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 '천만 관객' 열풍 타고 '김원봉 미화(美化)' 움직임 일어
  • ▲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가 연기한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  ⓒ 뉴데일리
    ▲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가 연기한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 ⓒ 뉴데일리


    투철한 공산주의자, 소련 자금 받아 무장독립투쟁 전개
    48년 월북, 김일성 밑에서 최고위직 두루 거친 전범(戰犯)  


    최동훈 감독이 연출한 영화 ‘암살’이 충무로 극장가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달 22일 개봉한 ‘암살’은 광복절인 8월 15일 누적 관객 1천만명을 돌파하며 올 한 해 침체기를 겪었던 국내 영화계에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

    한국 영화 최고 예매율(54%)과 최고 오프닝 스코어(47만 7,600명)를 기록하며 시작부터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킨 ‘암살’은 개봉 25일 만에 한국 영화 사상 12번째로 천만 관객을 넘어서는 기염을 토하게 됐다.

    개봉 5주차 평일에도 꾸준히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 모으며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암살’은 이변이 없는 한, 이번 주 내로 한국 영화 사상 첫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실미도’의 기록(1,108만명)마저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 ‘도둑들’로 평단과 관객의 고른 호평을 받아온 최동훈 감독은 이번 ‘암살’에서도 예의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선보이며 한국형 ‘케이퍼 무비(Caper Movie)’의 진수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암살’은 ‘최동훈 사단’으로 불리는 배우들(이정재·전지현·오달수·김해숙·조승우 등)과, 충무로 흥행 카드를 쥐고 흔드는 배우들(하정우·조진웅·이경영 등)을 한 영화에 모조리 등장시킴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강탈’하는 마력을 발휘하고 있다.

    영화 ‘암살’이 멈출 줄 모르는 흥행돌풍을 일으키면서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관심도’ 역시 급증하는 분위기. 그 중에서도 조승우가 연기한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이 가장 뜨거운 화제선상에 오른 모습이다. 

    김원봉은 일제시대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전개했던 실존 인물이다. 경남 밀양(密陽) 출생으로 1918년 난징의 진링(金陵)대학에 입학한 뒤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해 일제 수탈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을 지휘했다.

    ‘암살’에서도 김원봉은 이야기 전개의 시발이 되는 핵심 인물이다. 백범 김구(白凡 金九)와 함께 조선주둔군 사령관 카와구치 마모루와 친일파 강인국을 사살하는 계획을 세운 뒤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염석진(이정재 분)에게 ‘암살조’를 꾸릴 것을 지시하면서 영화가 시작되기 때문.

  • ▲ 백의사의 총사령, 염동진(廉東振)을 모델로 그려진 염석진(이정재 분).   ⓒ 뉴데일리
    ▲ 백의사의 총사령, 염동진(廉東振)을 모델로 그려진 염석진(이정재 분). ⓒ 뉴데일리



    일제 수탈 기관 파괴하던 독립운동가, ‘6.25전쟁 가담’ 아이러니

    “민족에 총부리 겨눈 전범(戰犯), 독립유공자 대상 될 순 없어” 


    문제는 영화를 감상한 관객을 중심으로, 아나키스트(Anarchists)의 수장격으로 묘사된 김원봉을 ‘재평가’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데 있다.

    투철한 공산주의자로 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등을 지낸 김원봉은 1948년 남북협상 때 북한으로 건너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월북인사’다.

    1948년 9월, 북한 내 서열 7위에 해당하는 국가검열위원장 자리에 오른 김원봉은 자타공인 ‘전쟁전문가’로 6.25전쟁에도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과거엔 나라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한 역전의 용사였으나 결국엔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눈 전범(戰犯)으로 전락했다는 얘기.

    전쟁 기간 북한 ‘노동상’이 된 김원봉은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만일 6.25전쟁에 반대했거나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불가능한 인사 조치였다.

    일각에선 김원봉에 대해 “일제시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대로 평가하고, 해방 후의 사회주의 활동은 별도로 평가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정치인사는 “김원봉 선생에게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 잔 바치고 싶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김원봉이 해방 전, 독립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방 후 북한 김일성 밑으로 들어가, 6.25전쟁까지 가담한 전과(前過)를 이제 와서 ‘없던 일로’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종합적으로 공과(功過)를 평가하자’는 주장은 지극히 타당한 제안이다. 그러나 전쟁 기간 북한 최고위직에 있었던 약산 김원봉은 우리 민족에게 씻기 힘든 상처를 안긴 인물이라는 점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과 국군 장병을 죽고 다치게 한 전범이 영화 한 편으로 ‘미화’될 수는 없다. 이것이 약산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을 경계하는 이유다.

    조광형 기자 ckh@newdaily.co.kr


  • ▲ 영화 ‘암살’의 흥행에 힘입어 ‘약산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 주목된다.  ⓒ 뉴데일리
    ▲ 영화 ‘암살’의 흥행에 힘입어 ‘약산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 주목된다. ⓒ 뉴데일리


    김원봉은 영웅, 염동진은 천하의 역적?

    김일성 암살 시도한 염동진, 영화에선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이 민족의 독립투쟁을 이끈 '위인'으로 묘사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염동진을 모델로 한 염석진은 극중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 찍혀 말년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최동훈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염석진이란 캐릭터는 백의사(白衣社)의 총사령이었던 염동진(廉東振)에서 착안했다"고 밝힌 바 있다.

    본명이 염응택(廉應澤)인 염동진은 1932년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졸업한 뒤 남의사에서 활동하다 1937년 관동군에게 체포된다.

    일각에선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염동진이 일제의 모진 고문에 굴복, '밀정 노릇'을 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영화 '암살'에서도 염석진은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 일제 수하로 들어가 과거의 동료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비양심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그러나 실제로 염동진이 일본군에 협조했다는 공식 기록이 없어 '일제 부역설'은 구전되고 있는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1943년 평양에서 지하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한 염동진은 1945년 해방 이후 반공 테러단체인 '백의사(白衣社)'를 결성했다.

    1946년 평양역에서 열린 3ㆍ1절 기념대회에 수류탄을 투척, 김일성(金日成)·강양욱(康良煜)·김책(金策) 등을 암살하려 했던 사건의 배후가 '백의사'였고, 이듬해 발생한 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 암살 사건에도 '백의사'가 관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백의사'는 당시 좌파 인사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백색 테러리스트'로 유명세를 떨쳤다.

    김원봉이 좌파 무력집단의 거두였다면, '백의사'로 대변된 염동진은 우파 무장투쟁가들의 상징적인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백의사'는 6,25전쟁 기간 염동진이 사망하면서 자연 해산됐다.



    [정도원 칼럼] 영화 보고 역사 논하는 수준이 개탄스럽다

    "적화되면 숙청될 문재인이 김원봉에 술 올린다니‥"

    약산의 무장투쟁, 유고의 티토와는 수준 달라…
    북한정권 부역 과오 큰 인물


                                                                                          정도원 기자           

  •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약산 김원봉에게 마음 속으로나마 훈장을 달아주고 술 한 잔 올리고 싶다고 밝혔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약산 김원봉에게 마음 속으로나마 훈장을 달아주고 술 한 잔 올리고 싶다고 밝혔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돌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를 서훈하자며,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을 거론하고 나섰다.

    약산은 3·1 독립 만세 운동이 벌어졌던 1919년 12월 만주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해 무장 항일 투쟁에 나섰던 인물이다. 그가 이끈 의열단은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장 폭살 의거, 같은 해 12월 27일에는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를 일으켰다. 이후 여러 차례의 의거 공작이 실패하거나 미수에 그치던 중 1926년 12월 28일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 의거가 결실을 맺은 바 있다.

    이후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좌우합작운동을 벌이다가 김구·김규식 등이 남북연석회의를 이유로 방북했을 때 함께 북한으로 올라갔다가 그대로 남아 월북 인사가 됐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수립된 뒤에는 검열상·노동상 등을 지내며 내각에 참여했다가 이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의장을 마지막으로 1956년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면서 숙청됐다.

    문재인 대표는 약산에 대해 "일제시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대로 평가하고, 해방 후의 사회주의 활동은 별도로 평가하면 되지 않을까"라며 "광복 7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 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 잔 바치고 싶다"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밝혔다.

  • ▲ 미소공동위원회에 출석한 약산 김원봉과 긍인 허헌, 이정 박헌영(사진 왼쪽부터). ⓒ위키백과
    ▲ 미소공동위원회에 출석한 약산 김원봉과 긍인 허헌, 이정 박헌영(사진 왼쪽부터). ⓒ위키백과


    일단 약산은 문재인 대표의 평가처럼 '해방 후에 사회주의 활동'을 한 것으로 그친 게 아니라, 월북해 북한의 내각에 참여했다. 이후 북한은 정권 수립 2년 뒤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해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과 국군 장병을 죽고 다치게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결국 우리의 적인 북한정권에 부역(附逆)한 것이다. 문재인 대표의 평가처럼 '해방 후에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라는 것으로 그치려면 적어도 북한정권에 부역한 바가 없는 몽양 여운형 정도를 예시로 들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동일인이 해방 전에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 후에 북한에 부역한 행적을 칼로 무 자르듯이 나눠 별도로 평가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2·8 전당대회에서 승리한 문재인 대표와 4·29 재보궐선거를 네 곳 모두 전패하며 말아먹은 문재인 대표를 별도로 따로 따로 평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만일 이를 따로 평가한다면 문재인 대표가 지금 새정치연합 대표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겠느냔 말이다.

    결국 종합적으로 공과(功過)를 따져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에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 공이 과보다 얼마나 더 큰 지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약산이 해방 전에 의열단·조선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 등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약산이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어떤 유의미한 전과를 올리거나 이를 통해 세계 열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이끌어낸 것은 아니다.

  • ▲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주의 계열 무장 독립운동가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1944년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과 회담하고 있다. 회담 직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임시정부를 승인했다. ⓒ위키백과
    ▲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주의 계열 무장 독립운동가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1944년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과 회담하고 있다. 회담 직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임시정부를 승인했다. ⓒ위키백과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Јосип Броз Тито)와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티토는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 독립운동가였는데, 나치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강점하자 무장 조직을 결성해 맞서 싸웠다. 이에 1944년 영국을 필두로 하는 서방 연합국과 소련 등이 티토의 임시정부를 승인했다. 유고슬라비아는 승전국의 지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맞았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도 초청됐다.

    약산의 독립운동의 가치를 결코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냉정히 볼 때 어떠한 규모 있는 무장 군대를 이끌며 대일전(對日戰)에 일주체로서 참전한 것은 아니고, 그 무장 저항이란 단발성의 폭탄 투척 의거 등에 집중됐던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임시정부의 열강 승인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결국 승전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맞이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해방 이후 초대 북한 내각에서 국가검열상으로 입각하면서 부역한 과오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참화를 불러일으켰다. 불과 2년 뒤 수상 김일성이 전면적인 남침을 결행한 것이다. 6·25 남침 중에 국가검열상으로 있던 약산은 1952년 이정 박헌영이 실각하면서 북한 내각이 개각되자 노동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설에는 약산이 남침에 반대했다고 하지만, 남침 당시 국가검열상이라는 요직에 있었고 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도 다른 내각 각료 자리로 옮겨간 행적으로 볼 때 6·25 남침에 연루된 죄과는 씻을 수가 없다. 공과로 보면 역시 과오가 압도적으로 큰 인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 북한의 초대 내각 사진. 맨 앞줄 가운데에 김일성 수상이 있고, 좌우로 부수상인 홍명희와 박헌영이 있다. 약산 김원봉은 둘째 줄, 오른쪽으로부터 두 번째에 선글라스를 쓴 사람이다. ⓒ위키백과
    ▲ 북한의 초대 내각 사진. 맨 앞줄 가운데에 김일성 수상이 있고, 좌우로 부수상인 홍명희와 박헌영이 있다. 약산 김원봉은 둘째 줄, 오른쪽으로부터 두 번째에 선글라스를 쓴 사람이다. ⓒ위키백과

    그렇다면 문재인 대표는 왜 뜬금없이 약산을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를 재평가하자는 주장을 했을까.

    지난 15일로 천만 관객을 넘긴 영화 〈암살〉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실제로 문재인 대표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글에서 "김구 현상금 5만 엔, 김원봉 현상금 8만 엔은 '암살'에 나오는 대사"라며 "영화 '암살'에는 항일의 역사와 친일의 역사, 그리고 변절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 선거에 나왔었고, 다음 대통령 선거에도 도전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수권정당의 대표라는 사람이 한갓 영화 때문에 국가와 국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제안을 하는 모습이 개탄스럽다.

    문재인 대표는 감명깊게 본 영화가 〈광해, 왕이 된 남자〉라며 "백성을 위한 진짜 왕이 되려고 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하기도 했다. 본 것은 무조건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모양이니 〈공주의 남자〉나 〈해를 품은 달〉 같은 퓨전 사극은 '문재인 대표 이하 관람불가'로 지정해야 할 것 같다.

  •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영화 암살을 거론하며, 약산 김원봉을 재평가하자는 취지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캡처된 내용에는 중략된 부분이 있다. ⓒ문재인 대표 페이스북 캡처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영화 암살을 거론하며, 약산 김원봉을 재평가하자는 취지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캡처된 내용에는 중략된 부분이 있다. ⓒ문재인 대표 페이스북 캡처


    광해군은 7년에 걸친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적에게 짓밟히고 초토화됐는데도, 즉위한 뒤 대규모 토목 공사를 잇달아 벌여 민력을 고갈시킨 것으로 악명 높다. 1611년 창덕궁의 중건이 끝났는데도 창경궁의 중수를 시작했으며, 이후에는 지관(풍수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서울 내에 왕기가 있다는 경희궁과 인경궁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경기 파주 교하로 천도를 시도하기도 했는데, 민력과 재정이 완전히 파탄 나서 실행에 옮기지 못할 정도였다.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폐모살제(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증살했다는 의혹)로 인망을 잃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과도한 토목 공사로 민심을 잃으니 엉성한 반정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왕위를 잃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문재인 대표가 생각하는 '백성을 위한 진짜 왕'은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이며, 과도한 토목 공사를 일으켜 민력을 파탄내는 왕이란 말인가. 게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올라 감정을 수습하기 어려웠다고 하니, 전란 직후에 교하로 도읍을 옮기려 한 광해군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종으로 도읍을 옮기려 해 민력을 파탄낸 것은 맞지만 그 외에도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문재인 대표는 모쪼록 영화를 보지 말고 역사를 봤으면 한다. 당장 영화 〈광해〉 말고 조선시대에 폐위된 또 다른 임금, 연산군 시절을 공부해 보는 것은 어떤가.

    지금 노무현정권 시절에 청와대에서 일했던 사람들끼리 3철이니, 9인방이니, 문지기니 하는 조직을 만들어 권력을 독점하려 하고 있는 것으로 새정치연합 내에 모든 내홍이 시작됐다. 실로 연산군 시절 권력을 독점하려 사화를 일으킨 '궁중파(宮中派)'와 다를 바 없는 행태다.

    출신은 같은 훈구인데도 왕실과 가깝다는 이유로 궁중파라 하여, 내각에 포진해 있던 부중파(府中派)를 배척하고 패권주의적 행태를 보이니, 지난 정권에서 본래 함께 친노(親盧)였고 통일부장관·법무부장관을 했던 사람들마저 모두 치를 떨고 탈당했다. 같은 훈구끼리도 이리 할진데 사림이라면 어떻겠는가. 비노(非盧·비노무현)계가 전부 공천 학살당하거나 물갈이당할 것으로 우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 ▲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계열 무장 독립운동가 폴 포트. 정권을 잡은 뒤 킬링필드를 일으켜 4년 동안 80만 명을 학살했는데, 특히 지식인 계층의 피해가 컸다. ⓒ위키백과
    ▲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계열 무장 독립운동가 폴 포트. 정권을 잡은 뒤 킬링필드를 일으켜 4년 동안 80만 명을 학살했는데, 특히 지식인 계층의 피해가 컸다. ⓒ위키백과

    연산군 시절이 너무 옛날이라 와닿지 않는다면 현대 캄보디아를 공부해 보는 것은 어떤가. 폴 포트는 프랑스로부터 인도차이나를 독립시키기 위한 무장 항쟁에 가담했던 공산주의자인데, 1975년 정권을 잡자 이른바 '킬링필드'를 일으켰다.

    폴 포트 집권 4년 동안 80만 명이 학살됐고, 캄보디아의 평균 기대 수명은 16세까지 낮아졌다. 안경을 끼고 있었다는 이유로 총살당한 사람도 있을 정도였고, 지식인에 대한 적대감이 한없이 높았으니 당시 문재인 대표가 캄보디아에 살고 있었더라면 죽음을 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혹시 그래도 문재인 대표는 폴 포트의 대프랑스 독립운동과 킬링필드 학살은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마음 속으로나마 훈장을 달아줄 생각인가.

    사실 북한이 대한민국을 적화(赤化)하면 숙청 대상 1순위가 지식인 계층이라고 하니, '킬링필드'가 한반도가 아닌 인도차이나에서 일어난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불행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천운일 수도 있다. 약산이 내각에 참여해 있던 북한에 의해 자행된 6·25 남침이 성공했더라면 문재인 대표가 어찌 약산에게 술 한 잔 올릴 여유가 있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