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이나 일본 사람들은 국가에 중차대한 재난이 발생할 경우 '공영방송(公營放送 · public broadcasting)'을 제일 먼저 시청한다고 한다. 이는 공영방송에 대한 자국민들의 기대와 신뢰가 크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이 방송의 목적을 영리에 두지 않고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해 방송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은 공영방송에서 전하는 각종 뉴스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역사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BBC나 NHK에서 만드는 다큐멘터리는 일선 학교에서 곧잘 교육용으로 활용되곤 한다. 시청자에게서 거둬들이는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 설마 왜곡된 역사를 내보내겠느냐는 강한 믿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떨까?
◆ 조대현 사장 "신뢰도 회복 위해 노력" 공염불?
국내에는 KBS와 MBC, 두 개의 공영방송이 존재한다. 이 중 수신료를 주재원(主財源)으로 운영되는 진정한 의미의 공영방송은 KBS 한국방송 뿐이다.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가 운영하는 MBC는 전적으로 광고료에 의존하는 수익 구조를 보여 사실상 상업방송에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런데 이들 공영방송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그다지 높지 않은 듯 하다. 지난해 말 한 여론조사전문기관이 실시한 방송사 신뢰도 조사에서 KBS와 MBC는 상업방송이자 신생 종합편성채널인 JTBC에 밀려 각각 2,3위를 기록했다. 특히 KBS의 경우, 신뢰도 부문에선 언제나 선두 자리를 지켜왔었기에 이같은 여론조사 결과는 적지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자구 노력 없이 안주(安住)하는 지상파"라는 어느 일간지의 기획기사 타이틀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이와 관련, 조대현 KBS 사장은 지난해 열린 국정감사에서 KBS의 신뢰도가 하락했다는 점을 거론하며 "모든 조사에서 다시 신뢰도 1위를 되찾도록 노력하겠다"는 이례적인 다짐을 하기도 했다.시청자들이 보시기에 KBS 프로그램은 다른 상업방송과는 다르고 국민과 국가에게 필요한 방송을 한다고 인정받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당시 조대현 사장은 'KBS의 신뢰 회복이 안 되면 수신료 인상을 안 하겠다는 각오가 돼 있는 것이냐'는 새누리당 서상기 의원의 지적에 "공익적이고 공정한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수신료 현실화가 매우 중요하지만, 우리 스스로 노력해 신뢰를 회복하는 게 먼저"라고 강조했다.
공영방송의 최고 책임자가 "신뢰도 회복이 우선"이라고 강조한 것은 여러가지로 시사하는 의미가 컸다.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 '신뢰도가 떨어졌다'고 자인한 것은 스스로 제 역할과 본분에 충실하지 못했음을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 이는 수신료 인상의 '대의명분'이 자칫 사라질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반면 조대현 사장이 공개석상에서 뼈 아픈 '자기 반성'을 토해낸 만큼, 머지않아 혁신적인 내부 변화가 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새해가 밝은지 두 달이 지나도록 모두가 기대했던 변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내 이전투구 양상이 심해지고, 역사를 왜곡하고 편향된 가치관을 유도하는 엉터리 다큐멘터리가 버젓이 방송되는 등 이전보다 더욱 악화된 병폐(病弊)를 드러내고 있다.
▲취재윤리에 반하는 과정에서 녹취된 음성이 그대로 기사화 되고, ▲선배 기자들이 후배에게 "특정 노조(제1노조 - KBS노동조합)로 갈 경우 가만 두지 않겠다"는 협박성 발언을 가하는 반민주적인 행태가 사내에 횡행하는가하면, ▲다큐 프로그램의 편향성을 지적한 원로 이사장을 겨냥해 '폭력적'이라고 비난을 퍼붓는 PD협회 성명이 기자들의 '지지'를 받는 기막힌 현실은 KBS가 여전히 전근대적인 악습(惡習)과 병폐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
◆ 수정주의 사관 가득 '엉터리 다큐', 누가 승인?
이중에서도 KBS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음을 보여준 극명한 사례는 바로 지난 7일 전파를 탄 '광복 70주년 특집 : 뿌리 깊은 미래―1편'에서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의 피란민들을 '남녘 사람'이라고 지칭하고, ▲대구 10.1폭동을 묘사하면서 '미군정이 시행한 강제적 미곡 수매(收買)가 봉기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편협한 시각을 드러내는 등 심각한 역사 왜곡이 판을 친 다큐멘터리였지만, 토요일 오후 전파를 타기까지 이같은 문제점을 사전에 지적하고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제작부와 심의실, 그 어느 곳에서도 해당 다큐의 문제점을 거론하지 않았고, 결국 수정주의(revisionism, 修正主義) 사관으로 가득찬 반미, 반대한민국적인 다큐멘터리가 전국의 안방극장에서 방영되고 말았다.
때마침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KBS 이인호 이사장이 뒤늦게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인호 이사장은 지난 11일 KBS 본사에서 열린 KBS 임시이사회에서 "'뿌리 깊은 미래' 다큐를 본 사람들로부터 내용이 편향적이라는 항의를 여러 통 받았다"면서 "이런 식으로 방송을 하면 앞으로 KBS 수신료를 어떻게 인상하겠느냐는 항의도 받았다"는 얘기를 전했다.
그러나 야당 추천 이사들은 "이인호 이사장의 발언은 제작진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발언"이라며 목청을 높였다.이제 겨우 1부가 나갔는데, 이사회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사전 검열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사회가 이렇게 시시콜콜 지적하는 것은 제작부서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습니다. 해당 내용은 시청자위원회에서 심의하면 됩니다.
이에 이인호 이사장은 "국민을 대표해 위임된 이사회는 제작진이 잘못 이해하거나 한쪽에 치우칠 경우, 제대로 된 의견을 개진할 필요가 있다"고 맞섰다.이번 방송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잇따르고 일각에선 수신료 거부 운동까지 거론되는 분위기입니다. KBS 이사회는 이같은 여론을 전달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방송법 제49조에 따르면 이사회의 기능 중 첫 번째는 공사가 행하는 방송의 공적 책임에 관한 사항, 그리고 기타 이사회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항을 안건으로 올려 심의·의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인호 이사장의 발언은 지극히 합당하고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피란민들을 '남녘 사람'이라고 지칭, 노골적으로 '대한민국의 존재'를 지운 다큐가 공영방송에서 버젓이 방송된 것은 'KBS의 공적 책임'에 위배된 것으로, 당연히 '안건'으로 올려야 할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야당 측 이사들은 "이사장의 발언은 KBS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훼손하고, 제작진에게 일종의 위협으로 다가갈 소지가 있다"며 "앞으로는 이사회에서 프로그램에 대한 발언을 하지 말아달라"고 윽박질렀다.
결국 "이사회는 프로그램의 내용을 갖고 토론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야당 측 이사들의 발언이 받아들여져, 이인호 이사장이 꺼낸 'KBS 다큐'에 대한 논의는 진행조차 되지 못했다.
제작 과정에서 올바른 필터링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사후에라도 이를 바로 잡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KBS를 대표하는 일부 이사들은 방송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들먹이며 시청자위원회에 판단을 떠 넘기는 무책임한 처사를 보였다.
이미 왜곡된 정보가 전파를 타고 전국 각지에 퍼지는 '대형사고'가 발생했음에도 불구, 이인호 이사장 외에는 이를 바로 잡으려는 이사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KBS가 오래 전에 '자정기능'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지도, 바로잡으려 하지도 않는 집단에게 거액의 수신료를 안겨다 줄 국민이 얼마나 될까?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는 KBS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마지막 잣대가 될 것"이라는 한 방송 인사의 따가운 지적이 피부에 와닿는 순간이었다. -
◆ "나홀로 KBS에" 취임 직후부터 '입바른 소리'
이인호 이사장의 고군분투(孤軍奮鬪)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해 9월 취임사에서 "공정한 보도와 공공성이 높은 프로그램을 통해 모든 일에서 (방송이)선도적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문한 이인호 이사장은 17일, 취임 뒤 처음 가진 이사회에서 "이사회는 KBS의 공공성과 공정성을 높이는 데에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KBS 이사들이 프로그램에 대한 논평이나 비판을 해선 안 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방송은 독립성 공공성을 보장해야 되기 때문에 이사들은 프로그램에 대해서 논평도 비평도 해서는 안된다하는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사회는 KBS가 공공성 공정성이 높은 방송이 되는 데에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되고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를 반성하는 일은 언제고 멈추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KBS 다큐'와 관련, "제작진이 잘못 이해하거나 한쪽에 치우칠 경우, 제대로 된 의견을 개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것은 이같은 평소 소신이 묻어난 발언이었다.
방송의 독립성 보장을 위해 특정 프로그램에 대한 왈가왈부를 자제해야한다는 야당 추천 이사들의 주장에 대해 이인호 이사장은 "편성과 보도는 다른 경영과 마찬가지로 사장에게 위임된 권한이고 이사회가 거기에 직접 관여할 일은 없겠지만, KBS 구성원 모두가 KBS가 생산하는 방송 모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늘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잘잘못에 대해서 이사들이 최종적으로 책임을 져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인호 이사장은 "보도의 공정성, 편성의 독립성이란 누구 혼자만 독주하는 것을 허용하는 게 아니"라며 "제작진이 최선의 역량을 투입해 만든 프로그램이 내적인 검증 검색 라인을 통해서 올라갔을 때 비로서 손색없는 훌륭한 프로그램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식'을 재차 강조했다.보도의 공정성, 또 편성의 독립성이라는 것은 어떤 한두 사람이 독주 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모든 프로그램은 담당 부서에서 기탄없는 활발한 토론을 통해서 결정되고 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역량이 투입되도록 개방적이어야 할 것이고 그러고 나서 책임 피디 그리고 회사 내적인 검증 검색 라인을 통해서 올라갔을 때 밖에 나가서 손색이 없고 정말 훌륭한 프로그램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창의성을 극대화 해 양질의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완벽한 게이트 키핑을 통해 공익적인 방송을 내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이인호 이사장이 원한 공영방송 KBS의 이상적인 시스템이었다.
이인호 이사장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상식적인 얘기'를 취임 당일에도, 해가 바뀐 을미년 새해에도 변함없이 강조했다. 하지만 듣는 이들도 변함이 없었다. 취임 지후부터 이인호 이사장의 역사관을 물고 늘어졌던 일부 관계자들은 이번 'KBS 다큐' 사태에 대해서도 이 이사장의 처신을 문제 삼았다.
가장 눈에 띄는 반발은 KBS PD협회(협회장 안주식)의 '날선 성명'이었다. KBS PD협회는 12일 '이인호 이사장의 도를 넘은 프로그램 개입'이라는 제하의 성명을 발표, "(11일)어제의 이사회는 이인호 이사장의 잘못된, 그리고 어쩌면 무서우리만치 폭력적인 인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자리"라고 비난했다.이인호 이사장은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KBS 프로그램의 내용의 최종 책임 프로듀서인양 행동하고 사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프로그램의 내외부의 외압을 막아내는 역할을 해야 하는 이사회를 프로그램 개입과 이념 전쟁의 장으로 활용하겠다는 사고입니다.
KBS PD협회는 "'뿌리깊은 미래'는 당시 해방공간의 정치적 역학관계나 국제관계, 북한의 상황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고, 민초들의 시각으로 구성돼 거시적 역사 평가 자체가 시도되지 않았는데도 '북한'이라는 이념 잣대를 들이대려 했다"면서 "이 이사장이 우매하고 부족한 제작진에게 프로그램에 대한 걱정과 우려의 여론을 전달해야 한다고 했다"고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이 다큐는 민초들의 고난한 삶을 위로하고 현재의 우리가 그 고생을 성공적으로 극복해 이 자리에까지 왔음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오히려 이번 발언으로 이인호 이사장이 전형적인 레드콤플렉스 색안경으로 모든 프로그램을 재단하는 왜곡된 역사인식의 소유자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KBS PD협회는 "백보 양보해 시중에 그러한 여론이 있다는 사실만을 전달하려 했다면, 이인호 이사장은 이사회가 아니라 KBS시청자 위원회에 제보하는 선에서 그쳤어야 했다"며 이사회의 '역할'과 '기능'을 애써 축소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
◆ 'KBS공영노조' '자유경제원' 힘 보태
상기한 것처럼 KBS 내에서 총대를 매고 앞장서는 장수(將帥)는 여전히 이인호 이사장 한 명 뿐이다. 하지만 최근엔 동지가 하나둘 늘어가고 있다. KBS의 '왜곡 다큐'가 전파를 탄 이후 'KBS공영노조'와 '자유경제원'이 '뿌리깊은 미래'를 비판하는 성명을 잇따라 내고 이 이사장을 거들었다. 바른사회시민연대 등 보수단체연합에서도 "KBS가 역사를 부정적으로 그린 반미·反대한민국 편파 다큐프로그램을 제작·방송했다"는 규탄기자회견을 열며 여론 확산에 기여했다.
반대 여론을 두려워하지 않는 애국 인사들의 헌신으로 여론도 조금씩 바뀌는 모습이다. 관련 기사를 보고 'KBS 다큐'를 다시 살펴봤다는 한 방송계 인사는 "무심코 보면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해석에 따라 역사적 사실이 곡해될 소지가 다분한 다큐멘터리였다"며 "공영방송에서 좀 더 꼼꼼히 체크를 하고 제작을 해줬으면 한다"는 당부를 건넸다.
정치 성향을 중도라고 밝힌 한 인사는 "이사장의 해명을 듣고보니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며 "이사회의 수장으로서 공익과 대치되거가 편향적인 방송에 대해서는 과감히 의견을 개진할 필요가 있고 또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 "KBS 내부 구성원 분발이 중요한 시점"
공영방송 KBS의 정체성을 되찾고 이름 그대로 공익적인 방송이 되기 위해선 안팎에서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선 제작진은 훌륭한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하며 시청자들은 정도를 벗어난 방송이 전파를 타지 못하도록 애정어린 비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황우섭 KBS 공영노조 위원장의 분석에 따르면 이번 다큐 논란은 1차적으로 내부 '게이트 키핑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내부 목소리가 분명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 이를 애써 외면하려는 세력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이인호 이사장이 내부에서 상하좌우 협공을 당하는 형국이 지속된다면 KBS의 공공성 회복은 요원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누구의 말처럼 매커시즘은 정치권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KBS 내부에선 또 다른 매커시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제1노조에 가입하려는 후배를 억압하고, 산업화 시대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구태(舊態)가 여전히 KBS 내에 횡행한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누구보다도 내부 구성원들의 분발이 중요한 시점이다. 연로(年老)한 이인호 이사장 외에도 KBS 구성원 모두가 자체 생산하는 방송에 대해 관심을 갖고 책임을 지려는 '능동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하지 않을까? -
◆ 이인호 KBS이사장이 지난해 첫 이사회에서 개진한 모두발언 전문안녕하십니까 KBS 가족여러분. 지난 이사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출된 후 오늘 이렇게 첫 이사회를 주재하게 되었습니다. 선출 된 후 처음으로 집행기관을 모시고 처음 주재하는 이사회입니다만은, 아쉽게도 네 분의 이사님들이 참석을 못하셨습니다. 제가 KBS의 이사장이 될 자격을 갖추었는가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관을 가졌는가 하는데 대해 일부 언론의 문제제기가 있는 것을 인식하시고 의구심을 푸는 것이 KBS이사회가 보다 일치된 모습으로 나가게 되는 방법이라 생각하고 제게 서면질의를 보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정식 안건에 들어가기 전에 제가 거기에 대해서 몇 말씀 드리고 지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는 이사님들이나 집행부의 시간을 뺏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이사장 선임에 관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사장으로서 내정되었다는 언론보도를 접하고 저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이사 선임과 이사장 호선은 방송통신위원회와 KBS 이사들의 권한인데 내정이라는 말은 그분들의 권한에 대한 침해였으며 그때 저는 갑작스럽게 KBS 이사 후보로 추천하겠다는 제의를 받고 수락도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후보로 추천되었다고 보도하는 것이 올바른 보도자세 였다고 봅니다.
몇 분의 후보가 있었는지 저는 모르지만, 제 발탁이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무자격자 심기식의 낙하산 인사였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신문과 방송에 얼굴이 자주보이는 몇 안되는 여성 대학교수, 한국 최초의 여성 대사,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KBS이사로서 저는 불편할 정도로 언론의 조명을 받는 삶을 살아왔으며 제 가치관이나 역사관은 글이나 방송기록을 통해 널리 이미 밝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큰 책임이 따르는 중책이라 후보를 사양할까 했던 제가 수락하기로 결정한 것은 제 이름이 나오자마자 비판의 독화살을 쏘기 시작한 일부 매체의 독자들 사이에서도 저를 크게 반기고 독려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양심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민주국가이고 제 역사관이나 가치관은 그동안 제가 걸어온 길, 특히 그 사회참여나 방송에 출연한 내용, 기고한 글들을 통해 모두 상세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새삼 얘기를 해야 할 필요도 사실 없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으로부터 특명전권대사로 발령받아 모두 8개국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사로 활동했고 능력과 업적을 인정받아서 문화외교를 통해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높이는 전략기구인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으로 발탁되어 연임까지 하며 4년의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친지가 불과 11년 전입니다.
그런데 KBS가 대한민국 국민의 방송으로 제 구실을 다하도록 독려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KBS이사장의 자리에는 제가 사상적으로 역사관으로 보아 부적합하다는 말을 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KBS가 어느 나라의 방송이라고 생각하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역사에 관한 제 인식이나 정서가 국민과 같지 않아서 부적격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민주화투쟁이 지식인들의 핵심과제로 등장했던 70년대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심하게 편향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운동권 교육을 받았던 일부 정치인들이나 국사학교수, 교사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일부 언론인들의 역사인식이 제 인식과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가 발생한데 대한 역사학자 또 교수로서의 제 책임과 잘못은 386세대를 중심으로 후속세대의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정서가 역사지식의 부족으로 반체제 쪽으로 편향되어 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데 있지 그들과 다른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논란이 되고 있는 현대사의 전 기간을 직접 경험하며 살았고 그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일정정도 기여를 했고 또 역사학도로 12년이나 훈련을 받고 전 생애를 역사교육에 바치다시피 한 사람이 저만큼 역사를 공부할 겨를이 없었던 사람들의 견해와 다르다고 또 그 수가 상당수 된다고 해서 제가 그쪽으로 영합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책임방기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은 인기투표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받은 눈으로 열심히 연구를 했을 때 제대로 된 역사적 진실이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 면에서는 제가 역사 선생으로써 소임을 잘못했다고 봅니다.
제가 독재를 미화하고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를 옹호한다는 비판은 터무니 없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국가적 정통성을 부정하는 좌편항적 역사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비판의 대상에 올랐을 때 저는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던 사람이고 그때 바로 그런 논리를 내세워서 색깔론 공세를 멈추라고 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 지금 제 역사관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공격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통한 현실입니다.
제가 이승만 대통령을 최근에도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가 비록 부정 부패와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항거에 의해 불미스럽게 대통령직에 물러났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시대를 앞지르는 진보적 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독립 운동가였고 우리 민족의 남반쪽만이라도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독재 아래 놓였던 세계 공산권으로 흡수되는 것을 막아내어 진정한 자주독립을 성취하고 대한민국이 자유와 독립을 토대로 복지국가로 발전하는 길을, 헌법적 토대를 만들었다는 인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정 부패에 항거하여 자기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결코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칭찬하며 병원으로 부상자를 위문갔던 지도자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제도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독재자였지만, 그 독재를 통해 경제 발전을 촉진시킴으로서 민생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민주주의가 꽃 필수 있는 사회경제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의 유산은 긍정적 부정적 측면이 다 섞여 있지만 그분 또한 군인이 집권하는 것은 비극적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분이였습니다.
이상은 제가 일제식민지 지배 체제를 미화하고 독재를 미화하는 역사관을 가졌다는 거짓 주장을 불식시키기 위한 반론일 뿐,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KBS 이사장으로서이지 역사 선생으로서가 아닙니다.
지금의 제 임무는 KBS가 명실상부하게 국민의 방송으로서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공공성과 성실성이 높고 어떤 정치적 성향에도 편향되지 않는 그런 모범적인 방송이 되고 또 그 방송을 창출해 내는 우리 KBS 가족들이 일하는 환경이 정말 창의성이 나오게끔 좋게 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제 자격시비에 관한 것은 좀 그만두고 우리 본연의 임무에 충실 할 수 있는 그러한 이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몇 분 이사님들께서 공개 질의를 하신 것 가운데 제 임무와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신 게 있습니다. 방송은 독립성 공공성을 보장해야 되기 때문에 이사들은 프로그램에 대해서 논평도 비평도 해서는 안된다하는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사회는 KBS가 공공성 공정성이 높은 방송이 되는 데에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되고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를 반성하는 일은 언제고 멈추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편성과 보도는 다른 경영과 마찬가지로 사장에게 위임된 권한이고 이사회가 거기에 직접 관여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KBS 구성원 모두가 KBS가 생산하는 방송 모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늘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며 잘잘못에 대해서 이사들이 최종적으로 책임을 져야 된다고 저는 압니다.
또 보도의 공정성, 또 편성의 독립성이라는 것은 어떤 한두 사람이 독주 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모든 프로그램은 담당 부서에서 기탄없는 활발한 토론을 통해서 결정되고 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역량이 투입되도록 개방적이어야 할 것이고 그러고 나서 책임 피디 그리고 회사 내적인 검증 검색 라인을 통해서 올라갔을 때 밖에 나가서 손색이 없고 정말 훌륭한 프로그램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을 잘못하면 바로 그것이 정치적인 개입을 불러 오게 되는 것이며 또 우리 스스로가 방송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엄청난 영향력을 정치적 힘으로 쓰고 싶은 유혹을 견뎌내는 것도 저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오늘 제가 처음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고 제가 가끔가다 방송에 출연도 하고 신문에 기고도 하고 지식인으로 사는 사람으로서 항상 주장했던 바이고, 지금 제가 이 나이에 그러한 소신을 버릴 리가 없음을 여러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제가 너무 길게 말씀을 드렸는데 서면상의 공개질의서 내용이 KBS인터넷 사이트등에 올라가 있으니까 그중에서 제 임무 수행과 관계되는 부분만을 오늘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우리 KBS 구성원들 사이에서 이사회 업무수행에 관해서 의문이 있거나 하면 달갑게 그것을 받아 숙고를 하고 또 다른 이사님들하고 같이 의논을 해서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하는 식으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또 제가 이사님들께 한 가지 부탁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의 제도가 이사 몇 사람은 여권에서 추천하고 또 몇 사람은 야권에서 추천하게 되어 있지만 굉장히 중요한 단서 조항이 그 사람들이 어느 누구도 특정 정당하고 관계가 있는 사람이어서는 안된다는 굉장히 중요한 단서 조항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바로 방송이 어떤 정파적 투쟁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취지였는데 지금 불행히도 우리 KBS 이사회 자체가 어느 면에서는 그런 여야 정치 논리에 함몰되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것에서 우리가 탈피하지 않으면 방송의 중립성 독립성 얘기하는 것이 사실 무의미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사님들께서는 누구의 추천을 받았던 간에 우리 KBS를 위해서 그리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각자의 양심과 양식에 비추어서 항상 좋은 의견을 제시하여 주시고 또 KBS 구성원 모두가 바로 그러한 정신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총체적인 역량이 가장 좋은 방향으로 결집 돼서 방송이 정치에 끌려 다니지 않고 오히려 정치가 상생과 화해의 정치, 생산적인 정치가 되도록 이끌어가는 최선을 다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