 늑골을 타격했다. 그야말로 본능적이고 신속한 공격이었다. 이제 상황은 오히려 현우에게 불리했다. 피오기는 현우에게 반격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곧이어 성한 다리로 체중을 지탱하고 부상당한 다리로 현우의 관자놀이에 돌려차기를 적중시켰다. 비명소리는 피오기의 입에서 터져 나왔지만,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건 현우였다. 현우는 또다시 허공을 날아 갑판에 처박혔다. 현우는 정말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게 귀찮았다.
“미시리, 상황인지는 제2의 천성이야. 최소한 몇 발자국 앞만 내다봐도 위험한 상황을 미리 예방할 수 있지. 물론 상황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위험에 대한 반응시간이 몇 배나 빨라지고. 그럼 이제 반동의 살가죽을 조금 찢고, 손을 집어넣어 있는 힘껏 펄떡거리는 심장을 움켜잡아도 되겠지? 푸하하하!”
“탕!”
“윽!”
“탕! 탕! 탕!”
“피오기 동무, 카람빗에서 천천히 손을 떼시오. 아니면 다음 총알은 동무의 머리를 관통할 것이오.”
“피오기 동무? 그럼, 설마 동무가…….”
“그렇소! 난 과거에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이었던 윤지원이요.”
“크크크, 이거 상황이 아주 재밌게 됐군.”
“현우 씨, 괜찮아요?”
“예, 내일의 계획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렇지 움직일 수는 있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천천히 오세요. 홍화 동무, 동무는 저쪽으로 가고.”
“!”
그런데 바로 그때 지원이 들고 있던 AK-74 돌격소총이 손에서 빠져나가 바다로 떨어졌다. 지원의 지시에 따라 앞으로 걸어가던 홍화가 순식간에 돌려차기를 해 지원의 무장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순간 도주선에는 지극히 짧은 시간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네 사람은 곧바로 다음 행동을 예상하고 상대를 골라 빠르게 움직였다. 현우는 피오기를, 지원은 홍화와 맞섰다. 그런데 이런 집단난투극에서 보다 효과적인 전술은 각자의 파상적인 공격과 수비보다는 동료에게 의지해 공격과 방어를 함께 수행하는 팀워크였다. 현우와 지원은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해 등을 맞대고 피오기와 홍화를 상대했다.
“현우 씨, 이제 진실을 말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지원 씨도 제 정체가 궁금한가요?”
“그래요.”
“난 과거 비밀통치자금을 관리하던 리재경 씨의 탈출을 도왔습니다.”
“아바지의 친구 리재경 씨요?”
“그렇습니다. 당시 리재경 씨는 김정은의 왕조세습이 공식화되자 북한 정권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거기다 황장엽 씨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북한을 개방시킬 가능성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했고요.”
“그럼 혹시 메시지 속의 ‘천사’가 바로 현우 씨?”
“아닙니다. 전 단지 천사를 창조해 악마를 불러들인 것뿐입니다.”
“그럼 그 모든 게 공작원들을 유인하려는 미끼였다는 소리인가요?”
“맞습니다. 더 정확히는 리재경의 죽음에 대한 저 나름의 복수였습니다.”
“세상에! 그럼 현우 씨도 정원 씨와 함께 국정원에서 근무하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주 놀라운 사실을 하나 확인했습니다.”
“그 내용이 뭐죠?”
“지원 씨의 아버지인 윤일현 씨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애초 리재경 씨는 윤일현 씨가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을 적극 반대했답니다.”
“…….”
“믿기 힘들겠지만 아버지 윤일현 씨는 북한에서 벌어지는 홀로도모르(Holodomor·인위적 기근에 의한 대학살)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자신의 출세와 행복을 포기한 진정한 영웅이셨습니다. 그리고 리재경 씨는 아버지와 뜻을 함께 해 김정일 사후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 치밀한 계획까지 세웠고요.”
“그럼 아바지가 돌아가실 때 죄목으로 거론된 국가전복죄가 맞는다는 말씀이세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윤일현 씨가 리재경 씨의 경고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하셨습니다. 그것이 결국 지원 씨 아버지의 최후가 됐고 말입니다.”
“그건 바로 저 때문이었어요.”
“!”
“저를 암울한 북한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사지에 들어오신 거예요.”
“그랬군요. 자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었어요. 아무튼 저는 리재경 피살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현장근무에서 제외돼 최근까지 근신 중이었습니다.”
“그게 모두 사실이었다니…….”
“지원 씨, 고개를 숙여요!”
“퍽!”
“윽!”
“벌써 지친 건가?”
“천만에.”
“내가 마지막 선물로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 해줄까.”
“죽음에 이르러 남기는 유언인가?”
“아니. 미시리에게 하는 작별인사가 더 정확할거야.”
“그래, 해봐.”
“크크크, 미시리가 방금 말한 리재경의 암살을 기획한 장본인이 바로 나야. 그리고 저기 홍화 동무가 민족의 반역자 리재경의 조카고.”
“!”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나에게 리재경의 암살을 지시한 명령권자야.”
“그게 누구지?”
“바로 홍화 동무의 아바지 리명수 상장.”
“아니, 왜 동생이 친형을.”
“리재경이 해외로 김정일의 비밀통치자금을 몰래 빼돌리려 한다는 첩보를 사전에 입수했거든. 그런데 리명수 상장을 옹위하는 인민무력부도 그 통치자금이 꼭 필요했지.”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리는군. 결국 리명수를 중심으로 한 인민무력부의 권력욕 때문이었군.”
“글쎄, 그 큰 뜻을 권력욕이라고 해야 하나. 난 인민을 위한 구국의 결단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제대로 만났어.”
“그러게, 이런 걸 두고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 하는 건가. 크크크.”
“홍화 동무, 동무의 상대는 바로 나야.”
“퍽!”
“컥!”
싸움의 목적이 보다 분명해졌다. 그것은 개인의 사사로움을 넘어 거국적인 목표로 치달았다. 한쪽은 무급노동의 노예로 전락한 주민들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한반도에서의 전화(戰禍)를 계획하고, 또 다른 한쪽은 전화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피오기의 생존본능이 되살아나 현우와 지원이 양쪽에서 협공을 받는 모습으로 전개됐다. 피오기는 카람빗을 이용해 신체의 취약한 부분을 고집스럽게 공격했다. 거기다 피오기의 발차기를 팔로 막은 현우가 고통을 호소했다. 아마도 피오기의 엄청난 위력에 왼쪽 아래팔뼈인 척골과 요골이 부러진 것 같았다. 피오기의 입가에 야비하고 사악한 죽음의 꽃이 한 송이 피었다. 홍화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지원은 현우의 비명소리를 듣고 위험을 감지했다. 피오기는 이 절묘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미시리, 정말 지겨운 싸움이었어. 그럼 잘 가라우!”
“!”
역시나 피오기는 힘을 적게 쓰고 상대를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는 급소를 노렸다. 그때 지원이 현우를 한쪽으로 밀치며 피오기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내달렸다. 충격을 덜 받기 위해 거리를 좁히고 공격의 방향을 바꾸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다음 순간 카람빗이 폭탄조끼를 찢고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지원은 자신의 상체로 섬뜩한 카람빗을 통해 전해지는 엄청난 충격을 방패처럼 모두 흡수했다. 정말 무모하고 위험한 판단이었다. 그런데 카람빗은 애초 찌르는 용도보다는 휘두르고 찍기에 더 적합한 형태다. 그래서 카람빗이 지원의 상체에 꽂히면서 1차 충격을 전하고, 2차로 폭탄조끼 위를 대각선으로 미끄러지며 땅이 갈라지듯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다. 지원도 역시 피오기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몸이 날아가 기관실벽에 부딪혀 의식을 잃고 말았다.
“으으으, 이 무자비한 인간.”
상황을 파악한 현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핏빛으로 변했다. 그때 피오기의 잔혹한 공격이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현우는 피오기의 느린 공격속도를 이용해 태권도의 옆차기로 정확히 옆구리를 가격했다. 피오기는 고통을 참느라 잠시 주춤했다. 현우는 피오기가 숨을 몰아쉬는 사이 몸을 허공에 띄워 곧바로 공중회전차기를 시도했다. 공중회전차기는 현우의 분노를 물리적으로 고스란히 전달했다. 현우의 강력한 발차기에 피오기의 얼굴이 180도 꺾이며 갈매기처럼 허공에 날아올랐다. 그때 도주선이 파도의 최고 정점에서 아래로 떨어짐과 동시에 피오기가 홍화를 덮쳤다. 순간 홍화의 동공이 커지며 울컥하고 피를 토했다. 피오기의 카람빗이 엉뚱하게도 홍화의 심장에 박힌 것이다.
“컥!”
“홍화 동무, 괜찮소?”
“젠장! 운이 억세게도 없는 날이네요.”
“그러게 말이오.”
“부조장 동무?”
“말하시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어서 공해로 빠져나가야 해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알고 있소. 하지만 저 남조선 반동 새끼를 여기에 남겨두면 죽을 때까지 철천지한이 될 것이오. 홍화 동무, 내가 저 원수의 심장을 꺼내 동무에게 반드시 선물하겠소.”
“부조장 동무, 난 영원히 동무의 그림자로 남을 거예요.”
“나도 그렇소. 나도 동무가 가는 곳이면 이제부터 어디든 따라가겠소.”
“그런데 제 역할은 아무래도 여기가 끝인 것 같아요.”
“아니오. 동무의 마지막 과업은 나와 함께 조국에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오.”
“내 꿈은 부조장 동무와 영웅적인 삶을 사는 거였는데, 컥!”
“꼭 그렇게 될 것이오. 날 믿으시오.”
“예, 믿어요. 사실 그동안 제 머릿속에선 삶과 죽음이 원시우주처럼 구분되지 않는 혼돈상태였어요. 그런데 하늘과 땅처럼 이제 그 구별이 확실해지는 것 같아요. 내 인생은 바람이 사라지고 투쟁만 남아 있었어요. 그걸 오늘에야 깨달았고요. 아무튼 지금은 내 삶의 주인공인 된 느낌이에요. 내가 감당해야 할 현실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홍화 동무,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금방 돌아오겠소.”
“예, 여기서 영원히 기다릴게요.”
“미시리! 이제 끝장을 보자.”
피오기는 홍화를 갑판에 뉘어놓자마자 그녀의 가슴에 박힌 카람빗을 다시 뽑아들었다. 그러자 카람빗이 빠진 자리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피오기는 홍화의 양손을 들어 카람빗이 박혔던 위치에 살며시 놓았다. 그러자 뜨거운 피가 단숨에 홍화의 손가락을 집어삼켰다. 마치 식인물고기 떼 같았다. 이제 피오기의 눈엔 죽음의 의미가 없었다. 오직 홍화에게서 본 눈물의 의미만 있었다. 현우도 목숨을 건 결정을 내렸다. 그리곤 늘어진 온몸의 뼈가 욱신거리는 것을 참아내며 이어질 공격에 대비했다. 카람빗의 칼끝에서 한 방울, 두 방울. 삶의 숙성도를 의미하는 홍화의 핏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세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카람빗의 강한 빛이 현우의 시선을 다시 스치고 지나갔다.
“으아아아!”
“!”

피오기는 카람빗에 묻은 홍화의 피를 현우의 피로 씻어내겠다는 각오로 덤벼들었다. 하지만 현우도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을 압도하는 강렬한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피오기를 행해 눈보라처럼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그리고 피오기가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정확한 타격시점을 노려 비상하듯 뛰어올랐다. 순간 현우가 오후의 태양 속으로 사라졌다. 강한 햇빛에 눈을 잃은 피오기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현우는 속도의 감속 없이 방향을 전환해 공격목표를 끝까지 쫓았다. 순간 불길함이 피오기의 뇌리를 스쳤다. 동시에 현우의 공중옆차기가 또 피오기의 상체에 적중하며 늑골을 부러뜨렸다. 피오기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혼미했다. 더불어 카람빗도 무용지물로 변했다. 하지만 피오기의 생존본능만큼은 여전히 강했다. 피오기는 본능적으로 도주선의 측면을 잡고 통로를 따라 비틀거리며 선수로 몸을 피했다.
“헉! 헉! 헉!”
추격자는 현우였다. 배의 머리끝에 다다른 피오기가 도주로가 막히자 할 수 없이 다시 몸을 돌렸다. 순간 다시 한 번 태양 속에서 현우가 나타났다. 아니, 이제는 태양 그 자체처럼 눈부신 광채를 뿌렸다. 최후의 일격이 피오기의 가슴에 또 적중됐다. 그리고 피오기는 터진 모래자루처럼 힘없이 뒤로 나가떨어지며 권선기(통발을 끌어올리는 배 앞에 달려 있는 기계) 근처에 처박혔다. 그런데 거기에는 꽃게잡이조업을 할 때 통발에 연결해 물 밑바닥으로 가라앉히는 갈고리모양의 커다란 닻이 있었다. 닻은 양끝이 창끝처럼 마름모꼴로 아주 날카롭고 예리했다. 피오기의 입에선 한 주먹의 피가 울컥하고 쏟아졌다. 드디어 생사가 극명하게 갈렸다. 어구는 투쟁심을 죽이듯 피오기의 근육질 몸을 그대로 관통해 가슴 앞에서 그 끝을 하늘로 쳐들고 있었다. 이제 피오기는 덫에 걸린 동물처럼 옴짝달싹 못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죽음을 지켜보며 부르르 떨기만 했다.
“컥! 정말 어이없고 황당한 결과로군. 내가 운명의 함정에 빠지다니.”
“누구나 운명의 수레바퀴가 멈출 때가 있지. 당신의 운명은 여기서 멈춘 것뿐이야.”
“그 말을 들으니 약간 위로가 되는군. 사실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웅이 되려한 건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어. 누군가는 배고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인민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어야 했거든. 어두운 삶의 바다에서 길을 안내해줄 희망의 등불 말이야. 만약 신이 북한에 폭정과 기아, 절망과 함께 미래도 주었다면 나는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야.”
“그랬군.”
“이제 그 임무는 누가 대신 맡겠지?”
“아마도.”
“그럼 나는 인민들에게 행동을 보여준 것으로 만족하고 이만 쉬겠소. 무척 피곤하군.”
“아마 당신은 내 기억에 오래 남아 있을 거야.”
“컥! 고맙군, 미시리. 그럼 잘 가게. 아니지. 잘 있으시오. 컥!”
“으으으, 현우 씨!”
“지원 씨, 칼에 찔린 곳은 어때요?”
“폭탄조끼를 입고 있어서 다행히 깊게 박히지는 않았어요. 현우 씨, 어서 탈출해요. 아까 홍화 동무가 급조폭발물의 타이머를 작동시켰어요.”
“부~웅! 부~웅! 부~웅!”
“!”
“세상에! 북한의 화물선이 울리는 기적소리예요. 이대로 계속 달리면 저 화물선과 충돌할 수밖에 없어요.”
“지원 씨, 이쪽으로.”
“현우 씨, 전 여기 남아야 해요. 혼자 가세요.”
“!”
“이 폭탄조끼는 한 번 채우면 절대 풀 수 없도록 특수제작된 거예요. 저와 함께 있으면 현우 씨도 위험해요. 그러니까 어서…….”
“그건 내 정해진 운명이 아니에요. 내 운명은 이미 지원 씨만을 위해 살도록 고정됐거든요. 지원 씨, 당신의 운명을 나와 함께 푸른 자유의 바다에 맡기는 건 어때요?”
“현우~씨.”
“!”
“부~웅! 부~웅! 부~웅!”

현우의 입술이 지원을 덮쳤다. 그리고 두 사람은 너른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제 현우와 지원은 두 바다와 두 해류가 하나로 섞이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 바다는 너울을 만들어 알을 품듯 두 사람을 살포시 안았다. 하지만 피오기와 홍화가 탄 도주선은 두 사람의 악몽 같은 현실을 그대로 남겨둔 채 바람만 싣고 달렸다. 죽음을 향해 돌진한 도주선은 북한 화물선 강남4호 코앞에서 엄청난 굉음을 내며 불덩이로 변했다. 그리고 불덩이로 변한 도주선은 곧장 강남4호에 재앙을 몰아갔다.

“쾅! 쾅!”
잠시 후 선체 전체가 불그레한 녹물을 뒤집어쓴 강남4호에서 두 번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첫 번째는 도주선의 직접적인 충돌로 인해 화물선 측면의 디젤유탱크에 압력이 가해져 디젤유가 기화되면서 발생한 강력한 폭발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폭발은 디젤유탱크에서 발생한 폭발이 바로 옆의 가솔린 탱크에 충격을 가해 일어났다. 순간 탄약고가 폭발하듯 갑판을 뚫은 시커먼 불덩이가 불기둥을 이루며 수백 미터 상공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불기둥의 파편들이 아주 멀리까지 날아가 넓은 바다에 광범위하게 떨어졌다. 마치 신의 분노로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 바다를 완전히 뒤덮은 것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도주선의 급조폭발물과 일체형으로 제작된 지원의 폭탄조끼는 터지지 않았다. 현우는 지원의 폭탄조끼를 살펴보고 그 이유를 금방 알았다. 피오기의 카람빗 칼날이 접지선을 절단한 게 그 이유였다.
“사실 전 우리의 사랑이 이룰 수 없는 엇갈린 운명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아름다운 사랑으로 남기려고 한 거예요. 저 때문에 현우 씨가 죽었다고 생각했거든요.”
“자책하지 말아요. 그건 누군가에게 듣는 독한 말보다 더 나쁜 거예요.”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웠어요. 그래서 현우 씨에게로 가는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았어요.”
“비극의 탈을 쓴 희극도 비극이에요. 희극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거예요.”
“맞아요, 현우 씨.”
“전 지원 씨가 아니면 영원히 혼자일 거예요. 내게 희극은 오직 지원 씨의 사랑나무에서만 떨어지거든요.”
“저도요, 현우 씨.”
“타타타타타타타!”
“이거, 진짜 엄청난 폭발은 여기서 일어나고 있었군.”
“팀장님, 우리가 너무 눈치가 없는 것 아닐까요?”
“그런가. 현우야! 우선 이것부터 받아라. 구명조끼다.”
“고맙다.”
“그럼, 하던 것 마저 해라. 난 선원들의 구조상황을 파악하고 조금 있다 다시 올게.”
“짜식은, 후후후.”
“아참! 정원 씨,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뭐죠?”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선물이라고요?”
“예, 블랙 북(Black Book)이에요.”
“혹시 북한의 대남공작부서가 최우선 공격목표로 설정한 남한 내 주요 인사들의 명단 말인가요?”
“예, 맞아요.”
“정말 의외의 수확이네요. 고맙습니다, 지원 씨.”
“그럼 이제 둘만 있어도 되죠?”
“당연하죠.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그리고 부를 때까지 이 부근엔 얼씬도 않겠습니다.”
“팀장님, 저도 사랑의 바다에 빠지고 싶어요.”
“뭐!”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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