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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이 국군 내 좌익분자 척결을 위해 지시한 ‘숙군(肅軍)’이 대한민국의 수호와 발전에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는 국방전문가의 의견이 나왔다.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남침한 북한에 우리 국군이 강한 반공정신으로 무장해 맞서 싸워, 대한민국을 지켜낸 배경에는, 숙군을 통한 우리 군의 사상적 단결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사)건국이념보급회(사무총장 김효선)가 주최하고 뉴데일리(회장 인보길)와 대한민국사랑회(회장 김길자)가 후원하는 58회 이승만포럼이, 17일 서울 중구 정동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렸다.
이번 포럼의 발제자로 나선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문학박사)은 6.25전쟁 당시,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북한의 남침을 우리 국군이 막아낸 것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추진한 ‘숙군(肅軍)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밝혔다.
남정옥 박사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성공 가능성은 거의 100%에 가까웠다.
당시 북한 김일성은 소련으로부터 전차 242대와 야크(Yak)-9 전투기 등 각종 항공기 226대, 자주포 등 728문, 2인승 모터사이클 540대를 도입한 상태였다. 반면, 국군은 전차, 전투기, 모터사이클 등은 단 한대도 없었고, 그나마 91문을 보유했던 구형 105미리 대포도 사거리가 북한 것의 절반에 불과했다.
특히 김일성이 중국으로부터 약 6만여명의 조선족(朝鮮族) 출신 병사를 지원받아 편입시키면서, 10만에 불과했던 국군의 두배인 20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실제 맥아더 장군은 1950년 7월 초, 북한군에 대해 “현대식 무기를 갖추고 훈련도 잘 된 군대”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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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옥 박사는 이 같은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살아남은 이유에 대해 ▲미국 참전까지 버텨낸 국군 ▲북한군이 김일성 명령에 의해 서울진입 후 최초 계획을 바꿔, 한강교량 대신 주요 시설을 점령한 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3일간 지체한 점 ▲남한에서 ‘인민봉기’나 노동자 집단 파업이 일어나지 않은 점 등을 들었다.남 박사는 이 중에서도 “전쟁 초기 반공정신으로 무장한 국군의 활약상이 가장 극적이었다”며 “국군이 북한 전차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중국 국공내전의 장제스 군대처럼 부대단위로 집단 투항하지 않았던 것은 숙군을 통해 '반공군대'로 거듭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숙군을 결심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여수 주둔 제14연대에서 발생했던 ‘여순사건’이라고 남 박사는 설명했다.
여순사건 발생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지하에서 공작해 전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며, “각급 학교와 정부기관을 조사해, 공산사상이 만연치 못하도록 법령을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정옥 박사는 “좌익분자 색출이 추진되던 가운데,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이 경무대에 제출한 군내 좌익 상황자료, 이른바 ‘김태선 리스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큰 충격을 줬다”고 강조했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김태선 리스트’를 보고, 곧장 로버츠 미 군사고문단장을 경무대로 불러, “당신들이 국방경비대를 만들면서, 좌우익 가리지 않고 아무나 받아들이는 바람에 군 내부가 이지경이 됐다”며 불만을 표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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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츠 단장에게서 ‘대통령 지시사항’으로 문서를 건네받은 이응준 육군참모총장은, 백선엽 정보국장과 신상철 헌병사령관을 불러, 극비리에 숙군작업을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육군본부 정보국이 조사를 맡고, 헌병사령부가 좌익혐의자를 체포하는 등 역할을 분담했다.특히, 좌익분자 조사작업은 특무대장 김창룡 대위가 남로당 군사책 이재복의 비서 겸 연락책 김영식을 서울 삼청동에서 체포하면서 급진전했다.
군은 김영식의 자택에서 압수한 비밀서류 분석을 통해, 군에 침투한 좌익계 500여명의 명단을 발견했다. 이 중에는 당시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 오일균 소령, 교수부장 조병건 소령, 중대장 김학림 중위, 최남근 제15연대장 등 100여 명의 장교도 포함돼 있었다.
남정옥 박사에 따르면, 숙군은 총 4회에 걸쳐 지속적이고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1차 숙군은 여순 10ㆍ19 사건 직후부터 1949년 3월까지, 2차는 194년 5월부터 같은 해 9월, 3차는 1949년 10월~1950년 3월까지 각각 진행됐다.
군은 1950년 3월 실시된 4차 숙군작업에서,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 총책 성시백, 남로당 정치고문 이주하, 남로당 당수 김삼룡 등을 체포하면서, 군 내부에 남아있던 공산당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4차례에 걸쳐 실시된 숙군으로, 군정보당국은 군인 801명과 군 관계 민간인 526명 등 총 1,327명을 검거했다.
남정옥 박사는 “조사 결과, 반란에 연루된 장병이 수백명에 달했다”며, “이응준 총장과 백선엽 장군이 수감 장병 대다수를 만나 면담하고, 반란 주모자, 적극 활동자는 엄벌을, 소극적 가담자들은 정상참작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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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옥 박사는 “정부에서도 제주 4.3사건과 여수 제14연대 반란사건, 대구 제6연대 반란사건 등을 고려해, 이를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법률 제정의 필요성을 느끼고,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며 “1948년 12월 1일 발효한 국보법에 따라, 남로당 등 좌익계 정당과 사회단체 등의 등록이 취소되고, 공산당을 불법단체로 규정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남정옥 박사는 숙군이 대한민국과 군에 미친 영향에 대해, “숙군이 없었다면, 6.25전쟁 중 국군 내 반란사건에 의해 대한민국은 위기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 박사는 “숙군은 공산세력을 척결할 수 있는 안보적 토대가 됐다”며, “이를 통해 북한 김일성의 남침야욕을 좌절시켰고, 미군 참전을 가능케 했다”고 평가했다.
남 박사는 “숙군 과정에서 옥석이 구별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면서도, “사상적으로 혼미에 빠진 국군을 ‘자기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거쳐 소생시켰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남 박사는 숙군의 의미에 대해 “6.25 전란 속에서 대한민국을 구했고, 국군을 반공군대로 육성,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게 했다”며, “전후 한미동맹과 함께, 대북억지력을 발휘토록 하는 등 대한민국을 10대 경제강국으로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