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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법 민사 재판부가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와 남편인 심재환 변호사의 ‘종북 의혹’을 제기한 변희재 미디어워치에게 배상판결을 선고한 것과 대조적으로, 이정희 대표 부부가 변 대표 등을 고소한 사건은 대법원에서 ‘무혐의’ 처분이 확정된 사실이 밝혀졌다.
민사재판에서의 손해배상이 형법상 명예훼손죄와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형사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단 결과가, 손해배상을 구하는 민사소송에서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도 없다.
때문에 검찰은 물론 고등법원과 대법원이 일관되게 ‘무혐의’라고 판단한 명예훼손 사건이, 민사재판에서는 원고들의 명예를 훼손한 불법행위로 다뤄져, 새로운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서울고법 민사합의 13부(고의영 부장판사)는 8일, 트위터를 통해 이정희 대표 부부의 ‘종북’ 의혹을 제기한 변희재 대표와, 이를 인용보도한 언론사들에 대해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다.
서울고법 재판부는, 변 대표가 이정희 대표 부부를 ‘종북’이라고 지칭해 이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시했다.
이어 재판부는 변희재 대표에게 1,500만원, 변 대표의 글을 인용 보도한 뉴데일리와 조선일보에게 각각 2,000만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그러나 판결 내용이 알려지면서, 반론이 쏟아졌다.
‘종북’이란 표현을, 널리 북한의 이념과 전략 전술을 따르고, 북한의 3대세습체제와 그들의 주장을 옹호하는 언행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이는, 국민들의 일반적인 정서에 반하는 판결이란 평가가 적지 않았다.
특히 공당의 대표에 대한 국가관 검증은 폭넓게 보장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비판이 많았다.
‘종북’과 ‘주사파’라는 표현이 명예훼손의 대상이 된다면, 주로 좌파매체가 우파인사 등을 공격할 때 즐겨 쓰는 ‘친일’, ‘수구’와 같은 표현 역시 손해배상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나 이정희 대표와 심재환 변호사가, 같은 사안을 가지고 검찰에 낸 고소사건이 대법원의 최종 판단으로 ‘무혐의’ 확정된 사실이 드러나, 서울고법 민사13부 판결을 둘러싼 논란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24는 지난해 9월 이정희 대표 부부가 변 대표와 언론사를 상대로 낸 재정신청을 기각했다.
앞서 이정희 대표 부부가 낸 고소사건을 처음 맡았던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2012년 9월, 피고소인인 변 대표와 언론사 등에 대해 모두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이에 이정희 대표 부부는 서울고법에 재정신청을 냈으나,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재정신청은 검사의 불기소 처분에 불복한 고소인이 상급심 법원에 내는 이의신청으로, 고소사건을 법원이 직접 재판에 회부할 것을 청구하는 제도다.
서울고법의 재정신청 기각에 불복한 이정희 대표 부부는 대법원에 재항고했으나, 올해 1월 대법원은 이 대표 부부의 신청을 최종적으로 기각했다.
이로써, 변 대표와 언론사 등을 상대로 한 이정희 대표 부부의 명예훼손 고소사건은, 혐의가 없는 것으로 최종 확정됐다.
사건을 맡았던 검찰은, ‘종북’이란 표현을 “당사자의 주관적인 판단이나 의견을 표시한 것”으로 보고, 명예훼손죄 성립을 부정했다.
재정신청을 심리한 서울고법과 재항고 사건을 맡은 대법원 재판부도, 검찰과 같은 태도를 나타냈다.
서울 고법 형사부와 대법원의 판단은, 변 대표와 언론사에 배상책임을 인정한 서울고법 민사 재판부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서울고법 민사 재판부는 변 대표의 ‘종북’ 표현을, [평가 내지 의견의 표시]로 보지 않고, [구체적 사실의 적시]로 봤다.
어떤 인물 혹은 현상에 대한 [평가 혹은 의견의 표시]만으로는, 명예훼손의 원인이 되는 불법행위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종북’을 [평가 혹은 의견의 표시]로 보는 이상, 명예훼손을 이유로 한 손해배상 청구는 부정된다.
이정희 대표 부부의 고소에 대해 검찰과 서울고법, 대법원은, 변 대표의 ‘종북 발언’을, [평가 혹은 의견의 표시]로 판단했다.
반면, 같은 사안을 심리한 서울고법 민사재판부는, ‘종북 발언’을 명예훼손의 성립요건인 [구체적 사실의 적시]로 보고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한 사안을 놓고, 형사재판부와 민사재판부가 각각 상반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종북’이란 표현을 사실의 적시가 아닌 [평가 내지 의견의 진술]로 본 민사 판례도 있다.
올해 3월 25일 서울남부지법 12민사부(김종원 부장판사)는, 임수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을 ‘종북의 상징’이라고 지칭한 새누리당 박상은 의원에게, 명예훼손이 아닌 인격권 침해만을 인정해 200만원의 배상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종북의 상징’이란 표현은 원고에 대한 피고의 [의견 내지 논평]을 표명한 것에 불과할 뿐, 그 자체로서 원고의 사회적 평가를 침해할 만한 구체적 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서울고법 민사13부의 이번 판결은, ‘종북’의 개념을 지나치게 좁게 해석했다는 점에서, 법조계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더구나 변 대표의 트윗 글을 별도의 논평없이 인용보도한 기사에 대해 광범위한 배상책임을 인정한 것은, 균형감을 상실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