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영복은 죽는 날까지 혁명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은 '통혁당원'이었다

    “문화대혁명은 인간의 의식을 바꾸어 역사를 추동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강철화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언론 보도들은 그에 대한 칭송 일색이다. 그가 대한민국을 폭력혁명으로 전복하려 했던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붉은 혁명가';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언론은 거의 없다.

    서울대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김질락에게 포섭되어 통혁당에 가담했다. 육군 중위로 복무 중 체포되어 1968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88년까지 복역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신영복은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모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펴냈다.
언제 다시 세상에 나올지 모르는 무기수가 담담하게 자신에 대한 성찰, 가족에 대한 그리움, 인간에 대한 사랑, 바람직한 세상에 대한 꿈 등을 그려낸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당시 대학생이던 나도 이 책을 읽었다. 예나 지금이나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지만, ‘통혁당 무기수’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보고 싶었다. 그의 글에는 반공주의자인 내 가슴마저 울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의 글을 읽고 나서 결심했다. ‘이 사람은 나와는 생각하는 바가 다른 사람이지만, 인생을 치열하게 살았다. 나는 이 사람보다 더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야겠다.’

얼마 후 신영복은 <사람아, 아, 사람아>라는 책을 번역했다. 문화대혁명기, 중국 지식인들의 삶을 다룬 작품이라고 했다. 나는 이 책을 읽지는 않았다. 통혁당 사건 무기수가 문화대혁명기의 신산한 삶을 다룬 책을 번역했다는 게 흥미로웠다.

그리고 나서 그리 오래 되지 않아,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신영복이 석방됐다. 신문마다 그의 석방을 대서특필했다. 그의 책을 냈던 출판사들과 대형서점들에서는 ‘저자와의 만남’ 자리에 신영복을 초대했다. 나도 ‘통혁당 무기수 신영복’이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어 참석했다.그는 미남이었고, 말도 잘 했다. 한 마디 한 마디 무게감과 깊이가 느껴졌다.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이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를 번역했는데,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내심,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던 ‘통혁당 무기수’의 입에서 문화대혁명의 비인간성에 대한 통렬한 탄핵의 소리가 나오리라고 기대했다. 신영복이 대답했다.

“문화대혁명은 여러 문제점이 있었지만, 인간의 의식을 바꾸어 역사를 추동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간의 의식을 바꾸어 역사를 추동하겠다’는 모택동의 그 망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비명에 죽게 만들었는데 저런 소리를 하나, 저 사람이 책에서 말하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말짱 헛소리였구나, 저 사람은 자기에게 그럴 기회가 주어졌다면, ‘인간의 의식을 바꾸어 역사를 추동하겠다’고 문화대혁명 같은 유혈극을 벌이고도 남았을 인간이구나”하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와 함께, “박정희 정권은 순수한 젊은 지식인을 무고하게 투옥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감옥에 가두어야 할 마성(魔性)을 가진 자를 가둔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영복이 사랑한 ‘인간’은 피가 흐르고 온기가 있는, 일상의 희노애락에 울고 웃는 ‘구체적 인간’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한 인간은 파리한 얼굴의 지식인의 관념이 만들어낸 ‘추상적 인간(인류)’이었다. 그런 자들은 ‘추상적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구체적 인간’을 얼마든지 짓밟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로베스피에르, 제르진스키, 카스트로, 체 게바라, 모택동, 폴 포트 같은 인간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사회에 나와서 1960년대 후반, 그와 서울대학교에서 생활했던 분들로부터 당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월남전과 북한의 공비남파 등에 고무되어 1970년대 초까지는 틀림없이 이 땅에서 공산주의혁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에 호응해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았다고 했다. 그 분들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저자와의 만남’ 행사에서 내가 받았던 느낌이 틀린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뒤에 신영복이 바뀌었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신영복이 밝은 세상으로 나와서 했던 언행들도 가만히 뜯어보면, 젊은 시절의 꿈, 아니 망상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선동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의 의식은 감옥에서 화석화되어 있었다. 말은 부드러워졌고, 폭력혁명은 보류했는지 몰라도, 그는 여전히 혁명을 꿈꾸는 통혁당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