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李承晩, 공산당을 절대악으로 보다!

    趙甲濟    


  • 공산당의 선동을 이긴 李承晩(이승만)의 선동:
    공산당 극렬분자들을 반역자, 매국노, 사대주의자, 거짓선동가, 분열주의자, 소련 간첩단, 私利私慾(사리자욕)주의자, 文明파괴자라고 정확히 규정하였다.
     
      누가 이승만을 귀국시켰나?
       
          태평양 전쟁이 原爆 투하로 끝나기 전 미국 정부는 소련군이 참전하기를 바랐다. 그 代價로 소련이 만주와 한반도를 점령하고 지배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이 항복할 뜻을 미국측에 통보하자 딘 러스크와 본스틸 대령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한반도 지도를 참고로 하여 38선을 선택했다. 미국은, 38선을 미군과 소련군의 점령지 분계선으로 하자고 소련측에 제안했다. 스탈린이 이 제안을 거절하고 “부산까지 소련군이 점령 관리하겠다”고 해도 미국이 손을 쓸 수가 없을 때였다. 소련군은 만주를 장악한 데 이어 북한지역으로 넘어오고 있었으나 미군은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일본에 대한 美蘇 분할점령을 생각하고 있던 터라 덜 중요한 한반도에선 미국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남한이 공산화되지 않았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소련군은 소련군에 편입되어 있던 중국공산당 산하 抗日 빨치산 출신 장교 金日成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발탁하여 1945년 9월 북한에 데리고 들어왔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조선독립을 위해 싸운 적은 없다. ‘朝鮮戰爭’이란 책을 쓴 일본공산당원 출신 기자 하기와라 료씨는 “이때 김일성은 조선인의 의식을 갖지 않은 일종의 이방인이었다”고 지적했다.
       바로 이 시기 李承晩은 34년째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소련이 김일성을 데리고 북한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과는 반대로 미국은 미래의 대통령이 귀국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李承晩은 1945년 초 흑해연안 얄타에서 있었던 회담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한반도를 소련에 넘겨주기로 스탈린에게 약속했다는 폭로를 한 적이 있다. 그 전부터 李承晩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태프트-가츠라 밀약을 통하여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를 묵인했듯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지배를 인정하려 한다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여 親蘇的이고 좌경적인 인물들이 박혀 있었던 미 국무부를 화 나게 했었다. 
       李承晩이 주장한 얄타 밀약설은 한참 뒤 회담록이 공개됨으로써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나 1945년 당시엔 미국측이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李承晩이 여행증명서를 받아 귀국을 준비하고 있을 때인 8월 하순부터 국무부와 합참은 여러 가지 트집을 잡고 이유를 달아 ‘反美的 인사’로 낙인찍힌 李承晩의 귀국길을 막았다.
    미국 정부의 비협조로 李承晩은 서울까지 가는 교통편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10월1일자 메모에서 李承晩은 한국을 소련의 영향권 안에 두기로 한 국무부 내의 親共 분자들이 자신의 귀국을 방해한다고 썼다. 李承晩 연구가이기도 한 李庭植 교수(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명예교수)는 ‘해방전후의 이승만과 미국’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증오와 절망감에 쌓인 채 당황하던 이승만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일면식도 없는 육군장교가 느닷없이 나타나 그의 귀국을 재촉했고 그를 서울로 보내준 것이다. 이승만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0월16일이었다.>

       李 교수는 李承晩 귀국의 미스터리를 추적했다.
    미 합참본부가 육군성 군사정보처 워싱턴 출장소장 앞으로 전보를 보냈다.
    <워싱턴에 살고 있는 이승만이란 한국인을 찾아 빨리 서울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부소장인 윌리엄 킨트너 대령은 부하 장교를 시켜서 수소문한 끝에 매사추세츠街의 사무실에 있던 李承晩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승만을 귀국시켜달라고 요청했던 이는 남한 점령 미군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장군이었다.

    하지는 李承晩과 상해 臨政 사람들이 귀국해야 한국의 혼돈상황이 정리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45년 9월13일자 하지 사령부 일일보고서는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이승만을 한국의 孫中山(孫文)으로 여기고 있다”고 했다.
    李承晩은 남한의 좌우익 사람 모두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 중장은 인천에 상륙한 9월8일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말을 잘 하는 해군중령 윌리엄즈를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윌리엄즈는 비행기를 타고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민심동향을 파악했다. 한국의 서민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는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있다는데 왜 모셔오지 않는가?”

       李庭植 교수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들은 해방과 독립을 동일시했고, 미군과 공산세력과의 갈등이 표면화하기 전이라 좌익도, 우익도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9월14일 좌익들이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명단에 李承晩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순진한 한국인들은 해방되고 독립한 나라의 대통령이 李承晩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李承晩이란 이름은 오랫동안 많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위대한 독립투사’라는 傳說的 이미지의 뿌리를 내려놓고 있었다.

       이런 民心보고를 받은 하지 중장이 본국에 李承晩을 귀국시켜달라고 건의했던 것이다. 나중에 李承晩을 싫어하게 되는 하지와 좌익이 그의 귀국을 도운 셈이지만, 근본적으론 李 박사에 대한 한국 민중의 존경과 지지가 그를 불러들인 원동력이었다. 無名의 金日成을 북한으로 데리고 들어와 전설적 김일성 장군으로 조작하여 꼭두각시로 부린 것이 소련군인 데 반해 美 국무부는 李承晩의 귀국을 막고 있었다. 그런 이승만을 조국으로 불러들인 것은 그에 대한 민중의 압도적 지지였다. 이런 출발의 차이가 그 뒤 남북한의 차이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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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공산당을 선제공격하다!
      
       1945년 12월19일 저녁 7시30분 李承晩은 서울중앙방송국(KBS)을 통하여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그때 李 박사는 모든 정당과 政派(정파)를 통합한 汎國民 조직으로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李 박사는 이 일을 방해하는, 朴憲永이 이끄는 공산당을 지목, 결별 선언을 한 것이다.

    당시 공산당은 대중 조직이 가장 강하였다. 30여년 만에 귀국한 李承晩은 카리스마는 있었으나 直系(직계) 조직은 없었다. 하지 사령관의 美軍政 당국도 공산당을 建國 과정에 참여시키려고 하였다. 일종의 左右합작 노선이었다. 트루먼 행정부도 아직은 對蘇(대소) 봉쇄정책을 생각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이런 가운데 李承晩은 이 역사적 연설을 통하여 공산당 극렬분자들을 반역자, 매국노, 사대주의자, 거짓선동가, 분열주의자, 소련 간첩단, 私利私慾(사리자욕)주의자, 文明파괴자라고 정확히 규정하였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자들이므로 국가 건설과정에서 함께 갈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 연설은 아마도 국가 지도자가 한, 공산당에 대한 2차 대전 후 최초의 정면 대결 선언일 것이다.
      
       “(공산당 극렬분자들은) 제 나라를 파괴시키고 他國의 권리범위 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爲主(위주)하는 자”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명목을 빙자하고 國權을 없이하야 나라와 동족을 팔아 私利와 영광을 위하여 부언낭설로 인민을 속이며, 徒黨(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軍器(군기)를 사용하야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名詞(명사)를 조작하야 국민 전체의 분열상태를 世人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렀더니, 요즈음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奸計(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희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야 민심을 현혹시키나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를 만들고 저희 私慾(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이다.”
      
       李承晩은 선전 선동 부분에서 공산당에 결코 지지 않는 戰略과 기술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공산당이 소련을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라고 찬양하는 것을 약점으로 잡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희 조국에 들어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 것을 만들어 가지고 잘하나 못하나 우리의 원하는 대로 만들어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한국 사람의 形容(형용)을 하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가 저희 조국에 갖다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는 것이니, 우리 삼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어놓고 싸울 결심이다.”

      
       李 박사는 박헌영 김일성이 이끌던 남북한 공산주의 세력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 이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이 자들이 스탈린의 졸개로서 소련을 위하여 봉사하는 賣國奴(매국노)들이란 점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폭로한 정치인은 해방공간에서 오로지 李承晩 한 분뿐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한국 사람의 形容을 하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 가” 소련에 갖다 바치려는 반역자로 묘사하였다. 한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소련을 위하여 복무하는 간첩들이란 지적이었다.
      
       공산주의가 세계적으로 得勢(득세)하던 시절에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표현인데, 적중한 예언이기도 하다. 68년이 흐른 지금도 유효한 분석이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 즉 從北(종북)세력은 민주투사나 한국인의 形容을 하고 있으나 賣國奴 김정일을 위하여 복무하는 간첩세력인 것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공산주의와 싸우는 방법도 제시하였다.

       “먼저 그 사람들을 誨諭(회유)해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내용을 모르고 따라 다니는 무리를 권유하여 돌아서게만 되면 함께 나아갈 것이오…”
       거짓선동엔 진실의 햇볕을 비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변할 수 없는 공산주의 골수분자들이 아니라 附和雷同(부화뇌동)하는 무리들을 설득의 대상으로 보았다.

       李承晩(이승만)은 교정이 되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은 ‘親父兄(친부형) 親子姪(친자질)이라도 원수로 대우해야 한다. 大義를 위해서는 愛憎(애증)과 親疎(친소)를 돌아볼 수 없는 것이다’고 못 박았다. 이른바 大義滅親(대의멸친)의 정신이다. 그는 이어서 공산주의자들을 파괴자, 민족주의자들을 건설자로 규정하였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건설자와 파괴자는 협동이 못되는 법이다. 건설자가 변경되든지 파괴자가 회개하든지 해서 같은 목적을 가지기 전에는 완전한 합동은 못된다.”

       李 박사는 끝으로 이렇게 호소하였다.
       “이 큰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切分으로 나뉘어져서 동족상쟁의 禍(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우리가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 노릇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 각처에 모든 애국애족하는 동포의 합심 합력으로 단순한 民主政體下에서 국가를 건설하야 만년무궁한 자유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하자.”

       이 연설은 70세 老鬪士(노투사)의 위대한 先制공격이었다.
    급소를 얻어맞은 조선공산당 박헌영은 중앙위원회 대표 명의로 ‘세계민주주의전선의 분열을 책동하는 파시스트 이승만 박사의 성명을 반박함’이라는 長文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표현은 극렬했지만 守勢的(수세적)일 수밖에 없었다.

    박헌영 등 공산세력이 주도한 좌익의 통일전선체인 조선인민공화국은 李承晩이 귀국하기 전에 그를 主席으로 추대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래 놓고 그를 파시스트라고 공격하니 국민들에겐 잘 먹히지 않았다. 대중의 李承晩에 대한 신뢰는 공산당의 선전 선동이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뿌리를 박고 있었다.
      
       李承晩이 공산당을 賣國세력으로 규정한 지 1주일이 지난 12월2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美, 英, 蘇 3國 外相 회담은 남북한에 대한 5년 기한의 신탁 통치안을 발표하였다. 金九, 李承晩이 주도한 反託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朴憲永의 조선공산당은 熱火(열화)와 같은 민심에 동요하여 贊反(찬반)을 정하지 못했다. 지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을 찾아가 지침을 받으려 했으나 영사관측은 본국으로부터 훈령을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박헌영은 12월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그는 김일성 등 조선공산당 북조선 分局 간부들에게 신탁통치에 대한 남한의 민심이 반대쪽이라고 설명하였다.

    김일성도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모스크바에 갔던 북한주둔 소련군 民政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으로 돌아온 다음날 朴憲永에게 지침을 하달하였다. 신탁통치를 결의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朴憲永은 1946년 1월1일 밤 평양을 출발, 2일 새벽 서울에 도착, 김일성과 보조를 맞추어 조선공산당 이름으로 모스크바 협정, 즉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李承晩의 1주일 전 예언대로 극렬공산주의자들은 民心을 거스르고, 소련의 지령에 충직하게 복무함으로써 회복이 불가능한 敗着(패착)을 두었다. 좌익은 賣國세력, 우익은 民族진영이 된 것이다. 右翼(우익) 주도의 反託, 좌익 주도의 贊託 政局은 김구의 臨政(임정)세력을 오른쪽으로 몰았다. 그 뒤 한 동안 李承晩-金九 연합전선이 형성되면서 좌익은 더욱 고립된다.
      
       李承晩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先制공격으로 역사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가 2010년 한국 대통령이었다면 연평도 도발 직후 평양의 금수산 기념궁전을 폭격하도록 명령하여 김일성의 屍身(시신)을 날려버리고 김정일-김정은을 昏絶(혼절) 시켰을 것이다.
      
       李承晩의 공산주의자 배격 연설은 한반도 정세를 賣國者와 愛國者, 파괴자와 건설자, 敵과 동지, 善과 惡으로 가른 역사의 分水嶺(분수령)이었다.
    오늘의 한반도 정세는 그 연설의 결과물이다.

    李 박사는 공산주의를 절대악으로 보았다.
    그는 공산당을 콜레라에 비유, "인간은 콜레라와 동거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정은과 종북세력을 이기는 비결은 무덤 속의 이승만이 갖고 있다.
    "저들은 惡이요, 敵이요, 위협이니 없이 하라"는 충고가 그것이다.
    李 박사는 박정희와 함께 대한민국의 守護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