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자유민주주의 체제 지키는 사람들 위한 것…빨갱이 것 아냐” 억울함 호소
  • ▲ 1982년 만들어진, '임을 위한 행진곡' 원곡 악보. ⓒ뉴데일리 DB
    ▲ 1982년 만들어진, '임을 위한 행진곡' 원곡 악보. ⓒ뉴데일리 DB

    지난 4월부터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행사 공식 기념곡’으로 지정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이에 행사 주관부처인 국가보훈처는 “북한과의 관련성이 있다는 논란이 일었던 곡을 정부 공식행사 기념곡으로 지정할 수는 없다”고 거절하고 있다. 5월 중순이 된 최근까지 정치권과 언론 등이 나서서 보훈처를 압박하고 있다.

    정부 안팎과 보훈단체들은 “작사를 맡았던 황석영 씨가 불법 방북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은 바 있는데, 방북 당시 북한의 5.18 선전영화 ‘임을 위한 교향시’를 공동 제작하고, 여기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배경음악으로 삽입했다”며 이런 노래를 정부 공식 행사 기념곡으로 지정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일부 보훈단체에서는 대외홍보자료를 통해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내용, 활용 실태 등을 고려할 때 정부 행사인 5.18 추모행사의 기념곡으로 지정해 제창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전인 백기완 씨의 시 ‘묏비나리’의 주요 내용이 민중계급론, 美제국주의 식민지배 등을 근거로 한국 사회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북한 정권이나 좌파 단체, 특히 이석기의 RO나 통합진보당과 같은 ‘종북 단체들’이 한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사용한다는 주장도 펼친다.

    따라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정부 공식행사 기념곡으로 지정할 경우 ‘남남 갈등’이 커지고 국내 종북세력의 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천으로 알려진 시 ‘묏비나리’를 만든 사람이 백기완 씨라는 점을 문제 삼기도 한다.

  • ▲ 북한선전영화 '임을 위한 교향시' 크레딧에 나오는 윤이상.  ⓒ뉴데일리 DB
    ▲ 북한선전영화 '임을 위한 교향시' 크레딧에 나오는 윤이상. ⓒ뉴데일리 DB

    13대와 14대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던 백기완 씨는 1979년 11월 서울YWCA 회관에서 결혼식으로 위장한 ‘계엄해제·유신철폐 촉구 시위’를 연다. 실은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를 당한 뒤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하지 않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으려 하자 대선에 나갈 기회가 사라진 재야인사들이 반발한 시위였다.

    백기완 씨는 이 사건으로 구속 수감됐다. 1980년 계엄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뒤 1981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보훈단체와 정부 측에서는 백기완 씨가 감옥에 있으면서 썼던 시 ‘묏비나리’ 가운데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의심하고 있었다.

    “치켜뜬 눈매엔 군바리가 꼬꾸라지고 힘껏 쥔 아귀엔 코배기들이 으스러지고 썽난 뿔은 벌겋게 방망이로 달아올라 / 꽹쇠는 갈라 쳐 판을 열고 장고는 몰아쳐 떼를 부르고 징은 후려쳐 길을 내고 북은 쌔려쳐 저 분단의 벽 제국의 불야성 왕창 쓸어안고 무너져라…(하략)”

    하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이 백기완 씨가 쓴 시 ‘묏비나리’를 참고하기는 했지만 전체를 차용한 것도 아니고, 백기완 씨의 전력과 노래를 직접 연관 짓기는 무리가 있다는 비판이 많다.

    어떤 이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사용하는 단체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석기의 RO 조직이 애국가 대신 ‘혁명동지가’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한 점, 종북 문제로 해체된 통진당의 전신 민주노동당이 창당 이후 공식 행사를 할 때마다 애국가와 국민의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민중의례’를 올렸다는 점을 비판한다.

    이런 행동이 대한민국 정통성과 체제를 부정하고, 나아가 적화통일을 위한 의도를 지닌 것이라는 주장들이다.

    그런데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이런 정치적인 해석이나 주장보다는 현행 규정을 바탕으로 대화와 설득으로 타협하는게 더 낫다는 지적도 있다.

    과거 통진당의 이석기 씨는 RO 문제가 불거지기 전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며, 이를 국가라 부를 법적 근거도 없다”며 “차라리 ‘아리랑’을 국가로 지정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2010년 이명박 정부는 ‘국민의례규정’을 대통령 훈령 제272조로 공포, 국민의례의 표준 절차와 시행방법 등을 공개했다. 해당 규정 제3조에 따르면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공식행사를 개최할 때 다른 식순에 앞서 국민의례를 실시해야 한다”고 돼 있다.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러 가지 면을 본 뒤 고민해 보면,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행사의 기념곡으로 정하는 것은 핵심이 아니어 보인다. 규정에 따라 반드시 국민의례, 즉 애국가를 제창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 기념곡이 되든 안 되든 간에 합창단이 행사에서 부르면 된다는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기념곡으로 제정한 뒤 참석자들에게 “반드시 제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행 법 규정을 무시하겠다는 뜻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 ▲ 북한선전영화 '임을 위한 교향시' 크레딧에 나오는 황석영.  ⓒ뉴데일리 DB
    ▲ 북한선전영화 '임을 위한 교향시' 크레딧에 나오는 황석영. ⓒ뉴데일리 DB

    2013년 6월, 본지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곡가 김상률 씨와 인터뷰를 한 대목도 참고할 만 하다. 당시 김상률 씨는 이런 말을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것은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려 일어났던 분들의 용기에 대한 존경이며, 그들 사이에 피어난 사랑에 대한 찬사다. 그리고 미래에 닥칠 수 있는 불의에 대한 우리의 각오다. 이건 ‘빨갱이’를 위한 노래가 아니다. 말도 안 된다.”

    당시 김상률 씨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사가는 황석영 씨로 백기완 씨가 쓴 ‘묏비나리’를 참고해 금방 만들었다”고 했다.

    여기에 해결 방안이 숨어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곡으로 정 삼고 싶다면 현재 논란이 되는, 황석영 작사의 곡 대신에 다른 가사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고, 애국가 제창 등 국민의례를 한 뒤 합창단에게 부르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정치적 이슈로 활용해 정부를 공격하려는 사람들은 불순한 의도를 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