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4 10월 4일 오후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
진녹색 북한 군복을 입은 한 남성이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에게 손을 내민다.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자는 뜻에서다.
김 실장은 이 남성의 손을 잡고 자리를 일어선다.
강렬한 눈빛 때문에 ‘레이저 김’이라 불리는 김 실장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진다.때 마침 VIP석 앞을 지나는 북한 선수단을 향해 두 남자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남과 북의 최고 안보 책임자가 나란히 선 채로 말이다.
김 실장을 일으킨 사람은 북한의 서열 2위 황병서 북한군 총 정치국장이다.청와대는 3일 북한이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에 황병서 북한군 총 정치국장과 최룡해 노동당 비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을 보내겠다는 통보를 받은 이후 긴급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회의에서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을 현장에 파견키로 결정했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국가 안보의 최고 책임자를 '메신저' 삼아 간접 접촉을 이어간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김관진 실장의 폐막식 참석이 원래 예정됐던 건지는 확실치 않다. 그분들(북한 대표단)이 참석했으니 함께 했을 것”이라면서도 “(김 실장이)대통령과 조율 없이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매우 이례적인 북 최고실세 3인이 전격 방문한 자리에 김관진 실장을 보낸 것은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우선 이날 류길재 통일부장관과 가진 오찬 회동과 아시안게임 폐막식 때 북한의 황병서 총정치국장 옆자리에 김관진 실장을 보냄으로써 ‘격’을 맞췄다.
북한 김정은 전용기에 경호원까지 대동하고 온 북한 대표단 일행에 각별한 예우를 갖춘 것이다.
특히 김정은을 제외하고 북한군 최고위직에 있는 황병서 총 정치국장을 겨냥해 김 실장을 급파한 것은 남북간 실질적인 안보 논의를 이끌어내겠다는 박 대통령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후 정홍원 국무총리도 북측 대표단과 접촉하며 의전 격을 대폭 상승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북한 권력 2위~4위 3명을 전담할 수 있도록 우리 측에서도 국무총리, 국가안보실장, 통일부장관까지 나서는 '극진한 대접'인 셈이다.
'핵포기와 주민 인권개선 없이는 협상도 없다'는 확고한 대북 원칙론을 고수하는 박 대통령이 이 같은 적극적인 대처를 한 이유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지난달 유엔총회 무대에서부터 북한과 핵과 인권을 두고 외교전을 벌인 것과 최근 김정은의 신변이상설이 퍼지는 것 등을 고려할 때, 유사시 꼭 필요한 '대화의 활로'를 열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
박 대통령의 극진한 대접에 남과 북은 예정에 없는 회담을 연이어 더 가졌다.
폐회식 종료를 10여 분 앞두고 김양건 당 비서가 잠시 자리에 나섰다가 A4용지 1장을 들고 자리에 복귀, 이를 황 정치총국장, 최룡해 당 비서와 함께 돌려봤다.
이후 황 총 정치국장이 김관진 실장에게 귀엣말로 대화를 나눈 뒤 김 실장은 이석우 총리 비서실장을 통해 정 총리에게 전달했다. 이후 정 총리와 북한 대표단은 폐회식 직후 면담을 한 차례 더 가졌다. 면담 내용이 이 A4용지에 적힌 내용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양 측은 폐회식 직후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 내 한 사무실에서 비공개로 대화를 나눴다.
우리 측에서는 정홍원 총리,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 류길재 통일부 장관, 유정복 인천시장이 북한 대표단 3인방과 7분 간 면담을 가졌다.이로써 이날 하루 동안 남과 북은 총 네 차례 접촉을 가졌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을 필두로 한 티타임을 시작으로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의 오찬회동과 마지막으로 정홍원 국무총리와의 환담이 폐막식 전 후로 두 차례나 진행됐다.특히 남과 북이 각각 남녀 축구에서 우승한 것을 두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잇따랐다.
청와대 관계자는 “남남북녀 등 공개된 양측 발언만 봐도 좋았던 분위기가 나타났다”고 말했다.첫 만남에서 정 총리가 “남북이 사이좋게 우승해 앞으로 남북 간 축구 교류를 하면 아주 멋있는 모양이 되고 민족들이 굉장히 박수를 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황 총정치국장은 “여자축구는 (북한이) 우승하고 남자축구도 (남한이) 그랬으니까 축구는 완전히 됐다. 이 기세로 세계에서 조선민족이 세계 패권을 (잡아) 같이 나아가자”고 화답했다.
양측은 2차 남북 고위급접촉을 이 달 말에서 11월 초에 편한 시기에 갖기로 약속했다.
남과 북은 회담 중 북측 대표단이 박근혜 대통령을 예방하는 문제도 상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부는 브리핑을 통해 “박 대통령은 북측 고위급 대표단을 만날 용의가 있었지만 북측이 이번에는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을 위해 왔기 때문에 시간 관계상 청와대를 방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접촉이 워낙 속도감 있게 돌아간 만큼 남과 북이 진정성을 확인할 계기가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유엔 연설 이후, 북한이 박 대통령에 대한 실명 비난을 이어가면서 남북관계 경색이 우려돼 왔던 게 사실이다. 이번 남과 북의 만남으로 그동안 일관성을 보여온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이 소기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또 북한이 핵심 실세들을 총출동 시킨 것이 우리나라가 요구해온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라는 시각도 짙다.
북한 고위급 대표단의 방남(方南)은 긴박함 속에서도 침착하게 진행됐다.
북한은 전일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을 판문점이 아닌 아시안게임 참석자를 통해 알려왔고 우리정부가 이를 수락하면서 전격 이뤄졌다.청와대는 전일 오후,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었고 이날 오전에도 김기춘 비서실장 주재로 수석비서관회의를 소집했다. 이밖에도 각 수석실 별로 북한의 의도를 면밀히 파악하기 위한 회의가 잇따랐단 것으로 전해졌다.
북측 대표단은 이날 밤 10시 14분께 전용기 편으로 평양으로 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