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지켜온 대한민국인데, 치명적 안보불감증

    로버트 김

     

  • 지난 주 나는 우리나라의 정치계와 종교단체들이 그들대로의 국가를 위한답시고 자행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울분이 복받쳐왔다.
     비록 타향살이를 하는 몸이지만, 대한민국의 피와 정기를 받은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조국을 위해 옥살이까지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의 정국이 이렇게 지리멸렬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암초에 부딪히기 직전 상황이다. 아니, 이미 침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1년 동안 국회에서 통과된 법이 한건도 없었다고 하니, 이런 망국을 재촉하는 정치싸움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이러한 정치권을 보면서 이번에 타계하신 채명신 장군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 당시 광부나 간호사로라도 일을 해서 달러를 벌어야겠다는 충정으로 독일로 간 남녀청년들, 그리고 미국의 월남전을 돕는 조건으로 달러를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어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맹호부대를 창설하여 월남에 가서 우리나라의 경제재건의 씨앗 돈을 마련했는데, 이 맹호부대를 이끌고 사지(死地)로 간 용감한 장군이 바로 채명신 장군이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한에서 태어난 그는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북한의 종교탄압이 시작되면서 공산주의가 싫어졌다고 한다. 1946년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나 함께 일하자는 그의 권유를 뿌리쳤고, 북한에서 소련군의 무자비한 약탈과 공산주의의 허구에 실망하여 월남했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임관 후 6•25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인민군 복장을 한 게릴라전사로서 적진 깊숙이 들어가 김일성의 오른팔이었던 노동당 제2비서를 만나 회유를 권했는데,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자결을 했다고 한다. 

그의 유언대로 그의 아들을 동생으로 입양하여 한국에서 교육시켜 지금은 서울의 모대학의 교수로 있는데, 동생의 장래를 위해서 지금까지 이를 숨겼다고 한다. 이후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참여 회유를 거절하여 강제예편되어 군복을 벗은 후 주 스웨덴 대사, 주 그리스 대사, 그리고 주 브라질 대사로서 국익에 충실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국내정세를 걱정하면서 전시작전 전환을 논의하는 자체가 시기상조라고 했다. 안보라는 버팀목 없이 부르짖는 평화주의는 오히려 전쟁을 부추긴다는 그의 철학에 공감한다.
핵으로 무장한 북한을 앞에 두고 우리는 너무도 평화롭다. 실은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은 것이리라. 

이것은 우리 국민들의 뇌리에 박힌 안보 불감증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1973년 월남이 망한 이유가 그들에게 안보교육이란 없었으며, 부패한 정부와 국민들 간에 만연된 개인 이기주의 때문이었다. 반면에 호찌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은 국민들로 하여금 오직 통일을 염원하도록 교육시켰다. 그들은 목숨을 바쳐 국가에 충성했다. 그들의 무기는 매우 열약했지만, 그들의 그 충성심이 미국도 손을 들게 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여야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끊임없는 정쟁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며, 임박한 북한의 대남도발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전 한미연합사령관 월터 샤프(Walter L Sharp) 장군은 지금 한국이 1960~70년대의 월남과 같다고 했다. 우리는 그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채명신 장군은 그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대한민국의 장래를 걱정했고, 그의 유지대로 장군묘지 대신 자신이 생전에 사랑했던 971명의 베트남 참전 전사들의 키 낮은 비석들과 똑같은 높이로 세워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지리멸렬(支離滅裂)하는 조국의 정치와 사회상에 마음이 착잡하지만, 그래도 이 나라는 북한의 위협 속에서 채명신 장군과 같은 수많은 애국자들이 꿋꿋하게 지켜왔다.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정치권도 이에 협조하면 우리에게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로버트 김(robertkim04@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