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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과 생애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토론회가 자유경제원 주최로 열렸다.
자유경제원은 이승만 대통령에 덧씌워진 7가지의 누명을 바로잡자는 취지로, ▲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나?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 ▲이승만은 6.25가 발발하자 국민을 버리고 제일 먼저 도망쳤다는데? ▲이승만은 부정선거로 당선됐다는데?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라는데? ▲이승만은 독재자라던데? ▲이승만은 항일투쟁을 했나? (무장투쟁 vs 이승만의 외교전략) ▲이승만은 친일청산도 안하고 친일파를 비호했다는데? 라는 주제로, 13일부터 9월10일까지 모두 7차례 토론회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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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 사회를 맡은 현진권 자유경제원장은, "오늘은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아주 역사적인 날"이라며, "현재 국민 중 95%는 이승만 대통령을 나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이번 토론회를 통해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남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부분이 월등히 많다.
국민의 95%는 나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몰라서 제대로 된 평가를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소수의 선지자적인 분들을 중심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지만, 5%에 해당하는 소수로는 이승만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하면 독재자, 부정선거라는 인식이 팽배하게 깔려있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라를 버리고 먼저 도망쳤다는 인식도 깔려있다. 그런데 이 모든 주장들은 거짓말이다. 지금까지 이런 주장들에 대해 보수 우파 학자들이 직접적으로 반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해가 사실처럼 굳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받고 있는 대표적인 누명 7가지를, 7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바로잡고자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주의를 최초로 도입한 분인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돼야 우리나라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와 새로운 역사가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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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를 맡은 남정욱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에 대해서 나름대로 공과를 나눠서 평가하는데, 이승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며, "역사적인 평가라는 것은 기억이 없는 기록만 남은 상태에서 시작되는건데, 사람의 기억에 의존한 감정적인 서술을 바탕으로 이승만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남정욱 교수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한국사를 바라보지 않고, 고립적이고 폐쇄적인 틀 안에서 대한민국의 독립과 건국, 분단을 인식하면서, 이승만의 각종 결단이 사정없이 폄훼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남 교수는 ‘세계사 속의 한국사’라는 거시적인 시각에서,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결단을 바로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억은 불분명하고 불완전하며 편파적인데다가 자기중심적이다. 어떤 사실이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50년에서 70년이 지난 후에 역사가 된다는 인식이 많다.
이승만을 비판하고 누명을 씌운 이들은 그냥 이승만의 모든 것이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조차도 오로지 사리사욕의 영역으로 해석해 버린다.
독립운동은 말로, 기개로,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1818 중립법'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이승만의 무장 독립운동 반대를 이해할 수 있는데, 전후맥락 없이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반대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1818중립법'은 미국과 평화 관계에 있는 외국 지배자를 목표로, 군사적 계획을 시작하거나 착수하는 자들을 유죄라 여기는 미국의 법률을 말한다.
그런 이유에서 미국과 평화관계에 있는 일본 국왕을 목표로 군사를 모으고 훈련시키는 무장 독립투쟁은 이승만에겐 단기적 이익을 노린 기회주의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세력들은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을 무시하고, 그가 독립운동을 반대했다고만 비난하고 있다.
이승만을 폄훼하는 주장은 분단 책임론으로 이어진다. 미국이 군사 분계선으로 38선을 확정하고, 소련에 먼저 제의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45년 8월 6일부터 11일까지 6일 동안 벌어진 미국과 소련과 일본의 정치문제를 봐야 우리나라의 분단을 이해할 수 있다.
8월 6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8월 8일 스탈린이 항복 준비 중인 일본에 선전포고,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투하, 8월 10일 일본 전격 항복 선언, 그런 가운데 8월 11일 소련이 한반도를 단독으로 점령할 것을 염려한 미국은, '일반명령 1호'를 소련, 영국, 중국 등에 통보한다.
'일반명령 1호'의 요지는 38선 이북의 항복은 소련이, 이남의 항복은 미국이 받는다는 것이다. 쉽게 얘기해 지금의 북한은 소련이, 대한민국은 미국이 점령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제안을 소련이 받아들이면서, 현재와 같은 분단은 유지됐다.
이런 사실에 비춰 일부세력들은 분단의 책임이 미국과 그것을 받아들인 이승만에게 있다고 비난하지만, 미국과 이승만의 분단 결정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소련에 의해 공산화 됐을 것이 확실하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자립한 나라에게 자신들의 상품을 판매하겠단 의지로 분단을, 이승만은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분단을 했다는 것이 옳다.
일부세력들은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해서도 비난하고 나서지만, 소련에 의해 공산주의 틀이 잡힌 북한을 보며,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를 면하겠다는 이승만의 의지를 이해하지 못한 비난이라 할 수 있다.
북한에서는 남한보다 약 1년 앞서 이미 단독선거를 통해 단독 국회를 구성해 단독 정부를 만들었다. 그런점에서 세계사적 흐름과 공산주의의 본질을 파악한 이승만에게, 단독정부 수립은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당시 국민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보다 선호했다. 신탁통치가 끝난 후 우리민족이 걷게 될 길이 공산주의였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공산주의의 참혹한 전체주의와 숨 막히는 고통을 알고 있던 이승만은, 분단이 되더라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 땅에 이식하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믿고, 단독정부론을 제창해 대한민국 건국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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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후 이어진 토론에서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억울할 것 같다. 역사적 사실이 아닌, 근거 없는 비판과 비난은 사실과 어긋난 왜곡과 거짓으로 도배됐다"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악의적 왜곡이 누명의 주요 원인이 됐다고 진단했다.
나아가 김용삼 편집장은, “우리 국민은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이라 매도하면서, 역설적으로 건국을 반대한 김구는 민족의 영웅으로 받드는 이상한 잣대를 가지고 있다”면서, ‘이승만은 절대惡’, ‘김구는 절대善’이라는 이분법적 평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특히 김용삼 편집장은 “국제정세에 어두운 김구는 쿠테타를 통해 미군정을 무너트리려고 여러차례 시도했다”며,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와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은 정치에 있어서 이상과 현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설명했다.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남한과 북한만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 2차대전 전후에 한반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전 세계적 질서가 냉전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적 안목으로 남북문제를 봐야하는데, 우리는 남북관계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분단의 원인을 찾았던 것이 문제였다.
1945년 8월 14일 미국이 38선을 제안하지 않았으면, 한반도는 소련이 점령했을 것이고 곧바로 공산화가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38선을 제안했는가? 독일과 소련의 공격으로 항복한 폴란드를 보면서 미국은 공산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해, 한반도 전체를 소련군이 점령해 공산화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38선을 제안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38선으로 인해 남한의 공산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이라고 매도하면서, 건국에 반대한 김구를 민족의 영웅으로 받드는 이상한 잣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구는 국제정세에 어두웠다. 김구는 거시적 안목이 부족해, 임정의 권위를 업고 쿠데타를 통해 미군정을 무너뜨리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와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은, 정치에 있어서 이상과 현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김구는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상에만 충실하려고 고집을 부렸다. 김구 주장처럼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들이 통일정부를 위해 협상을 하고, 무조건 백기 들고 공산주의자들에게 항서를 썼다면, 공산정권의 수립으로 적화통일의 길이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71%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좋아한다고 답한 결과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켜낸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무지한 미움과 비난이 계속되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평가가 지금이라도 시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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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이승만을 공격하는 사람들의 논리에는 모순이 있다"며, "식민지를 거느린 세계의 강국에게 우리가 일본에 억울하게 당하고 있으니 독립시켜달라고, 도와달라고 요구하고, 공산화를 막고, 독립정부를 수립한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김학은 교수는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단독정부 수립이 갖는 의미를 아일랜드와 이스라엘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당시의 국제정세를 기준으로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아닌지를 본다면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지금과 180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국민들의 71%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신봉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민들의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땅을 갖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신봉하면서 개인 소유의 토지를 원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무지다. 얼마나 우리나라 국민이 무지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 문맹률은 80%에 달했다.
식민지 해방과 더불어 분단의 문제를 안은 것은 한국만이 아니다. 아일랜드가 대표적인 예인데, 초대 대통령과 수상을 연임한 드 바레라는 북아일랜드 문제를 남겨두고 아일랜드를 독립시켰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달리 국민들은 드 바레라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세계 최강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700년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소국이 국제정세에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크지 않다는 것을 모든 이들이 잘 알고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예가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이다. 그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작은 국토에서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당시로서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벤 구리온의 후임자들이 조금씩 조금씩 이스라엘을 확장시켜 지금의 국토를 가질 수 있었다.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이승만의 업적은 드 바레라와 벤 구리온과 비교해서 전혀 뒤쳐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 후손보다 못하다고 비난받아야 한다.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가치 판단의 기준은 옳은가(right) 틀린가(wrong)에서 좋은가(good) 나쁜가(bad)로 바뀌었다.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의 기준처럼 옳은가 틀린가에서 최선의 선택인가 아닌가로 바뀌어야 하는데, 아직도 잘했나 못했나라는 중세시대 가치기준으로 보고 있는 것이 큰 문제다.
앞서 아일랜드와 이스라엘의 예를 보듯이, 국제정세에 비춰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아닌지를 본다면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180도 달라질텐데, 아직도 구시대적인 발상에 갇힌 우리의 가치 기준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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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토론자로 나선 조우석 문화평론가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각종 누명의 밑바탕에 한국정치의 고질병인 전임 대통령 흠집내기 풍토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공헌한 건국혁명가 이승만을 외면하는 것도 모자라 그의 생애를 정치적으로 왜곡하고, 누명을 씌우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조우석 평론가는, “대한민국을 만든 건국혁명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야말로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으로 모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며, 대한민국의 건국을 ‘자유민주주의라는 문명의 파도가, 20세기 중반 동아시아와 한반도에 상륙했음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나아가 조우석 평론가는 이승만을 분단의 주범으로 모는 시각의 이면에, ‘분단=근대민족국가의 미완성’이란 편협한 민족주의 정서가 자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정치의 고질병인 전임 대통령 때리기 풍토가 문제다. 한국 특유의 근시안적 시야인데, 중국의 대륙적 마인드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과 부국 대통령 박정희는 한국현대사에서 특별한 이름이다. 우남이 역사의 큰 그림을 그린 지도자라면, 박정희는 기상과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박정희조차 쿠데타 집권 초기 짧은 시야와 조급함으로, 백범 김구를 높이 평가해 현재 좌파가 백범을 과대평가하고, 이승만의 건국과정을 부정하게 하는데 빌미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건국혁명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야말로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으로 모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는 세계사적인 시야를 가졌던 사람으로,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품고 있는 대한민국을 출범시키는데 성공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세계사적인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문명의 파도가 20세기 중반 동아시아와 한반도에 상륙했음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그럼에도 이승만을 분단의 주범으로 모는 시각은, '분단=근대민족국가의 미완성'이란 민족주의 정서가 작용한 탓이라 할 수 있다.
소련 스탈린의 지령은 북한지역에 단독정부를 세우라는 것으로,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는 사실은 이미 다 밝혀졌다.
이승만의 능동적이고 선제적인 대응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속절없이 공산화됐을 것이 뻔한데, 그런데도 이승만을 단정의 원흉으로 몰아 비난하는 것은, 의심스러운 정치적 배경을 가졌다는 것을 스스로 주장하는 꼴이다.
우리 근대사를 보면 좌파세력이 적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사례는 한두 번이 아니다. 만약 이승만에 의해 독립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다면, 건국혁명과 부국혁명은 커녕 우리는 아직도 베트남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나의 오랜 관심 중 하나가 대체역사소설을 쓰고 싶은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적화통일된 시점으로 2015년 5월을 살아가고 있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이 어떤지를 리얼하게 묘사하는 소설을 써 피부에 와닿게 한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으로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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