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由 선택 10만 피란민들, 한국전쟁이 자유 위한 투쟁임을 세계에 보여줬다"
  •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 世界史의 결정적 순간 -

    흥남철수 作戰



    포위 상태에서 철수하는 군대가 외국 민간인 10만 명을 구출, 함께 떠난 것은 달리 예가 없다.  
    자신의 발로 自由를 선택한 10만의 피란민들이 한국전쟁이 자유를 위한 투쟁임을 세계에 보여줬다


    李相欣(月刊朝鮮) /월간조선 2005년 7월호


     

    55년 만의 報恩 


     

  • ▲ 지난 5월2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족공원에 건립된 흥남철수 기념비 앞에 선 로버트 러니氏와 현봉학 박사. 로버트 러니는 흥남철수 때 1만4000명을 피란시킨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상급선원이었다.
    ▲ 지난 5월2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족공원에 건립된 흥남철수 기념비 앞에 선 로버트 러니氏와 현봉학 박사. 로버트 러니는 흥남철수 때 1만4000명을 피란시킨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상급선원이었다.


    지난 5월27일, 경남 거제도 신현읍의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거제 고현항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이곳이 노인들로 북적거렸다.
    여기저기에서 투박한 함경도 사투리가 들려왔다.
    1950년 12월 혹한의 흥남부두를 빽빽하게 메우고 서 있던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사지에서 구해 준 은인들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거제도에 세웠다.
    거제도는 흥남부두를 떠난 10만여 명의 피란민들이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楊承浩(양승호·84)씨도 그중 한 명이다.

    『1950년 12월24일, 1000명의 피란민과 함께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탄 배가 피란민을 실은 첫 배 같았습니다.
    장승포 경찰서에서는 피란민들을
    어디에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습니다.
    경찰은 일단 우리를 인근 국민학교 교실에 배치했어요.
    이북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경찰이 경비를 서더군요.
    그런데 다음날부터 피란민을 실은 배가 막 쏟아져 들어오자, 경찰들이 경비고 뭐고 「알아서 다른 곳에 가서 살아라」고 합디다』

    장승포에 살고 있는 尹末順(윤말순ㆍ82) 할머니는 부두에 내리는 북한 피란민들에게 주먹밥을 나눠 줬다. 배에서 내린 피란민들은 3일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상태였다.

    『피란민들이 탄 배가 도착하면 주먹밥을 해서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부두로 나갔지.
    피란민들은 한 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다른 손에는 우리가 주는 주먹밥을 먹으면서
    부두를 죽 빠져나오두먼』


     

  • ▲ 1950년 12월24일 마지막 수송선이 떠난 후 폭파되는 흥남부두.
    ▲ 1950년 12월24일 마지막 수송선이 떠난 후 폭파되는 흥남부두.

  • ▲ 지난 5월27일 경남 거제시 신현읍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서 열린 흥남철수작전 기념비 준공식.
    ▲ 지난 5월27일 경남 거제시 신현읍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서 열린 흥남철수작전 기념비 준공식.

     

    인구 10만의 巨濟에 피란민 15만 수용


    거제도에 도착한 피란민들은 주민들의 신세를 져야 했다.

    그때 일을 기억하는 거제도 노인들은 『골방이나 창고에까지 피란민들이 들어찼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방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마을 어귀 공터나 산에 움막을 치고 살았다.

    당시 거제의 인구는 10만 명, 피란민이 15만 명 이상이었다.
    흥남철수작전으로 온 10만여 명의 피란민 외에 부산에 머물던 피란민 상당수가 거제도로 옮겨졌다.

  • ▲ 지난 5월27일, 경남 거제시 신현읍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에 건립된「흥남철수작전 기념비」의 모습.
    ▲ 지난 5월27일, 경남 거제시 신현읍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에 건립된「흥남철수작전 기념비」의 모습.

    장승포 주민 鄭元株(정원주·83)씨는 당시 피란민들의 생활을 생생히 기억했다.

    『우리 뒤주 방에도 피란민들이 몇 명 있었어.
    양식은 배급이 되었지만, 그 사람들 참 불쌍했지 뭐.
    고향에서 금붙이라도 가져온 피란민들은 이를 밑천으로 장사를 했지만, 대부분 돈이 없으니까 산에서 나무를 해서 팔거나, 막노동을 했어.
    그런 일거리도 거의 없었어』

    포로를 상대로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피란민도 있었다.
    포로수용소 철조망 너머로 먹을 것을 넘겨주면, 포로들은 옷가지나 모포를 던져 주었다.
    피란민들은 포로를 표시하는 「PW」라는 글씨를 지우고, 국방색을 탈색한 후 시장에 내다 팔았다.

    피란민들이 많이 머문 장승포항·옥포항·고현항의 부두는 좌판을 벌인 피란민들로 가득했다.
    당시 거제도에서는 장승포항이 가장 번화했다.

    피란민들은 부두에 나와 쌀·고무신·광목 장사를 하거나, 솥을 걸어 놓고 국밥·국수 등을 팔았다.
    윤말금 할머니는 장승포 부두에서 국밥을 팔던 함경도 아줌마의 사투리를 잊지 않고 있다.

    『「빨리 옵세, 오가리 마이 있소」 하고 소리치데.
    나는 「오가리」가 뭔가 싶어 솥을 들여다봤지.
    팥죽 같은 데 밀가루를 뜯어 넣은 것을 오가리라고 하데.
    그 사람들 참 생활력이 강했어요』

    함흥에서 거제도로 피란 온 崔元植(최원식·82) 前 잡지협회 회장은 『성포리 구장집에 아홉 명이 머물렀다』며
    『아홉 명이 그 집에서 석 달 동안 쌀이고 김장김치고 다 먹었는데도 구장은 싫은 표정 하나 짓지 않았다』고 말했다.

    『구장은 밤마다 우리에게 고생한다며 이불 속에 손을 넣어 보고, 먹을 것도 주었어요.
    그렇게 인심이 좋을 수 없었습니다.
    그 구장에게는 자식이 없어서 이제는
    고맙다는 말을 전할 사람도 없습니다』

    피란민들은 거제도에 짧게는 3개월, 보통 1~3년 정도 머물렀다.
    거제도를 빠져 나간 이들은 부산에 나가 막노동을 하거나, 전국에 흩어져서 구두닦이·식당일·공사판 노동일 등을 닥치는 대로 했다.


    포위된 美 제1 해병사단


     

  • ▲ 흥남으로 철수하는 美 해병 1사단 병사들.
    ▲ 흥남으로 철수하는 美 해병 1사단 병사들.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12일 시작됐다.
    동원된 수송선은 모두 193척, 병력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하기 위해 함포 사격과 공중 폭격이 밤낮없이 이루어졌다.

    6·25 때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丁一權(정일권) 장군은 手記에서 『나는 美 10군단장인 알몬드 소장의 철수계획을 들으면서 미국의 거대한 군사력을 실감했다. 그러면서도 그 막강한 해군력·공군력·지상군을 왜 전진공격할 때는 전면 가동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흥남철수는 함경남도 長津湖(장진호) 일대에서 中共軍(중공군)에게 포위된 美 해병1사단 1만2,000명의 병력을 구출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美 해병 1사단이 괴멸될 경우 동부전선에 투입된 美 10군단 병력 10만5,000명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崔秉具(최병구·75·現 서일大 영어강사)씨는 美 해병 1사단 5연대 E중대 민간인 통역관으로 長津湖(장진호) 전투에 참여했다.
    전쟁 전에 美 육군 군사고문단에서 일했던 崔씨는 인천상륙작전 직후 美軍(미군)에 합류했다.

    崔秉具씨는 1950년 10월26일 美 해병대원들과 함께 원산에 상륙해 長津湖 쪽으로 북진했다.
    崔씨가 속한 美 해병1사단 5연대는 7연대와 함께 長津湖(장진호) 서쪽에 있는 유담리까지 들어갔다.

    맥아더 사령부는 11월24일 한국전쟁을 끝내기 위해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총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였다.
    서부전선을 맡은 美 8군은 곧바로 中共軍(중공군)의 반격에 부닥쳤다.
    서부전선 곳곳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戰勢(전세)가 급변하자 동부전선의 美 해병 1사단은 「長津湖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지점에 있는 무평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부전선에서 美 8군을 압박하는 中共軍의 뒤통수를 친 후, 8군과 함께 협공을 펼치려는 작전이었다.

    무평리 공격의 선봉에 선 부대가 崔秉具(최병구)씨가 속한 해병 1사단 5연대였다.
    美 해병대는 11월27일, 서쪽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美 해병대는 유담리에서 채 5km 도 전진하지 못해 中共軍(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을 만났다.
    崔秉具씨의 설명이다.


    山을 이룬 中共軍의 시신


     

  • ▲ 철수하는 美 해병 1사단. 피곤에 지친 병사들이 눈위에 쓰러져 쉬고 있다.
    ▲ 철수하는 美 해병 1사단. 피곤에 지친 병사들이 눈위에 쓰러져 쉬고 있다.

    『유담리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밤새도록 총알을 있는 대로 쏘았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포위되었는지 어쨌는지도 모르고 몰려오는 敵(적)을 쏘기에 바빴습니다.
    中共軍(중공군)의 군복은 뒤집어 입으면 하얀색인데, 밤에는 사람인지 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습니다.

    中共軍은 괴성을 지르며 나팔을 불면서 몰려왔습니다.
    총도 없이 손에 수류탄 하나씩 들고 무조건 달려오다가 총을 맞아 죽습니다.
    하루 저녁 전투를 마치고 중대장하고 中共軍 시체를 세는데 너무 많아서 도저히 셀 수 없었습니다』

    11월28일 아침이 밝자 美 해병대는 中共軍에 포위당한 것을 알았다.

    長津湖(장진호) 서쪽 유담리에 있던 美 해병 1사단 주력부대인 5연대와 7연대, 長津湖 동쪽에 주둔했던 육군 2개 보병대대와 1개 포병대대 약 1만2,000명의 병력이 고립되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11월29일 해병 1사단에 「흥남으로 집결해서 교두보를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포위된 美 해병대는 왔던 길을 되돌아 유담리→하갈우리→고토리→진흥리→흥남까지 240km 이르는 거리를 철수해야 했다.

    이 루트는 「한국의 지붕」으로 불리는 개마고원 지대로, 해발 1000~2000m의 고산지대였다.
    고토리에서 진흥리 사이에는 험난한 황초령 고갯길이 있었다.
    中共軍이 이곳만 점령하고 있어도 사단 병력 전체가 꼼짝 못했다.

    美 해병대는 中共軍뿐 아니라 추운 날씨와도 싸워야 했다.
    기온은 낮에는 영하 20℃, 밤에는 영하 30℃ 이하로 떨어졌다.
    동상과 설사 등으로 쓰러지는 병사가 속출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추위를 敵들도 겪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中共軍, 추위와 굶주림으로 戰意 상실


    <소총의 기름이 혹한으로 얼어붙어 사격을 할 수 없었다.
    자동소총도 불발이나 단발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관총은 어는 것을 막기 위해 2시간마다 사격을 해야 했고,
    박격포 포판이 반동으로 얼어붙은 땅에 부딪혀서 금이 가기 일쑤였다.
    트럭과 전차는 두 시간마다 15분쯤 가동시켜 놓지 않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땅 표면이 35cm 정도 얼어 야전 축성은 그야말로 중노동이었다.
    고무를 많이 사용한 군화는 땀이 많이 차 가만히 있으면 곧 동상에 걸렸다.
    시레이션은 겉은 녹일 수 있어도 속은 얼음덩어리가 남아 있어 복통이나 설사를 일으켰다.
    부상자는 곧바로 동사하기 때문에 후송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마저 곤란했다〉

    (한국전쟁: 日本육전사 연구보급회)


    <모든 것이 얼어 붙었다.
    혈액이 얼어 병이 깨지고, 혈액이 용해되지 않고 튜브가 막혀 버렸기 때문에 수혈할 수 없었다.
    붕대를 갈 수도 없었는데 그것은 장갑을 끼고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상처를 보기 위해 옷을 벗길 수도 없었다.
    때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었다〉

    (美 해병대 戰史)


    1km 전진에 3시간 30분 걸리기도



  • ▲ 李鍾淵 변호사. 美 해병 1사단 연락장교(당시 중위).
    ▲ 李鍾淵 변호사. 美 해병 1사단 연락장교(당시 중위).

    中共軍은 주로 밤이나 새벽을 틈타 공격을 해 왔다.
    이들의 공격은 부족한 탄약과 형편없는 무기, 물자의 부족으로 미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中共軍은 박격포나 기관총 없이 주로 수류탄에 의존한 공격을 펼쳤다.
    美 해병대원이 총을 쏘는 참호 1m 앞까지 기어와 수류탄을 던지려고 하다가 죽은 中共軍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中共軍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戰意(전의)를 잃은 상태였다.
    미군이 접근해도 참호에서 도망가지 않고 스스로 포로가 되거나, 피란민에 섞여서 내려오는 자도 있었다.

    12월1일, 美 해병대 5연대, 7연대는 유담리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다.
    崔秉具(최병구)씨의 설명이다.

    『고지를 하나 점령한 후 부대를 통과시키고, 또 다른 중대가 고지를 점령하고 다시 부대를 통과시키는 식으로 후퇴했습니다.
    황초령 부근에서 中共軍(중공군) 30명이 포로가 되겠다고 따라오는데
    아무리 가라고 해도 가지를 않습니다.
    자기들은 공산당이 아니라 장개석 부대라며 막무가내로 따라오는 겁니다』

    12월4일, 美 해병대는 유담리에서 22km 떨어진 하갈우리에 무사히 도착했다.

    간혹 1km를 전진하는 데 평균 3시간 30분이 걸릴 정도로 힘든 철수였다.
    하갈우리에는 美 해병대 지휘소와 보급기지가 있었다.
    철수작전 4일 동안 발생한 해병대 부상자가 4,400명, 사망자가 137명이었다.

    하갈우리에서 집결한 병력은 1만여 명, 차량은 1,000대였다.
    하갈우리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美 해병대는 12월6일 하갈우리 집결지를 출발, 다음 철수지점인 고토리로 이동했다.

    12월7일 아침 선두부대가 고토리 진지에 도착했다.
    하갈우리에서 고토리까지 오는 과정의 전투에서 美 해병대는 사망 86명, 부상 506명 등 600여 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해병대의 철수에서 항공기 엄호는 절대적이었다.
    항공기 때문에 中共軍(중공군)은 주간에 부대 자체를 집결할 수 없었다.

    中共軍은 항공기와 보병, 포병을 유기적으로 사용하는 미군의 전투기술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步(보)·戰(전)·砲(포)·항공기 간의 협조는 놀라울 정도로 긴밀하였다.
    從深(종심) 깊이 중화기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자동경화기, 로켓, 무반동포 등을 잘 조정하여 배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화기들은 엄폐되어 있었다.

    我軍(아군)이 70~100m까지 접근했을 때 갑자기 사격하여, 我軍(아군)의 전개를 곤란하게 해 많은 피해를 주었다>

    (中共軍 26군 노획문서)

    수적으로 미군보다 많게는 10배나 우세했던 中共軍은 추위와 보급 부족으로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수송인원이 없어 보급추진이 안 되었고, 병사들은 찬 음식을 먹었다.
    그나마 2일 동안에 감자 몇 개밖에 먹지 못한 병사도 있었다.
    부상자는 제때 후송이 되지 않아 부상은 곧 사망이었고, 화포를 이용하려 해도 탄약이 없었다.
    있다고 해도 불발탄이었다. 병사들이 눈 쌓인 지면에서 야영을 해서 손과 발이 얼어
    수류탄의 안전핀도 뽑을 수 없었다. 박격포의 포신도 얼어 수축되었으며
    포탄의 70%가 불발이었다>

    (美 해병대 공간사 및 노획한 中共軍 문서)


    12월10일, 美 해병대가 마지막 관문인 황초령을 넘을 때 中共軍은 미군의 주력부대를 분산시키는 공세를 펼쳤으나 미군의 화력에 큰 힘을 쓸 수 없었다.

    12월11일, 고토리를 출발한 美 해병대는 진흥리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별다른 저항 없이 트럭이나 기차 등으로 흥남으로 철수했다.
    고토리-진흥리 간 전투에서 美 해병은 전사 51명, 부상 300여 명 등 도합 35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 ▲ 李鍾淵 변호사. 美 해병 1사단 연락장교(당시 중위).


    美 해병대의 後尾(후미)를 쫓는 피란민들


    피란민들은 철수하는 美 해병대의 後尾(후미)를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美 해병대가 고토리를 지날 무렵 피란민 수는 3,5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철수 후속부대인 공병대가 가끔 피란민들에게 뒤쳐지거나, 이들과 섞여서 행군했다.

    가끔씩 피란민 속에 섞여서 있다가 튀어나와 미군을 공격하는 中共軍(중공군) 때문에 後尾(후미)를 맡은 미군들은 공포를 쏘면서 따라붙는 피란민들을 멀찍이 떼어놓으려 했다.

    <제1연대 2대대 B중대는 피란민들이 진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다.
    눈보라 속에 노인과 아녀자들이 불도 없이 눈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남루한 모습을 하고 있는 어린이들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해병대 병사들에게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피란민들을 진지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싶었지만, 中共軍이 피란민들 틈에 끼어서 진지 내로 들어와서 공격을 가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미군은 이들을 진지 밖에 둘 수밖에 없었다.
    이날 밤 해군 위생병의 도움으로 아기 두 명이 출산했다>

    (한국전쟁: 日本육전사 연구보급회)


     

  • ▲ 李鍾淵 변호사. 美 해병 1사단 연락장교(당시 중위).



    死地(사지)에 내몰린 기독교인들


    당시 고려大 1학년에 재학 중이던 李鍾淵(이종연·77) 변호사는 전쟁이 나자 학도병으로 지원했다.
    그 후 그는 美 해병대 1사단 연락장교로 파견되어 통역을 담당했다.
    그는 長津湖 전투 때 사단지휘소가 있던 하갈우리에 머물고 있었다.

    『내 임무는 하갈우리 중년 남자들을 동원해 지휘소 설치를 돕고, 공수 투하된 보급품을 회수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동원된 마을 사람들 중 세 명이 敵(적)의 사격으로 죽었습니다.
    하루는 어느 집을 방문하니 20명의 주민이 예배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울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5년간 공산 치하에서 박해받은 그들은 또다시 공산군에 점령되면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갈우리에 남아 있던 300명 주민이 같이 피란을 나왔습니다.
    그들은 눈 쌓인 맨땅에서 잤습니다.
    흥남부두에 도착하니 온 부두가 피란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정말 비참한 광경이었어요』

    함경북도 길주와 청진 방향으로 진격했던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은 비교적 손쉬운 철수 작전을 펼쳤다.

    韓永燮(한영섭·77)씨는 KBS 종군기자로 수도사단을 따라 청진까지 진격했다가 후퇴했다.

    『저를 비롯한 수도사단 일부 군인들은 군함을 타고 먼저 청진항을 출발했습니다.
    당시 청진·성진 등 다른 항구에서도 목선으로 피란한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軍은 수복지역에서 치안유지를 했던 청년과 反共단체 사람들을 트럭을 동원해 육로로 먼저 피신을 시켰습니다.
    성진과 흥남 중간인 이원에서 하룻밤 머무르는데 마을 노인들 20여 명이 몰려와서 애원을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은 늙어서 못 가지만 애들이라도 좀 데리고 가달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배에 여유가 없다」면서 「걸어서 흥남으로 가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철수를 앞둔 흥남부두는 피란민과 군인이 뒤섞여 아수라장이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12월11일 원래 함흥과 흥남에서 강력한 교두보를 구축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이북에서 전면철수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美 10군단은 10일 안에 10만 명의 병력과 수십만t의 물자 수송을 끝낸다는 철수계획을 세웠다.

    長津湖(장진호)에서 철수한 해병대들이 흥남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93척의 함정이 사람과 물자를 싣기에 여념이 없었다.
    12월12일 長津湖 전투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美 해병 1사단부터 배에 올랐다.

    흥남 앞바다에서는 미주리호를 비롯한 13척의 美 항공모함이 中共軍(중공군) 진지와 집결지를 향해 함포사격을 했다.
    함재기들은 하늘에서 中共軍에게 폭격을 퍼부었으며, 흥남 시가지에 늘어선 곡사포는 북쪽과 서쪽을 향해 쉴새없이 불을 뿜었다.


    미군, 피란민 철수를 고려 안 해


     

  • ▲ 玄鳳學 박사. 6·25 전쟁 당시 美10군단 민사담당 고문관.
    ▲ 玄鳳學 박사. 6·25 전쟁 당시 美10군단 민사담당 고문관.

    美 해병 1사단의 승선에 이어, 美 10군단 본부, 국군 1군단 순으로 군인들의 승선이 완료됐다.
    흥남 외곽의 방어선은 점차 축소되었고, 中共軍과 북한군은 산발적인 돌파를 계속했다.
    미군 철수가 마무리될 무렵 美 함선들은 지원 포격을 한층 강화했다.

    미군의 철수작전에는 당초 피란민 수송계획이 없었다.
    흥남으로 몰려든 10만 명의 피란민들은 미군 수송선을 탈 수 있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이 부두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함남 갑산군 동림면에서 걸어서 흥남부두까지 온 趙來佶(조래길·80)씨는 『피란민들이 배에 가까이 가면 UN軍이 막았다. 해가 지면 인근 주택에 들어가거나 부두에서 잠을 잤다. 부두 상황을 계속 파악해야 했다』고 말했다.
    민가에 들어가지 못한 많은 피란민들은 부두나 인근 백사장에서 밤을 샜다.
    살을 에는 눈보라가 쉼없이 몰아쳤다.

    美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보좌관 헤이그(훗날 美 국무부 장관) 대위는 『흥남철수의 가장 아픈 기억은 누군가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면서 무시무시한 추위 속에서 심지어 허리까지 오는 바닷물 속에 서 있던 피란민들을 바라보던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알몬드 장군의 美 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흥남부두에 와 있던 玄鳳學(현봉학·83) 박사는 피란민을 구하기 위해 뛰었다.
    그의 고향은 함흥이었고, 함흥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공산당이 점령을 하면 이들의 목숨이 제일 위험했다.

    玄鳳學 박사는 알몬드 장군의 부참모장인 포니 대령을 만나 함흥의 민간인들을 구해 줄 것을 요청했다.
    포니 대령은 『같이 노력해 보자』고 말했다.
    11월30일 포니 대령과 玄鳳學 박사는 알몬드 장군을 만났다.

    玄박사는 『장군님! 이들은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신봉하는 자들입니다. 지난 5년 동안 그들은 공산주의자와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UN軍을 도와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호소했다.

    포니 대령도 거들었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각오하고 우리를 도왔습니다』


    玄鳳學(현봉학)의 애끓는 설득


    알몬드 장군은 『당신들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현재로서는 군대조차 제대로 탈출할 수 있을지 모르겠기 때문에 확신을 할 수가 없다』『맥아더 사령부에 건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흥남에서 13km 떨어진 함흥의 철수 시한이 12월16일 오전 6시로 잡혔다.
    中共軍은 함흥 앞까지 와 있었다.
    玄鳳學(현봉학) 박사는 여러 차례 알몬드 장군에게 건의를 했다.

    알몬드 장군은 12월15일 玄鳳學 박사를 불러 『4,000~5,000명의 피란민을 함흥에서 흥남으로 구출하기로 했다. 우선 기독교인들과 유엔군을 위해 일한 사람을 철수시키라』고 말했다.

    玄鳳學 박사는 그 길로 지프를 몰고 함흥으로 달려갔다.
    교회를 돌며 서둘러 철수하라고 연락했다.
    그날 함흥 기차역에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소식을 들은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기차는 12월16일 새벽 5시에 흥남으로 출발했다.
    기차를 타지 못한 사람들이 걸어서 흥남으로 왔다.
    헌병들은 군용차량을 위해 피란민을 제지했다.
    많은 사람들은 산길을 타고 걸어서 흥남으로 갔다.
     
    지난 5월2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족공원에 건립된 흥남철수 기념비 앞에 선 로버트 러니氏와 현봉학 박사.
    로버트 러니는 흥남철수 때 1만4,000명을 피란시킨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상급선원이었다.


  • ▲ 金白一 1군단장.
    ▲ 金白一 1군단장.



    한국軍 『우리는 걸어서 탈출하겠다』


    미군과 달리 한국군 지휘부는 피란민을 데리고 가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국군의 후퇴가 결정된 직후 丁一權(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은 1군단 사령부가 있는 성진에서 金白一(김백일) 군단장을 만났다.
    丁一權(정일권) 장군의 手記다.

    <金白一(김백일)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야 군인이니까 민간인 배를 타고 빠져나갈 수 있겠지.
    여기 북한 동포들은 어디로 가나, 산으로 가나 바다로 가나.
    모두들 아우성이야.
    울면서 제발 이남으로 데려가 달라는 거야.

    북괴놈들이 무지막지하게 보복을 하고 있다는 거야.

    알몬드는 군대 수송이 먼저라고 하겠지.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동포들을 배에 태우겠네.
    그러니까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거든 잘 수습이나 해주게』

    흥남으로 철수한 金白一 장군은 1군단사령부에서 피란민 수송대책을 열었다.
    12월19일이었다.

    수도사단장 宋堯讚(송요찬) 준장과 군단 민사처장 柳原植(유원식) 중령 등 참모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金白一(김백일)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끝까지 미군과 교섭을 벌여야 한다.
    수십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정 못 하겠다고 하면 그 사람들 앞에서 배라도 갈라야 한다.
    정 안 되면 차라리 우리 총으로 쏴 죽이는 편이 났다.
    어차피 북괴놈들에게 당할 테니 말이다.
    최악의 경우 우리가 피란민들을 직접 데리고 가야 한다』>


    한국군 1군단장 金白一(김백일) 장군의 민사참모였던 柳原植(유원식) 중령의 증언에 따르면, 민간인 철수는 흥남철수의 막바지에 결정되었다.

    <12월18일 철수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알몬드 장군이 불러서 갔습니다.
    장군은 함남지사와 어느 목사 등 3명의 민간인만 데리고 가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아연실색했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적어도 10만 명은 데리고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문제로 알몬드 장군과 옥신각신했습니다.
    나는 나와서 곧바로 金白一 장군에게 보고했습니다.
    金白一 장군은 『미국이 영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국군 1군단이 피란민을 엄호하면서
    육로로 후퇴하자』고 말했습니다.
    참모들이 모두 동의했습니다.

    19일 다시 알몬드 장군 측을 만났더니 『3,000명까지만 허용하고 그 이상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육로로 가겠다고 하자 『노, 노』 하며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민족의 증언: 중앙일보)



    흥남철수작전의 책임자 알몬드 장군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부두에 모여든 피란민 자신들이었다.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알몬드 장군은 L-19기를 타고 흥남부두 위를 비행하였다.
    헤이그 대위도 다른 L-19기로 비행을 하고 있었다.
    헤이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썼다.

    <보잘것없는 살림살이를 든 많은 피란민들이 우리 군인들과 뒤섞여 있었다.
    육군과 해병대는 이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공산 정권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해졌다.
    항구에 정박 중인 미국 배를 향해 수만 명의 피란민들이 차가운 바닷물을 헤치면서 걸어갔다>



    맥아더 사령부, 피란민 전면 철수 결정


     
     

  • ▲ 마리너스 레너드 라루 선장. 6·25 전쟁 후 성베네딕토회 修士가 되었다.
    ▲ 마리너스 레너드 라루 선장. 6·25 전쟁 후 성베네딕토회 修士가 되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놔두고 갈 수 없다. 모두 구출해야 해』

    피란민의 전면 철수가 결정되자 남한과 일본에서 수송선과 상륙정이 징발되어 올라왔다.
    12월19일부터 민간인들의 승선이 시작되었다.
    1,000명이 타도록 설계된 상륙정들은 5,000명까지 승선을 시켰다.
    피란민이 너무 많이 타서 갯벌에 처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륙정도 있었다.

    12월19일 부산에서 올라온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항으로 들어갔다.
    건조된지 5년이 된 7,600t 급 미국 국적의 화물선이었다.
    12월20일 흥남부두에 도착해 쌍안경으로 흥남부두를 살피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깜짝 놀랐다.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북한 피란민들이 선창에 떼를 지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레로 나르거나, 들것, 혹은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들의 옆에는 놀란 병아리들처럼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뒤에는 그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하려는 中共軍(중공군)이 있었고,
    그들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닻을 내리자 美 10군단 존 차일즈 대령이 승선했다.

    『우리가 당신에게 피란민을 태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소,
    당신이 자원하여 얼마라도 태우고 나올 수 있는지 묻고 싶소.
    상급선원과 의논해 결정을 내려 줄 것을 부탁하오』

    이 말을 들은 라루 선장은 누구와 상의하지도 않고 배를 부두에 댈 것을 명령했다.

    12월22일 밤 9시부터 피란민 승선이 시작되었다.
    라루 선장은 일등항해사에게 『피란민을 승선시키시오, 1만 명이 되면 나에게 보고하시오』하고 지시했다.
    승선은 다음날 오전 11시가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최종 승선을 마쳤을 때 1만4,000명이 타고 있었다.

    3일간의 항해 끝에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거제도에 도착하여 피란민을 풀어놓았다.
    라루 선장은 전쟁 후 본국으로 돌아가 베네딕토회 修士(수사)가 되어 생을 마쳤다.


    自由(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


     

  • ▲ 白南權 장군. 수도사단 부사단장(당시 대령).
    ▲ 白南權 장군. 수도사단 부사단장(당시 대령).

    왜 10만이 넘는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북한을 탈출했을까.
    피란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白南權(백남권·84·소장 전역) 장군은 흥남철수 당시 국군 1군단 수도사단 부사단장이었다.
    그는 『골수 좌익분자들은 다 도망가고 북한지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전부 국군을 환영하는 사람들이었다』『다시 공산정권이 들어섰을 때의 보복이 두려워 모두 따라 내려왔다』고 말했다.

    『곳곳마다 주민들이 국군 환영대회를 했습니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치안대를 조직했고, 「애국청년단」 같은 反共단체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북한에 어떻게 남아 있겠습니까.
    우리 수도사단이 북진을 할 때 나는 가는 곳마다 초상집을 목격했습니다.
    후퇴하는 인민군들이 反共(반공)인사를 학살한 것입니다.
    공산군의 만행을 잘 아는 주민들은 다시 공산군이 내려온다니까 필사적으로 탈출한 겁니다』

    흥남시 운중리에 살고 있던 玄彩麟(현채린·79)씨 집에는 UN軍 포부대가 집결해 있었다.
    다음날 이 포부대가 돌연히 사라졌다.

    玄씨는 포부대가 후퇴하는 것을 보고 아들·딸·아내를 데리고 내호부두로 갔다.
    내호부두는 비료공장·화학공장·기계공장 등이 몰려있는 곳이었다.
    바다 쪽에서는 함포사격이 요란했다.

    『내가 배를 탄 것이 12월23일입니다.
    우리는 배를 못 타면 몰살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두에는 내가 탄 화물선 외에 화물선 한 척이 더 있었습니다.
    우리 화물선은 미국 상선이었는데 3개 층으로 되어 있었어요.
    배에서 애를 낳는 것도 보았어요.
    대소변도 그 자리에서 봐야 하니 냄새가 말도 못했습니다.
    강릉쯤을 지나는데 크리스마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 玄彩麟. 북한에서 소비조합 근무
    ▲ 玄彩麟. 북한에서 소비조합 근무

    玄씨는 일제시대 상업학교를 나왔다.
    12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다고 한다.
    북한 정권이 들어섰을 때 그는 소비조합에서 일을 했다.
    소비조합은 배급을 관리하고 조달하는 기관이다.

    『나는 노동당원도 아니었고, 北의 사상도 맞지 않았습니다.
    北에 있다가는 앞으로 신상에 어떤 변화가 올지 알 수 없었어요.
    거제도에 4년간 머물면서 노동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1954년 서울에 올라왔는데 취직할 데가 없었습니다.
    동작동 국립묘지 조성공사에서 막노동을 2년 했습니다.
    그 후 공군 군속도 하고, 회사도 다니고 문구점도 했습니다』


    현재 거제도 장승포에 살고 있는 李모(75)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신의주에 살았다.
    李할머니는 후퇴하는 인민군이 아버지와 오빠를 처형하는 것을 보고 충격받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신의주 제일교회 목사였습니다.
    오빠는 3대 독자였고요.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사상이 나쁘다면서 아버지와 오빠를 내가 보는 앞에서 처형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고, 깨어나니 옛날 기억이 아무것도 나지 않는 완전히 바보가 되었습니다.

    그 후 南에 함께 나온 우리 교회 장로님이 성경을 꺼내놓고 글도 가르쳐 주고, 여러 가지 기억을 상기시켜 주었지만 지금도 19세 이전의 일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오빠의 처형 장면도 생각나지 않아요.
    장로님이 가르쳐 줘서 알 뿐이죠』

    李할머니는 그 후 「여자 학도병」에 지원하여 국군을 따라 흥남으로 오게 됐다. 


     

    崔元植 前 잡지협회 회장, 북한에서 공무원


  • ▲ 崔元植 前 잡지협회 회장. 북한에서 공무원.
    ▲ 崔元植 前 잡지협회 회장. 북한에서 공무원.

    崔元植(최원식·82) 前 잡지협회 회장은 함남 갑산에서 걸어서 후퇴를 했다.
    일제 때 혜산군청 산업과에서 공무원을 했던 그는 이북 정권에서 쫓겨난 후 취직이 되지 않았다.

    『소학교도 안 나온 사람이 郡守로 발령 받아 왔습니다.
    일제 때 공무원도 거의 다 쫓겨났습니다.
    北에 있어 봐야 아무 희망이 없었습니다.
    혜산진에서 풍산까지 80리, 거기서 북청이 150리, 거리서 흥남이 150리입니다.
    후퇴하는 국군 뒤를 따라 나왔습니다.
    당시 北에 있던 여자들은 늙은 시부모들 때문에 거의 못 나왔습니다』

    崔씨는 흥남까지 오는 데 22일 정도 걸렸다고 했다.
    잠은 동네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자고, 밥은 얻어먹거나 사먹었다.
    피란민들에 대한 인심이 좋아 동네마다 잘 재워 주었다고 했다.

    흥남부두에 머물 때는 밤에는 인근 마을 집에 들어가 자고, 낮에는 부두로 나오기를 반복했다.
    흥남 주민들도 떠날 준비를 하느라 모두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타고 나온 LST(상륙정)에는 2,000명 가량이 탔다.
    항해 도중 기관이 고장 나서 바다에 정박한 채 수리를 하고 오는 바람에 거제도에 도착하는 데 14일이 걸렸다.

    UN軍 협조자


    흥남시 송동리에 살던 楊承浩(양승호·84)씨는 광복 후 원산 군자교 인민학교 교사로 있었다.
    UN軍이 흥남 지역을 점령하고 나서 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공산군이 들어오면 나는 UN軍 협력자로 꼼짝없이 죽을 입장이었습니다.
    12월12일 교원자질 향상 강습이 있어서 새벽에 만세교를 넘어 시내에 있는 학교로 갔는데 오후부터 다리가 통제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만세교 서쪽 서흥남 지역에 있던 우리 가족들이 못 넘어온 것 같습니다』

    당시 그의 집에는 할머니, 부모, 동생이 남아 있었다.
    그는 외아들이었다.

    楊씨는 『사람들이 내호부두에 집결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갔다.
    그는 흥남시 교사들과 따로 모여 있었다.


     

  • ▲ 인천상륙작전 시 마운트 매킨리호에 승선한 맥아더 사령관. 그의 뒤편 오른쪽이 알몬드 소장이다(왼쪽 사진). 알몬드 장군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있는 포니 대령.
    ▲ 인천상륙작전 시 마운트 매킨리호에 승선한 맥아더 사령관. 그의 뒤편 오른쪽이 알몬드 소장이다(왼쪽 사진). 알몬드 장군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있는 포니 대령.



    흥남철수 後(후) 軍(군)입대한 사람들 많아


    『부두에서 며칠을 기다렸는데, 12월20일경인가 앞뒤에 해치가 두 개 있는 배가 한 척 왔습니다.
    그 배 사람들이 교사들이 모여 있는 우리 쪽을 향해 「선생! 여기 일할 사람 50명이 필요하니 올려 보내시오」 하는 겁니다.
    사람들을 피란시키려는데 그냥 태우기가 뭣하니 일할 사람 뽑는다는 명목으로 우리를 태운 겁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해 50명이 탔습니다.
    배에는 쌀 가마니가 실려 있었습니다.
    내가 번호를 500번을 받았는데 배 안에는 이미 청진에서 타고 온 수백 명이 있었어요.
    합해서 1,000명 정도 될 겁니다』

    楊씨는 크리스마스 전날 거제도 장승포에 도착했다.
    그는 뒷배가 들어올 때마다 혹시 가족이 탔는가 하고 나가 보았으나, 그의 가족은 없었다.
    楊씨는 거제도에 3개월 정도 머물다 방위군에 입대해 부산으로 갔다.
    그때 방위군 간부들의 부정사건으로 방위군이 해체되자, 건설현장에서 막노동 등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楊承浩(양승호)씨처럼 방위군이나 軍에 입대를 한 피란민들이 많았다.
    현재 기업체 사장을 하고 있는 朴씨(75)는 『공산당을 무찔러 하루빨리 가족을 만나려고 軍에 지원했다』고 한다.
    그는 『북한에 조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실명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朴씨는 4형제였으나 혼자만 탈출했다.

    『흥남에서 떠나온 사람들을 전부 한 일주일만 피했다 오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곧 UN軍이 반격한다고 했으니까요.
    그때 내가 20세였는데 인민군에 징집 안 당하려고 이리저리 피하고 있었습니다.
    부두에 도착해 보니 벌써 LST 같은 상륙정은 다 떠나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발동어선 하나가 들어왔어요.
    이 어선에는 동력이 없는 바지선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탔습니다.
    하룻밤 항해 끝에 강원도 묵호항에 도착했습니다.
    오다가 파도가 심해 바지선의 물을 퍼내느라 난리를 쳤습니다』

    묵호에 내린 朴씨는 방위군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한 달간 훈련받은 후 다시 육군 종합학교에 입교했다.
    여기서 15명이 차출되어 종합학교 후보생 자격으로 美 8군에 배속이 되었다.

    『美 8군 공수부대에서 북한 침투교육을 위한 밀봉교육을 받고 곧바로 낙하산으로 북한에 투입됐습니다. 소위로 임관할 시간도 없었어요. 강원도 통천에 23명이 낙하했는데 3명이 걸어서 살아나오고 다 죽었습니다. 敵 보급로 폭파가 임무였는데 작전 중에 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부대가 있었다는 것은 확인이 되어 전우회가 결성되어 있지만, 그때 전사한 사람은 군번이 없어서 그런지 명단 확인이 안 되어 전공처리가 안 됩니다. 동작동에 추모비만 하나 세웠어요』

     

  • ▲ 楊承浩. 북한에서 교장.
    ▲ 楊承浩. 북한에서 교장.

    10·26과 12·12 당시 보안사 기획처장을 지냈던 崔禮燮(최예섭·76·준장전역) 장군은 흥남에서 돛단배를 타고 빠져나왔다.
    도착한 곳은 경북 포항이었다.

    『12월 초 흥남 우리 집에 수도사단 사령부 헌병 대위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국군이 후퇴하니 젊은이들은 우선 피하라」고 했습니다.
    6남매 중에 징집 나이가 된 나와 동생 두 명이 부두에 가니 누런 돛을 단 범선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10명 정도가 타고 탈출했습니다.
    우리는 정보를 빨리 알고 빠져나온 겁니다』


    崔장군은 함흥사범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교사로 취직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마침 방위군 사관학교에 생도 모집이 있어서 그는 동생과 함께 지원했다.

    『군인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지원했습니다.
    방위군이 해체된 후에 장교만 남아 보병학교에 들어가서 再교육을 받고 임관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남은 가족들이 흥남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가족과 재회한 후 동생은 고등학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학교로 돌려 보내고,
    나는 군인으로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우리 갑종 출신 1만1000명이 참전했는데, 참 많이 죽었습니다』


     

  • ▲ 劉在萬 함남도민회 회장. 흥남 철수작전 기념사업회 공동위원.
    ▲ 劉在萬 함남도민회 회장. 흥남 철수작전 기념사업회 공동위원.

    흥남부두에서 현지 입대한 경우도 있다.
    劉在萬(유재만·74·소장 전역) 함경남도 도민회장이 그런 경우다.

    『부두에서 군인들이 「입대할 사람 손 들라」고 해서 지원했습니다.
    그러면 배를 빨리 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입대하겠다는 청년 500명만 군용선으로 미리 싣고 묵호에 나온 것입니다.
    묵호에서 입대자를 再분류해 곧바로 제식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때 누구도 입대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저 군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단순한 생각만 했습니다.
    일주일간 훈련받고 이등병으로 고성의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다가, 나중에 장교로 지원했습니다』

    그는 종합학교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한 후 수도사단 1연대 12중대 소대장으로 향로봉 전투와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됐다.

    劉在萬 회장은 『당시 임관하여 수도사단에 배치된 갑종 8기 동기생 12명이 전쟁 중 모두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고, 혼자만 남았다』고 한다.


    흥남부두의 이별



  • ▲ 沈敬模 파라다이스 부회장. 부모와 함께 21명 全가족이 월남.
    ▲ 沈敬模 파라다이스 부회장. 부모와 함께 21명 全가족이 월남.

    족과 헤어져서 부두에 온 이들이 많았고, 흥남부두에 도착한 이후 안타까운 이별은 계속됐다.

    沈敬模(심경모·66) 파라다이스 부회장 가족은 국군이 후퇴한다고 하자 고향인 갑산을 떠났다.
    21명이나 되는 대가족이었다.
    沈회장은 『당시 형님과 숙부가 反共단체 활동을 해서 온 가족이 탈출했다』고 말했다.

    온 가족이 무사히 흥남부두에 도착했으나 沈회장의 셋째 형은 배를 타지 못했다.
    배를 기다리던 그의 셋째 형은 날이 추워서 잠시 민가에 불을 쬐러 들어갔다.
    그 사이 부두에 있던 가족들의 승선이 시작됐다.
    沈부회장의 형은 당시 여학교 교사였다고 한다.

    丁一權(정일권) 육군 참모총장은 12월24일 흥남부두에서 마지막 수송선이 떠날 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받았다고 기록했다.

    <그때 수송선(LST)의 앞 쇠문이 닫혀지고 있던 순간이었다.
    피란민들은 필사적으로 닫히는 쇠문에도 매달렸다.
    쇠문에 끼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쇠문을 잡으려고 팔을 뻗쳤다가 바닷물에 곤두박질하는 피란민도 있었다.
    그러한 참상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그만 통곡을 하고 말았다.
    착잡한 심정에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사퇴의사를 밝혔다.
    한참 후에 李承晩 대통령이 말문을 열었다.

    『그것이 어찌 丁총장만의 죄인가.
    정말 죄인은 나야.

    이토록 가슴 아픈 일은 또 없을 것이오.
    자식과 헤어져 나온 부모들은 자식 생각에 울 것이고, 부모와 갈라진 자식들은 부모 생각에 울 것 아니겠는가.
    전쟁은 이제부터이니 더욱 분발해야 하는 것이오』〉

    (丁一權 회고록)


    목숨을 건 흥남부두에서의 탈출


    黃鎬采(황호채·80)씨는 당시 LST 온양호 실습 항해사였다.

    온양호는 미국에서 기증받은 배로 대한해운공사 소속이었는데 전쟁이 나자 징발되었다.
    黃씨는 철수 마지막 날 항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2700t 온양호에 수천 명을 태우고 나왔습니다.
    사람이 포개서 앉을 정도였습니다.
    부두에는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이 아우성이었습니다.
    선두 쪽의 문을 닫을 때는 미처 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피란민이
    문 사이에 끼여 허덕이다가 바다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배에 탄 미군들이 배를 빨리 떼라고 허공에 총을 막 쏘았어요.
    우리 배가 출항하자마자 흥남 시내가 불바다가 됐는데, 철수선을 타지 못하고 부둣가에서 아우성 치던 그 많던 피란민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1950년 12월10일을 전후하여 원산, 성진 등에도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12월7일 원산항에 운집한 피란민들을 싣고 나온 것은 미국 상선인 레인 빅토리호였다.
    레인 빅토리호는 원산에서 7,600명의 피란민을 싣고 나와 부산에 내려놓았다.

    李根用(이근용·74)씨는 『아버지가 원산시 자치위원회 과장이었는데 새벽 2시에 市에서 사람이 와서 원산부두로 피하라는 연락을 했다』며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부두로 나갔다』고 했다.

    『배에 빈 자리가 없다며 꼭 데려나올 사람만 데리고 원산부두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인원 제한 때문에 일단 인민군 징집 나이인 나와 동생을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나중에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배를 타서 가족이 모두 만났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李씨 가족은 거제도에 가야 피란민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정부관리들의 말에 따라 거제도로 이동했다고 한다.

    남한에 도착한 피란민들은 생존을 위해 싸우느라 그동안 과거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朱惠子(주혜자·74·여)씨는 『나이가 드니 그때 두고 온 늙은 부모와 동생들 생각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흥남철수 당시 함흥사범학교 졸업반이었다.

  • ▲ 1만4000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미국 시애틀 항구로 돌아오자 시애틀 포스트 인텔리전스에 관련기사가 실렸다(1951년 1월).
    ▲ 1만4000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미국 시애틀 항구로 돌아오자 시애틀 포스트 인텔리전스에 관련기사가 실렸다(1951년 1월).


    영웅들


    『나는 집이 흥남에 있었는데 방학을 해서 잠시 흥남에 있는 고모 집에 가 있었습니다.
    그때 고모가 피란한다기에 나는 「잠시 남한 구경이나 하고 오자」 해서 나왔습니다.
    한 일주일 안에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다 그렇게 알고 있었죠.
    「나는 왜 부모님에게 밥 한 끼 대접 못 하는 불효를 저지르고, 동생들 얼굴도 못 보고 살아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비관스럽습니다』

    수도사단 부사단장이었던 白南權 장군은 『그때 흥남에서 우리가 북한 동포를 버리고 왔다면
    지금 얼마나 큰 죄책감에 살고 있겠는가』 하고 말했다.

    『전쟁 동안 내가 데리고 있던 부하 500명이 죽고, 1,500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지금도 그들을 死地로 보낼 때 따뜻한 고깃국이라도 한 그릇 먹여서 보냈더라면 하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지난 5월27일 열린 거제도 흥남철수 기념비 준공식장에는 美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외손자 토머스 퍼거슨(61), 알몬드 장군의 副참모장 포니 대령의 손자 존 포니(37·의사),메러디스 빅토리호 상급선원 로버트 러니(77·변호사), 玄鳳學(현봉학) 박사 등이 참석했다.

    CNN, CBS, 로이터 통신 등 외국 취재진의 열기가 뜨거웠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앞에 선 러니氏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사람들이 흥남부두에 모여 있었고, 그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어서 구조한 것입니다.
    피란민들은 질서정연하게 탔고, 서로 밀치지도 않았어요. 배에는 화장실도 없고, 물도 없고,
    음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추운 갑판 위에서 잘 참아 주었어요.

    정말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진정한 영웅입니다.

    피란민들의 탈출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때 헤어진 많은 이산가족을 생각하면 아직도 슬픕니다』


    영웅들의 후손들


     

  • ▲ 포니 대령의 손자 존 포니(왼쪽)와 알몬드 장군의 외손자 토머스 퍼거슨(오른쪽).
    ▲ 포니 대령의 손자 존 포니(왼쪽)와 알몬드 장군의 외손자 토머스 퍼거슨(오른쪽).


    이날 행사에 참여한 포니 대령의 손자는 『정말 믿을 수 없는 행사』라며 『할아버지가 살아서 이 모습을 보았다면 무척 기뻐했을 것』이라며 감격해했다.
    그의 할아버지 포니 대령은 1965년 작고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할 때 사람들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 흥남철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가,
    후에 玄鳳學(현봉학) 박사로부터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존 포니氏는 『최근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 反美감정이 있다는 것을 안다』며 입을 열었다.

    『처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매우 슬펐어요.
    하지만 할아버지의 노력이 한국이 민주주의를 이루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처럼 한국을 도운 많은 분들의 희생으로 오늘날 한국에 민주주의가 왔습니다.

    과거를 모르는 일부 젊은이들은 지금 이러한 민주주의 덕분에 자기의 주장을 펼칠 수 있습니다.
    민주국가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무슨 발언을 하든 그것은 자유이니까요』
    ● 



    ▣ 흥남철수작전

    13일간 병력 10만, 피란민 10만 탈출

  • ▲ 포니 대령의 손자 존 포니(왼쪽)와 알몬드 장군의 외손자 토머스 퍼거슨(오른쪽).

    흥남철수작전은 全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이루어졌다.

    자유를 찾아 북한 지역을 탈출하려는 10만여 명의 피란민들은 UN軍이 自由(자유)의 전선을 지키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필사적으로 북한을 탈출하려는 피란민들을 보면서 자유진영의 사람들은 왜 UN軍이 이 전쟁을 하고 있으며, 왜 이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흥남철수작전은 12월12일 시작돼 12월24일 끝났다.
    美 10군단 병력과 한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 병력 10만5,000명, 피란민 9만8,000명(추정)이 북한지역을 탈출했다.
    차량 1만7,500대, 연료 2만9,000드럼, 탄약 9,000여t 등 35만t의 장비도 수송됐다.

    미군은 흥남철수작전을 끝내면서 흥남항구를 폭파시켰다.

    동부전선에 진출했던 美 10군단 병력 10만여 명은 1950년 12월 초 원산이 중공군에 함락되면서 퇴로를 차단당했다.
    함경남도 長津湖(장진호) 부근까지 진격했던 美 10군단 해병1사단 병력 1만2,000명은 中共軍에 완전 포위당했다.

    해병 1사단 병력을 구출해 내고, 美 10군단 병력을 흥남부두에 집결시켜 철수시킨 것이 흥남철수작전이었다.

    성공적인 흥남철수는 한국전쟁의 양상을 크게 바꾸었다.

    美 10군단은 병력과 화력을 온전하게 보존함으로써 후일 中共軍(중공군)의 대공세를 막아내는 주력부대가 됐다.
    중공군 제9병단은 美 해병 1사단의 포위망 탈출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中共軍 9병단은 3개월간 작전에 투입되지 못했다.
    동부전선에서 美軍(미군)을 섬멸한 뒤 곧바로 서부전선의 美 8군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中共軍(중공군)의 계획은 불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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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흥남철수 기념비 건립 주역 白聖鶴(백성학) 영안모자 회장

    『은혜를 잊지 않아야 제대로 된 나라다』


  • ▲ 포니 대령의 손자 존 포니(왼쪽)와 알몬드 장군의 외손자 토머스 퍼거슨(오른쪽).


    열 살 때 원산 떠난 전쟁고아

    『10만여 명의 생명을 구해 준 사람들의 은혜를 갚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주한미군이 조그만 실수를 해도 온 언론이 나서서 뭇매를 가하면서, 6·25 때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을 도와준 미국의 고마움은 다 잊어버린 것 같아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흥남철수 기념탑 건립에 매달리게 됐습니다』

    영안모자 白聖鶴(백성학) 회장은 지난 5년 동안 흥남철수 기념비 건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白회장은 1950년 12월 초 원산에서 목선을 타고 남한으로 넘어온 피란민이다.
    당시 그의 나이 열 살.

    전쟁고아인 그는 세계 최고의 모자 생산 기업을 일궜다.

    월남 후 그는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보이 생활을 할 때 「빌리」라는 미군으로부터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다.
    白회장은 1989년 오랜 노력 끝에 빌리를 찾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白회장의 이 사연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소개됐다.

    ―흥남철수 기념비를 건설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1998년 미국 맥아더 기념관에서 玄鳳學 박사가 쓴 「크리스마스 카고」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흥남철수에 관한 일종의 보고서였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묻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후 玄鳳學 박사를 만났는데 대단히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흥남철수를 지휘한 美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손자를 만났는데, 자기 할아버지가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한 것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할아버지가 사랑의 정신으로 한 일이다. 어떤 보상을 바란 것이 아니다. 피란민을 구출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만 하더군요.
    先代(선대)의 업적을 감추려는 겸손한 자세에 감동했습니다』

    ―제일 힘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함경남도 도민회 관련자들과 함께 「흥남철수 기념사업회」를 만들었는데,
    서로의 이견을 조율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함경도 사람이 아닌 내가 중간에 나서서
    이견 조율을 많이 했습니다』

    白회장은 1억원의 성금을 내놓았고, 함남 도민들이 모두 3억1000만원의 자금을 모았다.
    총 16억1000만원의 공사비가 들어갔다.
    행정자치부, 국가보훈처, 거제市가 비용 분담에 나섰다.


    『국내 언론이 너무했다』


    ―흥남철수 기념비 제막식에 알몬드 장군의 손자와 포니 대령의 손자가 왔더군요.

    『모두 무척 감격해했습니다.
    알몬드 장군은 흥남철수의 결정권자였고,
    알몬드 장군을 설득한 포니 대령과 玄鳳學 박사는 인간애가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포니 대령은 알몬드 장군이 선뜻 결정을 못 내릴 때 「피란민을 실을 공간을 이렇게 마련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했습니다.
    알몬드 장군은 촉박한 시한 내에 엄청난 양의 병력과 군사물자를 수송해야 하는 처지에서 피란민 철수까지 감당했습니다』

    ―이번 흥남 철수 기념비 건립행사가 국내 언론에 전혀 보도가 되지 않았는데. 일부러 홍보를 안 하신 겁니까.

    『미국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두 시간짜리 흥남철수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제작진 다섯 명이 왔습니다.
    CNN, CBS, AP, UPI, 로이터 통신 등에서도 기자가 많이 왔어요.
    CNN은 뉴스를 열두 번이나 방영했습니다.
    국내 언론이 너무했죠.

    국민소득이 1만 달러가 넘는 나라에서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다루고,
    은혜에 대한 감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들의 수준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흥남철수작전의 의미를 잊어버린 이유가 뭘까요.

    『우리 어른들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죄죠』

    흥남철수작전 기념비는 흥남부두에서 1만4,000명의 피란민을 태우고 나온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모습을 본떴다.
    15m 높이 비석 전면에는 흥남철수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이었던 레너드 라루氏와 흥남철수를 총지휘했던 맥아더 사령관과 알몬드 장군, 포니 대령, 玄鳳學(현봉학) 박사, 金白一(김백일) 장군 등의 사진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출처 : 월간조선 2005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