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선엽 장군을 ‘명예원수’로!”
예비역 단체, 정부에 추대 건의...
“우리도 이젠 ‘6․25전쟁 영웅’이 스러지기 전에
원로에 대한 ‘명예원수’ 칭호 부여가 필요한 시기 아닐까?”
이현오 /뉴데일리 객원기자 -
"내 말 잘 들어라. 우리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후퇴할 곳이 없다. 물러서면 나라가 망한다.
우리와 같이 싸우는 미군들은 우리를 믿고 싸우는데 우리가 먼저 후퇴하다니, 이 무슨 꼴인가.
대한 남아로 다시 싸우자. 내가 앞장서겠으니 나를 따르라.
내가 적을 무서워해 후퇴하거든 나를 쏘아라."1950년 8월21일 6․25 한국전쟁 중 격전지 중의 격전지로 일컬어지는 경북 칠곡 낙동강 지구 다부동 전투에서 2만여 북한군의 공세에 맞서 3분의1에 불과한 병력으로 치열한 공방을 벌이다 사기를 잃고 후퇴하는 사단 장병을 향해 백선엽 1사단장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지휘한 말이다.
이 전투에서 아군이 패할 경우 대구-경북이 고립무원에 빠지게 될 것임은 뻔한 상황이었다. 하늘의 도우심인가, 백 장군의 진두지휘에 고무된 1사단 장병의 애국투혼의 발휘였나? 전세는 극적으로 역전되어 이후 1사단이 차량 화 미군부대를 제치고 평양을 선두 입성하는 단초가 되기에 이른다.
최근 한 예비역 단체가 백선엽(전 육참총장, 합참의장) 장군을 ‘명예원수’ 추대를 건의해 우리사회에 백 장군의 ‘명예원수’ 추대 논의가 다시 불을 지필지 주목된다.
지난 21일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참전/친목단체인 육․해․공군․해병대 예비역 영관장교연합회(회장 권오강)가 국방회관에서 가진 2013년 정기총회를 겸한 북핵규탄 결의대회를 개최하면서 백선엽 장군의 ‘명예원수’추대를 관계기관에 건의했다. 이 단체는 3년 전인 지난 2010년 3월에도 같은 자리에서 동일하게 ‘명예원수’추대를 건의한바 있다.
예비역 영관장교연합회는 이 날 7만여 회원 연합회 명의로 밝힌 추대 건의문에서 “6․25 남침전쟁 63주년,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아 참전우방국을 비롯한 세계 각 국이 그 분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고 특히 미국이 6․25전쟁 영웅으로 명명한 지 오래인 백선엽 장군을 명예원수, 5성장군으로 추대 건의 한다”면서 6․25전쟁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군인으로서의 탁월한 작전 지휘력과 국가발전을 위해 헌신한 업적 등을 열거했다.
건의문은 또 “6․25전쟁으로 850만 예비역과 100만에 가까운 현역군인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명예원수, 5성장군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국군으로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국군의 중추 역할자였던 호국의 간성들인 (예, 영관장교연합회) 7만여 명의 간절한 심정으로 다시 추대 건의 한다”고 소망을 담았다.
-
백선엽 장군, 올해 연세 93세다. 찬․반은 어디에나 있겠지만 그 함자(銜字) 만으로도 장군의 이름은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고 사회 저변에 그의 이름은 6․25를 대변하는 상징어로 일컬어질 뿐 아니라 6․25한국전쟁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며, 최고 국가 원로로서 국내외 현역과 예비역의 우상이다. 물론 우리 국민 다수의 존경과 사랑의 대상임도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장군에 대해 ‘명예 원수’ 추대와 논의가 다시 일게 됨은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인지도 모른다. 물론 2009년 3월 추대 논의와 더불어 구체적인 시기와 방법, 절차 등이 활발하게 이어졌지만 군인사법에 대한 규정 미비와 일부에서의 시각차 등으로 중단되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국방부는 2010년 작성한 추진계획에서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대가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선양하고, 국민안보의식을 제고시키기 위해 추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사회 일각 한편에서 장군이 일제 강점하 만주군 장교로 임관했다는 점과 ‘간도 특설대’ 근무 경력을 꼬투리 잡았다.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5년 출범한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는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장군을 친일 인사로 등록 했다. 가족들의 “근거가 없는 얘기”라는 이의 제기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하지만 ‘간도 특설대는 팔로군 토벌에 주력했다’고 장군의 회고록 <군과 나>에서 밝히고 있다.
지금도 백선엽 장군에 대한 당시의 행적과 공과(功過)가 인터넷 상에서 떠돌고 있다. 소위 일제시대 간도 특설대에 근무하면서 독립군을 탄압했다는 이야기다. 지난해 민주통합당 김광진 의원은 백 장군을 '민족 반역자'라고 막가파 적 발언을 해 참전 예비역 단체와 보수 진영으로부터 거센 항의와 비판을 자초했다.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박 (論駁) 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은 이승만대로, 김구는 김구 방식대로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해 대한민국 건국과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다지는데 초석을 놓았다. 백선엽 장군 또한 북한의 김일성 공산주의자의 불법남침으로부터 무너져가는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피와 땀을 바쳤고, 그 결과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하는 발판을 구축했다.
어느 누군가를 평가할 때 의도적이건 의도적이 아니건 때로는 억측과 궤변, 날조와 모략도 있고, 편견과 편향, 맹목적 추종도 있다. 역사가 증거 해주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가치는 당대 시대상황을 어떻게 극복했으며,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안목이 오늘에 어떻게 투영되게 했느냐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최근 북한 김정은 집단의 ‘전쟁불사’ 무력시위와 위협적 언동(言動)이 국민의 몸과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굳건하게 우리 스스로의 영역을 지키고 있다. 바로 튼튼한 ‘한미동맹’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한·미동맹’ 용어를 처음 꺼낸 주인공이 바로 백선엽 장군이다. 전쟁 와중에도 미 군사고문단은 물론,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 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한 것이 시발이다.
올해는 6․25한국전쟁 발발 63주년이자 한미동맹 60주년이 되는 해다. 미국 독일 러시아 등 몇몇 국가에서는 전시에 원수가 배출됐다.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북한은 김일성․김정일이 대원수, 애송이 김정은마저 지난해 7월 원수 칭호를 부여 받았다. 영국엔 몽고메리, 미국 맥아더, 독일엔 롬멜, 일본 도고 헤이하치로가 원수 계급장을 달았다.
지난 1월18일 대한민국 국군 창설 산파역할을 한 군사영어학교 출신 모임인 ‘창군동우회’ 기념식에서 백선엽 장군님을 뵈었다. 93세 연세임에도 여전히 기개 넘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나라의 안위에 대한 염려는 여전하셨다.
우리도 이젠 ‘원수’ 계급장이, 그게 아니라면 원로에 대한 ‘명예원수’ 칭호 부여가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6․25전쟁 영웅이 스러지기 전에.
백선엽 장군은?
6ㆍ25 한국전쟁 당시 1사단장과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전쟁 영웅’.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1920년 11월 23일 출생.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하면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42년 12월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해방 직후 잠시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45년 2월 월남했다.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년 2월에 임관했다. 그해 1월 창설된 국방경비대에서 제5연대장,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제5연대장과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 개성을 관할하는 국군 1 보병사단 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했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白) 야전사령부’를 구성했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이듬해 4월에는 한국군 최초로 근대화된 2군단을 창설했다.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후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썼다. 이때 10개 상비사단 창설(11~20사단), 10개 예비사단 창설 등을 추진했다. 퇴역 후에는 외교관 생활을 한 뒤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현재는 대한민국육군협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이현오(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