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싱 ‘홍콩 탈출’, 시진핑 '숙청' 가속화?

재산 298억 달러를 가진 아시아 최고 부자, 장강그룹 리카싱(李嘉誠, 87세) 회장이 중국 공산당의 품을 벗어날 채비를 하고 있다.

지난 9일 리카싱 회장이 홍콩에 있는 장강그룹 지주사의 등록지를 조세피난처인 ‘케이먼 제도’로 옮긴다고 밝히자, 중화권 매체들의 반응은 묘했다.

리카싱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홍콩 증시에 상장된 기업 가운데 75%가 케이먼 제도에 본사를 두고 있다”면서, 자신의 지주사 이전이 갖는 의미를 축소하려 애썼지만, 중화권 매체들은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듯하다.

중화권 매체들은 그가 이미 중국 본토에 소유하고 있던 17조 원 상당의 부동산을 모두 매각한 뒤 그룹 지주사까지 이전하려 하자, “리카싱이 시진핑 때문에 홍콩을 떠나는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리카싱의 홍콩 탈출, 사실은 중국 공산당 탈출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명경망 등은 리카싱이 장강그룹 지주사를 케이먼 제도로 이전하는 이유가 “시진핑 중국 공산당 주석과의 관계가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홍콩 매체들은 2012년 3월 홍콩 행정장관 선거 당시 중국 공산당 부주석이었던 시진핑이 리카싱에게 ‘렁춘잉’ 후보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리카싱은 이를 거절하고 헨리 탕 후보를 지지했을 때부터 불편한 관계가 시작됐다고 전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주석에 취임하기 직전이었던 시진핑의 ‘요청’은 사실상 중국 공산당의 ‘명령’이나 다름없는데 리카싱이 자신과 친한 ‘기존 권력층’을 믿고는 이를 무시해 ‘찍혔다’는 설명이다.
 

리카싱과 시진핑의 불편한 관계는 2014년 7월 시작된 홍콩의 ‘우산 혁명’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는 게 홍콩 매체들의 분석이다.

홍콩 ‘우산 혁명’ 당시 시위대는 중국 공산당의 꼭두각시인 렁춘잉 행정장관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때 리카싱은 ‘행정장관 직선제’와 ‘렁춘잉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지지하는 듯 아무런 발언을 하지 않아 시진핑 등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밉보였다는 것이다.

리카싱은 실제로 한참 뒤 중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은 후에야 ‘우산 혁명’ 시위대를 마지못해 비판하는 식의 성명을 냈다. 

장쩌민-후진타오 이어지는 舊세력의 측근 리카싱

리카싱이 시진핑의 명령이나 ‘요청’에 이처럼 미적지근한 것은 중국 권력층과 관련이 있다.

리카싱은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기 전부터 이미 중화권 최고의 부자였다. 그는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외국계 투자자본이 대거 빠져나갈 때 ‘세계화상총회(전 세계 화교재벌의 모임)’를 동원해 중국에 대한 대규모 ‘외국인 투자’를 이뤄내 중국 공산당을 위기에서 구했다.

이 일로 등소평의 마음을 얻은 리카싱은 후계자 장쩌민 등과도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등소평에서부터 시작되는 ‘태자당’, 그 가운데서도 당시 실권을 갖고 있던 ‘상해방’에 속하는 ‘태자당’과 인맥을 쌓기 위해 거액의 ‘선물’을 준 것도 유명하다.

그 결과 1993년에는 천안문 동쪽의 ‘황금 상권’ 개발권을 따내는 등 중국 본토에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장쩌민은 리카싱을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친했다. 2000년에는 리카싱의 가족을 베이징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리카싱은 장쩌민이 이끄는 '태자당이면서 사해방'인 권력층과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됐다.

한국에서는 리카싱과 중국 공산당 실세의 친분관계, 중국 공산당의 권력승계를 설명할 때면 상해방, 태자당, 공청단으로만 분류하는 편이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인재 풀(Pool)이 워낙 협소하기 때문에 셋 중의 하나로 딱 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시진핑만 해도 태자당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공청단의 절대적 지지로 집권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을 잘 알고 있는 중화권 매체에서는 리카싱을 ‘태자당이면서 사해방’인 권력자들과 절친한 사이라고 보고 있다. 여기에는 등소평과 그 자녀들, ‘사해방’의 원조인 장쩌민과 그 가족들을 포함해, 최근 실각한 저우융캉, 쩡칭훙, 부인 구카이라이의 ‘장기밀매 사업’으로 더 유명해진 보시라이 등이 속한다.

현재 중국 공산당 주석인 시진핑은 ‘태자당이면서 사해방’인 세력들의 견제로 오랜 시간 고생을 했기에 이들을 ‘숙청’하는 데 진력을 다하는 모습이다. 반면 이들과 가까운 리카싱 등의 입장에서는 시진핑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시진핑 거침없는 ‘숙청’ 행보
정보기관 넘버 2도 구속

리카싱을 더욱 불편하게 하는 점은 중국 공산당 최고 권력층에서 ‘태자당이자 사해방’인 권력자들 숙청이 점차 위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리카싱이 장강그룹의 지주사를 케이먼 제도로 옮긴다는 발표가 나온 이튿날인 10일, 중화권 매체들은 중국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중국 국가안전부(MSS)의 ‘마젠(馬健)’ 부부장에게 ‘쌍규(雙規, 구속수사)’ 처분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중국 국가안전부는 과거 소련의 국가안전위원회(KGB)를 연상케 할 정도로 거대한 정보기관이다. 17개의 각 분야 공작국과 10개의 지원조직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국가안전부는 해외정보, 국내정보, 방첩, 수사 등의 모든 기능을 갖고 있다. 장쩌민 집권 당시 비공개 연설에 따르면 전 세계에 5만여 명의 국가안전부 공작원들이 활동 중이라고 한다.

관영매체인 ‘신화통신’과 한국 언론들이 자주 인용하는 중국 씽크탱크 ‘현대국제관계연구원’도 국가안전부 소속이다.

이런 최대 정보기관의 ‘넘버 2’인 부부장이, 그것도 차기 국가안전부 부장으로 꼽히는 인물이 ‘수사권 남용’과 거액의 뇌물을 받은 ‘부패’ 혐의로 공산당 중앙기율위원회에 의해 구속수사를 받게 된 것이다.

공산당 중앙기율위원회는 마젠 국가안전부 부부장이 최근 숙청당한 베이다팡정(北大方正) 그룹의 리여우 회장으로부터 2억 위안(한화 360억 원)의 뇌물을 받은 뒤, 국가안전부 요원들을 동원해 류즈화 前베이징 부시장의 섹스 비디오를 찍어 그를 낙마시켰다는 것이다.

여기다 현재 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 링지화 공산당 통일전선공작부장 가족에게 뇌물을 주고 그들의 비자금을 세탁, 관리해줬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안보 분야를 총괄 지휘하던 공산당 중앙정법위원회 서기 저우융캉에 이어 마젠 국가안전부 부부장까지 숙청한 시진핑은 이제 측근인 겅후이창 국가안전부 부장, 왕젠핑 공안부 부부장, 푸정화 공안부 부부장 겸 베이징 공안국장 등을 내세워 중국 안보분야를 모두 장악하게 된 것이다.

시진핑은 2014년부터 ‘부정부패 척결’을 기치로 내걸고 ‘정적 숙청’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저우융캉, 마젠에 이어 다음 차례는 쩡칭훙 前공산당 부주석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쩡칭훙은 이미 부패 혐의로 공산당의 조사를 받고 있다.

그 다음 차례는 후진타오, 마지막은 장쩌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천안문 사태 이후 베이징방(北京幇)을 누르고 26년 동안 권력을 잡았던 ‘상해방’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시진핑이 ‘태자당이면서 상해방’인 권력층을 노리고 있다는 점은 관영매체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공산당 기관지 가운데 하나인 ‘중국경제주간’은 지난 13일 특집기사에서 “저우융캉이 사형 또는 사형유예(2년가량 사형집행을 유예한 뒤 형을 낮춰주는 것)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英‘파이낸셜 타임스’는 “중국 공산당 안팎에서는 지난 10일 ‘쌍규 처분’을 받은 마젠 국가안전부 부부장도 ‘저우융캉과의 연루’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리카싱 장강그룹의 케이먼 제도 이전
‘생존을 위한 탈출’?

시진핑은 지난 12일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연수 프로그램에 참석한 공산당 현(懸) 서기 200여 명에게도 “권력, 돈, 여색(女色)을 조심하라”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중화권 매체들은 이를 “시진핑이 ‘부정부패 척결’의 기치를 계속 이어 가겠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난 26년 동안 ‘태자당이면서 상해방’인 권력층과 가장 가까웠고, 이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리카싱 입장에서는 시진핑의 이런 ‘부정부패 척결’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여기다 리카싱이 홍콩에 머무른다 해도 치안, 외교 등은 모두 중국 공산당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렁춘잉 행정장관이 통치하고 있으니 위협을 느끼는 게 당연해 보인다.

실제 시진핑은 홍콩에서도 ‘부정부패 척결’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홍콩 부동산 재벌 토마스 쿽 회장이 최근 뇌물 수수 혐의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자신보다 재계 순위가 한참 아래인 부동산 재벌이 징역형을 선고 받는 것을 보고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시진핑의 ‘숙청 행진’과 리카싱의 사업체 이전을 구경하는 대만과 反공산당 진영은 현재 중국 공산당 내의 권력투쟁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는 분위기다.

대만 매체 ‘자유시보’는 “리카싱의 장강그룹 본사 이전은 1997년 홍콩의 주권반환 이전에 본사를 영국으로 옮긴 HSBC 그룹 사례보다 더 충격적”이라고 평가했다. 

‘자유시보’는 이어 “리카싱 회장이 본사를 케이먼 제도로 옮기려는 것은 중국과 홍콩의 사법제도를 믿지 않는다는 표현이며, 중국의 일국양제(一國兩制, 한 국가 두 체제) 원칙에 불신임 표를 던진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