哲人정치가 李光耀
1994년 4월에 리콴유 싱가포르 수상은 포린 어페어즈에 기고한 글에서
아시아적 가치에 대해 언급하면서 미국은 서구적 민주주의의 잣대를
아시아에 적용하려 하지 말라고 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 한국야당 지도자는 아시아 국가인 한국의 정신사에는
옛날부터 민주주의의 싹이 있어왔다고 반박했다.
이야말로 관점의 차이이기 때문에 하나로 단순화하기란 쉽지 않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역사에는 다양한 모멘텀들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와 중국도 리콴유, 등소평 방식으로 해서 벌떡 일어섰고,
한국도 박정희, 김대중 방식으로 해서 산업화, 민주화를 다 같이 이룩했으니
‘리콴유-김대중 논쟁’은 저승에 가서도 계속 연장전을 벌일 듯싶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도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산업화(리콴유)와 민주화(김대중)를 넘어 이제는 또 다른 위대한 여행을 시작하자고.
리콴유와 박정희는 황량한 빈곤의 땅에선 서구적 민주주의 환경에선
무엇을 도무지 시작할 수조차 없다는 걸 절감한 인사들이다.
그래서 권위주의 리더십으로 나갔다.
김대중은 그 권위주의 때문에 바다 속에도 들어가 보고 감옥에도 가본 인사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그들은 한 가닥 논리에만 갇히게 되었다.
오늘의 한국은 ‘오로지 한 가닥’ 논리에만 갇힐 수 없는, 복잡한 사회가 되었다.
리콴유, 박정희가 말한 아시아적 가치나 한국적 가치 여하 간에 한국은 민주화 되었다.
그러니 리콴유와 박정희도 이제는 아시아적 가치나 한국적 가치도 권위주의만이 아닌,
민주주의와도 양립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하늘에서나마 바라보고 인정해야 한다.
반면에 김대중이 지향했던 민주주의는 오늘날 한국에서 지나치게 방만(放漫)해졌다는 걸
그도 하늘에서 바라봐야 한다. 공권력 알길 우습게 여기고, 저질(低質) 정쟁이 나라를 발목잡고, 폭민(暴民)정치가 춤을 추고, 포풀리즘이 홍수를 이루고, 공(公) 아닌 사(私)만 기승하고,
반(反)자유가 ‘자유를 파괴할 자유’까지 향유하려는 세태는
분명 이성적 민주주의 본연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한국인 세대가 이걸 돌아보는 데는
‘사회적 진화론(social Darwinism)자' 리콴유의 충고가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리콴유의 아우라는 그러나 단순한 ‘성공한 정치가’라는 점만으로 그치는 건 아니다.
그는 일종의 ‘철인 정치가(philosopher King)'였다. 그는 규범의 스승이었다.
현대는 어른을 죽인 시대다. 특히 교육자를 어른의 지위에서 끌어내리려 광분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리콴유는 규범의 교육자로서 산 ’의연한 어른‘이었다.
선생의 명복을 빈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