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 등장한 '기적의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 목숨 건 나흘간의 항해 기록
  • ▲ 1950년 12월 진행된 흥남철수작전 당시 연합군과 북한 피란민들의 이동 경로.    ⓒ 자료 제공 = 월드피스자유연합
    ▲ 1950년 12월 진행된 흥남철수작전 당시 연합군과 북한 피란민들의 이동 경로. ⓒ 자료 제공 = 월드피스자유연합



    "'기적의 배'가 없었다면 <국제시장> 덕수도 없었다"


    영화 <국제시장>은 흥남부두에 모인 수만명의 피란민들이 정박해 있는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 호에 타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부둣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은 국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제작진은 동생의 손을 답고 부둣가로 달려가는 어린 덕수의 시선을 통해 관객들에게 마치 전쟁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긴장감을 선사했다.

    촬영 당시 수백명의 보조출연자들이 동원됐지만 실제 [흥남 철수 작전](興南撤收作戰)의 규모에는 턱없이 모잘랐다. 이에 제작진은 CG작업으로 수많은 인파를 덧입혀서 사람들이 파도처럼 몰려들던 흥남 부둣가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흥남 철수 작전]은 1950년 12월 한반도 북동부 흥남항에서 진행된 대규모 탈북 작전을 일컫는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10만명 이상의 유엔군과 35만톤 이상의 군수물자가 성공적인 철수를 했을 뿐 아니라, 10만명에 가까운 북한 피란민까지 무사히 생명을 건진 것으로 전해졌다.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모두에서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연합군을 밀어붙인 중공군은 순식간에 평양을 재탈환하고 수도인 서울까지 재점령하는 가공할만한 전투력을 과시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미군과 연합군은 흥남에서 철수한 뒤 1월 4일엔 서울, 1월 7일엔 수원까지 공산 진영에 내주는 치욕을 겪었다.

    이른바 [1.4후퇴]라 불리는 이 사건은 한국전쟁의 양상을 크게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단기적으로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연합군이 이남으로 패퇴하는 양상으로 변했으나, 흥남에서의 성공적인 철수로 미 10군단이 병력과 화력을 온전하게 보존함으로써 훗날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주력부대가 되는 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영화 국제시장은 이렇듯 전쟁의 양상을 송두리째 바꾼 [흥남 철수]와 [1.4후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만일 [흥남 철수 작전]이 실패해 유엔군과 피란민 10만명이 도륙 당하고 각종 물자 35만톤이 파괴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1951년 1월부터 전개된 미군의 대대적인 반격이나 [제2차 서울수복]을 가져온 [리퍼작전](Operation Ripper)은 역사책에 등장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또한 <한국청십자사회복지회>를 설립한 장기려 박사나 화가 이중섭, 정치인 문재인은 짧은 생을 마감했거나 아니면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기려 박사와 이중섭 화백은 1950년 12월 각각 평양과 원산에서 남하, 부산에서 터전을 닦은 이북 출신 인사다. 문재인 의원의 부모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 때 미국 수송선을 타고 거제도로 탈출, 그곳에서 문재인을 출산해 키웠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영화 <국제시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로는 [다른 결단]을 내렸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이었다면,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됐을지도 모른다.

  • ▲ 장진호 전투는 한국에서는 흥남철수의 배경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美해병대에는 가장 고전한 전투로 유명하다. 사진은 장진호 전투 당시 얼어죽은 美해병대 장병들 시신.   ⓒ 6.25전쟁 종전 60주년 기념 블로그
    ▲ 장진호 전투는 한국에서는 흥남철수의 배경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美해병대에는 가장 고전한 전투로 유명하다. 사진은 장진호 전투 당시 얼어죽은 美해병대 장병들 시신. ⓒ 6.25전쟁 종전 60주년 기념 블로그
     
  • ▲ 흥남철수작전에 동원된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군함들이 흥남 부두항을 떠나는 장면. (영화 '국제시장' 중에서)  ⓒ CJ엔터테인먼트
    ▲ 흥남철수작전에 동원된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군함들이 흥남 부두항을 떠나는 장면. (영화 '국제시장' 중에서) ⓒ CJ엔터테인먼트



    #1. 장례미사에서 운명이 바뀌다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대표가 처음 <기적의 배>(Ship of Miracle)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것은 2001년 10월 14일 미국 뉴저지주의 성 베네딕도회 뉴튼수도원에서 있었던 마리너스(Marinus) 수사의 장례 미사에서였다. 당시 뉴저지 한인 성당에서 성가대장을 맡고 있던 부인과 함께 미사에 참석한 안 대표는 그 곳에서 우연히 마리너스 수사의 과거 행적을 알게 됐다.

    마리너스 수사의 본명은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1950년 12월 21~23일 흥남부두에서 피란민 1만 4,000명을 태우고 거제도로 향했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 호의 선장, 레너드 라루가 바로 이날 장례 미사의 주인공이었다.

    이전부터 신앙심이 깊었던 라루 선장은 전쟁이 끝난 뒤 1954년 뉴저지주 뉴튼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 중 하나인 성 바오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라루 선장은 마리너스 수사(修士)라는 수도명을 받고 46년간 철저히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1983년 미국으로 건너와 뉴저지에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나날을 보내던 안 대표에게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한국 피란민들을 구했던 미국 선원들의 일화는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연한 기회에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감동적인 사연을 접한 안 대표는 이때부터 전혀 다른 인생을 걷게 된다.

    그 즉시 이들의 인도주의적인 업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결심한 안 대표는 평소 관심에도 없던 한국전쟁을 공부하고 각종 전사(戰史)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구조 일화를 기록한 <마리너스의 기적의 배>라는 책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 이를 가져다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도 맡았다. 또 안 대표는 자신이 직접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을 다룬 <생명의 항해>라는 책도 펴냈다.

    그는 <월드피스자유연합>이란 사단법인을 세운 뒤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한국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별도의 사진전도 기획했다. 미국 국립자료보관청과 참전 군인들의 도움을 받아 전쟁 당시의 현장을 담은 사진들을 대량 확보한 안 대표는 2005년부터 서울 광화문광장·청계광장·육군훈련소 등지에서 <생명의 항해 - 6.25 사진전>을 순회 전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안 대표는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기네스북에 올리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북한 피란민 1만 4,000명을 구출한 공을 인정받아 2004년 9월 21일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안 대표는 수년 전 한국전쟁을 알리는 행사에 매진하는 이유를 묻는 뉴데일리 취재진에게 "단순히 한국전쟁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며 "폐허를 딛고 이룬 오늘의 번영을 이어가고 이를 더욱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지를 키우자는 게 제일 큰 목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과거를 잊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국민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은 평범한 이민자로 살고 있던 안 대표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고, 그의 발걸음을 자꾸만 고국으로 인도했다.

  • ▲ 프레스센터 앞에서 열린 '생명의 항해 6.25전쟁 사진전'을 시민들이 둘러보고 있다.  ⓒ 자료 제공 = 월드피스자유연합
    ▲ 프레스센터 앞에서 열린 '생명의 항해 6.25전쟁 사진전'을 시민들이 둘러보고 있다. ⓒ 자료 제공 = 월드피스자유연합



    그렇게 10년이란 세월히 흘렀다.

    안 대표가 뿌린 씨앗들은 이제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다.

    그가 발품을 모아 전시한 사진들과, 번역·집필한 각종 책자들은 자칫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 했던 [영웅들의 미담]을 세간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반세기 만에 [흥남철수작전]이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고, [한국판 쉰들러]로 불리는 현봉학 박사와 알몬드(Edward Almond) 장군,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등의 업적이 재조명 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순전히 안 대표의 활약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 대표는 <월드피스자유연합> 홈페이지에 남긴 글에서 "흥남철수작전은 생명 구출을 향한 [위대한 도전]이었다"며 "이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평가하고 있다.

    당시 북한 민간인은 적국의 국민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구출작전은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십만 병력과 거의 같은 수의 피란민이 무사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철수 현장의 모든 지휘관과 병사들이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고 민간인을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와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 ▲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대표  ⓒ 연합뉴스
    ▲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대표 ⓒ 연합뉴스

    #2. '미국의 잊혀진 전쟁'을 기억하자!

    <워싱턴 포스트> 기자 빌 길버트(Bill Gilbert)는 1985년 5월 19일 의미있는 칼럼을 썼다. 이 칼럼은 미국 정가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칼럼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5만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희생된 한국전쟁이 미국에서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 되고 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위한 기념비를 건립해야 한다.


    이 칼럼에 자극을 받은 스탠 패리스 하원의원(버지니아주)과 윌리엄 암스트롱 상원의원(콜로라도주)은 한국전쟁 중 군에 복무한 570만명을 위한 기념비를 수도인 워싱턴에 세우자는 법안을 제출했다.

    이로부터 10년 뒤, 워싱턴 시내 한복판에 19명의 참전용사상과 사망·실종자 명단을 새긴 벽면 등 한국전기념물이 세워졌다.

  • ▲ 미국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의 한국전 참전기념비(Korean War Veterans Memorial)   ⓒ 연합뉴스
    ▲ 미국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의 한국전 참전기념비(Korean War Veterans Memorial) ⓒ 연합뉴스



    이렇듯 미국인들에게 참전용사들에 대한 고마움을 상기시키는 일에 앞장 섰던 빌 길버트 기자는 2000년 6월 역사적인 책을 썼다. 바로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대표의 인생을 바꿔놓은 에세이 <기적의 배>(Ship of Miracle)를 출간하게 된 것.

    빌 길버트 기자는 서문에서 "미국인들이 '미국의 잊혀진 전쟁'을 기억하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도록 돕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역사를 위해 이 이야기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흥남에서 싸운 미국 군대에 경의를 표하는 과정에서, 저자로서 내가 희망한 것은 미국인들이 [미국의 잊혀진 전쟁]을 기억하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도록 돕는 것이었다.


    10여년 전 신문기사를 통해 "전쟁이란 역사를 잊어선 안된다"며 전국민적 각성을 촉구했던 빌 길버트 기자는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는 60대 이상의 미국인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 주목, 자신이 알고 있던 <메러디스 빅토리> 호 승무원들의 영웅적 활약상을 끄집어내기로 했다.

    6.25전쟁이 한창일 당시 미 공군에서 복무했던 빌 길버트는 1950년 크리스마스에 10만명의 미군과 9만여명의 피란민이 항구도시 흥남에서 철수, 북한을 탈출한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미국 군인들이 용감했었다면, 미국 군인들과 거의 같은 수의 북한 피란민을 구하기 위해 시간과 다투었던 승무원들의 용기도 그에 못지 않았다. <기적의 배>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들의 용감한 구조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제로 1950년 12월 중순 미 육군과 해병대의 장진호 포위 돌파, 그리고 함정들이 대기하고 있던 흥남으로 향한 그들의 노력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책들이 집필됐으나, 그와 동시에 전개되고 있던 북한 피란민의 구출 이야기, 특히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눈물겨운 사투에 대해선 거의 소개된 적이 없었다.


    장진호 전투에서의 극적인 상황이 타전될 당시, 대부분 미국인들의 관심은 북한 피란민과 그들에게 닥친 생사의 위험보다는 자국 병사들의 안전에 집중돼 있었다.

    물론 북한 피란민을 구출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승무원들은 50~60년대에 미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고 이같은 이야기는 몇 차례 신문과 잡지에 기사로 실린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기사들이 소개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몇십년 전의 일이었다. 사실 흥남철수 직후에도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이야기를 알았던 미국인들은 별로 없었으며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시점에 당시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빌 길버트는 현충일만 되면 각종 매스컴에서 베트남 참전용사만 집중적으로 다루는 현실을 못마땅해 했다.

    기자들과 뉴스 앵커들은 현충일이나 재향군인의 날 기념식을 보도하면서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참전 용사들에겐 경의를 표하는 찬사와 영상 자료를 내보내지만,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복무했던 이들, 특히 전투에 참가했던 이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빌 길버트
    가 통탄했던 미국인들의 희박한 역사 의식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을 연상케 한다. 전쟁의 당사국으로서 매년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갖고는 있지만, 나라를 지킨 순국선열을 진심으로 기리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하다. 누군가 과거 6.25전쟁이나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면, 고리타분하다며 손사래 치기 일쑤다. 


    역사 배우기를 꺼려하는 탓에 과거의 시간과 현재가 자꾸만 단절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제대로 된 역사를 알지 못하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능력도 점차 퇴화되는 모습이다. 젊은이들이 팩션을 자꾸만 논픽션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역사 단절]이 낳은 병폐현상 중 하나다.

    뚜렷한 역사인식이 없는 요즘 세대에 할아버지-아버지 세대의 역사를 반영한 영화 <국제시장>의 등장은 그래서 더욱 절실했고, 그만큼 위험요소도 많았다. 사실 관객이 외면해 버리면 그 뿐이었다. 영화의 메시지가 어떠하건간에 대중적 관심에서 멀어진다면 그 속에 담긴 진실도 함께 수장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국제시장>에 담긴 묵직한 메시지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역사를 전혀 모르던 이들에게도 감동의 파고를 일으켰다.

    서로 생면부지인 안재철 대표와 빌 길버트가 동일하게 [흥남철수작전]에 주목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인간 생명의 존귀함을 다룬 [휴머니즘]이야말로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생명을 구하는 일보다 더 숭고하고 위대한 일이 어디있을까?

    이들은 한 생명을 살리고자 자신을 돌보지 않았던 젊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해 차갑게 식어버린 현대인의 감성을 일깨우고자 했다. 하지만 <기적의 배>가 갓 출판됐을 때만 해도 이같은 바람은 한낱 허황된 꿈으로 비쳐졌다. 흥남철수와 한국전쟁에 대한 무관심은 그 이후로도 쭉 계속됐다.

    그런데 이들이 뿌린 씨앗은 한참만에 <국제시장>이란 영화로 발아(發芽)됐다. 흥남 부두항에서 생명을 건진 한 소년이 누군가의 아버지로 성장하는 휴먼스토리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울리고 말았다. [생명의 항해]에서 피어난 인류애가 시간과 장소를 돌고 돌아, 세대간의 높은 벽을 허무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 ▲ 미국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의 한국전 참전기념비(Korean War Veterans Memorial)   ⓒ 연합뉴스



    #3. 기나긴 피란민 행렬, 지평선 끝까지 이어져


    강풍이 몰아치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가 엄습했다. 해안으로부터 적의 포탄이 배를 향해 아슬아슬하게 날아오고, 미 전함 미주리호, 구축함 4척, 중순양함 2척이 응사하는 포탄이 해안 쪽으로 날아가는 상황 속에서 [운명]은 37살 된 필라델피아 출신의 상선 선장을 부르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개월째인 1950년 크리스마스 주간에 적진 217킬로미터 지점인 흥남항에서 선장 레너드 라루는 건조된지 5년 된 1만톤급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 갑판에 서 있었다.

    저는 쌍안경으로 해변을 살폈는데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북한 피란민들이 선창에 떼를 지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레를 나르거나 들거나 혹은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들의 옆에는 놀란 병아리처럼 그들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라루 선장은 약 10만명의 겁에 질린 북한 피란민, 죄없는 희생자들인 노인, 여성, 아이들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들은 민간인만 만나면 죽이려고 위협하는 중공군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중공군들은 민간인들이 미군과 연합군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백, 심지어 수천 가족의 비극이 부둣가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세 아이의 어머니인 29살 김정희씨는 두 살배기 막내 딸 원숙을 등에 업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한 손으로 다섯살배기 아들 두혁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열 살배기 큰 딸을 안고 있는 남편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흥남에서 남쪽으로 96킬로미터 떨어진 원산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이아몬드와 다른 귀금속을 파는 보석상을 운영했다. 전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공산체제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서 그들은 원산을 탈출해 남한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두 부부는 남쪽에서 가족의 자유와 안전을 찾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땅에 눈이 쌓여 있는 영하의 기온 속에서도 기꺼이 걸었다.

    걷고 또 걸었어요. 걷는 일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 같았어요.
    날이 아주 흐리고 지독하게 추웠지요.


    김씨는 걸어가면서 안전과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첫 단계조차 견뎌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지나쳤다. 도로에는 흥남을 향해 걸어가는 피란민들이 많았다. 그들의 피난은 공산당의 철권통치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었다. 이는 "북한사람들이 발로 투표하고 있었다"는 흥남 전투 참전용사들의 진술이 설득력이 있음을 말해줬다.

    흥남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전투기에 의해 폭격과 기총사격을 당했다. 그녀는 그 비행기들이 미국기였는지 중공기였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들은 대피하기 위해 여러 차례 도로변에 엎드려야 했다. 전투기들이 넓게 퍼져 있는 피란민을 공중에서 내리 덮칠 때 사람들은 저마다 기총사격에 희생당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뛰었다. 때문에 부모들은 거의 자식들과 헤어졌다.

    흥남에 도착한 후 그들은 흥남 부두가 아수라장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서로 밀치기도 하고 끌어당기기도 했다. 군인들은 병력 수송을 위한 배에 피란민들이 승선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민간인과 군인을 분리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부대의 승선이 완료된 후 아직 해변에 남아 있던 다른 군인들은(미 육군 보명 제 3사단 병사들) 피란민을 한반도의 남쪽 끝 항구 도시인 부산으로 수송하는 다른 함정들에 승선시키는 작업을 도왔다.

    피란민의 행렬이 지평선 끝까지 이어지고 또 시시각각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거대한 인파가 여기저기 형성되고 있을 때 김씨의 남편 이만식씨는 식구들이 먹을 양식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딸 군자를 데리고 갔다. 그는 아내에게 "여기서 기다려요. 곧 돌아오겠소"라고 말했다. 남편이 떠난 후 계속 늘어나는 인파와 미국 배들이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더 필사적이 됐다. 피란민들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배인지, 또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거기에 타면 운명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른 채, 앞 사람들에게 서둘러 배에 승선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들이 아는 것은 오직 그것이 배라는 사실 뿐이었다. 그들에게 배는 어떤 종류이든 [생존의 희망]이었다.

    김씨는 주위의 군중이 동요하는 것을 느꼈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앞으로 계속 나아가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녀는 남편이 말한 대로 바로 그 자리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싶었다. 그녀는 어떤 방향으로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서로 찾을 수 없을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원산에서 온 그녀의 이웃들까지도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부두의 모든 사람들이 배를 타려는 의지가 강해지면서 인파의 힘은 젊은 엄마와 두 아이를 미군 상륙정(LST)을 향해 밀어 넣었다. 인파 속의 어떤 이가 김씨에게 말했다.

    자, 갑시다. 이것이 마지막 배일지도 몰라요.


    1950년 흥남 부두의 광경을 목격한 이들은 그 상황이 베트남 전쟁 말엽인 1975년, 미군이 베트남으로부터 철수를 완료하고 있을 때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에 몰려들어 지붕에서 미군 헬기에 타려고 안간힘을 쓰던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말했다.

    흥남에서 김씨와 두 아이들은 말 그대로 인파에 떠밀려 미군 상륙정에 승선했다. 그녀는 남편과 큰 딸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자신이 남은 여생을 그들을 애타게 찾으며 보내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팔십 줄에 들어선 지금도 김정희씨는 아직도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다른 피란민들도 비슷한 시련을 겪었다. 애슐리 헐지 주니어는 흥남철수 이후 넉 달이 채 못된 1951년 4월 14일자 <이브닝 포스트>지에 피란민 중 몇 사람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한 남자는 자신의 바이올린만을 가져왔다. 한 여인은 재봉틀을 머리에 인 채 어렵게 배의 현문을 들어가고 있었다. 한 가족은 전체가 합심해 피아노를 실으려 했지만 사람들이 타기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포기했다. 곧 갑판 아래의 모든 공간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일부 사람들은 다리를 구부린 채 서로서로 끼어 앉았다. 나중에 온 사람들은 러시아워의 버스나 지하철 승객들처럼 서 있어야 했다. 3살 된 여자 아이 하나는 살아 있는 닭을 팔에 안고 있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상급선원들과 승무원들은 근처의 해안에서 이 광경을 충격적인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들은 193척의 해군 전함, 상선, 그리고 흥남한을 가득 메우고 있는 소형 어선들 중에서 가장 역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하는 운명이 자신들의 어깨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요란한 전쟁 상황에서 체험하게 되는 절망과 공포로 가득한 이 광경은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극적인 해상 구조작전의 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던커크 해안에서 35만명의 연합군이 진격해오는 나치로부터 탈출한 작전에 비견될 만한 기적같은 성과였다.

    피란민들을 죽이거나 생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12만명의 북한군과 중공군이 6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미군이 진을 치고 있는 방어선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피란민들 앞에는 부산에서의 안전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가는 유일한 희망의 길인 거대한 동해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 ▲ 미국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의 한국전 참전기념비(Korean War Veterans Memorial)   ⓒ 연합뉴스



    #4. "모세가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

    로이 E. 애플먼 중장은 1990년에 출판된 자신의 책 <함정을 벗어나 : 1950년, 동북부 북한에서의 미 육군 제 10군단>에서 피난민들이 10만명의 미군과 같이 후퇴하던 모습을 "놀라운 광경"이라고 묘사했다.

    피란민들은 미군의 안전 뿐만 아니라 피란민들 자신의 안전에도 위협이 됐다. 적군은 첩보를 위해 혹은 기습 공격을 하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민간인들 사이로 숨어들었기 때문에 피란민들은 언제든지 심각한 위협이 됐다.

  • ▲ 알렉산더 헤이그 2세(Alexander Meigs Haig, Jr.)는 미국의 국무 장관을 지낸 군인, 관료 및 정치인이다. 레이건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을 지냈으며, 닉슨과 포드 대통령 밑에서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냈다. 또한 그는 미국 군대에서 2번째로 높은 직위인 미국 육군 부참모 총장과 나토 및 미국 군대의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다. 한국 전쟁 시절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참모로 직접 참전했으며, 로널드 레이건 정부 출범당시 초대 국무장관직을 맡아 1980년대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를 조율해 왔다.  ⓒ 위키백과 / 연합뉴스
    ▲ 알렉산더 헤이그 2세(Alexander Meigs Haig, Jr.)는 미국의 국무 장관을 지낸 군인, 관료 및 정치인이다. 레이건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을 지냈으며, 닉슨과 포드 대통령 밑에서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냈다. 또한 그는 미국 군대에서 2번째로 높은 직위인 미국 육군 부참모 총장과 나토 및 미국 군대의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다. 한국 전쟁 시절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참모로 직접 참전했으며, 로널드 레이건 정부 출범당시 초대 국무장관직을 맡아 1980년대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를 조율해 왔다. ⓒ 위키백과 / 연합뉴스


    알렉산더 헤이그(Alexander Meigs Haig) 장군은 이 사건을 [철수]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철수가 아무리 질서정연하게 이뤄졌다 해도 이것은 분명 후퇴였고 병사들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남기고 온 시민들도 그렇게 느꼈다"고 기술했다.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헤이그는 경연락기 L-19를 타고 혼란 속의 광경 위를 비행했다. 알몬드(Edward Almond) 장군도 다른 L-19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육지에 있었건 혹은 항구의 배에 있었던 다른 이들이 나중에 묘사한 광경을 그들은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이다.

    헤이그는 나중에 이렇게 표현했다.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보잘 것 없는 살림살이를 든 많은 피란민들이 우리 군인들과 서로 뒤섞여 있었다. 육군과 해병대는 모두 이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공산 정권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는 마지막 순간에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해졌다. 그때 우리는 소형 비행기로 흥남항 상공을 비행하면서 항구에 정박 중인 미국 배를 향해 수만명의 피란민들이 차가운 바닷물을 헤치며 걸어가는 것을 봤다.


    알몬드 장군과 그의 젊은 보좌관 헤이그는 항구의 상공을 선회하면서 무전으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지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람들의 어마어마한 분투를 보면서 알몬드 장군은 10월에 대위로 승진한 헤이그에게 "이 사람들을 두고 떠날 순 없네. 반드시 모두 구출해야 하네"라고 말했다.

    군단 내의 수륙양용 작전 전문가 중 한 사람인 에드워드 포니(Edward Foney) 해병 대령은 부두 근처의 창고에 마련된 본부에서 흥남항구의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알몬드 장군의 부참모장으로서 군대를 배에 승선시키는 일, 피란민들과 바다에 떠 있는 것은 무엇이든 태워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일, 그리고 적에게 소용이 될 수 있는 보급품이나 장비를 이동시키거나 파괴하는 일 등을 포함한 철수작전 전체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군단의 병참장교인 로우니(Edward L. Rowny) 대령과 긴밀히 협력해서 일했다.

    헤이그포니 대령, 로우니 대령과 교신을 하면서 철수작전에 필요한 충분한 선박을 흥남으로 보내기로 한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을 했다.

    헤이그는 비록 젊은 장교였지만 상급 장교들에게 필요한 수의 배를 요청할 때 그들이 이 일에 대한 알몬드 장군의 [강한 의지]를 이해하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 헤이그는 장군의 지시를 전달했고, 포니 대령은 10만명의 피란민들을 자유의 땅으로 수송할 배를 확보했다.

    그러나 많은 피란민들의 탈출이 자동적으로, 아무런 논쟁없이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사상 유례 없는 작전을 위해 미군들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미국 본토 관리들의 막후설전이 벌어진 이후에야 비로소 작전이 진행될 수 있었다.

  • ▲ 현봉학(玄鳳學) 박사는 흥남 철수 작전 당시 9만 8천여명을 살려내 한국판 쉰들러 혹은 한국판 모세로 불린다. 해방 후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고, 1947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일했다. 이화여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윌리엄스 부인의 주선으로 미국 리치몬드주 버지니아주립대학에서 유학, 2년 후 임상병리학 펠로우십을 수료했다. 1950년 3월 귀국해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다 한국전쟁을 맞았고 해병대의 문관 겸 알몬드 10군 사령관의 민사부 고문으로 일했다. 미국 임상병리학회, 국제혈액학회, 미국 병리학회 회원, 한국임상병리학회 명예회원으로 활동했다. 한국 보건부장관 고문, 미 의학회 편집위원, 미 병리학회지 편집위원을 지내며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해 한미 양국 의학계에 공헌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문필가 피터 현과 2000년 4월과 2013년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고 현시학 제독이 현 선생의 동생이다.  ⓒ 위키백과 / 연합뉴스
    ▲ 현봉학(玄鳳學) 박사는 흥남 철수 작전 당시 9만 8천여명을 살려내 한국판 쉰들러 혹은 한국판 모세로 불린다. 해방 후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고, 1947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일했다. 이화여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윌리엄스 부인의 주선으로 미국 리치몬드주 버지니아주립대학에서 유학, 2년 후 임상병리학 펠로우십을 수료했다. 1950년 3월 귀국해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다 한국전쟁을 맞았고 해병대의 문관 겸 알몬드 10군 사령관의 민사부 고문으로 일했다. 미국 임상병리학회, 국제혈액학회, 미국 병리학회 회원, 한국임상병리학회 명예회원으로 활동했다. 한국 보건부장관 고문, 미 의학회 편집위원, 미 병리학회지 편집위원을 지내며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해 한미 양국 의학계에 공헌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문필가 피터 현과 2000년 4월과 2013년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고 현시학 제독이 현 선생의 동생이다. ⓒ 위키백과 / 연합뉴스



    현봉학 박사는 현 마리안과의 공저 <크리스마스 화물 : 민간인이 바라본 흥남철수>에서 이 논쟁에 대해 기록했다. 당시 알몬드 장군의 민간 문제 고문이었던 현봉학 박사는 훗날 필라델피아의 토마스 제퍼슨 대학 병원의 병리 및 혈액학 교수로 일했다.

    현봉학 박사는 포니 대령에게 알몬드 장군을 설득해 북한 피란민들을 포기하지 말고 흥남에서 구출해줄 것을 부탁했다.

    사정을 전해 들은 포니 대령은 알몬드 장군에게 부탁해 보겠노라고 말한 뒤 현 박사의 얼굴에 비친 걱정스런 표정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박사님,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한번 해 봅시다. 나폴레옹의 사전엔 불가능이란 말은 없었다지요?


    1950년 11월 30일, 포니 대령과 현봉학 박사는 알몬드 장군을 만났다.

    북한 피란민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시간을 더 들이고, 결과적으로 미군의 손실을 각오해야 하는 일에 강한 반대가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현 박사는 자신의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장군님, 이들은 진심으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5년 동안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장군님, 이들을 도와줘야 합니다.


    포니 대령이 덧붙여 말했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각오하고 우리를 도왔습니다.


    현 박사는 계속해서 "유엔군을 도와 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군대의 편의를 이유로 그들을 포기할 순 없습니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이들의 말을 경청한 알몬드 장군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우리 군대가 탈출할 수 있을지 조차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적의 스파이가 수천의 피란민 속으로 침투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시했다.

    회의가 끝난 후 알몬드 장군은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에 건의해보겠다는 선까지만 동의했다.

    현 박사는 자신의 주장을 계속 밀고 나갔다. 그는 알몬드 장군을 여러 번 더 만나 피란민들의 철수 문제를 건의했다. 포니 대령과 역사분과장인 제임스 쇼트 대위도 현 박사를 거들었다.

    이러한 현 박사 일행의 노력은 12월 9일 미군이 "한국인 군속 민간인들을 탈출시킬 수 없다"고 선언했을 때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이를 두고 현 박사는 "저는 저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절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필사적이기도 했어요"라고 말했다.

    4일 후, 현 박사는 메리뇰 선교회에서 한국에 파견돼 제10군단의 군종 신부로 근무하는 패트릭 클리어리 신부를 만났다. 클리어리 신부와 현 박사는 한 남한 사람의 도움으로 군사 장비를 싣고 갈 2척의 상륙정을 구했으며, 그 덕택으로 다른 배들은 4천명의 피란민들을 싣고 나갈 수 있었다. 그 때가 12월 중순이었다. 흥남에서 13킬로미터 떨어진 함흥에서의 철수 시한은 다음 날 오전 6시로 정해졌다. 중공군은 이제 함흥 앞까지 와 있었다.

    12월 15일 오후 포니 대령과 현 박사가 참석한 회의에서 알몬드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4천~5천명의 피란민을 함흥에서 흥남으로 기차로 운송하겠습니다.


    현 박사가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장로교회를 방문했을 때 50명의 신자들이 지하실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는 이날 밤이 그들이 함께 기도할 수 있는 마지막 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공군은 아침에 들이닥칠 것으로 예상됐다. 그가 신자들에게 미군들이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탈출시킬 것이라고 말하자, 이들 중 한 사람이 "모세가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머지 신자들은 그 외침을 받아 가락에 맞춰 반복했다.

  • ▲ 현봉학(玄鳳學) 박사는 흥남 철수 작전 당시 9만 8천여명을 살려내 한국판 쉰들러 혹은 한국판 모세로 불린다. 해방 후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고, 1947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일했다. 이화여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윌리엄스 부인의 주선으로 미국 리치몬드주 버지니아주립대학에서 유학, 2년 후 임상병리학 펠로우십을 수료했다. 1950년 3월 귀국해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다 한국전쟁을 맞았고 해병대의 문관 겸 알몬드 10군 사령관의 민사부 고문으로 일했다. 미국 임상병리학회, 국제혈액학회, 미국 병리학회 회원, 한국임상병리학회 명예회원으로 활동했다. 한국 보건부장관 고문, 미 의학회 편집위원, 미 병리학회지 편집위원을 지내며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해 한미 양국 의학계에 공헌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문필가 피터 현과 2000년 4월과 2013년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고 현시학 제독이 현 선생의 동생이다.  ⓒ 위키백과 / 연합뉴스



    #5. "승무원 외 12명의 승객만 승선 가능해"


    새벽 2시에 출발한 열차는 새벽 5시경 흥남항에 도착했다. 열차에 탈 수 없었던 많은 이들은 얼어붙은 논과 산길을 걸어서 흥남으로 갔다.

    함흥에서의 철수가 끝난 상황에서, 다음 문제는 흥남에 도착해 며칠째 배를 기다리고 있는 10만명의 피란민들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버려진 학교 건물이나 난방이 안된 개인주택에 수용됐다. 운이 덜 좋은 사람들은 난방도, 물도, 주방시설도 없는 학교 운동장이나 회합 장소 같은 노천에서 기다려야 했다. 죽는 사람도 있었고, 출산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군대를 탈출시키기 위한 배들은 항구에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한 번에 7척의 배를 수용할 수 있는 항구에 11척의 배가 닻을 내리고 있었다. 현 박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군대의 탈출은 밤낮으로 계속됐고 승무원들은 손상된 항구 시설과 고장난 예인선을 끊임없이 보수했습니다. 기온은 영하 10도로 떨어졌습니다. 총성은 점점 가까워졌지만 피란민들을 싣고 갈 배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12월 17일 마침내 구원의 손길이 도착했다. 남한 해군으로부터 3척의 상륙정이 흥남에 도착했고, 뒤이어 6척의 수송선이 일본으로부터 도착했다. 민간인들의 탈출은 12월 19일부터 시작됐다. 상륙정들은 공식 승선 인원보다 훨씬 더 많은 수를 태웠다. 1천명의 인원을 태우도록 건조된 배들에 5천명 이상을 태웠다.

    현 박사는 12월 21일 <써전트 앤드루 밀러> 호에 승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밤새 갑판에서 피란민 철수가 계속되는 것을 지켜 봤다. 일부 피란민들은 승선할 공산이 없을까 두려워 아우성을 쳤다. 그들의 두려움은 적이 가까워지면서 높아지는 포성에 의해 더 커졌다. "해군의 야간 포격은 수평선에 떨어지는 별똥별 같았다"고 현 박사는 말했다.

    현 박사가 탄 배는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출항하기 하루 전날인 12월 22일 아침 흥남 항구를 떠났다. 훗날 포니 대령으로부터 10만명의 북한 피란민이 흥남항에서 탈출했다는 말을 듣고 현 박사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저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려 했지만 도무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10군단은 제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을 도와 줬습니다.


    포니 대령은 흥남철수 후 곧장 미국으로 돌아갔고, 현 박사는 그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포니 대령은 답장에 이렇게 썼다.

    그쪽 지방에서만 10만명 이상의 생명을 구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당신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저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표정만으로도 충분한 감사의 선물이었소.

  • ▲ 에드워드 포니(Edward Foney) 해병 대령.  ⓒ 연합뉴스
    ▲ 에드워드 포니(Edward Foney) 해병 대령. ⓒ 연합뉴스


    더 늦었더라면 구조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근 도시인 원산은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어서, 남쪽으로의 어떠한 탈출도 봉쇄됐고 민간인들을 위한 비행기는 전혀 없었다. 바다만이 흥남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여러 척의 배가 피란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배들 중 하나가 바로 미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였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가을 내내 인천, 부산, 일본을 왕복했고, 52갤런짜리 드럼통에 담긴 10만톤의 제트 연료를 도쿄에서 흥남 부근에 있는 연포공항의 해병대 항공단까지 운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승무원들은 동해의 주요항인 흥남에 도착했을 때 적의 엄청난 공세 때문에 연료를 하역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해병대는 탈출 중이었다.

    그들은 부산으로 가서 연료를 하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부산에서 연료의 하역을 마치기도 전에 라루 선장은 철수 작전을 돕기 위해서 즉시 흥남으로 돌아오라는 긴급 명령을 받았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12월 20일 저녁 흥남에 도착했다.

    미군은 철수를 위해 여전히 흥남에서 대기 중이었으므로 구할 수 있는 배란 배는 모두 필요로 했다. 또한 거의 10만명에 달하는 북한 피란민들도 있었다. 그들은 적국인 북한의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이었지만 모두 고귀한 생명들이었다. 만약 구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흥남의 외항으로 들어온 후 소해정의 안내로 해안에서 가까운 지점까지 인도됐다. 해변에서는 피란민들이 자신들을 안전한 곳까지 데려가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상급 선원인 러니(J. Robert Lunney)는 소해정이 불빛 신호를 이용해 어떤 화물이 실려 있는지를 물어왔던 것을 기억했다. 모든 미국 배들이 무선통신을 꺼놓은 상화이었기 때문에 금속 조각들을 이용해 신호를 깜빡이는 통신방법은 필수적이었다. 소련의 잠수함이 바다 밑에서 잠행 중이었다.

    러니는 "제트 연료를 운반 중이라는 신호를 보냈을 때 그들의 충격적인 표정을 거의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입항하고 있던 곳은 오늘날에도 해전 역사상 가장 많은 해저 기뢰가 매설돼 있던 곳으로 여겨지는 지점이었기 때문에 소해정은 필수적이었다.

    러니는 이렇게 설명했다.

    자석 기뢰, 미끼 기뢰, 그리고 계산기 기뢰 등 상상 가능한 모든 종류의 기뢰가 매설돼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계산기 기뢰를 스마트 기뢰라 부르죠. 압력 기뢰도 있었는데, 그것은 기뢰 위를 지나가는 배의 크기에 반응해 터집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해변에 닻을 내렸을 때 미군 대령 몇명이 승선했다. 그들 중 한 명은 미 육군 제10군단의 존 H. 차일즈 대령이었는데, 알몬드 장군 휘하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대령들과 선장 라루, 러니를 포함한 몇몇 책임자들은 해군의 은어로 병동이라고 불리는 [살롱]에서 만났다.

    차일즈 대령은 라루 선장에게 그의 배가 항구에 있는 마지막 배들 중 하나라고 말한 후, 해변의 피란민들 중 몇 명이나 태우고 부산으로 갈 수 있는지를 물었다.

    여러 해가 지났지만 러니라루 선장의 대답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들은 라루 선장님에게 상황 설명을 하면서 우리가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흥남철수가 이미 시작됐다고 말했습니다. 해병 제1사단과 육군 보병 제7사단이 이미 철수했으며 육군 보병 제3사단이 방어선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적군이 포위망을 빠르게 좁혀오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더군요. 수천명의 피란민들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부두에 몰려 있었으므로 우리는 상황이 매우 급박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령들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상급 선원들과 승무원들 외에 12명의 승객만을 태울 수 있도록 설비돼 있으므로 라루 선장에게 피란민들을 태우라고 명령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우리가 당신에게 피란민들 태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소. 그러나 당신이 자원해 배를 가지고 들어가 해변의 피란민 중 얼마라도 태우고 나올 수 있는지 묻고 싶소. 상급 선원들과 협의해서 결정을 내려줄 것을 부탁합니다.


    이때 라루 선장은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고 러니는 기억했다.

    선장님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고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어요. 선장님은 배를 가지고 들어가서 가능한 많은 피란민들을 태우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상급 선원 중 어느 누구도 선장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대령들에게 대답하기 전에 간단한 회의를 가질 것을 제안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느 상급 선원도 여전히 선적돼 있는 제트 연료 때문에 배를 돌려 그곳을 떠나야 한다고 항의 하지도 않았다.

    우리들 각자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촌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두렵지 않았습니다. 선장님이 배를 몰고 들어가라고 지시하자, 우리는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 ▲ 에드워드 포니(Edward Foney) 해병 대령.  ⓒ 연합뉴스

    #6.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승선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죽음의 무르만스크 항로에서 화물을 운반했던 경험이 있는 라루 선장은 일등 항해사 디노 사비스티오를 돌아보며 말했다.

    피란민들을 승선시키시오. 그리고 승선한 피란민들이 1만명에 달하면 나에게 보고하시오.


    러니는 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피란민들은 마치 화물처럼 실렸습니다. 그들은 배의 모든 화물창고와 갑판 사이의 공간에 실렸죠. 우리는 그들에게 제공할 음식도 물도 없었어요. 의사도 없었고 통역도 없었습니다. 기온은 영하였으며 화물 창고에는 난방도 없고 전기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소지품을 갖고 승선했죠.

    아이들이 아이들을 업고 있었고, 어머니들은 젖먹이를 안은 채 다른 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고, 노인들은 아껴 둔 음식과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공포를 봤어요. 우리가 그들에게 "빨리 빨리"라고 외쳤을 때 그들은 순순히 따랐습니다. 이 말은 영어의 "Hurry! Hurry!"에 해당하는 한국어입니다. 우리가 아는 몇 안 되는 한국말 중 하나였지요.


    러니와 그의 동료 선원들이 피란민들을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태우고 있을 때 흥남을 에워싼 전투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이들은 전선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시각각 커지는 적의 위협을 느끼면서 승무원들이 가능한 많은 피란민들을 태우고 있을 때 라루 선장은 두 가지 사전조치를 취했다. 우선 해변으로부터 급히 철수를 해야할 경우를 대비해 배가 공해를 향하도록 기수를 돌려 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승무원들에게 피란민들을 태우는 동안 계속 엔진을 가동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의 혹독한 겨울 날씨는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때때로 바람은 강풍으로 바뀌었고 눈이 내렸다. 흥남에 있는 무선 및 유선통신 부대가 화재로 마비되고 장비의 대부분이 못쓰게 돼서 해안의 부대들 사이의 통신은 더욱 힘들어졌다.

    배에 승선한 첫 번째 피란민들은 갑판으로부터 5층 아래인 다섯 번째 화물창으로 안내됐다. 이 배의 항해일지는 당시 승선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1950년 12월 22일 저녁에 시작된 승선 기록은 피란민들의 승선이 그날 밤 9시 30분에 시작돼 다음 날 아침 11시 10분까지도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21:30  플랫폼을 통해 제5화물창 피란민 승선 시작.

    22:00  플랫폼을 통해 제4화물창 승선 시작. 사다리를 이용해 제 1,2,3화물창에 승선 중.

    23:15  플랫폼을 통해 제2,3화물창 피란민들 승선 시작

    24:00  5개의 화물창 피란민들 승선 계속. 전등과 전선을 확인. 순시 완료. 갑판 순시 완료.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피란민들을 싣고 바다로 나가기 직전 한 대의 지프가 선착장을 빠르게 달려 내려왔다. 한 젊은 육군 대위가 뛰어내려서 브릿지로 달려 올라왔다. 그는 황급히 라루 선장에게 말했다.

    범죄 수사대에 방금 공산주의자 몇 명이 피란민으로 위장하고 승선했을 수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무장 경호대와 함께 승선해서 부산까지 가라는 명령을 받아서 17명의 한국군 헌병과 같이 왔습니다.


    항해일지에 따르면, 12월 22일에서 23일로 넘어가면서 날씨는 흐렸고 바다는 고요했다. 피란민의 승선이 계속되는 동안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노큐바 호 옆에 정박해 있었다. 밤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그리고 승선을 돕기 위해서 투광 조명이 사용됐는데, 훗날 라루 선장은 그 투광조명이 위험스런 상황을 더욱 위험스럽게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승선을 준비하는 동안 모든 불을 켰습니다. 우리는 불빛 아래서 일렬로 정렬된 고정 표적이었지만 적의 포탄은 전혀 가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군의 중화기들 중 하나가 실수로 피란민들에게 포탄을 떨어뜨릴 수도 있었죠.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한 상급선원은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건 완전히 미친 짓이었어요. 서커스에서 광대가 하는 농담처럼 12명의 거인이 한 대의 소형차에 올라탔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피란민들이 승선하는 내내 선장 라루는 갑판 아래에 여전히 수 톤의 제트 연료를 운반 중이라는 사실을 걱정스럽게 의식하고 있었다. 후에 그는 정확한 양을 300톤이라고 썼다.

    불꽃 하나로도 그 배는 화장용 장작더미로 변할 수 있었으며 역사상 최악의 해상 재난이 될 수 있었습니다.


    위험은 심각한 장비 부족에 의해서 가중됐다. 피란민들을 위한 구명보트나 구명구는 없었다. 47명의 상급 선원과 승무원들을 위한 두 대의 보트와 47개의 구명구가 전부였다.

    일단 항구를 떠나면 철저한 보안 때문에 그들은 어떠한 무전 교신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공해에 홀로 있게 된다. 기뢰가 거미줄처럼 매설돼 있는 10킬로미터를 헤쳐 나가야 하는데 그들에겐 기뢰 탐지 장비도 없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상급 선원들은 피란민들은 모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3척의 해군 소해정이 흥남철수 2달 전에 적의 기뢰에 의해 침몰당했다는 사실이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바다에서나 공중으로부터의 적의 공격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그리고 바다에 나가더라도 호위함도 없었다.

    승무원들이 피란민들의 승선 작업을 끝냈을 때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는 1만 4천명이 타고 있었다. 부상이 있는 승객은 17명이었다. 5명의 여성은 출산을 불과 며칠 혹은 몇 시간 앞두고 있었다.

    부산으로 가는 그들의 항해는 말로 형언할 수 조차 없었다. 날씨는 지독하게 추웠으며 배의 주갑판과 그 아래는 피란민들로 가득차 있었다. 미군 승무원들은 친절하게도 자기들 몫의 비스켓을 몇몇 피란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별도의 화장실은 없었다. 일부 피란민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배의 측면으로 가 용변을 봤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아프거나, 기침을 하거나, 배 멀미로 토했다.

    라루 선장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승선해 있었다. 그만한 공간이 있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 있었다"고 훗날 기록했다. 그날은 12월 23일 아침이었다. 그들은 피난처인 부산으로부터 해로로 724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 ▲ 에드워드 포니(Edward Foney) 해병 대령.  ⓒ 연합뉴스



    #7. "선장님. 이제 1만 4,001명입니다"


    동해에서 맞은 첫날 밤, 일등 항해사인 디노 사바스티노는 함교에 있는 선장 라루에게 외쳤다.

    선장님, 몇 명 승선했는지 아십니까?


    선장은 외쳤다.

    자네가 알고 있잖는가? 1만 4,000명.


    사바스티노가 다시 외쳤다.

    글쎄요, 선장님. 이제 1만 4,001명입니다.


    아기가 한 명 태어났다. 로버트 러니는 이층 벙커 침대와 물 외에는 다른 시설은 전혀 없는 양호실로 호출됐다.

    러니는 이렇게 회고했다.

    도와주러 갔을 때 저는 산모 주위의 한국 여인들이 산파로서 아기의 분만을 도와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국 여성들은 분만을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분만 전의 건강관리라든가 의사의 필요성 같은 것은 전혀 몰랐어요. 그들은 논밭에서 일하다가 집에 들어와 아이를 낳고 다시 돌아가서 일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산모를 포함한 한국 여성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군요.


    러니는 만일의 상황을 위해 대기하면서 역사상 가장 극적인 해상 구조와 대규모 전쟁의 한복판에서 건강한 사내아이의 분만을 지켜 봤다. 항해 도중 4명의 아이가 더 태어났다.

    분만이 있을 때마다 여인들이 와서 자리를 잡으면 우리는 옆으로 비켜서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분만 과정에서 여인들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수건과 뜨거운 물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산모들은 아기들에게 젖을 물렸어요. 자연이 아이의 식량을 가져다 준 것이죠.


    러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미소를 보았지만 기쁨의 탄성은 듣지 못했다.

    사바스티노는 고향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저는 항상 갓난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무엇인가를 하고 있어요.


    승무원들은 첫 번째로 태어난 아이에게 김치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 ▲ 6.25전쟁중이던 1950년 당시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상급선원으로 피난민 1만4천여명을 구해낸 '흥남철수 작전'을 수행했던 로버트 러니.   ⓒ 연합뉴스
    ▲ 6.25전쟁중이던 1950년 당시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상급선원으로 피난민 1만4천여명을 구해낸 '흥남철수 작전'을 수행했던 로버트 러니. ⓒ 연합뉴스



    가장 큰 사건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일어났다. 그 때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부산항에 들어섰는데, 배가 거기에 정박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부산은 이미 수많은 피란민들로 가득차 있었다. 관리들이 배를 타고 <메러디스 빅토리> 호 옆으로 다가왔을 때 라루 선장은 "1만 4천명의 피란민을 태우고 있습니다. 이들을 어디에 내려놓아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는 안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부산에는 이미 백만 이상의 피란민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사람들을 수용할 공간과 시설이 없었다.

    라루 선장은 부산에서 남서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거제도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곳은 피란민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부산에서 닻을 올리기 전, 라루 선장은 미군 보급창으로부터 음식, 물, 담요, 옷가지 일부를 공급 받았다. 또한 마지막 여정에 동참할 2,3명의 통역관과 헌벙도 추가 승선시켰다.

    항해일지는 추가적인 식량과 인력을 싣는 일이 엄청난 작업이었음을 암시한다. 작업은 무려 7시간 반이나 걸렸다.

    00:00  밥을 가져와 승강구와 갑판에 있는 피란민들이 식사를 시작했다.

    07:30  피란민들 식사 완료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거제도의 해안을 향해 다가가고 있을 때 수송선 <써전트 트루먼 킴부로> 호의 선장 레이몬드 포쎄와 선원들은 도대체 그들이 목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내려고 애썼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나나 후 <더 스키퍼> 지에 실린 기사에서 포쎄 선장은 작가 에드워드 F. 올리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처음 그 빅토리급 배를 보았을 때 도대체 갑판에 싣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멀리 서 봤을 때에 그것은 그저 검은 고체 덩어리였거든요. 배가 점점 다가옴에 따라 우리는 그것이 사람들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조용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인 다음 날 일단 해변에 접근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승무원들은 또 하나의 도전, 즉 피란민들을 섬에 내려놓아야 하는 일에 직면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화물선을 해변으로 받아들일 선착장도, 부대시설도 없는 텅 빈 맨땅의 섬에 입항하고 있었다. 난민 수송을 완수하려면 상륙정이 필요했다. 선원들은 무거운 장비를 배에 싣거나 내릴 때 사용하는 사각형의 플랫폼을 사용해 피란민들을 상륙정에 승선시켰다. 플랫폼에는 한 번에 16명을 태울 수 있었다.

    엔지니어 알 코홀드는 70세 가량된 한 노파가 상륙정에 옮겨 타다가 모든 소지품을 놓쳐서 잃어버리는 것을 봤다. 그는 "흥남으로부터의 항해로 안전한 곳에 도착한 그 여인에게는 이제 자신의 생명 외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광경을 보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모든 피란민들은 배가 고팠고 매우 목이 말랐다. 그러나 지루하게 계속될 피란민들의 하선을 위해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거제도의 외항에 닻을 내렸을 때 피란민들은 서로 팔꿈치로 밀치거나 다투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배 밖으로 뛰어내려 해변까지 헤엄쳐 가겠다고도 하지 않았고, 기쁨의 탄성도 없었다. 그 대신에 피란민들은 승무원들이 감탄해 마지 않았던 침묵과 인내의 태도를 유지했다.

    라루 선장은 당시 심각한 부상이나 사망 사고의 위험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상륙정은 한 척에 약 8,500명이 탈 수 있었는데, 우리는 상륙정과 화물선을 밧줄로 묶어 연결해 놓고 피란민들이 화물선으로부터 내려와 타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작업은 상륙정이 위험스럽게 기울어질 정도로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바로 위에서 진행돼야 했습니다. 피란민이 차례로 상륙정에 승선하는 동안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선체가 상륙정과 계속 부딪혔습니다. 줄이 끊어질 수도 있었고 사람이 두 배 사이에서 압사할 수도 있었습니다.

  • ▲ 6.25전쟁중이던 1950년 당시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상급선원으로 피난민 1만4천여명을 구해낸 '흥남철수 작전'을 수행했던 로버트 러니.   ⓒ 연합뉴스

    #8.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항상 신앙심이 깊었던 라루 선장은 바다 생활 22년 후인 1954년 뉴저지주 뉴튼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 중 하나인 성 바오로 수도원에 들어갔고, 마리너스 수사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마리너스 수사는 2001년 10월에 타계했다. 빌 길버트 기자가 수도원을 찾았을때 87세였던 그는 휠체어를 타고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성 바오로 수도원의 원장인 조엘 아빠스는 "마리너스 수사는 방에서 독서를 하고, 기도를 하고, 동료 수사들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그의 세례명을 들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이름은 바다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에서 유래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마리너스 수사는 몇 차례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상급선원이었던 로버트 러니의 방문을 받았다. 한 번은 크리스마스에 그 곳을 방문했을 때 러니마리너스 수사에게 "자신의 어린 아들 알렉산더에게 어떻게 그가 부하들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흥남 해변에서 피란민들을 구하겠다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는지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수사는 그 10대 소년에게 부드러우면서도 간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답은 "벗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성경에 써 있단다.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동안 마리너스 수사는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성물 판매점을 관리했다. 의사를 만나러 가는 것 외엔 46년 동안 마리너스 수사가 수도원 밖으로 나간 적은 단 한 번 밖에 없었다. 그것은 1960년 그의 용기와 지도력을 인정 받아 워싱턴에서 있었던 특별상 수여식에 참석할 때였다. 이런 영예로운 상을 받을 기회가 왔을 때에도 마리너스 수사는 수도원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 시상식에서 시작 기도와 강복(降福)을 준 찰스 코리스턴 수도원장의 지시를 받고서야 함께 그 자리에 참석했다.

    마리너스 수사가 그 믿기 어려운 구조작전을 지휘한지 10년이 흐른 1960년 8월 24일, 워싱턴의 몇몇 고위 인사들이 그 배와 선장에게 표창을 수여하기 위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 모였다.

    그곳은 바로 10년 전에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남한은 미국의 방위 대상이 아니"라고 연설했던 곳이었다. 그 자리에는 4명의 상원의원, 5명의 하원의원, 2명의 해군제독, 주미 한국대사,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상무장관인 프레드릭 뮬러가 참석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용감한 배]라는 상패를 받았고, 마리너스 수사는 미 상선의 가장 높은 영예인 [공훈장]을 수상했다. 마리너스 수사, 그의 상급 선원들, 그리고 기타 승무원들에게는 단체 표창장과 장식띠가 수여됐다.

    젊은 해군장교로서 흥남에서의 공포와 기적을 직접 보았던 얼리 버크 제독은 승진을 거듭해 그 때는 해군의 가장 높은 지휘관인 해군 작전관이 돼 있었다. 수상식에서 그는 북한 피란민들을 구한 상급 선원과 승무원들의 용기를 높이 칭찬했다.

    이 피란민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피나는 노력과 엄청난 모험을 감수했습니다. 그들은 성공했고, 그들의 놀라운 노력의 결과로 공산주의의 압제하에서 신음하고 있을지도 모를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고 있습니다. 많은 이름 모를 한국인들은 그들의 자식들이 현재 누리는 자유에 대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이 경의를 표하고 있는)이 분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해상청의 보도 자료는 마리너스 수사와 그의 부하들의 업적을 "한 척의 배가 이룬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구조작전"이라고 표현했다.

    표창장에 딸린 메모에는 승무원들의 이름과 그들의 직책이 나열돼 있고, "첨부된 용감한 배 표창장은 아래에 나열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승무원 모두에게 수여된다"고 씌어 있다.

    죠셉 블레세트               청소
    존 P. 브레이디              엔지니어 장
    로버트 H. 클라크           시설
    러셀 V. 클라우스            식당
    리차드 C. 콜리              일반 승무원
    찰스 C. 크로켓              주유
    시드니 E. 딜                 보조 전기 기술자
    안드레스 디아즈             청소
    엘바르 G. 프란존            3등 항해사
    메이조 M. 풀러              급사
    리 그린                       소방, 급수
    나사니엘 T. 그린            통신 상급선원
    엘버트 W. 골렘베스키      2등 항해사
    로렌스 하메이커 Jr.         주유
    에드가 L. 하돈               시설
    모랄 B. 하퍼                 전기기술자
    찰스 헤리스                  숙련된 승무원
    레온 L. 헤이즈               설비
    조오지 E. 히르시마키       제1부 엔지니어
    조셉 A. 호튼                 소방, 급수
    로니 G. 헌터                 숙련된 승무원
    윌리엄 R. 자레트            숙련된 승무원
    케니스 E. 존스               숙련된 승무원
    레온 A. 카트로보스 Jr.      일반 승무원
    알프레드 W. 코홀드         엔지니어
    제임스 A. 켈지               제3부 엔지니어
    레너드 P. 라루               선장
    J. 로버트 러니               상급선원
    허버트 W. 린치              요리사
    패트릭 H. 맥도날드          숙련된 승무원
    아드리안 L. 맥그리거        식당
    아이라 D. 머피               갑판 시설
    윌리 뉴웰                     부 요리사
    베니스 뉴섬                   청소
    닐 H. 노블                    부 엔지니어
    엘머 B. 오스먼드            숙련된 승무원
    하딩 H. 피터슨               부 엔지니어
    조니 프릿차드                식당
    디노 S. 사바스티오          1등 항해사
    헨리 J.B.스미스              3등 항해사
    멀 스미스                     엔지니어
    루이스 A. 설리반            소방, 급수
    이스멀 B. 탱                 일반 승무원
    노엘 R. 윌슨                 숙련된 승무원
    윙 T. 윈                      요리사
    어니스트 윙그로브           갑판 설비
    스티브 G. 제노스            주유 담당



  • ▲ 6.25전쟁중이던 1950년 당시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상급선원으로 피난민 1만4천여명을 구해낸 '흥남철수 작전'을 수행했던 로버트 러니.   ⓒ 연합뉴스




    1920년부터 1949년까지 한반도의 함흥·흥남 지역을 관장하던 당시의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의 수도자들은 공산 치하에서 선교 활동의 제약을 받았고, 1949년 모든 수도자와 신부들이 체포되거나 추방 혹은 학살됐다.

    흥남 부두에서 <메러디스 빅토리> 호로 탈출한 상당수의 북한 피란민들이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며, 당시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1954년부터 성 베네딕도회의 뉴튼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수도자가 줄어든 이 수도원은 2001년부터 한국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수도자 10명이 파견돼 미국인들과 미주 한인들의 종교 생활을 돕고 있다.

    비록 <메리디스 빅토리> 호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하나의 배로 이룰 수 있었던, 선장과 선원들의 용기와 사랑은, 자유를 갈망하고 생명과 희망을 잃지 않으려 했던 피란민들의 열정과 함께 우리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고, 그 전통은 지금도 이곳에서 전해지고 있다.

                   -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대표



  • ▲ 벤자민 에드워드 포니(Benjamin E Forney). 그는 64년 전 ‘흥남부두 철수’ 당시 수많은 피란민의 목숨을 구한 고(故) 에드워드 포니(Edward H Forney) 준장(당시 대령)의 증손자다.  ⓒ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 벤자민 에드워드 포니(Benjamin E Forney). 그는 64년 전 ‘흥남부두 철수’ 당시 수많은 피란민의 목숨을 구한 고(故) 에드워드 포니(Edward H Forney) 준장(당시 대령)의 증손자다. ⓒ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 ▲ 흥남 철수 작전 때 14세 소년으로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극적으로 탑승, 목숨을 건진 원동혁(76) 오일 코퍼레이션 대표와 생존 승무원들. 사진 왼쪽부터 원 대표, 선원 벌리 스미스, 기관사 멀 스미스, 갑판장 로버트 러니, 엘머 스미스.   ⓒ 연합뉴스
    ▲ 흥남 철수 작전 때 14세 소년으로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극적으로 탑승, 목숨을 건진 원동혁(76) 오일 코퍼레이션 대표와 생존 승무원들. 사진 왼쪽부터 원 대표, 선원 벌리 스미스, 기관사 멀 스미스, 갑판장 로버트 러니, 엘머 스미스. ⓒ 연합뉴스
     
  • ▲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대표가 번역한 빌 길버트 著, '기적의 배'.  ⓒ 뉴데일리DB
    ▲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대표가 번역한 빌 길버트 著, '기적의 배'. ⓒ 뉴데일리DB
     
  • ▲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 마리너스 라루 수사)  ⓒ 자료 제공 = 월드피스자유연합
    ▲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 마리너스 라루 수사) ⓒ 자료 제공 = 월드피스자유연합

    [사진 및 자료 제공 = 월드피스자유연합 / 마리너스의 '기적의 배' / CJ E&M / 국방부 자료실]




    이경필 원장, 피난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서 출생...아들은 공군 조종사

    국제시장 덕수 동생 뻘 ‘김치(Kimchi)5’ 아시나요

    “인류사 최대 휴먼스토리 전하고 싶어, 기념공원조성 도와 달라”

                                                           최종편집 2015.01.07 김정래 기자  


  • ▲ 정원의 7배가 넘는 1만4,000여명을 태우고, 기적적으로 거제도 장승포에 도착한, 흥남철수작전 당시 마지막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조형물.   ⓒ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정원의 7배가 넘는 1만4,000여명을 태우고, 기적적으로 거제도 장승포에 도착한, 흥남철수작전 당시 마지막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조형물. ⓒ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경남 거제=김정래 기자]

6.25 한국동란과 1.4후퇴.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동토(凍土)의 땅, <장진호전투>의 패전과 철수는 우리 자유민들에게는 크나큰 절망이었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미군과 국군을 따라 흥남부두에 모인 북한 피란민들은 또 한 번 절망을 만난다.

남쪽을 향해 떠나는 미군 수송선들은, 후퇴하는 미군과 국군을 태우기에도 부족했으나, 김백일 육군 1군단장, 현봉학 통역관(재미 의학자), 알몬드 미군 10군단장, 포니 미국 대령, 피란선박을 운전한 라루 선장 등의 헌신과 노력으로,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피란민 승선의 길이 열렸다.

그렇게 기적과 같은 탈출이 이뤄지면서, 10만 여명의 북한 동포가 자유대한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이것이 <흥남철수작전>이고, 인류사에 영원히 빛나는 [휴먼스토리] 탄생의 시작이다.

   - 거제 <평화가축병원> 이경필 원장


1950년 12월 25일 성탄절. 북한 흥남부두를 떠난 미군의 마지막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한 명의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흥남철수작전 과정에서, 그것도 미군과 국군, 북한에서 자유를 그리며 목숨을 걸고 탈출한 피란민들로 북적인 배 안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출생 자체가 [기적]이었다.

<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라루 선장은, 이 아이에게 <김치(Kimchi) 5>란 별명을 붙여줬다. 흥남부두를 떠난 미군 수송선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두 합해 5명. 라루 선장은 이 아이들에게도 각각 <김치 1>부터 <김치 4>까지의 이름을 지어줬다.

<김치(Kimchi) 5>, 누구보다 태어난 여정이 특별했던 이 아이는, 자신이 태어난 미군 수송선이 피란민들을 내려놓은 거제에서 자랐다.

본명은 이경필, 올해 65세 거제 장승포에 있는 <평화가축병원> 원장.
크리스마스에 태어나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는 애칭으로 평생 불려온 이 원장의 기억 속 흥남철수작전은, 그의 말대로 인류사에 길이 남을 한편의 빛나는 [휴먼스토리]로 남아 있다.

그런 그가 최근 언론을 통해 자신의 꿈을 밝히기 시작했다.

잊혀지기엔 너무나 특별한 <흥남철수작전>. 이 장쾌한 휴먼드라마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기념 공원]을 만들고 싶다는게 그가 밝힌 꿈의 핵심이다.

  • ▲ 거제 평화가축병원 이경필 원장. 1950년 크리스마스, 흥남철수작전 마지막 미군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그에게 , 이 배의 선장 라루는 ‘김치(Kimchi) 5’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거제 평화가축병원 이경필 원장. 1950년 크리스마스, 흥남철수작전 마지막 미군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그에게 , 이 배의 선장 라루는 ‘김치(Kimchi) 5’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자유의 좌표를 찾아서

    <흥남철수작전>이 벌어지기 전인 1950년 12월 어느 날, 이경필 원장의 할머니는 UN군과 국군이 중공군에 밀려 퇴각하자 아들과 만삭의 며느리에게 "자유의 땅으로 떠나라"고 말한다.

    그리고 본인은 "고향과 집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이 말이 이 원장의 할머니와 부모가 나눈 생애 마지막 대화였다.

    65년 전, 이 원장의 자유를 향한 인생 행로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 원장은 태어나면서부터 참혹한 전쟁의 역사 한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이 원장은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긴박함도, 추위도 몰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원장은 “전쟁으로 인해, 스스로 평화와 은혜, 나눔이라는 소명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 원장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전에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한 말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이 평화의 땅에서 살게 된 것은 김백일 장군과 현봉학 교수, 그리고 많은 미군들의 도움과 거제도 사람들의 따뜻한 정성이 있기에 가능했다. 우리가 도움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이 되라.


    <흥남철수작전> 당시, 이 원장의 부모님이 탄 피란선 <매러디스 빅토리>호의 수용인원은 최대 3,000명, 그러나 당시 이 배에 탄 인원은 무려 1만4,000명이 넘었다.

    <흥남철수작전>이 전쟁사 최고의 휴먼스토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만명이 넘는 피란민의 탈출은, 미군과 국군의 목숨을 건 인류애가 빚어낸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다.

    이 기적의 액소더스를 거쳐 이 원장의 가족은 평생을 거제도에서 살았다. 이 원장의 부모는 사진관 등을 하며 3남 1녀를 훌륭히 키워냈다.

    전쟁의 역경 속에서, 자유의 좌표를 찾아 몸부림쳐온 이 원장의 집안은 4대에 걸쳐 [평화와 자유]라는 인류애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1대 할머니는 자식과 며느리, 언제 태어날지 모르는 손자 이경필과 생이별을 하며 자신의 후손들을 자유의 땅으로 보냈다.

    2대인 이 원장의 부모님은 <평화사진관>, <평화식당>을 운영하며 자식들에게 평화와 나눔, 은혜의 소중함을 교육했다. 3대인 이원장 자신도 <평화가축병원>을 운영하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있다. 4대인 이원장의 장남은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공군 중령(편대장)으로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있다(이 원장의 아들은 공군 조종사들이 기체 이상 등을 이유로 긴급 탈출을 하는 경우, 해당 조종사를 구조하는 헬기 편대장을 맡고 있다).


    광복 70주년 맞아, ‘기념공원’ 조성이 꿈

    이경필 원장의 하루는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 흥남철수작전>을 기리기 위한 [기념공원 조성사업] 추진 현황을 살피는 한편, <메러디스 빅토리>호(중국에 고철로 팔린 뒤, 해체돼 없어짐)와 같은 임무를 수행했던 <레인 빅토리>호를 미국에서 사오기 위한 활동에 한창이다.

    여기에 본업인 가축병원 일도 봐야한다.
    이 원장은 주 진료종목은 소와 돼지 등 대형동물이다. 이 탓에 병원 내 진료보다 외곽 지역으로 출장이 많다. 하루에도 20~30Km는 다반사로 왕진한다. 주변에서는 이 원장을 두고, [바보 수의사]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다.

    이 원장의 식을 줄 모르는 열정에 꿈만 같았던 [기념공원 조성사업]은 한발 두발 나아가고 있다.

    이미 이 원장은 <흥남철수작전 기념공원> 조성을 위해, 거제시 장승포동 70번지에 면적 99,000m²에 이르는 부지를 확보했다. 이곳에는 총사업비 280억원을 들여 <흥남철수작전>을 기념하는 상징조형물, 전망대 등을 세울 계획이다. <레인 빅토리>호 인수가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이 배도 이 곳에 자리를 잡을 예정이다.

  • ▲ 이경필 원장이, 흥남철수 작전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배에 오르는 피란민들을 표현한 조형물을 가리키며,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난 피난민들의 절박함과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이경필 원장이, 흥남철수 작전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배에 오르는 피란민들을 표현한 조형물을 가리키며,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난 피난민들의 절박함과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이 원장의 목표는 기념공원을 통해, 피난민의 애환과 생활상을 조명하고, 전쟁과 평화, 자유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체험교육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영화 <국제시장> 관람객이 곧 1,000만명도 넘을 거라고 한다.
    어려운 시절 모두가 하나 돼 가족을 지키자고 했던 아버지 세대에 대한 헌사를 이야기로 담고 있어서 기분이 참 좋은 영화였다.

    다만, 영화에서 흥남철수작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 피난민을 실은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거제도 장승포가 아닌 부산으로 도착하는 것처럼 묘사돼 아쉽기는 했다.

    <흥남철수작전>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장소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 이경필 원장


    아쉬운 것은 또 있다. 이 원장의 열정과 노력에도 기념공원 조성사업은 점차 추진력이 약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백일 장군을 친일파로 몰아 세우는 선동이다. 공원 조성을 반대하는 좌파단체들은 <흥남철수작전>에서 공을 세운 김백일 장군이 친일 인사이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폄훼한다.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김백일 장군 동상 철거를 위한 집회와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 ▲ 김백일 장군 동상 앞에 선 이경필 원장. 이 원장은“10만 명에 이르는 피란민들에게 자유의 땅과 생명을 준 김백일 장군의 정신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먼저 생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김백일 장군 동상 앞에 선 이경필 원장. 이 원장은“10만 명에 이르는 피란민들에게 자유의 땅과 생명을 준 김백일 장군의 정신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먼저 생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이에 대해 지난 해 <흥남철수기념사업회>는 거제시장을 상대로, [김백일 장군 동상 철거 명령 및 철거집행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냈고, 대법원 승소 확정판결을 받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백일 장군에 대한 친일파 비난공세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로 인해 이 원장의 숙원인 기념공원 조성사업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원장은 “김백일 장군에 대한 친일 논란은 대법원의 판결로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는 안 되는 사안”이라며, “10만 명에 이르는 피란민들에게 자유의 땅과 생명을 준 김백일 장군의 정신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먼저 생각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피난민 구한 ‘포니 장군’ 후손, “한국은 제2의 고향”

    이 원장은, 지난해 정전 60주년을 맞아 한국 국방부의 초청 및 방송국 다큐멘터리 촬영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이때 이 원장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방문해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확인하는 한편, 한국전쟁이 무승부가 아닌 한국의 승리임을 확신했다고 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전쟁의 결과로 5,000만 명의 한국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게 됐고,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극찬하는데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 이경필 원장


    이후 이 원장은 평화와 은혜, 나눔의 감사와 실천의 뜻으로 2개의 감사패를 준비했다.

    이 원장은 [미국의 영웅](American Hero)에 대한 감사패를 미국 재향군인회장에게 전달했고, 다른 하나는 흥남철수 작전 당시 자유를 찾아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올랐던 피란민을 구출한 故 에드워드 포니 준장(당시 대령)의 증손자 벤 포니에게 전달했다.

  • ▲ 이경필 원장이, 흥남철수 기념비에서 김백일 1군단장, 현봉학 통역관(재미 의학자), 알몬드 10군단장, 에드워드 포니 대령, 라루 선장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이경필 원장이, 흥남철수 기념비에서 김백일 1군단장, 현봉학 통역관(재미 의학자), 알몬드 10군단장, 에드워드 포니 대령, 라루 선장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이 원장은 “감사패를 전달하는 자리에서, 포니 준장의 증손자인 벤 포니가 한국전쟁과 <흥남철수작전>에 대해서 할아버지에게 들어 자세히 알고 있다”며, “한국을 사랑한다고 울먹이면서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삼고 싶다. 한국의 대학으로 공부를 하러 가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고 전했다.

    이 원장은 “젊은 청년 벤 포니를 보며 이제 우리도 도움을 주고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갚아야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현재, 포니 준장의 증손자 벤 포니는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벤 포니는 올해 초 입학해 첫 학기를 마쳤으며, <한국전쟁기념재단 참전용사 후손 장학생>으로 선발돼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받았다.

    이 원장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벤 포니가 자신과 만난 이후, 스스로의 말대로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삼고,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안보의식을 일깨우고, 한국전쟁과 흥남철수작전에 대해 알리는 일을 하는 것에 자랑스러워했다.

  • ▲ 이경필 원장은 지난해 12월25일,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현봉학 박사의 딸인 에스더 현(56), 헬렌 현(53)씨, 포니 대령의 손자인 네드 포니(51)씨와 감동적인 상봉을 했다.   ⓒ 사진 TV조선 화면 캡처
    ▲ 이경필 원장은 지난해 12월25일,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현봉학 박사의 딸인 에스더 현(56), 헬렌 현(53)씨, 포니 대령의 손자인 네드 포니(51)씨와 감동적인 상봉을 했다. ⓒ 사진 TV조선 화면 캡처

    이경필 원장은 현봉학 박사의 딸들과 포니 대령의 손자도 직접 만나 감사패를 전했다.

    이 원장은 지난해 12월25일,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현봉학 박사의 딸인 에스더 현(56), 헬렌 현(53)씨, 포니 대령의 손자인 네드 포니(51)씨와 감동적인 상봉을 했다.

    현씨와 포니씨는 이 자리에서 “당신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선물이군요.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화답했다.

    이들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통해서 흥남철수작전과 ‘김치 5’의 이야기를 들었다며, 이경필 원장과의 만남을 반겼다.

    이들의 생일 축하인사에 이경필 원장은 “흥남에서 떠난 피란민 10만명 중 마지막 배에서 태어난 끝둥이가 바로 저입니다. 그날 수송선으로 후송된 10만명이 이제는 증손자까지 100만명이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원장은 “15년 전에야 처음으로 제가 흥남 철수 중 배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작년에 미국을 찾아가 포니 대령의 묘역을 참배했다”고 전했다.

    이 자리에서 현 박사의 딸인 에스더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포니 대령의 손자를 만났다고 들었지만 직접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헬렌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가 돼서야 얼마나 자랑스러운 분인지 자세히 알게 됐다”며 “훌륭한 일을 했지만 자신의 행동이 이산가족을 만든 건 아닌지 속상해하셨다”고 말했다.

    포니 대령의 손자인 네드씨는 1998년 현봉학 박사를 만난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현 박사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의 할아버지가 했던 일을 알았다고 털어놨다.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 네드씨는 흥남철수작전을 주제로 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인연으로 한국을 찾은 네드씨의 아들은 한국에 매료돼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4년 째 공부를 하고 있다.

    이경필 원장과 현 박사의 딸, 포니 대령의 손자는 ‘처음 만났지만 가족 같은 기분“이라며 친근함을 나타냈다.

    지난해 12월 국가보훈처는 현봉학 박사를 ‘이 달의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전투병이 아닌 통역병이었던 그가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김치(Kimchi) 5’ 이경필, ‘김치1~4’ 근황은?

    이 원장은 <흥남철수작전>의 마지막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피란민 10만명 중 마지막 신생아로 태어났다. 같은 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크리스마스가 생일인 [김치 형제]가 4명 더 있었다.

    이 원장은 현재 <김치 1> 이외에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김치 1>과는 지난해 만난 것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서울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치 1>은, 언론에의 노출을 상당히 부담스러워 한다고 했다.

    이 원장은 나머지 [김치 형제]들에 대해 “그저 들리는 소문으로 ‘외국에서 살고 있다’, ‘벌써 세상을 떠났다’고 듣는 정도이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