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용운의 자유의 논리

  • ▲ 한용운 ⓒ 뉴데일리
    ▲ 한용운 ⓒ 뉴데일리

    흔히 사람들은 일제가 토지와 식량을 수탈했다는 교과서의 서술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그렇다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자는 말이냐”라고 불쾌해합니다. 저는 제국주의 비판의 논리가 그렇게 단순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는 수탈 여부로 비판할 것이 아니지요. 수탈 여부와 무관하게 제국주의는 그 자체로 비판의 대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름 아니라 인간 본성에 반하는 체제가 제국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다른 누구보다 명확히 한 사람이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분이신 한용운 선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본인 검찰의 심문에 대응하여 한용운 선생이 작성한 ‘조선독립의 글’이란 문장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자이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변하는 것이며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세상의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요. 자유가 없는 사람은 시체와 다를 바 없지요. 인간생명의 본질은 자유입니다. 한용운 선생이 일제의 조선 지배를 비판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한 것은 바로 이자유의 논리에서였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한용운 선생의 글을 읽고 일본인 검찰은 마음으로 승복하고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입니다. 그에 비출 때 일제의 조선 지배체제는 모순에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각종 세금은 거두어 가면서 정치적 권리는 인정하지 않은 것이 일제의 지배체제였습니다. 그런 모순은 어차피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모순을 해소하는 한 가지 방책은 조선인을 모조리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것입니다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제2장에서 썼습니다만, 차별을 받는 가운데 조선인들은 그들이 하나의 운명공동체인 민족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민족의식은 역설적으로 일제의 동화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인일수록 더욱 강했습니다. 그러니까 동화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의 방책은 조선인이게도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제는 1942년 조선의 청년들을 일본군대로 동원할 계획에서 1946년부터 조선인의 참정권을 인정할 방침을 세웁니다. 일제가 일찍 패망하는 통에 이 방침은 공수표가 되었습니다만, 실제 실현되었더라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을지는 짐작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제의 조선 지배체제는 조만간 해체될 수밖에 없는 모순에 가득 찬 것이었다고 보지요.
     그런데 일본인 검찰을 감복시킨 한용운 선생의 자유정신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저는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다”는 선생의 외침에서 문득 미국 독립혁명의 사상가인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연설을 떠올렸습니다. 그렇지요. 그것은 바다를 건너 온 정신이었습니다. 전통 성리학의 정신세계에서 그런 인간 자유론이 생겨날 여지는 별로 크지 않습니다. 이 점에 특별히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용운이란 당대의 지식인은 더 이상 전통 성리학의 세계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의 정신세계는 인류 보편의 자유 가치를 찾아 동서양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제국주의 비판이 일본인 검찰에게 경의로 받아들여진 것도 그가 이미 세계인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한용운 선생의 정신세계에서 저는 제가 앞서 이야기한 ‘문명사의 대전환’의 가장 훌륭한 예를 발견합니다. 중화제국이라는 문명권의 일부로 위치했던 조선 문명이 자유를 인간의 본성으로 알고 개인을 궁극의 실체로 인정하는 서유럽 문명권으로 포섭되어 가는 그 대전환 말입니다. 제가 식민지기를 이해하고 또 일제의 지배체제를 비판하는 시각은 바로 그러한 ‘문명사의 대전환’입니다. 그러한 시각을 가리켜 세간에서는 흔히들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그 진의가 올바로 이해되지 않은 가운데 편견에 가득 찬 비판만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에 대해 해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영구병합’을 위한 근대의 이식

    식민지근대화론은 일제가 조선을 지배한 목적에서부터 기존의 수탈론과 이해를 달리합니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한 기본 목적은 이른바 ‘영구병합’이었습니다. 일제가 남긴 통치사료를 보면 ‘영구병합’이란 말이 지겨울 정도로 자주 나옵니다. 영구히 일본의 영토로 삼겠다는 것이지요. 일본사람들은 여기에 20~30년간 살다가 돌아가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영구히 살려고 왔습니다. 이 점을 똑바로 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구병합’이란 거창한 목적을 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조선의 사회와 경제를 일본과 같은 것으로 만들어야지요. 조선의 정신과 문화를 그대로 두어서도 안 되지요. 그럴 목적에서 일제는 그들의 법과 제도와 문화를 조선에 이식하였습니다. 한갓 수탈이나 자행하여 민심을 잃기보다 좀 더 근본적인 이러한 프로젝트에 매달렸던 것이 일제의 조선 지배 35년간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1912년에 공포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이란 법을 들 수 있습니다. 그때 시행된 일본의 민법은 지금 대한민국의 민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 법을 대조하면 조항의 내용과 순서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근대 민법의 핵심 원리는 무엇입니까. 그에 대해 법학자들은 ‘사적 자유의 원칙’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국가나 다른 사람에게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그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다는 뜻이지요. 그렇다고 일제가 조선에다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원리를 도입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본 자신이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이전의 단계였지요. 그들이 만든 근대국가는 가족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정치원리에 기초한 천황제 국가였습니다. 일본이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원리를 실천하는 것은 미국에 의해 천황제 국가가 해체된 1945년 이후부터이지요. 그렇지만, 일제는 천황제라는 정치체제하에서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의 원리로서 근대적인 민법을 서유럽에서 도입하여 자기류로 정착시켰습니다. 그 서유럽 기원의 민법이 1912년 조선민사령을 통해 조선에 이식된 것입니다.

    신분제의 해체


    이후 조선에서는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적인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두 문명이 접합하여 서로 다른 유전자를 섞으면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고 할까요. 이하에서는 그러한 변화를 상징하는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첫째는 신분제의 해체입니다. 이른바 사민(四民)평등의 시대가 찾아 왔습니다. 1909년 경상도 예천군의 맛질이란 양반 마을에서의 일입니다. 오랫동안 마을을 지배해 온 박씨 양반가는 어느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대저 을사(乙巳) 이후에 양반과 이속(吏屬)들이 겁탕당하고 궁민과 평민이 때를 만났는지라. 동리의 상한(常漢)들이 양반을 칭하고 옛날 호칭은 간데없고 다툴 때는 호이호군(呼爾呼君)하니(하략)”(《맛질의 농민들》, 일조각, 293쪽).
     을사조약이 맺어진 1905년 이후 마을의 상놈[常漢]들이 양반을 업신여기고[겁탈하고] 서로 다툴 때는 막말을 하는[呼爾呼君] 사태가 생겼다는 겁니다. 양반으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이러한 변화가 왜 생겼습니까. 일제라는 새로운 지배자의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일제는 양반과 상놈의 신분 차별과 무관한 중립 권력이었습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신분으로 차별하는 일은 일제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동화정책에 어근나기 때문입니다. 1908년 같은 마을에서의 일입니다. 동네 앞을 지나는 도로를 닦는데 노동력이 동원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양반가의 자제들은 그러한 부역에서 면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 관리들은 그런 일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양반가의 자제들도 삽을 들고 도로에 나가 흙을 파고 날라야 했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히 양반과 상놈이 말을 트는 평등의 시대가 찾아 온 것이지요.
     1920년대가 되면 형평사(衡平社)라는 백정(白丁)의 단체가 백정의 신분해방을 위한 운동을 벌입니다. 조선왕조의 시대에 백정은 소나 돼지를 도살해 주고 그 가죽으로 신발 등을 만드는 직업인이었습니다만, 보통 사람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아니기에 성도 없었고 호적에도 등록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1909년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에게도 등록을 강제했습니다. 그 통에 백정들은 성도 갖고 본관도 갖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백정의 자녀가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형평사 운동 당시의 일이지요. 그러자 양반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어찌 내 자식을 백정의 자식과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게 할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특히 경상도 예천 지방에서 양반의 데모가 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을 국가의 간성(干城)이라 하여 양반들이 데모를 하면 국왕도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전통과 무관한 외래 권력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양반의 데모대는 총독부의 경찰에 의해 간단히 진압되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백정 신분은 죄다 사라지고 보통사람의 대열에 합류하고 말았습니다. 백정과 비슷한 존재가 일본에는 아직도 있습니다. 부락민(部落民)이라고 하지요. 자기 나라의 전통과 관습이니까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에 비하면 조선에 온 제국주의 권력은 차별의 해고에 훨씬 더 적극적이었던 셈입니다. 현지의 전통과 관습과 무관한 외래 권력이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식민지기의 신분제 해체는 어디까지나 공적 영역에서의 일이었습니다. 관습과 의식의 영역에서 신분차별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신분은 인간관계의 사회적 결을 가르는 차별로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크게 보아 1950년대까지의 농촌사회가 그러하였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제16장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근대적 경제 성장

    두 번째의 상징적 변화는 근대적인 경제 개발과 성장입니다. 식민지기에 관한 경제사 연구는 지난 몇 년간 큰 발전을 보였습니다. 낙성대경제연구소라는 곳에 모인 경제사 연구들은 식민지기의 각종 생산통계, 무역통계, 재정통계 등을 망라하여 오늘날 한국은행이 매년 추계하고 있는 국민계정과 동일 수준의 경제통계를 작성하였습니다. 동 연구소에서 나온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서울대학교 2006)라는 책이 그 종합판입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식민지기에 한반도라는 지리적 범위에서 어떠한 경제적 변화가 있었는지를 한층 소상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대강의 내용에 관해서는 《재인식》에 실린 김낙년 교수의 논문, <식민지 시기의 공업화 재론>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위 책은 김낙년 교수가 중심이 되어 편집할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1910~1940년 조선의 경제는 연평균 3.7% 성장하였습니다. 동기간 인구증가율이 연평균 1.3%이니까 일인당 실질소득은 연평균 2.4% 증가한 셈입니다. 이 같은 성장률은 같은 기간 주요 자본주의 국가가 정체와 위기의 시대였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경제성장에 따라 1차산업 농업의 비중이 줄고 2차산업 공업의 비중이 증가하는 산업구조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공장과 노동자의 수도 증가하였습니다. 경제란 무엇입니까. 기계와 기업과 정부 간의 재화와 서비스와 소득의 흐름이지요. 이 흐름에서 일부가 아무런 대가 없이 바깥으로 빠져나간다고 칩시다. 경제는 마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이 점점 쭈그러들지요. 이것이 바로 수탈론이 주장해 온 내용입니다만, 실제 일어난 경제적 변화는 그 반대 방향이었습니다. 재화와 소득의 흐름은 연간 3.7%의 속도로 점점 더 커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수탈론은 이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혹자는 경제성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부 일본인 차지였는데 우리 조선인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고 냉소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재인식》에 실린 주익종 박사의 논문, <식민시 시기의 생활수준>을 참조해 주십시오. 아주 훌륭한 반비판입니다. 여기서는 인구 2~3%의 소수에 불과한 일본인이 연간 3.7%의 경제성장의 과실을 모조리 다 차지하면 논리적으로 어떤 모순이 발생하는가를 여러 가지 가정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을 일본인 자본이 주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민족 간 소득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 논문은 조선인의 평균소득도 증대하였음을 설득력 있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생활수준을 반영하는 지표에는 일인당 소득수준 이외에 일인당 칼로리 섭취량, 신장, 보건위생, 교육수준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흔히 쌀이 대량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의 영양상태가 퍽 악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주익종은 만주에서 들어온 곡물과 지금까지 관심 밖이었던 채소·과일·통조림 등의 보조식품까지 합하면 그런 결론이 나올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유재산제도의 확립

    어떻게 하여 이 같은 경제성장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경제성장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만, 저는 식민지기와 같은 체제의 전환기에는 사유재산제도의 확립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유재산제도가 성립해 있지 않으면 누구도 저축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언제 누가 와서 강제로 빼앗아 갈지 모르니까요. EH 누구도 투자를 하려 하지 않지요. 투자의 과실이 자기 것이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실제 오늘날 아프리카나 남미의 여러 나라가 좀처럼 경제성장의 궤도에 올라서지 못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도 사유재산제도의 미비에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 비슷한 상황을 19세기의 조선왕조를 찾은 많은 외국인이 이야기했습니다. 예컨대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를 두루 여행한 저명한 지리학자 이자벨라 비숍(Isabrlla B. Bishop) 여사는 당시의 지배계급 양반을 가리켜 ‘면허받은 흡혈귀’라고 표현하였지요. 그만큼 일반 민중들은 양반관료의 자의적 수탈의 대상으로 무방비상태에 있었습니다.
    한국사에서 유·무형 재산의 포괄적인 범위에 걸쳐 사유재산 제도가 성립하는 것은 1910년대 초의 일이었습니다. 전술한 대로 1912년에 일본의 민법이 이식되었습니다. 재산권에 관한 근대 민법의 기본 원리는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소유권 절대의 원칙’입니다. 소유권은 절대적이며, 국가도 이를 임의적으로 침해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계약자유의 원칙’입니다. 이는 재산권을 양도하거나 처분함에서 소유자의 자유의사에 기초한 계약만이 법적으로 유일하게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원리를 보장하기 위해 민법은 모든 재산권은 국가가 정한 법에 따라 등기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에 맞추어 1912년에 ‘조선부동산등기령’이 공포됩니다. 그보다 앞서 1910년에는 ‘특허법 등을 조선에 시행하는 건’이 공포되어 일본에서 시행 중인 특허법, 의장법(意匠法), 실용신안법(實用新案法), 상표법, 저작권법이 조선에도 시행되었습니다. 그렇게 무형의 지적재산에서도 사유재산제도가 성립하였습니다.
     이렇게 재산제도를 정비한 다음 일제는 조선과 일본을 하나의 단일 시장으로 통합하였습니다. 1920년까지 사치품 몇 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관세가 폐지되었습니다. 그렇게 상품과 자본이 오가는 데 장애가 없어졌습니다. 요사이 말로 FTA[자유무역협정]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에 따라 두 지역 간의 수출입 무역이 크게 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자본이 일본에서 건너와 조선의 농토를 개간하고 수많은 공장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식민지의 경제성장을 이끈 요인은 일본의 시장과 투자였습니다.

  • ▲ 충남 일본 질소비료공장의 완성된 전경 ⓒ 뉴데일리
    ▲ 충남 일본 질소비료공장의 완성된 전경 ⓒ 뉴데일리

    수탈의 메커니즘

    그런데 그런 식의 경제성장이 계속되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조선의 토지와 자원과 공업시설은 점점 일본인의 소유가 되지요. 바로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식민지적 수탈이지요.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하여 한반도의 자원과 고업시설을 일본인의 소유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동화정책에 따른 실질적인 수탈의 무서운 결과를 보게 됩니다. 이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이라 하면 사람들은 일제의 조선 지배를 미화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수탈과 차별이 어떠한 메커니즘을 통해 벌어졌는지를 제대로 보자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이지요. 문자 그대로 식민지적으로 이루어진 근대화였습니다.
     그런데 식민지근대화론은 이러한 제국주의 비판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제국주의의 지배가 법과 제도와 시장을 통한 것인 만큼 그것은 새로운 인간관과 사회원리의 새로운 문명이 이식되어 전통과 충돌하고 접합하면서 나름의 형태로 정착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 점을 동시에 보자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바로 그 과정에서 조선인 자신이 스스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시대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자신을 근대인으로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식민지의 경제 규모가 커지는 과정에서 일본인과의 차이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만 조선인의 소득도 커지고 있었지요. 원래 그럴만한 문명 능력의 전통이었습니다. 그 점을 함부로 과소평가하면 역사적 허무주의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식민지기는 해방 후의 역사에 무엇을 남겼나요. 그에 관해서는 나중에 제9장에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