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이 말했다 "우리 모두 흥남부두 금순"이라고...
가요 '굳세어라 금순이'로 짚어본 영화 '국제시장' 1000만 관객 돌파 의미
조우석 | media@mediapen.com /미디어 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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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석 문화평론가
"모든 시대는 저마다 신(神)앞에 선다."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랑케의 말이라는데, 어느 나라건 그 시대는 나름의 가치와 시대정신이 있으니 누가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말을 좀 다른 맥락에서 패러디한 사람은 뜻밖에도 사회학자인 서울대 교수 전상인이다."모든 시대는 저마다 대중음악 앞에 선다."
무슨 말일까?
1827년 봄 비엔나에서 열린 베토벤 장례식에 몰렸던 20만 음악애호가들과, 앨비스 프레슬리를 못 잊어 30년 째 멤피스를 찾는 인파 사이에 질적 차이란 없다는 뜻이다.
또 있다.
우리 삶을 위로해줬던 가수 이미자와 남진, 그 이전의 고복수, 남인수, 현인 등이 들려줬던 대중가요야말로 근현대사의 증언으로 손색없다는 뜻인데, 필자 역시 그 말에 공감한다.
즉 개발연대를 두고 습관처럼 "어둡고 암울했던 그 시절"이라고 말하는 속류(俗流)지식인들이 허위의식보다 대중가요가 차라리 윗길이다.
자의식 과잉으로 몽롱해진 순문학의 소설-시보다 더 정직할 수도 있다.
난데없는 근현대사와 대중가요 사이의 상관관계를 더듬어본 건 영화 <국제시장> 때문이다.
덕수의 손녀가 불렀던 가요 <흥남부두 금순이>의 여운
13일 부로 그 영화가 1000만 관객 돌파를 기록했다.
부모 세대의 삶과 근현대사를 왜곡 없이 바라본 이 작품의 성공에 더없이 기쁜 마음인데, 필자에게 이 작품 이미지는 영화 말미 주인공 덕수(황정민)의 손녀가 부르는 <굳세어라 금순아> 하나로 각인됐다.
그걸 끈적거리지 않고, 마치 유치원 동요 부르는 걸로 처리한 절묘한 마무리가 여운이 남는데, 어쩌면 <국제시장>의 주제가가 그 노래다.
가수 현인의 1953년 히트작인 <굳세어라 금순아>(강사랑 작사-박시춘 작곡)는 6.25전쟁을 전후 탄생한 3대 명곡의 하나다.
3대 명곡은 <굳세어라 금순아>와 함께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이부풍 작사-박시춘 작곡. 1948년 발표), 이해연의 <단장의 미아리 고개>(반야월 작사 1955년 발표)가 꼽힌다.
그중 <굳세어라 금순아>만의 매력은 따로 있다.
그걸 정확하게 지적한 사람은 대중가요의 사회사에 그중 해박한, 멋진 단행본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2002년, 황금가지)의 저자인 이영미(52)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짚어내고 있다.
"전쟁의 이별을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그 리얼리티와 구체성, 가사의 서사성(敍事性, 내러티브)이 마치 장편소설이나 극영화를 보는 것 같다."
- 66쪽
당신이 무심코 불렀을 그 가요의 노랫말을 음미해보시라.
1절은 전쟁통 눈보라치는 흥남부두의 생이별을 담고 있지만, 2절은 장면이 훌쩍 바뀐다.
국제시장 장사치로 사는 피란지 부산에서의 현실이 생생하다.
20세기 한반도 최대 사건을 이 짧은 노랫말에 속도감있고, 입체적으로 담아냈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장편소설 못지 않은 그 노래의 입체적 이야기 구조
그래서 1절은 영화 <국제시장> 도입부의 장면과 완전히 일치한다.
아들 덕수가 혼란 통에 아버지, 여동생과 헤어지면서 어머니와 동생 둘의 가장이 되는 순간이다.
덕수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1‧4) 이후 나홀로" 부산에 정착하는데, <굳세어라 금순아> 2절 배경도 부산이다.
국제시장에 둥지를 차린 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바라보지만, 1절에 비해 정겹다.
노래가 그러하듯 영화 <국제시장>은 이후 펼쳐진 삶 속에서 "가족은 내가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지로 견뎌낸 덕수의 분투 가 작품의 몸통이다.
그건 전쟁과 가난 속에서 ‘내 가족은 내가 먹여 살린다’는 의지로 견뎌낸 억척의 시간이었다.
영화가 보여주듯 이역만리 유럽 땅에서 석탄을 캐야 했고, 큰 체구의 서양인 병든 몸을 돌보고, 남의 나라 전쟁터인 월남전 사지(死地)를 돌며 끝내 가난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낸 위대한 이야기는 덕수 개인의 스토리이자, 신데렐라 국가 대한민국의 장쾌한 스토리였다.
물론 영화 <국제시장>에 정치색은 없다. 우파 영화라고 규정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좌편향이 심한 대표적 문화장르인 영화계에서 부모 세대의 삶과 근현대사를 가감없이 바라본 이 작품의 등장은, 이후 1000만 관객 돌파란 영화사적으로 각별한 의미가 있다.
투박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도 세대를 망라한 호응을 얻어낸 것은 분명 이례적 성취다.
하지만 현재 얘기로 끝나는 영화와 달리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
과거-현재를 뛰어넘어 미래를 말하는 3절이야말로 이 노래의 절창(絶唱)이다.
단행본 <흥남부두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의 저자는 3절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고 지적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386세대의 그런 생각과 달리 이 노래가 1~2절로 마무리됐을 경우 얼마나 뒷맛이 허전했을까?
올해가 평화통일의 원년임을 암시하는 그 노래 3절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간들/
천지간에 너와 나인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남북통일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보자."
어떠신지?
3절 때문에 이 노래는 피란민의 한탄을 뛰어넘어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
올해가 북한급변 사태와 통일로 가는 원년이라는 관측도 많은데, 어쩌면 그렇게 이 노래의 여운이 절묘한지 모른다.
<국제시장> 속편이 나온다면, 배경은 3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마무리다.
지난해가 친노좌파 영화 <변호사>로 출발했던 것과 달리 <국제시장>의 대박이 2015년 새 출발의 모멘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하나 더. 이영미의 책 제목이 실은 또 다른 절창이다.
옛 가요를 패러디한 그 제목은 우리의 정체성을 되묻고 있다.
맞다.
흥남부두 금순이는 과연 어디로 갔을까?
가긴 어디로 갔나.
모두 여기 이 땅에 두 발을 굳게 딛고 살고 있다.
즉 5000만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금순이가 아닐까?
찢기고 참담했으나 끝내 일어섰던 과거를 잊으면 우린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다.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