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1회 이승만 포럼 /발표 전문>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戰時) 구국을 위한 3대 조치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
  • Ⅰ. 머리말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에게 6·25전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보다 더 어렵고 힘든 전쟁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에게 6·25전쟁은 ‘제2의 독립전쟁’이나 다름없었다. 북한의 공산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온갖 풍상을 겪어가며 일제강점기 40평생을 바쳐 힘써 온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한갓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민주주의 체제 대한민국도 자신의 평생의 꿈과 노력도 모두 사라질 순간이었다. 국가적으로나 이승만 개인적으로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오랜 독립투쟁으로 일궈낸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됐다. 75세의 고령에 달한 이승만에게 대한민국이 공산화될 경우, 이를 다시 만회할 시간적 여유도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만큼 북한의 기습남침은 이승만에게나 대한민국에게 충격적이며 치명타였다. 어쩌면 이승만에게 북한의 남침전쟁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것은 조국에 대한 그의 마지막 임무였다. 그만큼 북한군의 전력은 질적 양적으로 국군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남침당시 남북한 간에는 현격한 전력상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북한군은 국군에게도 단 한 대도 없는 전차 242대와 전투기 226대 그리고 병력면에서도 약 20만명(북한군 병력) 대 10만명(국군병력)으로 크게 우세했다. 북한군은 이런 전력을 앞세워 남침 이후 대한민국을 마치 ‘먹이 감을 잎에 둔 코브라’처럼 달려들며 공격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전쟁초기 북한군의 남북한의 현격한 전력차이에 대해, “제갈량(諸葛亮)이가 국무총리였어도 공산군의 장총대포(長銃大砲)와 전차를 막을 수 없었을 것이고, 또 정부가 이에 대한 대책을 미리 세우지 못한 것은 미국의 군사물자가 오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이다”고 말했다. 

      여기에 북한군은 중국대륙에서 항일전과 국공내전에서 다년간 단련된 중공군 내 한인병사 5-6만 명을 북한군 사단으로 둔갑시켜 남침의 선봉으로 내몰았다. 더욱이 북한군은 소련이 제공한 현대식 무기와 장비 그리고 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성해 준 남침전쟁계획을 가지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방어무기로 무장하고 있던 대한민국을 사정없이 휘몰아 내리쳤다. 누가 봐도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북한의 승리’를 점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현대전을 지도하고 수행할 수 있는 전쟁관리능력이나 위기관리능력이 전혀 축적되지 않았고,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도, 그리고 이를 경제적으로 뒷받침 할 재정적 능력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단독의 힘으로는 도저히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소총하나 만들 수 없는 신생국이자, 열악하기 그지없는 방어형무기로 무장한 국군으로서는 잠시 북한군의 남진을 늦출 수는 있어도 전쟁을 획기적으로 만회할 힘도 능력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국군에게는 최소한 현대전을 수행할 적 전투기나 전차에 맞설 수 있는 효과적인 무기가 전무한 상태였다. 이는 전쟁이전 미국의 소극적인 대한정책에 기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쟁이전 이승만 정부는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미국을 향해 군사동맹과 군사원조를 차례로 요청했으나, 미국의 무성의한 대한 대한정책으로 인해 모두 무위로 끝났다. 즉, 이승만은 전쟁이전 미국에게 태평양동맹 체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주한미군 주둔, 진해해군기지 제공, 전차와 항공기 등 최소한 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지원 등을 끈질기게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북한은 이런 대한민국의 안보상의 허점을 놓치지 않고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기습남침을 감행했다. 

      북한의 남침을 당한 대한민국으로서는 자력으로는 북한의 남침에 근본적으로 저지할 수 없었다. 미국이나 유엔 등 외부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현재의 사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런 사실을 이승만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에 대한 미국과 유엔의 도움은 불확실했다. 더욱이 그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시간이 문제였다. 신속한 도움이 없으면 도와준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었다. 그만큼 전황은 급전직하(急轉直下)였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이 아무리 발버둥 처도 살아날 가망이 희박했다.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이승만 정부는 미국과 유엔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한편으로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는데 노력했다.     매 순간이 위기였다. 자칫하면 나라가 결딴날 상황이었다. 그 위급한 중에도 이승만은 하나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나갔다. 그것은 바로 전선 상황이 아무리 어렵게 전개되더라도 국익과 민족을 위해 ‘꼭 해야 될 일’과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가려가며 했다. 그렇게 해서 누란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가까스로 지켜낼 수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구국을 위한 이승만의 3대 조치이다. 
      이승만은 전쟁초기 유엔결의가 있자 곧장 유엔군사령관에게 국군작전지휘권을 신속히 이양하고, 해외망명정부 제의에 결사반대했으며, 일본군의 참전을 반대하고 해양주권을 위한 평화선을 선포하며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국권을 수호했다. 이승만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대한민국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수 있고, 바다로 밀려날 수 있는 상황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의 이런 조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따라서 이 글은 이승만이 북한의 남침을 받고 행했던 구국을 위한 3대 조치들을 통해서 그의 전쟁리더십을 조명해 보는데 있다. 나아가 평시에도 그렇지만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는 전시 국가지도자의 이승만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아울러 살펴보고자 한다.
     
  • 6.25직후 달려온 맥아더를 맞은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 6.25직후 달려온 맥아더를 맞은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Ⅱ. 유엔군사령부 창설이후 유엔군사령관에게 국군작전지휘권 이양

    1. 유엔군사령부 창설과 지휘체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유엔회원국이 군대를 파병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자, 유엔안보리에서는 한국에 파병될 이들 유엔회원국 군대를 효율적으로 지휘할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결의했다. 
      하지만 유엔군사령부 창설에는 다소 우여곡절이 있었다. 유엔안보리는 한국에 대한 지원 결의가 있은 후, 장차 있게 될 유엔군을 통합 지휘할 지휘권 문제가 대두됐다. 이에 따라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 리(Trygve Lie)는 1950년 7월 3일 미국이 유엔군을 지휘하되, ‘한국지원협조위원회’를 통해 수행해 나갈 것을 골자로 한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런데 유엔사무총장이 제안한 한국지원협조위원회의 임무는 한국을 지원하는 모든 유엔회원국들 간의 업무를 협조할 뿐만 아니라, 유엔회원국들에게 지원도 촉구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현지 한국전선의 지휘관으로부터 보고를 받도록 했다. 
     
      미국은 이런 지휘체계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만약 미국 정부와 현지 지휘관 사이에 한국지원협조위원회가 존재할 경우, 한국에서 작전을 지휘하는데 많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며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이때 미국 합동참모본부(JCS)가 이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유엔군의 지휘구조는 미국이 유엔을 대신하여 한국의 작전을 통제하고, 유엔과 현지 사령관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배제하면서 정책적인 결정사항은 현지 지휘관이 아니라 미국 정부가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을 제출했다. James F. Schnabel, Policy and Direction, pp.115-117.

      미국은 합참이 마련한 이 안을 유엔안보리에 제출했다. 유엔안보리에서는 1950년 7월 7일 미국이 작성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제안한 ‘통합군사령부 설치 결의안’을 채택(유엔문서 S/1588)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을 위해 파병하는 유엔회원국 군대를 지휘하게 될 유엔군사령부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유엔안보리에서 결의한 유엔군사령부 설치안 결의내용이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이 무력으로 대한민국을 공격한 것을 평화의 파괴행위로 확정하고, (…)군사력과 기타 지원을 제공하는 모든 회원국이 미국 책임하의 통합군사령부(United Command)가 그러한 군사력과 기타 지원을 운용하도록 할 것을 권고하며, 
    미국이 그러한 군사력을 지휘할 사령관을 지명하도록 요청하며, 통합군사령부가 그의 재량으로 북한군에 대한 작전 중 유엔기를 여러 참전국의 국기와 함께 사용하도록 인가하며, 
    미국은 통합군사령부의 책임 하에 취해진 작전경과에 관한 적절한 보고서를 안전보장이사회로 제출하도록 요청한다.
     
      이 결의안의 주요 골자는 유엔은 한국에서 침략자를 격퇴하기 위한 전쟁을 수행할 권한을 미국의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에게 위임하고, 유엔회원국들이 파견한 군대는 미국의 통일된 지휘체계하에 둔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은 미 합동참모본부(JCS)를 한국에서의 전쟁을 전반적으로 지도할 대통령의 대행기구로 지정되면서, 미 합참이 유엔을 대신하여 한국에서의 모든 군사작전을 계획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핵심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또한 트루먼 대통령은 미 합참에서 유엔군사령관에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를 추천하자, 7월 10일 그를 유엔군사령관에 임명했다. 이에 미 육군부도 1950년 7월 12일,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에서의 작전에 필요한 전략지침을 다음과 같이 하달했다. “미국의 작전임무는 국제정치상 어디까지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지원 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6·25전쟁은 유엔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 리(Trigve Lie)도 유엔의 이름으로 싸우게 될 유엔군을 위해 유엔기(UN旗)를 유엔주재 미국 대표에게 수여하고, 한국에 파병될 유엔참전 국가들의 국기와 함께 게양토록 했다. 이에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J. Lawton Collins) 대장이 유엔기를 전달하기 위해 7월 14일, 일본 도쿄로 가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전달했다. 이에 따라 한국전선에서 미 지상군을 지휘하게 될 미 제8군사령부도 7월 17일 유엔기를 전달받게 됐다. 이 보다 앞서 미 제8군사령부는 한국에서 유엔군의 지상 작전을 총지휘하기 위해 7월 13일 한국으로 이동해 있었다. 
      한편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된 맥아더 장군은 7월 24일, 도쿄의 극동군사령부에 유엔군사령부(UNC)를 설치하고 임무에 들어갔다. 그러나 인력 제한으로 유엔군사령부의 참모 역할은 미 극동군사령부의 참모들이 겸직하게 됐다. 이로써 미 극동군사령부는 본연의 임무에다 유엔군사령부의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이로써 유엔군사령관은 자연스럽게 미 극동군사령부의 예하부대인 미 제8군사령부(지상군), 극동해군사령부, 극동공군사령부를 통해 한국에서 공산군과 전투를 벌이게 됐다.

    2. 유엔군사령관에게 국군 작전통제권 이양
      유엔안보리에서 유엔군사령부 설치안이 결의되고 이에 따라 유엔군사령부가 설치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회원국이 아닌 대한민국 국군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50년 7월 14일,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7월 18일, 무초 대사를 통해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작전통제권 이양에 관한 이승만 대통령의 결정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유엔군의 종국적인 승리를 확신한다”는 요지의 답신을 보내왔다. 

     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의 작전통제권 이양 서한과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이를 받아들이는 답신 서한은 1950년 7월 25일, 유엔사무총장을 거쳐 유엔안보리에 제출됐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사령관에게 국군의 작전통제권 이양에 앞서 정일권(丁一權) 육·해·공군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에게 이에 대한 지시를 미리 알렸다. 그것은 앞으로 국군은 유엔군사령부의 지휘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후 이승만은 7월 14일 무초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현재의 적대행위가 계속되는 동안 이양한다”라는 내용의 공식서한을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보낸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한 서한 내용이다.

    <대한민국을 위한 유엔의 공동 군사노력에 있어 한국 내 또는 한국 근해에서 작전 중인 유엔의 육·해·공군 모든 부대는 귀하의 통솔 하에 있으며,
    또한 귀하는 그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있음에 비추어, 본인은 현 적대행위의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모든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는 바이다.>(하략)

      이승만 대통령의 서한을 접수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7월 17일 미 제8군사령관에게 한국 지상군의 작전통제권을 다시 이양했다. 이때 국군의 해·공군의 작전통제권도 각각 미 극동해군사령관과 극동공군사령관에게 이양됐다. 그 결과 대한민국 육군은 미 제8군사령부의 작전통제를, 해군은 미 극동해군사령부의 작전통제를, 공군은 미 극동공군사령부의 작전통제를 각각 받게 됐다. 
      특히 미 제8군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은 1950년 7월 12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1950년 7월 13일부로 주한 미지상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라!”는 명령을 부여받고, 미 제8군사령부를 대구로 이전했다. 이때 유엔사무총장을 대리해 카친(Alfred G. Katzin) 대령이 도쿄에서 대구로 날아와 유엔기를 전달함으로써 이날부터 미 제8군사령관은 유엔군지상군사령관도 겸직하게 됐다. 

     이로써 미 제8군사령관은 주한 미 육군사령관으로서 예하의 미 지상군부대는 물론, 한국전선에 참전하는 모든 유엔군 지상부대들을 지휘하게 됐다. 국군의 작전통제권 이양에 따라 육군총참모장 정일권(丁一權) 소장은 육군본부 참모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국군 작전통제권 이양은 유엔군과의 연합작전을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었음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전쟁기간 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유엔군사령관에게 귀속됐다.
      이승만의 국군작전통제권의 유엔군사령관 이양은 향후 미국과의 관계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중요한 협상 카드로 이용됐다. 특히 한국정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휴전정책을 추진해 휴전이 성사단계에 이르렀을 때, 이승만은 유엔군에서 국군을 철수시켜 단독북진을 하겠다며 미국에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이에 워싱턴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우방국의 맹주임을 자처하는 미국이 도움을 주고 있는 대한민국 군대가, 유엔군에서 철수하여 미국과 유엔이 추진하고 있는 휴전정책에 반기를 들고 나올 경우, 미국의 국제사회에서 초강대국으로서의 지도력에 상처를 입는 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거기에다 공산국가는 이를 기회로 “도와주고 있는 한국도 통제하지 못한다”며 미국을 비아냥거리며 조롱거리로 삼을 것이다. 실제로 반공포로석방 후 공산군 측은 미국에게 한국정부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그런 미국을 어떻게 믿고 휴전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느냐며 비난했다. 
      그렇게 될 경우 미국의 국제적 위신과 초강대국으로서의 지도력은 추락되기에 충분했다. 이승만은 이것을 노렸다. 그는 전쟁초기 유엔회원국이 아닌 대한민국 군대를 유엔군의 일원으로 싸우게 했던 국군작전지휘권을 미국과의 협상에서 대한민국 국익을 위해 비장하면서도 유리한 카드로 활용했다. 이승만은 우리가 필요로 해서 준 전쟁초기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해 준 ‘국군작전지휘권’이라는 카드를 미국과의 어려운 협상 때마다 매우 요긴하게 써 먹었다. 이른바 ‘국군의 유엔군 철수’였다. 나중에 국군의 유엔군철수라는 카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데도 크게 한몫했다. 
      미국은 한미상호방조약을 위한 세부사항을 합의한 1954년 11월 17일 ‘한미합의의사록’에서, “유엔군사령부가 대한민국 방위를 책임지는 동안 대한민국 국군을 유엔군사령부의 작전통제권 하에 둔다(Retain ROK forces under the operational control of the United Nations Command while that Command has responsibilities for the defense of the ROK)”고 규정했다.
     이승만의 국익을 위한 기지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승만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하찮은 존재가 아닌 대등한 존재로서 대한민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아주 당당하게 얻어냈다. 이승만의 위대함이 또 한 번 빛을 발(發)하는 순간이었다.  
  • 이승만 대통령과 무초 대사.(자료사진)
    ▲ 이승만 대통령과 무초 대사.(자료사진)

    Ⅲ. 미국의 해외망명정부 제의에 결사반대

    1. 무초 대사의 망명정부에 권총을 빼들고 대응

      6·25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의 최대의 위기는 낙동강전선이었다. 미국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전선상황은 계속 남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이때는 대한민국으로서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미국 측에서는 해외망명정부가 솔솔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때 다부동에서 임시수도 대구를 사수하기 위해 혈전을 벌이던 제12연대장 김점곤(金點坤, 육군소장 예편) 대령은 당시의 위급한 상황에 대해 “다부동일 밀리면 미군이 한국군을 일본으로 데려가 재편성해서 전투를 치른다는 얘기가 많이 나돌았다. 제주도로 옮겨가 최후 항전을 벌일 것이라는 풍문도 있었다” 며 술회했다. 그만큼 당시 낙동강 상황은 대한민국에게는 절박했다는 것이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나름대로 일신상의 조치를 강구했다.
    이승만은 미군 참전에도 불구하고 전선이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며 후퇴를 하고, 급기야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는 위기 상황이 되자, 프란체스카 여사를 불러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떠나라고 했다. 그때가 1950년 7월 29일 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거의 명령조로 “마미, 북한군이 대구방어선을 뚫고 가까이 오게 되면 제일 먼저 당신을 쏘고 내가 싸움터로 나가야 돼요. 그쪽에 부탁을 해놓았으니 당신만은 여기를 떠나주시오”라고 강권하다시피 했다. 
      프란체스카는 “절대로 대통령의 짐이 되지 않을 것이며 최후까지 대통령과 함께 있겠다”며 잔류의사를 밝혔다. 프란체스카의 말에 이승만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나는 다시는 망명정부를 만들지 않을 거야. 우리 아이[병사]들과 같이 여기서 최후를 마칩시다”하며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는 당시의 절박했던 전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전쟁의 한 토목이다. 
      또한 낙동강 방어선이 최악의 위기에 빠진 8월 14일 적의 총공세에 의해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가자 무초(John J. Muccio) 미국대사가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무초 대사는 그곳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최악의 경우 남한 전체가 공산군에 점령된다 해도 망명정부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초가 한참 열을 올려 얘기하고 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허리에 차고 있던 모젤권총을 꺼내들었다. 
      순간 무초 대사의 입이 굳어져버렸고 얼굴색도 하얗게 질려버렸다. 옆에 있던 프란체스카도 깜짝 놀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권총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이 총은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발]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은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히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권총으로 어쩔 것은 아니지만 긴장한 무초 대사는 더 이상 말을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돌아갔다. 
  • 이승만 대통령과 워커 장군.
    ▲ 이승만 대통령과 워커 장군.
2. 워커 장군의 망명정부에 대한 이승만의 반응

  낙동강 방어전 시 육·해·공군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 정일권 소장도 1950년 9월초 대구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인 영천이 적에게 점령당했을 때 미 제8군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으로부터 망명정부에 관한 내용을 듣고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한 적이 있다. 
 
  워커 장군은 정일권 장군에게 “이것은 극비 중의 극비입니다. 제너럴 정과 나, 두 사람만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분간은 이승만 대통령한테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군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고 가장 잘 싸우는 2개 사단과 각계각층의 민간인 10만 명을 극비리에 선정해 주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정일권 장군은 “[이것이] 누구의 구상입니까? 워커 장군의 생각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맥아더 사령관의 극비 긴급지시입니다”라고 말했다.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9월 7일 영천방어가 가망 없어졌을 때 맥아더 사령관이 미 제8군의 전면철수를 고려하라고 했다면서, 정일권에게 이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 주었다. 국군 2개 사단과 민간인 10만 명에 대한 철수계획은 워커 자신의 생각이라고 했다. 워커는 정(丁) 장군이 승낙하면 맥아더사령관에게 건의하여 수송선박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철수장소에 대해서는 아메리카 군도라고 했으나, 정일권은 괌 아니면 하와이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정일권 장군은 사태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이튿날 새벽 부산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긴급 방문하고 미군 철수계획을 보고했다. 꼿꼿한 자세로 눈을 지그시 감고 보고를 받던 대통령은, “워커, 그 사람 보기보다는 여간 겁쟁이가 아니구먼. 망명의 설움을 안고 하와이에서 외롭게 일본 제국주의와 싸웠던 나, 이승만에게 이제는 겨레를 이끌고 다시 그곳으로 망명하라는 것인가!”라며 격노했다.  
  그리고서 이승만은 “워커 장군에게 말하시오. 나,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누가 가자고 해서 나의 조국을 등질 비겁자가 아니라고 말하시오. 나, 이승만은 영천이 무너져 공산군이 여기 부산에 오면 내가 먼저 앞에 나서서 싸울 것이오. 그래서 내 침실 머리맡에는 언제나 권총이 준비돼 있다고 말하시오!”라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계속해서 “가려거든 떠나라고 하시오. 미군들은 왜 여기에 왔는가. 공산침략군을 물리치고 정의와 자유를 위해 온 것 아닌가. 그런데도 전황이 위태롭다 해서 가고 싶다면 자기들끼리만 떠나라고 하시오!”라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전시 대한민국 망명정부 문제는 중공군 개입 이후 유엔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다시 제기됐다. 중공군의 신정공세에 따라 미국은 최악의 경우 망명정부를 유지하여 저항을 계속하도록 한국을 지원할 것을 정책목표로 설정했다. 

3. 1.4후퇴 이후 미국의 제주도 이전 검토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중 망명정부 운운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망명정부에 대해서는 전황이 불리해 질 때마다 미국 측에 의해 꾸준히 제기됐다. 즉, 낙동강 방어선 형성 전후와 중공군 개입 이후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의 해외 및 제주도 이전 문제를 제기했다. 
  낙동강선 방어는 자연적, 군사적, 심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선을 군사적으로 안정시켜 이른바 부산교두보를 방어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영토적 실체를 보존한다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한국정부는 제주도에 가서 또 하나의 대만을 만들거나, 아니면 인접국이나 다른 지역에서 망명정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정부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철수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 철수지역으로는 필리핀, 사모아, 피지의 남양군도, 하와이, 홋카이도 등이 고려되었으나, 최종 후보지역으로 제주도, 일본, 류큐열도(오키나와 제외), 대만으로 선정해 놓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전쟁 상황이 악화되면 그곳 중 한 곳을 택해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의도였다.  
  특히 미국 정부가 1951년 1월 12일 마련한 유엔군의 전쟁지도지침을 보면, “유엔군은 일단 일본으로 철수시키되, 한국 정부와 군경을 제주도로 이전시켜 저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극비리에 추진한 한국 정부의 제주도 이전계획에 포함된 대상인원은 행정부와 그 가족 36,000명, 한국 육군 260,000명, 경찰 60,000명, 공무원·군인 및 경찰가족 400,0000명, 기타 요원 등 총 100만 명으로 판단했다. 미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한국인을 일본으로 이동시키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처럼 6·25때 이승만 같은 국제정세를 꿰뚫는 강단 있는 지도자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전황이 불리해 질 때마다 제주도 및 해외에 망명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 Ⅳ. 일본군 참전반대 및 평화선 선포 

    1. 이승만의 반일의식과 일본군 참전 반대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反日) 감정은 남달랐다. 그는 자신의 조국 대한제국이 20세기 초 일본의 무력 앞에 힘없이 붕괴되는 것을 목도(目睹)하고, 이를 되찾기 위해 40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항일독립운동을 한 진정한 애국투사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90평생을 살면서 인생의 가장 왕성한 활동기인 30세(1905년)부터 70세(1945년)까지 40년을 미국에서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항일독립지사였다. 그 때문인지 그는 건국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어서도 일본만은 혹독하다고 할 만큼 아주 냉정하게 대했다. 일본을 혹독하게 대하는 이승만의 일화는 적지 않게 회자(膾炙)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이로니컬하게도 이승만이 대통령 재임 중 가장 많이 방문한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물론 자의에 의해서 간 적은 없다. 모두 유엔군사령관이 워싱턴의 한일우호정책 차원에서 마련한 방일이었다. 그때마다 이승만은 일본에 날선 비판을 가했다. 그 속에서 이승만의 일본에 대한 감정과 함께 향후 일본에 대한 한국정부의 나아갈 길을 밝히고 있음도 읽을 수 있다.
      이승만의 첫 번째 대한민국 건국 두 달 만인 1948년 10월 19일과 20일에 이루어졌다. 물론 일본점령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맥아더(Douglas MacArthur) 주일연합군사령관의 초청이었다. 맥아더는 이승만의 대일강경노선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리자는 속셈이었고, 이승만은 그때 워싱턴에서 추진하고 있는 주한미군 철수를 단념시키고 재일교포들의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회담에서 맥아더는 “앞으로 일본이 아시아 반공보루의 큰 역할을 하는만큼 한국의 일본에 대한 강경일변도 정책은 아시아 평화를 위해 걱정된다”고 하자, 이승만은 “일본이 그럴 자격을 갖추자면 스스로 우방임을 실증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토인 대마도와 36년간 착취해 간 우리의 재산을 반납해야 한다”며 오히려 강경한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그 다음날 회담에서도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주일대표부 설치를 요구하여, 1949년 1월 14일 일본 도쿄의 한 복판인 긴자(銀座)에 위치한 핫도리(腹部)빌딩에 주일대표부가 개설됐다. 

      이승만의 2차 방일은 6·25전쟁을 4개월 앞둔 1950년 2월 16일부터 18일까지 이뤄졌다. 이때도 맥아더 원수의 초청이었다. 회담에서 맥아더는 “한국과 일본이 반공전선에서 협력해야 한다”고 했고, 이에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방위선에서 제외한 것은 큰 실책으로 이북 공산당의 남침야욕에 불을 붙이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승만의 이런 예측은 4개월 뒤 현실로 다가왔다. 이때 맥아더는 “한국의 방위를 미국의 캘리포니아 방위나 마찬가지로 생각한다”며 화답했다. 맥아더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이 약속을 지켰다. 
      이승만의 3차 방일은 전쟁 중인 1953년 1월 5일부터 7일까지였다. 이때는 클라크(Mark W. Clark) 유엔군사령관이 경색된 한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그렇게 해서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머피(Robert Murphy) 주일미국대사, 김용식 주일한국공사, 오카사키 가쓰오(岡崎勝男) 일본외상,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과 일본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수상간의 회담이 클라크 장군의 관저인 마에다(前田)하우스에서 열렸다. 

     그렇지만 해결된 것은 없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수행했던 일행들에게 회담결과에 대해 “해결된 것은 없다. 한일 관계의 개선은 현재로서는 쉽지 않다. 한일 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교제하려면 앞으로 30년은 지나야 한다. 일제 때 종살이 한 세대가 사라지고 새싹이 자라나야 가능할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승만의 대일관(對日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은 전쟁 중 일본과 일본군에 대해서는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4후퇴 직후 미군 수뇌부가 유엔군에 일본군 편입가능성을 검토했을 때, 이를 알게 된 이승만 대통령은 대노했다. 대통령은 1951년 1월 12일 미군 수뇌부에게, “만일 일본군이 참전한다면 우리 국군은 일본군부터 먼저 격퇴한 다음, 공산군과 싸울 것이다”라며 극도의 불쾌감을 나타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장제스(蔣介石)의 자유중국군의 파한(派韓)을 극구 반대했다. 이승만이 그렇게 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전선에 일본군을 끌어들일 명분을 아예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1953년 4월,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고문인 올리버(Robert T. Oliver) 박사에게 쓴 편지에 나타나 있다. 
  • 맥아더 라인보다 훨씬 넓게 그은 평화선. 일본선박 침범땐 격침한다는 경고도 선포하였다.(사진은 경향신문 보도)
    ▲ 맥아더 라인보다 훨씬 넓게 그은 평화선. 일본선박 침범땐 격침한다는 경고도 선포하였다.(사진은 경향신문 보도)
    2. 이승만의 전시 평화선 선포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서만큼은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대통령 재임 동안 이를 일관성 있게 추진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독도 영유권 문제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10월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리고 1949년 1월 8일 신년기자회견에서 일본에게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던 것도 일본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독도의 영유권 문제에 대한 쐐기를 박기 위한 이승만의 심모원려(深謀遠慮)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승만은 전쟁 중 일본에 대한 확실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발표했다. 

      이른바 ‘이승만 라인’ 또는 ‘평화선’이었다. 이승만이 이런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1951년 9월 대일강화조약 발효로 ‘맥아더 라인’이 철폐된 뒤 예상되는 일본의 난폭한 어로(漁撈)를 막기 위한 한국정부의 불가피한 조치였던 것이다. 중앙일보사 편, 「경무대 비서 黃圭冕 증언」,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景武臺4季』󰊲, 275쪽. 또한 1952년 1월 18에 선포된 평화선은 최초에는 ‘어업보호수역안’으로 국무회의에 상정됐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확대수정하여 ‘한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으로 의결을 거쳐 국무원 공고 제14호로 선포했다. 평화선은 1945년 9월 28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의 대륙붕 선언 및 어업 관할 선언과 그 후 중남미에서 선포된 각종 해양관할권 수역에 기초하고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맥아더 라인’을 대체하려는 데에서 나왔다. 일본인들에 대한 어업제한으로 인해 한국이 간접적 혜택을 받았던 ‘맥아더 라인’이 1952년 4월 28일 미·일 강화조약의 발효에 따라 소멸되게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근해의 어업자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평화선이라고 불리는 “한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선언”을 하게 됐다.

     다음은 이승만 라인과 이를 비교하기 위한 맥아더 라인 및 클라크 라인을 나타내는 지도이다. 맥아더 라인은 1945년 제2차 대전 종전 후 패전국 일본을 통치하던 연합국최고사령부는 2번에 걸쳐 연합국최고사령관지시(SCAPIN,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Instruction Notes)를 공포하여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제외시키고(SCAPIN 제677호, 1946.1.29.), 독도 12해리 이내 일본어선의 접근을 금지(SCAPIN 제1033호, 1946.6.22.)하는 지시를 내렸다. 이것이 바로 지도상에 나타난 1차 맥아더라인과 2차 맥아더라인이다. 클라크 라인(정식명칭 한국해상방위수역)은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장군이 1952년 11월 공산군 스파이의 잠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해상봉쇄선으로 1953년 8월 27일 폐지됐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남북한 간의 우발적인 군사충돌을 위해 1953년 8월 30일 서해북방한계선(NLL)을 설정했다.
            
      이로써 동해상의 독도를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영토로 선언했음은 물론이고, 우리의 어업권도 확보했다. ‘이승만 라인’의 핵심은 “대한민국의 주권과 보호하에 있는 수역(水域)은 한반도 및 그 부속도서의 해안과 해상 경계선으로 한다”며 독도를 이 선(線)안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이 선언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허정(許政) 국무총리서리, 변영태(卞榮泰) 외무부장관, 이기붕(李起鵬) 국방부장관, 김훈(金勳) 상공부장관 등이 부서했다. 이 선언으로 일본 조야(朝野)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 들끓었다. 일본은 이것이 반일적인 이승만의 작품이라면서 ‘이승만 라인’이라 하며 강력히 반발했다. 
      심지어는 우방국인 미국·영국·자유중국까지 이에 대해 항의를 해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한국이 해양 상에 선을 그은 것은 한일 간의 평화유지에 있다”며 이를 ‘평화선(平和線)’으로 불렀다. 특히 무초 주한미국대사까지 이는 공해(公海) 자유에 배치된다며 항의하자, 이승만은 “미국 배는 해당 안 되니 고기 잡으러 와도 좋아!”라며 여유를 부렸다. 

     그러나 이후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배는 무차별 나포했음은 물론이다.   
      나아가 이승만 대통령은 공보처장 갈홍기(葛洪基)에게, “신라시대부터 왜구(倭寇) 등살에 시달려 와서 나중에는 임진란, 합방(合邦)까지 됐다”며, “지금 저놈들 망했다고 해도 먼저 깨일 놈들이야. 그냥 내버려 두면 해적 노릇 또 하게 돼. 우리 백성은 순박하기 짝이 없어. 맞붙여 놓으면 경쟁이 될 수 있나 떼어 놓아야지…어딘지 하나 금(線)을 그어놔야지. 준비가 될 때까지 못 넘어 오게 해야 돼”라며 이승만 라인 선포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 줬다. 
     
      이후 ‘이승만 라인’에 따른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일 간 외교전은 치열했다. 변영태 외무부장관은, “독도는 일본의 한국침략에 대한 최초의 희생물이다. 해방과 함께 독도는 다시 우리의 품에 안겼다. 독도는 한국독립의 상징이다…독도는 단 몇 개의 바위덩어리가 아니라 우리 겨레의 영예(榮譽)의 닻이다. 이것을 잃고서야 어찌 독립을 지킬 수 있겠는가. 일본이 독도 탈취를 꾀하는 것은 한국의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라며 독도 수호의지를 명백히 밝혔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1954년 1월 18일 평화선 선포 2주년을 기해 독도에 ‘한국령(韓國領)’이라는 표지석을 세우고, 독도가 영원한 한국영토임을 똑똑히 밝혔다. 독도가 이제까지 한국 영토로 명실상부 남아 있게 되었던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국토사랑과 역사적 인식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때 이승만이 그런 강경한 조치를 취하지 안했다면,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억지 주장을 펴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독도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 6.25전쟁중 군부대를 순방하는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 6.25전쟁중 군부대를 순방하는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