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에 있는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친구들 한테요? 음…. 얘들아, 빨리 와라! 여기 지낼 만 해!”
지난 10일, 강원도 철원군 일대를 지키는 육군 제6사단 GOP에서 만난 병사들의
장난기 어린 말이다.강원도 철원군은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과 함께
겨울철 우리나라에서 가장 춥기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3월 중순이 가까워지자 봄기운이 서서히 느껴지는 듯 했다.철원군 일대를 지키는 육군 제6사단은
1948년 6월 14일 충북 충주에서 제4여단으로 창설됐다.
1949년 5월 12일 육군본부 일반명령에 따라 사단으로 승격됐다.나중에는 유엔군의 애칭이 ‘푸른 별(Blue Star)’이라는 데 착안해
부대 명칭을 ‘청성부대’로 부르기 시작했다.6.25전쟁 개전 초기에는 춘천을 사흘 동안 방어하면서 북괴군의 진격을 가로막았고,
이후 3년 동안 154회의 전투에 참가해
적 9만 2,669명을 사살하고 6,437명을 생포한, 국군 최고의 부대 중 하나다. -
이런 6사단이 지키는 전방 GOP의 소초 생활을 [엿보기] 위해
사단 공보장교 <전창일> 중위의 도움을 받았다.늦봄에 전역한다는 전 중위는 [다른 곳에서도 근무하고 싶었는데 아쉽다]며
군에서 더 오랜 경력을 쌓지 못한 걸 안타까워하면서도
철원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운 편이라고 했다.“저도 처음 이곳(철원)으로 올 때는 강원도라는 말에 생활하기 힘든 곳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제 와보니까 서울도 가깝고 생활환경도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그의 설명대로 철원군은 몇 년 전 왔을 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새로 지은 군인 아파트는 인근에서 가장 좋은 아파트였고,
주변에 생긴 패스트푸드점, 커피숍 등은
[쌍팔년도 군대]를 기억하는 기성세대들에게는 생경하게 느껴질 듯 했다.강원도 철원군은 경기도 포천군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때문인지 6사단 부대들도 동부 전선 부대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나쁘지 않은 자연환경 속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
취재를 위해 먼저 <평화 전망대>를 찾았다.
3월 초순을 시샘하는 꽃샘추위 때문인지 전망대 위에 오르자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었다. -
이곳 전망대에는 남북 간 심리전이 한창일 때 사용하던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도 있었다.
전망대에서 보는 북한 지역과 우리 지역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
가장 먼저 눈에 띠는 모습은 [북한의 산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는 점.
90년대 소위 [고난의 행군]이 가져온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
그 다음 눈에 띠는 건 기온이었다.
불과 2km 가량의 거리임에도 우리 쪽은 얼음도, 눈도 없는 반면,
북한 쪽은 [김씨 일가] 때문에 주민들의 영혼까지 얼어버려서인지
모든 게 얼어붙어 있었다. -
-
-
전망대 위의 쌀쌀한 바람을 피해 6사단 경계구역을 지키는 GOP 소초로 향했다.
○○소초에는 소초장(중위)와 부소초장(하사)를 중심으로 40여 명의 장병들이 살고 있었다.적군의 공격을 우려해 지하벙커처럼 지은, 어두컴컴하고 그늘진 소초는 [옛말]이었다.
주변을 둘러싼 단단한 방호벽 속에 들어선 막사는
단열재를 충분히 넣고 시원스런 창문을 배치해 그런지 안에서도 따뜻하고 밝은 느낌이었다.소초 상황실은 꼭 빌딩 관리실 같았다.
인근 구석구석을 지켜보는 CCTV는 실시간 화면을 비춰주고 있었다.
생활관 안에 있던 병사들은 막 일어난 듯 개인정비 시간을 갖고 있었다. -
전 중위의 소개로 이제 막 군 생활을 시작한 일병과
올 봄이면 전역할 병장을 만나 GOP 생활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현재 21개월인 군 생활은 기성세대가 보기에는 [뭐, 별거 아니구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제한된 생활]을 해야 하는 [어린 군인들]에게는 그렇지 않다.<석용재> 일병과 <김태민> 병장은 뽀얀 피부와 순한 인상 때문인지
얼핏 봐서는 [국군 아저씨]라는 표현보다는 [고등학생]이래도 믿을 만큼 앳되어 보였다. -
92년생인 <김태민> 병장은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자
강한 정신력과 의지를 얻기 위해 군에 지원 입대했다고 한다.
GOP 소초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냐고 물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그런 거 없다]고 답했다.“힘든 점 꼽으라면…그런게 있나?
철책 경계근무 때문에 밤낮이 바뀐 게 가장 힘듭니다. 생체리듬이 깨지니까요.”
정기휴가는 규정대로 갈 수 있었고, 외출․외박만 제한됐다.
대신 각 부대 지휘관의 재량에 따라 다양한 이벤트를 갖기도 했다.
이 소초가 속한 연대의 경우에는 매년 [소초의 날]이라고 해
하루 동안 모든 병력이 연대 본부로 가서 체육활동과 축제를 벌이고,
다른 부대가 대신 근무를 서주는 이벤트를 벌이고 있었다.
대대장에 따라서는 [포상휴가증]을 상품으로 건 [로또 이벤트]를 열기도 한다고. -
병사들은 GOP라는 [고립된 곳]에서 생활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다다고 했다.
각 생활관 마다 있는 IPTV에서는 드라마, 영화 다시보기가 무료였고,
사이버 지식방 이용료도 GOP라는 특성 때문에 무료였다.
언제든 바깥사회 소식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
일반인들의 상상에 따라 [강원도 철원의 추위 때문에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가
되려 무안만 당했다. 방한 장비가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어서다.육군은 최근 GOP 소초와 격오지 병사들에게 우선적으로 신형 방한피복을 지급했다고 한다.
실제 이들이 입고 있는 [방한외피(舊야전상의)]와 [방상내피(일명 깔깔이)]는
시중에서 판매하는 아웃도어 용품 수준에 근접해 있었다.
귀마개와 장갑, 안면 마스크(일명 스키 마스크) 등도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품질이었다.
게다가 근무 시간에는 [핫팩]을 지급하고 있었다.
하나 얻어 써본 [핫팩]은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화력이 더 좋은 듯했다.
발열 시간이 12시간이나 됐다. -
입대한 지 8개월 밖에 안 된 <석용재> 일병조차 GOP 생활이 그리 힘들지 않다고 했다.
경기도 안양에 거주하는 부모님은 처음 신병교육대를 수료한 뒤 한 번,
자대 배치를 받은 뒤에는 삼촌과 함께 한 번 면회를 온 뒤,
부대 생활을 직접 둘러보고는 별로 걱정 안 하신다는 게 석 일병 설명이었다.석 일병에게 전역일을 묻자 [2015년 5월 전역한다]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21세기 한국 군대는 더 이상 [쌍팔년도 군대]가 아니었다. -
“GOP에서는 소초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동기 생활관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휴가 때 전공 책을 가져와서 생활관에서 공부하고,
사지방(사이버 지식방, 군용 PC방)이나 IPTV를 통해
강의 듣는다고 뭐라는 사람 없습니다.
다들 일과 시간이 끝나면 공부하거나 여가시간 가집니다.”
공부하는 군대. 대학에 재학 중 입대하는 병사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바뀐 모습이다. -
-
휴가나 개인장비를 정비하는 모습도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각이 잡힌 전투복]을 입은 장병은 아무도 없었다.
반짝반짝 광이 나는 전투화도 보기 어려웠다.
모두 [전투 임무에 충실하자]는 원칙에 따라 불필요한 [룰(Rule)]을 없앤 때문이었다. -
물론 수십 년 지나도 바뀌지 않은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오후 무렵, 소초로 [황금마차(군용 이동형 매점)]가 왔다.
[황금마차]가 문을 열자 소초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10년 째 [황금마차]를 운영한다는 민간인은 [과거에 비해 병사들 씀씀이가 커졌다]고 했다.
“처음 [황금마차]를 운영할 때는 병장 월급이 5만 원도 채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10만 원이 넘어서 그런지 한 번에 많은 물품을 사 가요.
주로 냉동식품이나 생필품 종류죠. 군것질 거리도 많이 삽니다.”
[황금마차]의 가장 큰 변화는 [카드 결제]와 [냉동식품], [아이스크림] 판매라고 했다.
살펴보니 소초 내에 전자렌지, 냉장고도 있었다. -
그런데 가만, 군대에서 군것질? 과거 [내무반 생활]에서는 금지인데…. 전 중위가 설명했다.
“이제는 일과가 끝난 뒤의 자유 시간에 운동을 하던 먹고 싶은 걸 먹든
말 그대로 자유입니다.
그런 걸로 소위 [군기] 잡는다고 전투력이 강해지고 적을 이기는 건 아니니까요.
대신 일과 시간에 실시하는 교육훈련은 예전보다 강도가 더 높습니다.
사실 과거 군에서 군것질을 못하게 했던 건 위생 문제 때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전 중위는 [그렇다고 군기가 약해진 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달라진 세태에 맞춰 군기를 강화하는 방식과 문화가 달라진 것이라고 했다. -
대학을 다니다 온 병사들이 많은 만큼 스스로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적 정보 교육, 정신교육을 실시한다고 했다.
[군기 든 모습]은 야간근무 전 장비점검이나 경계 근무 설 때를 보라고 했다.소초 장병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생활관을 둘러봤다.
-
생활관의 캐비넷형 관물대에는 각기 다른 종류의 화장품들이 눈에 띠었다.
생활관 옆으로는 드럼 세탁기가 있는 샤워실, 4대의 전화기가 있는 방,
200여 권의 책이 꽂힌 책장과 함께 [군화 건조기] 등과 같은 편의장비도 있었다. -
오후 6시 30분경, 이곳 소초에도 어둠이 찾아들었다.
장병들은 야간 근무 전 점검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일부 장병들의 소총에는 [도트 사이트
(표적을 분명하게 조준할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간이 조준경)]도 달려 있었다. -
-
장비 점검을 마치고 철책 점검에 투입된 장병들은
소초 생활관에서 볼 때의 부드러운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소초 생활관 안에서의 편안한 일상과는
다른 장병들의 표정과 태도는 보는 이에게는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
소초 장병들의 말처럼 [엄정한 군기]와 [강한 전투력]은
꾸준하고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나오는 것이지
소위 [군기 잡는다]고 나오는 게 아님을 이들은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
-
과거에 비해 편한 군 생활을 한다고 비난하거나,
혹은 [얼마나 고생할까]하는 부모들의 걱정이 [기우(奇遇)]라는 것을
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
육군 제6사단은 6.25전쟁 당시 공산군을 무찌르며 북진에 북진을 거듭,
압록강 강물을 수통에 떠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한 부대로도 유명하다.야간 경계 작전 중인 소초 장병들의 모습에서 그런 6사단의 전통을 느끼며 철원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