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명예훼손’혐의 서울지국장은 명성황후 능 앞에 백배사죄 먼저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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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보길의 역사 올레길] 산케이신문을 보며 ‘한성신보’를 생각한다“민비 죽여라” 칼 휘두른 日언론인, 이젠 대통령 음해!
'대통령 명예훼손’혐의 서울지국장은 '명성황후 시해' 범인들의 후계인가?
“왕비는 어디 있느냐? 말 안하면 죽이겠다” 머리채를 나꿔챈 남자는 젖가슴에 칼을 댄다.이미 하얀 속옷에 피를 뒤집어 쓴 젊은 여인은 왕세자비(王世子妃), 뒷날 순종(純宗)의 왕비.“아이고!” 공포에 질린 여인이 고꾸라져 기절했다. 남자는 다른 여인에게 돌진한다.119년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음력 8월20일(10월8일) 경복궁의 새벽,
몇 백명의 일본군과 조선병이 에워싼 건청궁(乾淸宮) 안은 아수라장이다.
날뛰는 악마들의 고함소리, 칼날에 쓰러지는 여인들의 비명, 달빛에 흐르는 핏물...핏물.“왕비를 찾아라. 일본제국의 적을 죽여라.” 신문사 사장도 칼을 빼들고 살인을 지휘한다.암살단 1조 대장은 아다치(安達謙藏)사장, 2조 대장은 주필 쿠니토모(國友重章),
편집장 고바야카와(小早川秀雄), 몇 명의 특파원과 기자들도 방방을 뒤지며 뛰고 뛴다.
공사관 무관, 외교관, 일본 경찰 등등 40여명의 살인마들이 칼 솜씨를 뽐내는 듯.
신문사는 한성신보(漢城新報). 청일전쟁 중 서울에 설립한 이 신문사는 침략의 선전대.겉으론 민간언론을 위장했지만 일본 외무성이 자금을 지원하는 정보센터, 공작기지였다.
신문사가 총동원된 집단 살인범들, 편집장은 뒷날 [민후암살기閔后暗殺記]까지 펴낸다. -
▶“마마에 손대지 마라” 뒤늦게 뛰어든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팔을 벌려 왕비 앞을 막아섰다.
궁녀 옷을 입고 조마조마하던 민비의 정체가 드러난 순간, 이경직의 두 팔은 잘라져 나갔다.“세자...세자...” 아들을 부르며 뛰어 가던 왕비가 넘어진다. 악마가 덮쳤다.
배를 두 발로 쾅쾅 밟고 뛰며 칼로 가슴을 몇 번이고 찍었다. 피가 콸콸 솟구쳤다.도대체 몇 명이나 죽였을까. 사진이 없는 민비의 얼굴 몽타쥐를 들고 뒤지면서
악마들은 비슷한 여인들을 모조리 찔렀다. 비슷하지 않아도 죽이고 짓밟았다.
옆방엔 기습 즉시 감금된 고종과 세자가 옷이 찢기고 칼자루에 맞아 넋을 잃은 채.
사방에 죽어 넘어진 여인들을 옥호루(玉壺樓)에 모아 놓았다.“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함성이 새벽 하늘을 갈랐다. 하얀 달이 창백하다.관자놀이에 마마 자욱이 남아있는 민비, 왕비를 확인하고 확인한 악마들은 만세를 불렀다.일부 학자들은 그들이 피에 젖은 왕비 시신에 ‘국부검사’라며 만행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일본의 산케이(産經)신문 서울지국장이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피소, 출국정지 되었다.문득 조선왕비 살해에 앞장섰던 한성신보 일당이 떠올라 을미사변 현장을 돌아 보았다.지난 3일 산케이신문은 세월호 침몰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동정에 대하여
증권가 찌라시, C일보 칼럼 등을 인용, “이 소문은 박 대통령과 남성에 관한 것”이라며
이웃나라 여성 대통령의 사생활에 악의 넘치는 의문을 제기했다. 전세계에 인터넷으로!
“대통령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권력 중심에 알수 없는 소문이 화제”라고 강조했다.
현장취재나 확인도 없이 소문을 빙자한 전형적 3류 황색지의 중상모략, 언론이 아니다.
청와대의 항의와 시민단체의 고발에 산케이신문은 적반하장 흥분한 모습이다.
“관련기사는 한국 국회와 언론에 공개된 정보를 정리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명예훼손 혐의로 출두하라는 요구는 이해 못하겠다“고 버티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과연! 침략과 전쟁과 대학살과 우상숭배 역사에 습관화된 '안하무인' 본색을 보는 듯. -
▶일국의 왕비를 살해한 일당도 미리 준비한대로 증거 인멸에 철저했다.
“우물에 던져라” “연못에 빠트리라” “뼈까지 불 태워라”
처참한 왕비의 시신은 결국 건청궁 옆 숲속에서 석유를 끼얹고 불태워 파묻었다.
한성신보 편집장은 "왕비의 모든 흔적을 없애기 위해 궁녀와 함께 태웠다"고 적었다.‘왕비 살해작전’을 현장 지휘한 일본공사 미우라는 감금된 고종 앞에 나타나 말했다.“대원군과 훈련대의 반란을 일본군이 진압하려다 뜻밖의 참사가 났다.”이 억지는 3개월전 이노우에(井上馨) 공사의 시나리오에 숨은 덮어씌우기 각본이다.
1년전 ‘경복궁 침공’때 대원군을 앞장 세워 쳐들어가 친일 쿠데타를 벌였던 그 각본!
일본에 돌아간 미우라등 범인 일당은 시민들의 ‘개선장군’ 환호성에 의기양양했다.재판 결과는 ‘증거 불충분’ ‘무죄’로 몇 달만에 풀려나 영웅대접을 받고 줄줄이 출세한다.
▶그날 일본은 고종을 협박, 왕비를 폐하고 서인 (廢庶人)으로 선포하였으나,
서거 3년째에 대한제국 출범후 '명성황후' 시호를 받고 국장으로 금곡 홍릉에 묻힌다.
민비 명성황후는 왕실과 정부내에서 가장 강력한 반일(反日) 행동파였다.한해 전 청일전쟁 때 7월23일 ‘경복궁전쟁’을 감행한 일본은 기존내각을 해산,
친일내각을 세우고 ‘한국을 개혁한다’며 일본식 ‘갑오경장’을 강요한다.
왕실의 권력을 내각에 박탈당한 민비는 특히 대원군을 포섭하려 로비하는 일본을 경계,
일본의 지휘를 받는 김홍집 내각에 대해 ‘역적’ ‘흉악’이라는 말도 자주 했다.청일전쟁을 휴전하고 미국의 주선으로 성립한 시모노세키 조약 직후,러시아의 ‘3국간섭’으로 일본이 먹었던 요동을 한달 만에 토해내자 왕비는 무릎을 쳤다.조선 왕실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압제를 물리치려 했다.
고종은 위기마다 슬기롭게 대처하는 왕비의 판단력에 흡족, 일심동체였다고 한다..“일찌기 왕비가 말한 것이 다 들어맞았다. 정상적인 방도와 임시변통을 잘 배합했다.”왕은 왕비의 명석한 두뇌, 직관력과 비상한 기억력, 결단성에 많이 의존해 왔다.일본은 “남의 말 잘듣는 왕”보다 “조선의 버팀목 전략가 왕비”를 전쟁하듯 학살한 것이다.▶한성신보 사장을 자임한 아다치는 일본의 대륙점령을 옹호하는 국권당(國權黨)의 두목,부산에서 ‘조선시보’를 만들다가 ‘경복궁 전쟁’ 직후 서울에서 한성신보를 맡았다.“조선 놈들이 머리를 치켜들고 일본을 경멸한다.” 아다치는 '혐한(嫌韓)신문'을 만들었다.남산자락 800평의 고급 사옥은 수십명이 거주하는 침략론자들의 아지트,
조선왕비 살해작전을 추진하는 일본정부(이토 수상, 무쓰 외상, 이노우에 공사) 앞잡이,
직접 범행은 민간인이 해야한다는 꼼수에 따라 ‘민간 주역’을 도맡았다.그들은 사무라이 출신도 검객들도 깡패도 아니다. '깡패 범행'이란 준비된 거짓말이다.
신문사 종사자들은 미국 하버드 대학, 프랑스등 유학파 지식인들이 많았다.
재판에서 풀려난 그들은 국회의원, 장관, 고급간부가 되어 장기간 조선식민정책을 펼친다. -
▶일본이 최우선으로 육성한 일본식 군대 ‘훈련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왕실이 이 훈련대를 두려워했음은 물론이다. 이름만 조선군대, 공포의 일본군대,
여차하면 경복궁을 점령하고 왕조를 무너트릴 왜적 ‘트로이의 목마’ 아닌가.왕비가 훈련대를 해산시킨다는 소문을 증폭시키면서 일본은 이것을 즉시 악용했다.대원군과 훈련대의 쿠데타 각본! 사건직후 일본 언론이 똑 같이 보도하고 재판 진술도 같았다.
마치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때 조선인 대학살을 감행하던 수법과 너무 닮았다.
청일전쟁때 군부대신(국방장관) 조희연(趙羲淵)은 조선정부 기밀을 일본 공사관에 빼주었고,
일본이 군사협력을 요구하자 우범선, 이두황, 이범래등의 병력을 전쟁에 합세시켰다.
왕비살해에는 훈련대 장교들을 설득 참여시키고 훈련대 1대대를 경복궁 점령에 동원하였다.특히 조희연은 사건 당일, 미우라 공사에게 일본군의 경복궁 파견을 공식 요청한다.2대대장 우범선(禹範善)은 사건 5일전 미우라 공사를 만나 조선측 주동자로 참여하였다.그의 임무는 일본인들과 마포 공덕동 대원군 별장에 가서 대원군을 호위, 입궐하는 것.광화문 담을 넘어 문을 활짝 열고 대원군 가마는 근정전으로 달려갔다.
충성파 홍계훈이 막아서자 일본군이 칼로 치고 우범선이 총격을 퍼부었다.▶사건 한달 전, 고종은 긴가민가 하면서도 이노우에를 믿었다.
‘정변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파다할 때 건청궁을 찾아온 전 일본공사는 말했다.
“조선 사람이 역모를 꾀한다 해도 일본 군대가 왕실을 보호할 것이니 안심하시라.”
이노우에는 자신의 범행계획에 차질을 막는, 왕비의 피신을 막는 다짐을 두고 귀국했다.
흉흉한 소문에 대책을 궁리하던 왕비도 믿는 신하에게 물어 보았다.왕실 재정을 담당하는 농상공부협판 정병하(鄭秉夏)는 운명의 그날 밤 이렇게 대답했다.“일본군대가 대궐에 들어옴은 성체(임금)를 보호하려는 것이니 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그 시각 일본-조선 합작 암살부대는 출동준비를 마치고 명령을 기다리던 중이었다.왕비는 마지막 피신 기회를 놓쳤고 그 공격표적이 자신일 줄은 더더욱 몰랐던 것이다.
정병하는 4개월뒤 고종의 아관파천 직후, 김홍집 어윤중과 함께 군중의 손에 죽었다.
▶망국을 체험한 한국에서 ‘친일파’는 ‘매국노’이다. 누구든 제거하는 마녀의 흉기다.
구한말 일본은 갖가지 방법과 수단으로 ‘친일파’를 만들고 이용하여 조선을 먹었다.당시 친일파에는 일본식 국가개혁을 위한 길인 줄 착각한 사람도 많다. 초기 일진회처럼!참 순진한 한국인! 지금도 ‘친한파’에 마음을 열어주는 지식인 정치인 관료들이 참 많다.이런 인연 저런 빚 때문에 알게 모르게 ‘신판 일진회’가 되어 ‘봉사’하는 사람들은 없을까.
일본에서 ‘친한파’라면? 구한말 침략자들, 조선 ‘합병 공로자’들로 금방 그려진다.그동안 한국이 ‘일본은 글로벌 동반자’를 외쳐 온 것은 ‘과거 청산-새출발’의 당부였다.
죄악 불감증, 역사조작의 만용, 반성없는 호통, 일본 정권의 정신 나이는 역시 12세!120년을 굴러온 역사는 놀랍게도 ‘한반도 쟁탈시대’로 역주행한 듯 가파르게 구르고 있다.중국의 부활과 한중 협력을 두고 이성을 잃은 일본의 ‘혐한 캠페인’의 끝이 무엇일지.아베의 언행을 두고 ‘침략과 분단’이 떠오르는 트라우마는 허상일 것인가.산케이신문의 행태가 왕비 살육에 칼 빼들고 덤빈 한성신보의 데자뷔로 다가든다.일본의 독도 억지에 분노하는 한국민에게 “억지 부리지 말라”는 산케이신문.위안부 사죄 요구에 “한국 이미지는 위안부뿐”이냐는 산케이의 사고능력 장애!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대로 이제 칼 대신 펜인가, 왕비의 영혼이 통곡할 일이다.
산케이는 일본 천황의 여자문제나 천황부인의 남자문제를 조작해도 되는 신문인가.
한성신보의 후계자가 아니라면 선진 언론 본연의 언론정신을 찾아주기 바란다.
오늘이라도 산케이는 명성황후 능에 찾아가 백배 사죄부터 해야 할것이다.아베에게 야스쿠니만 가지 말고 명성황후 앞에 사죄하라는 사설부터 써라.
<뉴데일리 대표,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 포럼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