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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제1차 연평해전 승전 10주년 기념식이 열린 평택 해군2함대 사령부. 기념식 장소의 내빈 의자에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제1차 연평해전 당시 작전사령관이었던 서영길 제독(예비역 중장)과 당시 2함대 사령관으로 전투를 지휘했던 박정성 제독(예비역 소장)이었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정옥근 해군참모총장도 당시 해군작전사령부 작전참모처장으로 근무하면서 승리에 기여해 전투유공 무공포장을 받은 바 있다.
통쾌한 승리 넉달 뒤 대기발령으로 좌천, 진급도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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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어느 누구인들 6월 15일에 대한 감회가 새롭지 않을까. 하지만 당시 2함대 사령관이던 박 제독에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고 이 자리는 특별한 장소였다. 승전 주역이었던 박 제독은 제1차 연평해전 네 달 뒤인 1999년 11월 느닷없이 해군본부 대기로 인사발령이 났다. 통상 1년 에서 1년 반 정도인 함대 사령관 임기도 채우지 못했다. '해군참모총장 특별 보좌관’이라는 새 보직이 주어졌지만 정말 아무 할 일도 없는 한직(閑職)이었다. 부관과 비서 한 명만 있는 그의 방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6개월간 허송세월을 하다 해군본부 군수참모부장으로 옮겼다. 이후 정보작전참모부장을 거쳐 해군 군수사령관을 끝으로 2004년 4월 전역했다. 끝내 중장 진급의 꿈은 접어야 했다.
제1차 연평해전은 해전 9일 전인 1999년 6월 6일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으로 시작됐다. 어선 20여척과 함께 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 3척은 평상시와 달리 우리 함정을 들이받으려 했다. 박 제독은 즉각 계획적 도발이라고 판단했다. 전 함대에 비상소집령을 내리고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박 제독은 1998년 11월 2함대사령관으로 부임한 후 6개월간 적의 도발에 대비한 충분한 교육과 훈련을 시킨 뒤였다.
덩치가 크고 속도가 늦은 북한 함정이 충돌해오면 우리 해군은 재빨리 회피하는 작전을 폈다. 경고사격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엔진이 낡은 북한 함정을 무리하게 움직이게 만들어 장비 고장을 유도하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NLL을 지킬 수 없어 결국 우리 고속정이 취약한 북한 함정 선미(船尾)를 들이박아 피해를 입혔고 양측의 긴장은 고조돼 갔다. 이런 공방전이 10일 동안 이어졌다.6월 15일 아침 9시28분 북한군이 기습공격을 해왔다. 그날 아침 북한 함정이 평소와는 달리 신속하게 움직이자 박 제독은 바로 응전 준비를 지시했다.
“공격이 시작됐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전 함정에 포별로 타깃을 정한 뒤 록온(lock on : 자동추적장치 가동)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적의 함포는 수동인 데 반해 우리 함포는 함정이 어떻게 움직이든 목표를 자동으로 추적합니다. 명령을 내린 지 정확하게 1분 뒤에 적이 사격해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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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제독의 판단과 평소의 대비는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적을 완파했다. 76㎜, 40㎜ 함포와 20㎜ 벌컨포가 14분 동안 비처럼 포탄을 퍼부은 현장은 처참했다. 갑판에 있던 북한군은 거의 전사하거나 중상. 함포 위력 때문에 형체도 없이 찢긴 사체들이 즐비했다. 적의 함정 4~5척이 침몰, 대파됐고 5~6척이 손상을 입었다. 목격한 전사자만 수십 명. 반면 우리 함정은 고속정 1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고 장병 11명이 부상을 당한 정도였다.
하지만 이 같은 빛나는 전과의 보상은 ‘좌천’이었다. 박 제독은 좌천성 인사에 대해 “인사권자의 고유권한에 가타부타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단 “제1차연평해전 이후 남북 군사회담에서 북한 측이 ‘연평해전의 남조선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을 회담에 참석한 후배들로부터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김대중 정권은 나라를 지킨 제독에게, 훈장을 줘야할 지휘관에게 북한의 책임자 처벌 요구대로 ‘물을 먹인’ 것이다.
김대중 정권, "연평해전 남조선 책임자 처벌해라" 북한 요구 수용
승전 10주년 기념식을 마친 뒤 박 제독은 모처럼 열변을 토했다.
“해군 2함대 장병들이 제1차 연평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지난 10년간 큰 자랑임에도 마치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되어버렸다”고 울분을 토했다. “좌파정권의 햇볕정책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제독은 “당시 선제사격 금지 등의 지시로 우리 손발은 완전히 묶였었다”며 “국방부와 합참으로부터 그런 지시가 계속 내려왔다”고 말했다.
“적의 포탄을 맞고 나서야 대응하라는 것인데 이 때문에 우리는 웅크린 상태에서 죽을 고생을 했다"며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선전만 해댔고 그렇게 방심하는 사이 제2차 연평해전에서 피해를 당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 제독은 “제1차 연평해전을 겪은 뒤 적의 NLL 침범 때 근접 기동전을 벌이는 전술은 수정돼야 옳았습니다. 보복을 노리는 적에게 기습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6·15 정상회담으로 우리 군 지휘부 및 장병의 긴장이 늦춰졌고 북한의 도발 징후와 함정의 남하 의도에 대해 군 지휘부가 혼선을 겪으면서 기회만 노리던 북한 해군에 역습을 당한 겁니다. 근접 기동전이 불가피한 5단계 전략은 제2차 연평해전 후에 가까스로 시위기동, 경고사격, 격파사격 순의 3단계로 변경됐습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박 제독은 “북한 주장대로 NLL을 조정해 12마일 영해선을 인정해 줄 경우 수도권 도서 12마일까지 북한 함선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돼 수도권 서쪽 방어가 거의 불가능해진다”며 "함대사령관에게 지휘전권을 보장해 현장에서 종결해야 하며 충돌하면 응전하라는 식의 지시는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