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
     
                               박근혜 체제의 5重苦                                         

 '성완종 리스트' 파동은 우리 정치 공동체의 충격 흡수 장치가
얼마나 취약한가를 다시 한 번 드러냈다.
지금 한반도 주변에선 미국과 중국이 냉전(冷戰)을 벌이고 있고,
현해탄 양쪽의 관계가 적성국처럼 험악해지고 있다.
북한은 핵탄두를 더 소형화하고 미사일을 더 멀리, 더 정확하게
쏘아대고 있다.
이런 판국인데 우리 내부에선 고작 누가 누구 돈을 '꿀꺽' 했네, 안 했네 하는
고장 난 축음기 같은 논란으로 온 나라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싶다.
 
 논란의 시발은 '성완종식(式) 신뢰론'이었다.
그는 경향신문과 가진 '최후의 인터뷰'에서 "사람은 신뢰를 중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부정한 돈을 주고받는 사이를 어떻게 '신뢰 관계'로 포장할 수 있으며,
돈 준 사람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됐을 때 돈 받은 사람이 그걸 막아주지 못하면
곧 '신뢰'를 저버리는 게 되는 것인지?
이런 관계는 부정부패·불법의 공동정범이다.
거기다 '신뢰'라는 근사한 말을 갖다 붙이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이완구 총리의 '말, 말, 말…' 또한
한 나라의 총리에게 걸맞은 교양과 품격을 갖추지 못한 마구잡이 스타일 이었다.
그가 성완종 회장이 들고 갔다는 '비타 500' 상자 속 3000만원을
과연 '꿀꺽'했는지 안 했는지는 판검사들이 가릴 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이라도 이완구 총리는 그가 내뱉었다, 쓸어담았다, 얼버무렸다, 슬쩍 바꿨다 한
말들의 불연속성 때문에라도 총리 자리에 더는 버티고 앉아 있으려야 있기가 썩 어렵게 됐다.
 
 그렇다고 야당은 '성완종 장부'에서 열외(列外)인가?
 노무현 정권 때 성완종 회장을 두 번씩이나 사면해준 것과 관련해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특사는 (청와대가 아니라) 법무부가 하는 것"이라고 떠넘긴 것도 이번에 선보인 언어의 서커스 가운데 단연 걸작에 속하는 것이었다.
지난 세월 이런저런 일로 잡혀가 사면·복권 받아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어설픈 소리를 하는가?
 
 그러나 문제는 이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금 박근혜 정부, 여야 정계, 미디어들은 온통 이 누추한 논란에 인질 잡혀가지고
새벽부터 밤까지 온 정신이 그 한 가지에만 팔려 있다.
이 '거국적 멘붕' 상태야말로 본질 문제보다 더 큰 재난일 수 있다.
한 국가의 엘리트 집단이 할 일이 그리 없어 그런 진흙탕에나 코를 박은 채
제정신 못 차리고 허우적거린대서야 말이 되는가?
 
 그렇다고 이번 사태를 가벼이 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통령과 집권당이 위기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거나 질질 끌다가 타이밍을 놓치지 말고,
모든 게 결국은 자신들 리더십의 빈곤과 부덕(不德)의 소치임을 통감하면서
온몸을 실어 그것을 단기간에 정면 돌파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무엇보다 수사를 전광석화처럼 해치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안 된다.
바닥에 떨어진 리더십을 추스르기 위해 정치적 보강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보강 작업의 초점은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인의 정치'와는 다른 '대통령의 정치'를 하는 것이다.
국가 지도자로서 역사적·철학적 프로젝트를 띄워 올리고
그 주위에 절대다수 공감 세력을 엮어 세우는
정치적·문화적·도덕적 영향력 투쟁을 하라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체제 갈등의 한가운데 선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가치 투쟁'을 제쳐놓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함께 할 '가치 동맹' '가치 연합'에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런 대통령 주변에 '가치의 동지(同志)'라고 부를 만한 동맹군이나 연합군이 있을 턱이 없다.
기껏 친이(親李), 친박(親朴) 운운하는 사(私)조직들의 좁쌀 싸움이나 있을 뿐이다.
이걸로 어떻게 반대 세력의 '증오의 쓰나미'를 막아내면서
노동·연금·공기업·역사 교과서 문제를 개혁하고 통일 대박을 이루겠다는 것인가?
 
 '성완종 리스트' 파동은 그러나 그 협소한 친박 호위 무사 핵심들마저 정조준하고 말았다.
그래서 박근혜  체제는 정당성의 위기, 효율성의 위기, 신뢰의 위기, 대통령 영(令)의 위기,
그리고 전통적 지지자들의 실망 등 5중고(重苦)를 한꺼번에 맞을 위험에 처해 있다.

박 대통령은 뒤늦게나마 통치 스타일의 일대 쇄신을 도모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귀국하자마자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뽑아주신 여러분, 제 탓입니다. 한 번 더 받쳐주십시오"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그리고 친박을 넘어 '범(汎)자유민주연합' 위에 서야 한다.
계파 수장이 아니라 대통령다운 대통령으로서 말이다. 
[조선일보 2015.4.21 류근일 칼럼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