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박정희, 한국의 탄생』 (살림 | 2009년10월)
다른 건 몰라도 박정희만은 안 된다는 당신에게
미국 역대 대통령들이 조각된 사우스 다코다 주 러시모어 산의 초대형 큰 바위 얼굴은 우리에게 못내 부러운 광경입니다. 나라를 세우고(조지 워싱턴), 땅을 넓힌 뒤(토머스 제퍼슨), 분열을 치료하고(에이브러햄 링컨), 강국으로 만든(시어도어 루스벨트) 지도자를 기억하려는 미국인들의 자부심이 드러납니다. 역대 대통령과 그 시대란 결국 자신들이 함께 연출해낸 드라마가 아니겠습니까?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인들이 굳이 먼 산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달러화만 봐도 됩니다. 1달러화의 조지 워싱턴, 2달러화의 토머스 제퍼슨을 포함해 에이브러햄 링컨(5달러), 앤드루 잭슨(20달러)을 매일같이 보고 만지며 삽니다. 대통령 이야기는 단행본은 물론 영화, TV 드라마로도 쏟아져 나옵니다.
링컨을 다룬 단행본만 16,000여종이고, 영화 『JFK』 『닉슨』을 연출한 올리버 스톤은 ‘대통령 전문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습니다. 2대 대통령을 그린 TV 미니시리즈 『존 애덤스』는 2008년 에미상 13개 부문을 휩쓸었다지요? 누구의 비유대로 그들에게 대통령 이야기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이라면, 우리는 그 반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곡해·질시 속에 손가락질하거나, 그것도 질려서 내처 잊고 삽니다. 다른 이는 몰라도 박정희만큼은 안 된다며 흥분하는 이들도 주위에 왕왕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닙니다. 그가 이룩한 경제적 성취가 20세기 세계사에 흔치 않은 사건인데, 왜 그 시대 지도자를 백안시하거나 금기로 알까요? 왜 무뚝뚝한 개발독재 시대라는 문패만 달아놓은 채 손을 털어야 하는지요? 그의 통치기간은 현대사의 청년기라서 오늘 한국의 뼈대가 만들어진 시기입니다. 폭력정치·정보정치를 포함한 부정적인 측면까지도 우리 유산이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초고속성장을 질주하며 완전고용의 신화를 낳았던 그 시기를 저는 이 책에서 ‘6070 시대’라고 명명했고, ‘금박(金箔의 시대’라고도 했습니다.
경제 우울증을 앓는 이 시대 옛날이야기를 하며 헛된 위안을 주고받자는 게 아닙니다. 6070 시대는 탄탄대로가 아니었을 뿐더러 우여곡절을 거쳐 위기와 수렁을 헤쳐가야 했으니, 그 자체로 드라마가 아닐까요? 때문에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그때만큼 역동성이 분출했던 시기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시기를 이끌었던 박정희를 포함한 앞 시대 선배들의 이름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불러주고 기억을 해줄까요?
때문에 이 책은 ‘실물크기 박정희’를 함께 들여다보자는 제안입니다. 오해하실까 두렵습니다. 이 책은 면죄부가 아닙니다. 사람 박정희, 인간 박정희의 전체 모습을 함께 발견해보자는 것이지요. 실은 제 스스로가 궁금했습니다. 이토록 개성 강하고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그는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성장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게 미스터리라고 하지만, 풀리지 않는 비밀이란 없습니다. 무심했던 우리가 놓쳐왔을 뿐이지요. 대표적인 대목이 출생의 비밀입니다. 그의 생애는 고향인 경북 선산의 상모리가 품고 있는 비밀을 해독하지 않고는 접근할 수 없다는 게 이 책의 시각입니다. 훗날 박정희를 움직였던 힘은 어릴 적 마치 불도장처럼 찍혔던 가난과 수치심에서 비롯되는데, 그건 ‘고향이되 고향이 아니었던’ 상모리에서 싹텄습니다.
상모리는 전 시대, 봉건·전근대의 상징이자 전형이었습니다. 어떻게든 그곳을 벗어나려는 충동,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라면 지금의 낡고 병든 패러다임을 뒤집겠다는 맹렬한 서원(誓願)도 여기에 뿌리가 있습니다. 남달리 과묵한 성격과 돌연한 만주행 등 박정희의 행로도 비로소 설명이 되는데, 집안의 구조적 배경도 중요합니다. 특히 부친 박성빈이 그렇습니다.
좌절한 먹물인 그는 구한말과 일제 초기 고령 박씨 문중에서 버림받은 뒤 고향을 떠나 처가살이를 해야 했고, 그것도 산지기 신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통사회의 바닥, 즉 식민지 환경에 더해 사회적 소외 속에 갇혀있던 답답한 삶이 소년 박정희의 성장 배경이었습니다. 이러저런 이유로 그동안 우리는 그런 디테일 확인에 소홀했습니다. 이 책은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박정희의 맨얼굴도 새롭게 들여다보았는데, 그게 ‘울보 박정희’의 모습이고, 적지 않은 서정시를 썼던 낭만시인의 면모입니다.
이런 측면은 그동안 철권 통치자 이미지에 가려왔을 뿐인데, 이번 기회에 그가 남 몰래 흘렸던 눈물에서 가슴 미어지는 통곡 그리고 절묘했던 ‘악어의 눈물’까지를 훑어보았습니다. 술꾼 대통령의 진면목, 그래서 때로는 망가지는 박정희는 또 어떠한가요?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쉬 해독되지 않는 정치 9단 마키아벨리언다운 복잡한 표정과 포석까지도 다면체 박정희 모습이라는 게 저의 시각입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전기나 평전은 아닙니다. 박정희의 실체와 그의 시대를 함께 점검해보는 시도 즉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현대사 재해석’입니다. 사람 따로, 시대 따로는 없으니까요. 성장기의 일제 식민지, 청년기의 해방정국·건국, 정치 입신을 준비하던 한국전쟁·제1공화국을 거치면서 그때마다 급격한 전환과 성장을 거듭했던 박정희에게 한국 현대사가 마치 운명처럼 얽혀 있습니다.
사후 30년, 이제는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새 논의가 필요한데, 이 책이 그 실마리가 되길 저는 기대합니다. 20세기 한국 현대사는 박정희를 건너뛰거나 우회해서는 절대로 만날 수 없습니다. 그걸 부정하려는 것은 괜한 허위의식이자 냉소주의일 뿐이 아닐까요? 저는 압니다. 아직도 진보·보수라는 공허한 그림자놀이에 코 박고 있는 게 한국사회인지라 이 책에 대한 비판과 옹호가 함께 나올 것입니다. 그런 반응 모두를 환영합니다.
실은 이 책은 논쟁을 위한 것도 아니지요. 무엇보다 우리 시대 젊은이들을 향해 말문을 트는 작업입니다. 로켓처럼 치솟았던 한국사회가 왜 지금 휘청거릴까요? 왜 경제 우울증에 시름시름할까요? 그 시대가 만일 ‘금박의 시대’였다면, 21세기 지금을 진정한 황금시대로 만드는 게 우리 몫이 아닐까요? 지금 밥 먹고 살며 즐기는 시대란 결국은 그 시대의 연장선상인데, 앞 시대를 외면하는 것은 무책임한 게 아닐까요? 젊은 층을 포함한 우리가 무임승차 세대(free-rider generation)로 남을 수야 없지 않을까요? 즉 박정희를 반추하며 우리 시대를 떠올리는 게 중요합니다.
신화와 오해의 벽에 갇혀 있는 박정희 <이하 프롤로그>
하지만 여전히 박정희는 신화와 오해의 벽에 갇혀 있는데, 장기집권을 했다는 이미지에 가린 탓일까? 사람들은 박정희가 무척이나 젊었고, 한국의 역대 대통령 중 최연소 지도자였다는 점을 채 떠올리지 못한다. 1963년 윤보선과 맞붙었던 첫 대선 때 “황소처럼 일하겠다”라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그런 억척 이미지에 맞게 그는 실제로 젊었다.
해방 이후 등장한 역대 대통령 열 명 중 박정희를 제외한 아홉 명의 취임시 평균 연령은 62.1세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했던 2공화국의 총리·대통령을 포함해서 그렇다. 쿠데타 당시 박정희는 44세로, 역대 대통령 평균에 비해 18.1세나 적었다. 부인 육영수도 30대의 젊은 새댁이었다. 집권을 마감했던 1979년 당시가 62세라서 요즘 기준으로는 노인 축에도 못 끼었다.
이에 비해 이승만, 윤보선, 장면, 최규하, 김대중, 김영삼이 60대 혹은 70대였고,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도 50대에 집권했다. 유일한 40대인 그가 얼마나 활기 찼는지는 미국 J. F 케네디 대통령과 맞비교를 해야 한다. 그는 박정희와 동갑이다. 선거로 당선된 미국 내 최연소 대통령 케네디는 버락 오바마에 비해 세 살이 젊다. 그런 케네디와 박정희와는 태어난 해(1917년)와 집권 연도(1961년) 역시 같다.
통치 철학도 닮은꼴이다. 구조가 그렇다는 얘기인데, 케네디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정치 명문 집안의 차남이다. 하지만 집안이 가톨릭이라서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개신교도가 아닌 첫 소수파 출신이기도 했다. 개신교를 믿는 앵글로색슨계 백인, 즉 와스프(WASP)라는 주류 파워엘리트와는 달랐다. 그는 집권 기간 동안 막강한 철강 대기업을 굴복시켰고, 제2의 노예해방을 통해 인종차별의 궁극적 해결도 노렸다.
그런 만큼이나 케네디는 미국사회의 내부에 적을 키우고 있었다는 얘기다. “정의야말로 진정 나라를 드높인다”고 외쳤던 그는 재임 기간 내내 당대 인기보다 후대의 평가를 염두에 뒀는데, 소원대로 댈러스의 비극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급반등했다.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치의 영원한 리더로 등극한 것인데, 박정희는 그와 또 달랐다.
불과 집권 3년을 못 채우고 암살됐던 집권 1,000일의 케네디가 ‘영원한 대통령’인데 비해, 박정희는 서거 이후 바로 편견·오해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역설이다. 케네디 식으로 말한다면 “근대화와 민족중흥은 정녕 나라를 드높인다”고 외쳤던 그는 한국의 오늘을 만든 주인공이다. 이점 논란의 여지가 없다. 긍정·부정의 평가를 포함해 누구나 그걸 일단 인정한다.
케네디가 이미지로 구축된 대통령이라면, 박정희는 뚜렷한 성적표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에 대한 저평가 현상은 크게 의아스럽다. 사실 박정희는 6070 개발시대의 선배들이 품고 있던 꿈을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질풍노도 시대를 이끌었던 그는 비유컨대 지휘자였다. 대한민국 오케스트라를 이끌던 ‘마에스트로 박’으로 딱이던 그는 단원의 실력을 조율해 ‘코리안 사운드’를 뽑아내는 대성공을 거뒀다.
-
-
▲ ▲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앞당겼고, 그 토대 위에서 시민들은 민주화 트로피를 쟁취하는 ‘역할 분담’에 성공했다. 아무리 봐도 산업화·민주화 둘 사이는 배타적 관계가 아닌데, 지금 우리는 유례없는 자유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사진='박정희, 살아있는 경제학'의 표지(백년동안 출판사)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가 박정희를 20세기의 산업지휘관이라고 명명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에서 보듯 한국사회가 “(근대화) 저울의 거의 밑바닥에서 20세기를 시작하여 거의 꼭대기에서 20세기를 마감”하는 데 기여한 공헌 때문이다. 국내의 좌파 지식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학자인 그의 발언은 그래서 더욱 이채롭다.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포드 자동차를 만든) 헨리 포드, 소련의 스탈린, 일본 소니의 회장 모리타 아키오 등 20세기 산업군주들을 도열시킨다면, 한국의 산업지휘관 역시 그 반열에 마땅히 속할 것이다.”
사실 박정희가 내세웠던 모토인 민족중흥이란 서유럽이 산업혁명 이후 이룩해온 모더니즘 혁명, 부국강병의 꿈인데, 그 도약을 밑천 삼아 한국은 오래전 OECD회원국이 됐다. 그 전후해서 무한변신에도 성공했다. 해방 이후 받았던 해외원조만도 25조원인데, 이 원조를 끊은 것이 1991년이다. 원조 수혜국에서 지원국으로 탈바꿈한 나라는 2차 대전 이후 우리가 거의 유일하다.
단 지휘자 ‘박 마에스트로’의 집착이 문제였을까? 사람들은 박정희를 말하면서 끝에는 물음표를 달곤 하는데, 고 김수환 추기경도 그랬다. 1972년 봄, 추기경은 식목일 다음날 하루를 대통령과 함께 움직였다. 진주까지 가는 기차여행을 포함해 11시간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저 분이 어떤 통치 철학을 가졌는지를 보고 듣자”고 결심했다.
“어이 비서실장, 저것 봐. 나무가 없잖아. 추기경님, 저 둑 좀 보십시오. 대한민국이 이래요!”
기차가 김천을 통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추기경님, 여기가 무슨 역입니까?”
“아마 대신역일 겁니다.”
“아 그래요. 쯧쯧………. 저 플라타너스 나무는 전지(剪枝)하면 안 되는데. 비서실장! 철도청장 불러서 저걸 누가 했는지 알아봐.”
김 추기경은 “박 대통령은 우리 강산 구석구석 나무 한 그루에까지 애정을 쏟는 분이었다. 그 모든 것을 자신이 가꾸고 돌봐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집착이 강했다. 종이에 4대 강을 그려 가면서 몇 십 년은 족히 걸릴 개발계획을 설명해주는 그분 모습에서 이 나라가 1인 장기독재로 갈 것임을 예견했다”고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밝혔다. 김 추기경이 그러했듯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아쉬움을 품고 있다. 그래서 주변에서 일었던 3선 개헌 움직임을 애써 뜯어말린 뒤 시골 농부로 조용히 살았던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사례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대통령직을 걸었던 국민투표에서 패배하자 잔여임기도 마다한 채 훌훌 권좌를 털었던 프랑스 샤를르 드골 대통령의 멋진 뒷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왜 박정희는 그러지 못했을까? 무엇이 그들과 같고 무엇이 달랐을까? 어쨌거나 타계 30년을 맞는 그는 높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 역대 대통령 선호도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항상 부동의 1위다. 그것도 2위와의 격차가 엄청 나다. 2008년 KBS가 실시한 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가운데 역할을 가장 잘 한 이는 누구냐’는 질문에 응답자 69.8퍼센트가 박정희를 꼽았다. 나머지는 김대중(12.5퍼센트)과 노무현(4.5퍼센트) 순이다. 이런 반응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서거 10주년이었던 1989년 조선일보 여론조사에서 박정희를 제외한 네 명이 ‘잘했다’보다는 ‘잘 못했다’는 비율이 높았다. 모두 마이너스 점수를 맞은 셈인데, 유일한 예외가 박정희다. ‘잘 못했다’는 평가(5.6퍼센트)를 멀리 따돌리고 84.7퍼센트가 ‘잘했다’고 응답했다. 1992년 미디어리서치 조사도 박정희(88.3퍼센트), 전두환(3.0퍼센트), 이승만(2.8퍼센트)의 순이다.
그게 대중 차원의 박정희 향수에 불과하다고? 아니다, 너무 쉽게 말하면 안 되는 법이다. 어디 우리만 그러하던가?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1999년 그를 ‘현대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20인’에 꼽았다. 문제는 우리 지식사회의 살벌한 풍토다.
“박정희를 말하는 자 저주 있을진저!”
그들은 대중과는 전혀 딴판인데, 지식인들은 1960~1970년대 내내 반 박정희 정서를 주도했고, 지금도 그 틀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민중문화운동이라는 견고한 요새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나올 생각을 못 한다. 불행이다. 이런 풍토에서 ‘꺼내면 안 되는 이름’이 박정희다. 신화로 떠받드는 측과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불세출의 영웅이지만 몇몇 지식인들에게 박정희란 쉬쉬해야 하는 이름이다.
이런 기형적 풍토를 거부했던 학자가 김형아다. 국립오스트레일리아대 정치학과 교수인 그는 1974년 유신한국을 뒤로 한 채 서울을 떠났다. ‘독재의 나라’를 스스로가 견딜 수 없어 작별을 선언했다.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에 둥지를 틀었지만, 잊을 수 없는 한국인지라 별산대놀이 등 1970년대 한국의 민중운동을 연구했다. 그러던 중 20년 만에 박정희와 김일성의 자주·주체를 연구하고자 취재차 서울을 방문했다. 그때 크게 놀랐다.
“한국 방문 중 알게 된 것은 수많은 대학교에서 김일성연구소가 있고, 그에 따른 자료도 풍부한데 반면에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자료, 특히 1970년대 자료는 거의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도 기이해서 왜 그러느냐고 국회도서관 직원에서 물어야 했다.”
이럴 수가! 박정희는 내내 빈칸으로, 익명의 공간으로 남아 왔던 것이다. 김형아가 박정희 단독 연구 쪽으로 방향을 바꾼 까닭은 부당하게 박정희를 홀대하는 한국사회에서 받았던 충격 때문이다. 그 결과 바로 몇 해 전 발표했던 단행본이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이다. 이 책이 유신에 대해 전면적인 재해석을 담고 있음은 물론이다. 즉 유신을 정권 연장의 음모라고 보지 않는다. 중화학공업을 통해 한국을 선진국 문턱으로 밀어 올리려는 마지막 빅 푸시big push이자, 이를 위한 환경정비로 규정한다. 이런 이들의 용기 때문에 사회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지만 고정관념은 여전하다.
대중 차원의 고정관념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친일파요, 둘째 독재자이며 셋째 지역차별의 3대 원죄가 있다는 주장이다. ‘진짜 박정희’를 만나기 위해서 우선 이런 고정관념부터 점검해야 하는데, 세상이 알듯 박정희는 식민시대 빈농에서 태어나 만주관동군 장교를 거쳤다.
친일파 시비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교육 때문이다. 군관학교를 수석 졸업했던 그는 일본 육사에서 위탁교육을 받았으며, 해방 직전 만주지역에 배치돼 1년 동안 초급장교 생활을 했다. 그런 20대 시절의 선택을 두고 친일파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단선적인 논리, 시야 좁은 민족주의 논리와는 관점이 다르다. 당시 동북아의 엘리트 교육을 체험한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개인사로나 훗날의 공적 활동에서나 도움이 됐으면 됐지 그 반대는 아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조국은 식민지 상황이었다. 그 안의 젊은이를 무턱대고 ‘식민화된 군인’으로 설정하는 것이야말로 몰이해가 아닐까? 한번 물어보자. 청년 박정희는 자기 삶이 자랑스럽기만 했을까? 식민지 구조에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안의 근대성에 조금씩 눈을 떠가는 식의 아픔을 겪었으리라. 그게 누구보다 강렬했다는 증거도 적지 않다. 친일파 논란이란 그의 사후에 제기됐고, 그것도 정치적 공격이라는 점도 기억해 둬야 한다.
독재자라는 비판 역시 따져볼 요인이 많다. 분명 그에게 서구 민주주의란 하이패션, 즉 비싸지만 거추장스러운 옷이었다. 2000년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싱가포르의 지도자 리콴유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처럼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고 본다. 박정희에게 보다 간절했던 과제는 사회개조였다. 중화학공업을 통한 경제 이륙take-off이란 비전이 중요했다. 물론 여기에 개인의 권력욕도 배어 있었을 것이다. 꿈 없는 권력욕이 추한 데 비해, 그의 권력욕은 그렇지만은 않았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양립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 선 민주화, 후 산업화의 길을 걷는 것은 어땠을까?”
사람들은 그렇게 묻는다. 문제는 지금도 선발 산업국가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정치혁명(시민혁명)과 경제혁명(산업혁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믿는 이가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간단한 얘기다. 우리가 소망해온 자유와 민주란 어느 날 갑자기 민주헌법을 채택하고, 의회민주주의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는 순간 뿅, 하고 등장하는 마법의 게임이 아니다. 그걸 얌전히 지키면서 산업화에 성공했던 제3세계 나라가 어디 있기나 한가?
결과적으로 그가 산업화를 앞당겼고, 그 토대 위에서 시민들은 민주화 트로피를 쟁취하는 ‘역할 분담’에 성공했다. 아무리 봐도 산업화·민주화 둘 사이는 배타적 관계가 아닌데, 지금 우리는 유례없는 자유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프리덤하우스 기준으로 봐도 그렇고, 광장민주주의를 운운하고 있는 지금 상황으로 봐도 그렇다. 그걸 두고 어느 외국 외교관이 최정호(전 한국신문학회장)에게 예언하듯 말했다.
“박정희에 의해 한국이 당대에 근대 산업국가로 초석을 다지리라는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또 박정희의 반대 세력에 의해 근대 민주국가의 초석을 다지게 되리라는 것도 확실히 믿는다.”
여전히 논란이 되는, 박정희 원죄의 하나라는 영호남 사이의 지역감정 문제도 중요하다. 1971년 대선 이후 본격화된 이 문제는 훗날 호남 푸대접론으로 연결되었다.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아서, 지역별로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파워 엘리트 구성비에서도 지역차별의 흔적이 엿보인다.
왜 초기 경제개발 과정에서 서울-부산을 개발축으로 삼으며 호남을 소외시켰느냐 하는 의문도 따져봐야 할 문제다. 지역감정이 존재하는 게 현실이라면, 정교한 사실 확인부터 필요하다.
하지만 이때 함께 물어봐야 할 것이 있다. 선거 때마다 호남 푸대접 때문에 표가 떨어진다고 야단이던 상황에서 그가 의도적으로 지역차별을 했을까? 대한민국 모두를 바꾸는 대혁명의 과정에서 호남 차별 같은 게 박정희의 안중에 있기라도 했을까? 혹시 그게 사실이라면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는 아니었을까?
그렇다. 오해와 억측의 포로가 되어온 박정희와 6070시대란 ‘only yesterday', 즉 바로 어제 거쳤던 시대다. 나이 든 세대는 나름 안다고 생각하지만 전체 모습은 아슴아슴하거나 잘 모르는 게 태반일 것이다. 세월의 풍화작용 때문이기도 하고, 아니면 누군가가 잘못된 기억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젊은 층은 또 달라서 박정희 시대란 의외로 까마득할 수도 있다.
그러저런 이유로 박정희는 지금 우리 사회의 혼란 그리고 세대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디딤돌이다. 지금의 사회분열, 진보·보수 갈등도 그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에서 출발하는데, 그동안 우리는 너무 소모적이었다. 그 결과 국가의 밑천인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까지 까먹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라는 말대로 박정희의 실체 파악은 그만큼 소중하다.
더욱이 1990년대 이후 우리는 급속한 해체기에 돌입했다. 시작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역사 바로 세우기’인데, 책임 있는 자기 점검대신 성급한 과거와의 단절이 문제였다. 2000년대에 집권했던 두 정부는 더 했다. 민주화의 가치를 너무 좁게 해석했던 그들은 정신이 없었다. 그 결과 성난 얼굴로 과거를 돌아보는 냉소와 적대적 자세가 유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