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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와의 인연으로 한국을 찾아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동아시아 관계에 대해 공부 중인 29살의 미국 청년이 있다. 벤자민 에드워드 포니(Benjamin E Forney). 그는 64년 전 ‘흥남부두 철수’ 당시 수많은 피란민의 목숨을 구한 고(故) 에드워드 포니(Edward H Forney) 준장(당시 대령)의 증손자다.
‘흥남철수 작전’은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의 미국 10 군단과 대한민국 1군단을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선박편으로 철수시킨 작전이다.
당시 흥남부두에는 군인뿐 아니라 피란민 10만명이 몰려 있었다. 통역을 맡았던 현봉학 박사는 에드워드 포니 대령을 찾아가 “피란민을 구해 달라”고 읍소했고 포니 대령은 상관인 알몬드 소장을 설득했다. 결국 군함과 화물선, 상선 등 총 14척이 미군 10만명과 피란민 10만명을 무사히 구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나온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철수 작전의 마지막 상선이었으며, 2,000~3,000명의 정원인 배에 1만 4,000명의 피난민을 태워 남쪽으로의 철수에 성공함으로써,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증조할아버지가 없었다면, 현재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는 벤자민씨가 <뉴데일리>와 만나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가족이야기’와 ‘한국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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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는 포니家 역사, 내 생일도 8.15
“6·25는 한국의 역사이자 우리 가족의 역사입니다. 흥남철수 작전이 가족의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또 제 생일은 광복절인 8월 15일입니다. 한국과의 놀라운 인연에 저도 신기합니다.”
벤자민씨는 이 같이 말하며 “한국과의 인연은 운명 혹은 필연이다”고 말했다.
65년 전, 증조부는 흥남철수 작전으로 피난민 10만명의 목숨을 구하고 자유의 땅을 찾아 살게 해주며 한국 역사에 잊을 수 없는 인물이 됐고, 그의 증손자 벤자민씨는 서울대 국제대학원에 진학해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흥남철수 피난민 2세대들은 ‘은혜를 잊지 말라’는 부모들의 바람을 잊지 않고 벤자민씨가 한국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드러나지 않게 십시일반 생활비를 후원하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벤자민씨의 원래 목표는 작가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한국에 와서 공부를 하며 한국과 미국의 ‘가교역할’을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
▲전쟁 영웅 증조부, 집과는 의절
이에 대해 벤포니씨는 “증조부의 이야기를 조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 들으며 살아왔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증조부와 조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거의 의절한 것과 마찬가지였다”며 “증조부가 군인으로서 세계 각국의 전쟁에 참여하는 동안 집에 소홀했기 때문이었다”고 담담히 이유를 밝혔다.
이어 벤자민씨는 “증조부에 대한 깊은 이야기와 흥남철수 작전 등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아버지 덕분이었다”며 “아버지가 1998년 당시 코리언소사이어티에서 실시하는 국제교육과 문화교류에 관계된 3주짜리 프로그램에 신청하면서 아버지와 현봉학 박사와 다시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현봉학 박사는 벤자민씨의 증조부인 에드워드 포니 대령을 찾아가 “피란민을 구해 달라”고 읍소한 당사자다.
벤자민씨는 “현봉학 박사는 증조부가 돌아가신 후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며 “우연히 아버지가 신청한 코리언소사이어티 프로그램 명단에서 현봉학 박사가 ‘포니’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직접 연락해 다시 만나게 됐다”고 설명했다.
벤자민씨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페트릭 포니(Edward P Forney)는 역사 선생님으로 두바이와 카이로 등에서 생활하다 현재는 베이징 인민부속중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전쟁 중, 적으로 만났던 중국과 포니가(家) 인연을 맺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
그러나 벤자민씨는 “단지 직업 때문”이라며 싱거운 대답을 내놓았다. 이어 “아버지는 항상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며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와 같이 한국에서 사는 날도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벤자민씨는 2009년 풀브라이트(Ful Bright) 장학생으로 드디어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그는 목포 영흥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틈틈이 흥남철수작전으로 생명을 구한 피란민의 후손들을 만났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증조부의 생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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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가 행한 ‘인류애’와 '동아시아 평화' 위해 일할 것
벤자민씨는 지난 2014년 초 서울대 국제대학원에 입학해 현재 두 학기를 마쳤다. 동아시아 관계와 한미 관계 등에 대해 관심이 많은 그는 후에, 연구원을 거쳐 외교관이 되는 것이 꿈이다.
이 같은 꿈을 꿀 수 있게된 결정적 계기는, 벤자민씨의 뚜렷한 목표와 김인규 전 KBS 사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한국전쟁기념재단 참전용사 후손 장학생으로 선발돼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받았기에 가능했다.
또,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동천교회의 흥남철수 피난민 2세대와 서울에서 피부과를 운영하며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지원하는 후원자의 도움도 컸다.
벤자민씨는 “한국의 여러분들이 은혜를 갚는다며 도와주고 계신다. 고마움에 가슴이 뭉클하고 그분들을 생각해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다”며 “앞으로 한·미동맹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지금은 꿈이지만 외교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벤자민씨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6·25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 많이 아쉽다. 특히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북한의 핵실험 등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데 정작 한국인들은 무관심한 것 같다. 이 같은 것을 알리는 게 앞으로의 내 역할인 것 같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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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의 도시 포항, 포니로(路)..포니 준장 기려
흥남철수 작전의 영웅 포니 준장과 해병대는 인연이 깊다. 해병대 1사단의 포항 주둔에 포니 준장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6·25 때부터 주둔하던 미 해병대 3항공사단이 1950년대 포항을 떠나게 됐다. 이때 포항에 있던 미 해병대 3항공사단 기지를 ‘한국 해병대가 물려받아 전략의 맥을 이어 가야 한다’고 건의한 사람이 포니 준장이다.
이 후에도 포니 준장은 정전 후 2년간 한국 해병대 수석 군사고문관으로 근무하면서 해병대 교육과 인재 양성에 헌신했다.
이 같은 포니 준장의 업적을 기려, 지난 2010년 11월 해병대1사단은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부대 내 일월지 입구에 ‘포니로(路)’를 건설했다.
살기 위해 적을 죽여야 하는 전쟁의 한가운데서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른 사람을 돕고 구하는 포니 준장과 현봉학 박사를 기념하고 ‘인류애’에 대해 돌아보기 위함이었다.
포니 준장이 ‘흥남철수 작전’으로 살린 피난민은 10만여명. 이들의 후손은 현재 100만명이 넘는다.
흥남철수 작전의 시작이 됐던 중공군의 개입, 이로 인해 발발된 제2차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는 미국 전쟁 역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돼있다.
악전고투의 전투에서 미국 1 해병 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철수 작전을 통해 피난민 10만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벤자민씨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피란민들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한 증조부가 자랑스럽다”며 “증조부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한국에도 감사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