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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입니까. 주제가 빗나가는 듯합니다만, 이 문제를 잠시 생각해 봅시다. 흔히들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아닙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 그것이 역사이지요. 기억되지 않은 과거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허무이지요. 어려운 문제는 다음부터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객관적 기억은 가능한가. 저는 이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언제 홍수가 발생했고 언제 일식이 일어났는지, 자연현상에 대한 객관적 기억은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요. 그렇지만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인간들이 서로 다툰 사회현상에 관한 기억은 이해관계가 다르면 다르게 기억되고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있어서 절대적인 객관은 없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학이란 학문이 과연 성립할까요. 무엇 때문에 역사가는 먼지 묻은 고문서를 뒤지면서 과거의 사실을 캐고 있나요. 저는 《재인식》에 실은 저의 논문 <왜 다시 해방전후사인가>에서 ‘직업으로서의 역사학’이란 절을 두어 이 문제에 대한 저의 평소 고민을 펼쳐 보았습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역사가란 ‘역사와 투쟁하는 지식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역사가가 투쟁하는 역사란 대중의 과거사에 대한 집단기억을 말합니다. 대중의 집단기억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일 수도 있지만 특정 이해관계 집단이나 정치가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조작되어 대중에게 주입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최고수준의 집단기억이라 할 국가와 민족의 역사에서 후자의 경우를 자주 봅니다. 우리 한국인은 반만년 전부터 하나의 민족이라는, 오늘날 한국인이 공유하고 있는 민족의식이 그 좋은 예입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음에 대해선 제2장에서 쓴 그대로입니다. 역사가는 이러한 대중의 집단기억에 매몰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역사가는 대중의 집단기억이 정치적으로 기획되거나 조작되었을 수 있음을 사료에 기초하여 대중에 알리는 전문 직업인이지요.
역사가의 비판을 통해 대중은 그들의 과거사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갖습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모색할 지혜를 과거사의 성찰에서 찾는 것이지요. 그러한 성찰의 화두를 대중에 던지는 직업능력의 소지자가 역사가입니다. 역사가의 고발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역사가는 자기의 발언이 객관적이거나 법칙적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사료를 보니 이렇게 저렇게 통념과 다르더라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선진사회라면 대중은 그러한 역사가의 발언을 경청하지요. 대중이 역사가의 발언을 무시하면 그 사회는 후진사회입니다. 일단은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직접 먼지 묻은 고문서를 뒤지면서 얻은 지식이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다른 역사가의 다른 의견과 견주면서 어느 의견이 옳은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저는 대중과 역사가 사이에 이러한 민주적인 분업관계가 성립해 있는 사회야말로 진짜 선진사회라고 생각합니다.국사교과서의 수탈론
지금부터 저는 이 같은 역사가의 직업의식에서 1910~1945년 일제하의 식민지로 있었던 우리의 불행했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다 잘 아시는 대로 그 시대에 대해 보통의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집단기억은 한마디로 요약하여 ‘수탈’입니다. 일제의 조선 통치는 수탈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남의 재산을 빼앗는 행위가 수탈입니다. 일제는 무자비하게 우리 민족의 토지와 식량과 노동력을 수탈하였지요. 그래서 우리 민족은 초근목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거나 해외로 유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60년간 국사교과서가 그렇게 국민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렇게 믿고 있지요.
국사교과서를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2001년에 발행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보면 “일제는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철저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억압, 수탈하였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예컨대 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통해 전국 농지의 4할이나 되는 많은 토지를 국유지로 수탈하였으며, 이 토지를 일본에서 이주한 일본농민이나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과 같은 국책회사에 헐값으로 불하하였습니다. 또 총독부는 생산된 쌀의 절반을 빼앗아 일본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농사를 다 짓고 나면 경찰과 헌병이 총칼을 들이대고 절반을 빼앗아간 것처럼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문맥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또 일제는 노동력을 수탈하였습니다. 1940년대의 전시기에 약 650만 명의 조선인을 전선으로 공장으로 탄광으로 강제 연행하였으며, 임금을 주지 않고 노예와 같이 부려먹었다는 겁니다. 그 가운데 조선의 처녀들이 있었습니다. 정신대(挺身隊)라는 명목으로 조선의 처녀들을 동원하여 일본군의 위안부로 삼았는데, 그 수가 수십만에 이른다고 교과서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제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서 확인한 사실입니다만, 국사 교실에서 이 대목이 나오면 선생도 울먹이고 학생도 울었답니다. 그렇게 악독한 수탈을 당한 조상들이 너무 서럽고 분하여 울지 않고 어떻게 배기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감히 말하겠습니다. 이런 교과서의 내용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예 사실이 아닌 것도 있고 비슷한 사실이 없지 않으나 과장되거나 잘못 해석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깜짝 놀랄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거두절미하고 말한다면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교과서를 쓴 역자학자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제가 이전에 <국사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성과 그 신화성>(《시대정신》28, 2005)이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요, 혹 참고가 되면 좋겠습니다. 대중의 집단기억으로서 역사가 정치화된 역사가에 의해 또는 역사화된 정치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역사의 본질을 국사교과서의 수탈설만큼 적나라하게 잘 보여 주는 다른 사례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생산된 쌀의 거의 절반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쌀이 건너간 경로는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수출이라는 시장경제의 경로를 통해서였습니다. 당시는 수출이 아니라 ‘이출’(移出)이라 했습니다. 수탈과 수출은 매우 다르지요. 수탈은 조선 측에 기근 이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지만, 수출은 수출한 농민과 지주에게 수출소득을 남깁니다. 쌀이 수출된 것은 총독부가 강제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쌀값이 30%정도 높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수출을 하면 농민과 지주는 더 많은 소득을 얻게 됩니다. 그 결과 조선의 총소득이 커지면서 전체 경제가 성장하게 되지요. 모자라는 식량은 만주에서 조나 콩과 같은 대용 식량을 사와서 충당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추계에 의하면 인구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이 줄었다고도 반드시 이야기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또 수출소득으로 면제품과 같은 공산품을 일본에서 수입하거나 아예 기계나 원료를 수입하여 방직공장을 차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 김성수 선생의 경성방직(京城紡織)이 그렇게 해서 세워진 공장입니다. 요컨대 수출을 하면 수탈과는 전혀 딴판으로 전체 경제가 성장하게 마련이지요.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한국의 교과서는 이 평범한 경제학의 상식을 거꾸로 쓰고 있을까요.토지수탈설이 만들어진 과정
토지의 수탈설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농지의 4할이나 되는 대량의 토지가 수탈당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로부터도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 점을 저는 1923년에 쓰인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에서 확인합니다. 이 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일제의 수탈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천택·철도·광산·어장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가옥세·인구세·가축세·백일세(百一稅)·지방세·주초세(酒草稅)·비료세·종자세·영업세·청결세·소득세… 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은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이하 생략) -
일제가 조선인의 토지를 대량 수탈했다는 신화가 최초로 학술 논문의 형태로 제시되는 것은 1955년 일본 도쿄[東京]대학에 유학 중이던 이재무에 의해서입니다. 이재무는 토지조사사업 당시 총독부가 농민들로 하여금 소유 농지를 신고하게 한 조사방식이 실은 수탈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농민들은 소유권 관념이 희박하였고 신고라는 까다로운 행정절차에 익숙하지 않았다. 총독부는 이러한 농민들에게 기한부 신고를 강요하여 대량의 무신고지가 발생하도록 유도하였다. 연후에 그 토지를 국유지로 몰수하여 일본 이민과 동척 회사 등에 유리하게 불하하였다는 겁니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면서 이재무가 무슨 실증적 근거를 내세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렇다는 개인적인 신념에 근거한 일방적인 추론이었지요. 이재무의 개인적 신념은 오늘날의 연구 수준에서 보면 허허롭기 짝이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토지를 가리켜 ‘사람의 목숨줄’[人之命脈]이라 하였습니다. 소유권 관념이 희박했다니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또 조선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500년간 3년에 한 번씩 국가에 호적을 신고해야 했습니다. 신고 절차에 익숙지 않았다니 그것도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한 토지수탈설이 교과서에 최초로 실리는 것은 1962년 역사교육연구회라는 단체가 만든 중등 국사교과서에서입니다. 이 교과서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를 수탈한 결과 인본인의 토지가 전국의 거의 절반이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역시 무슨 근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뒤이어 1967년 민영규가 쓴 교과서에 전국 국토의 40%가 수탈당했다는 기술이 나옵니다만, 그 역시 무슨 근거가 있는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의 교과서는 검인정 제도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쓴 여러 교과서가 있었는데, 모든 교과서가 다 그렇게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부터 교과서가 국정 제도로 바뀝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0년 이상 민영규가 만들어 낸 40% 수탈설이 정설로 교과서에 실려 왔습니다. 앞서 말한 식량 수탈설도 마찬가지입니다. 1960년대까지의 교과서에는 그러한 기술이 없었습니다. 국정 교과서로 바뀐 뒤부터 일제가 식량의 절반을 실어 날랐다는 식의 난폭한 서술이 등장하지요.
국정으로 바뀐 교과서의 서술이 거칠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장에서 비판한 바입니다만,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민족의 이름으로 단행한 유신의 시대였습니다. 민족주의가 더 없이 강세를 떨치던 시기였지요. 역사가들은 이 같은 시대적 추세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역사가는 있지도 않았던 사실을 만들어 냄으로써 정치가와 대중의 민족주의적 욕망에 부응하였지요. 교과서의 서술이 난폭해진 것은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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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와 별도로 일제의 토지 수탈에 관한 학술 연구서가 나오는 것은 1982년의 일이었습니다. 이 해에 신용하 교수가 출간한 《조선토지조사사업연구》(지식산업사, 1982)는 뒤늦게나마 일제의 토지 수탈을 입증한 연구라고 크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저도 그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뒤 제 나름대로 한국의 토지제도사를 연구하면서 저는 신 교수의 위 책이 진지한 실증의 산물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배 교수에 대한 무례한 언사인 줄 알고 있습니다만, 대중의 역사인식에 대한 매우 공적인 문제라 어쩔 수 없군요. 이재무와 달리 신 교수는 일제의 국유지 수탈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일제가 민유지를 국유지로 수탈하고자 광분했던 모습을 신 교수는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 들고”라고 매우 선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 증거로서 신 교수는 일제가 수탈했던 국유지의 여러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두는 1918년에 출간된 토지조사사업의 보고서에 소개된 분쟁사건을 신 교수가 편리한 대로 각색한 것에 불과하지요. 예컨대 경남 김해의 어떤 땅을 두고 경남 도장관은 국유지임을, 민간인 누구는 민유임을 주장하는 분쟁에 대해 보고서는 각각의 주장은 이렇고 저렇다는 식으로 중립적으로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신 교수는 분쟁의 결과는 보나 마나 뻔한 것이라 하여 모조리 국유지로 판결이 난 것처럼 바꾸어 썼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제대로 된 실증이라고 할 수 없지요.
신용하 교수가 위 책을 출간한 그 해에 경남 김해 군청에서 토지조사사업 당시에 작성된 문서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 자료를 이용한 논문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1985년부터입니다. 저도 그 과정에서 한 몫을 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총독부는 국유지를 둘러싼 분쟁의 심사에서 공정하였으며, 나아가 기존의 국유지라도 민유인 근거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민유지로 바꾸어 판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분쟁을 거쳐 남은 국유지는 전국의 총 484만 정보의 토지 가운데 12.7만 정보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마저 대부분 1924년까지 일본 이민이 아니라 조선인 연고 소작농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불하해 버렸습니다.만들어진 기억의 상업화
1997년 저를 포함한 몇 사람의 연구자들이 토지조사사업 당시의 원 자료에 기초하여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민음사, 1997)라는 연구서를 출간하였습니다. 이후 이전과 같은 난폭한 수탈설은 많이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교과서의 서술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군요. 한번 만들어진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입니다. 선진사회라면 그러한 일이 있기 곤란합니다. 거기서는 학술세계를 지배하는 엄격한 심판자 그룹이 있어서 옳고 그름에 대해 거역할 수 없는 판정을 내립니다. 그에 비해 후진사회는 엄격한 심판자 그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뭐가 옳고 그른지를 대중은 물론 연구자조차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요. 대중의 집단기억과 관련된 문제라면 더욱 그러하지요. 한번 권력화한 대중의 집단기억은 좀처럼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좀 불쾌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한국사회는 아직 이 같은 후진사회의 특질을 많이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가 그런 후진적 양상을 떨치지 못하는 데는 상업화 된 민족주의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신용하 교수가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 측량기를 들고”를 이야기했지만 실제 피스톨이 발사된 사건을 하나라도 제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역사가의 그런 한계는 역사소설가에 의해 곧잘 매워집니다. 1994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조정래의 장편 역사소설 《아리랑》 아홉 권이 그 좋은 예이지요. 다 합하여 무려 3백만 부가 팔린 소설이라고 합니다. 이 소설의 앞부분은 토지조사사업 당시를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 무대에서 사업의 실무를 맡은 조선인 모리배들이 일본인 순사와 결탁하여 신고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리석은 농민들의 토지를 수탈하고 있습니다. 토지를 빼앗기게 된 농민이 모리배에 항의하다 몸을 밀쳐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자 일본인 순사가 그 농민을 나무에 묶어 놓고 즉결 처분으로 총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설가의 상상력이 지나쳐 소름이 끼칠 지경입니다. 이 소설가는 당시가 비록 식민지이지만 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일개 순사가 사람을 즉결로 처형하다니요. 일제가 1911년에 공포한 조선형사령(朝鮮刑事令)이란 법에 그런 조항이 있는지 묻고 싶군요. 그렇게 그 시대는 한 소설가에 의해 더없는 야만의 시대로 그려졌습니다. 마치 포르투갈의 모험 상인들이 아프리카 남미의 미개 지역에 들어가 마구 분탕질치는 식으로 식민지기의 농촌사회를 그리고 있습니다. 본의가 아니겠습니다만, 그 소설에서 우리 민족은 동네 사람이 죄 없이 총살당해도 그저 보고만 있는 나약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야만인들로 그려져 있습니다. 과연 그랬던가요. 어쨌든 그 소설을 읽은 수많은 젊은이가 그 시대를 야만의 시대로 알겠지요. 그리고선 야만인처럼 난폭하게 지난 20세기의 역사를 사고하겠지요. 그것이 두려워서 하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