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의 眞實 바로 가르치면 歷史敎育 바로 선다

    최 응 표 / 뉴데일리 고문 (뉴욕에서)

    전쟁은 야합을 가져와서는 안 되며 인간을 자유롭게해야 한다.
    전쟁의 목적은 세력균형을 구하는 것이어
    서는 안 되며 민주주의를 위하여 세계를 안전케 해야만 한다.
    전쟁은 동맹국을 구출만 해서는 안 되며 반
    드시 惡을 파괴해야만 한다.
    - 페렌바크-

    지난 22일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는 ‘탈북민이 본 6.25전쟁의 실체’ 세미나에서 “북한 주민들이 6.25전쟁의 진실만 알아도 북한전체는 붕괴될 것”이라며 ‘북한에 들어가는 모든 정보수단에 6.25의 진실을 담아서 보내야 한다“고 했다.

    강철환 대표의 말은 6.25에 대한 바른 인식은 북한체제의 붕괴뿐 아니라, 우리국민의 국가안보의식의 전환은 물론, 6.25에 대한 實像(실상)을 모른 채, 虛像(허상)으로 가득 차 있는 중, 고등학생들의 의식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다시 말해 6.25에 대한 진실만 바로 가르쳐도 역사교육이 바로 선다는 깊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6월은 우리에게 너무나 잔인하다.

    수백만의 死傷者(사상자), 수십만의 전쟁미망인, 20만에 가까운 전쟁고아, 그리고 천만 이상의 이산가족을 내며 全국토를 잿더미로 만든 1950년의 6.25전쟁, 1999년 6월 15일의 제1연평해전, 2002년 6월 29일 우리 ‘참수리 호’와 함께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2연평해전, 모두가 김일성, 김정일에 의한 참변이었다.

1950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몇 년 뒤,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세계 최고의 전략가들에게 저주받은 전쟁을 치르기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최악의 장소를 물색해 보라고 한다면 만장일치로 한국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저주받은 전쟁을 겪었고, 현재도 그 한 복판에 서 있으면서도 편하고 즐겁게 살자는 생물학적 충동에 취해 그 엄청난 전쟁의 아픔을 잊은 채 살고 있다. 정말 이래도 되는가를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말이다.

페렌파크(This Kind of War<한국전쟁>저자)는 전쟁은 동맹국을 구출만 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惡을 파괴해야만 한다고 했지만, 바오 닌이 ‘전쟁의 슬픔’에서 “정의가 승리했고, 人間愛(인간애)가 승리했다. 그러나 악과 죽음과 비인간적인 폭력도 승리했다”고 말한 대로 惡(6.25의 주범, 북한)은 여전히 살아남아 더 끔찍한 위협, 더 큰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사르트르가 “사람의 그림자가 드믄 굶주린 빠리에는 전쟁은 끝났지만 평화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말한 대로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아직 지평선 너머에 있다.

사람의 그림자가 드문 굶주린 빠리가 아니라 사람의 그림자가 넘쳐흐르고 다이어트를 고민하는 살찐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평화를 기다린다는 것,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전쟁의 슬픔’에서 바오 닌은 “손실된 것, 잃은 것은 보상할 수 있고, 상처는 아물고 고통은 누그러든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슬픔은 나날이 깊어지고,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다.”며 전쟁의 아픔을 호소하고 있다.

6.25의 傷痕(상흔)을 그대로 안은 채 흘러온 66년, 아직도 6.25의 실상이 아닌 허상으로 꾸며진 역사교육이 교육현장을 지배하고 있는 슬픈 현실은 또 하나의 민족적 비극이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되는 나라’라는 증오의 역사관과 북한식 역사교육의 결과가 마침내 ‘헬 조선’으로 이어지고 있는 참담한 현실, 국가생존의 문제로 발전하기 전에 바로 잡아야 한다.

“역사는 한번 잘못 저지른 실수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법이 없다. 인과의 열매는 결국 씨앗을 뿌린 자가 거둬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었다.” 마크 클라크 장군이 그의 회고록 ‘다뉴브 강에서 압록강까지’에서 한 말이다.

그렇다. 6.25전쟁의 주범 북한이 씨앗을 뿌린 제1인자라면, 역사교육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우리는 씨앗을 뿌린 제2인자다.

지금부터라도 6.25의 진실을 바로 가르치는 작업에 총력을 쏟는 것, 살아남은 자들의 절대 의무가 아닌가.

아무리 6.25가 국제대전의 종식을 가져온 세계사적인 의미를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6.25전쟁은 민족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영원히 아물지 않는 아픔을 안겨준 한편의 슬픈 드라마, 그러면서도 영원히 기억해야할 敍事(서사)다.

바른 역사인식을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가 지난 무렵, 6.25전쟁 開戰(개전)을 직접 지켜본 나는 그 실상을 젊은 세대에게 똑바로 알리기 위해 5년 전에 썼던 <나는 八路軍(팔로군)입니다>라는
칼럼을 다시 싣는다. 6.25의 진실을 바로 전해주기 위해서다.

다음의 칼럼은 진실에 바탕을 둔 역사적 사실이다. 내 눈으로 직접보고 듣고 느낀, 역사적 현장에서 직접 거둬들인 양심의 소리다. 아마도 우리세대가 6.25전쟁을 지켜본 직접경험자의 마지막세대가 아닌가 싶다. (참고:1932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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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八路軍(팔로군)입니다
최응표(뉴욕에서)

잊혀 진 전쟁, 원치 않은 전쟁, 불쾌한 전쟁으로 불리면서 ‘역사의 고아(orphaned by history)'가 된 6.25전쟁은 61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미군들이 ’비기기 위해 죽어야 하나(to die for a tie)'며 참전의미를 냉소적으로 표현했던 잊혀져가는 전쟁, 하지만 우리에게는 잊을 수도, 잊혀 저도 안 되는 것이 6.25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 인민군 제6사단 제 15연대가 개성 松岳山(송악산)을 넘어 개성시내에 진입한 시간은 대충 새벽 4시 30분에서 5시경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 때 18세였고, 開城 松都中學校 학생이었다.

송악산 기슭에 있던 기숙사엔 북한에서 월남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나도 그 중의 하나였다. 송악산 기슭엔 아직도 새벽의 어둠이 짖게 깔린 가운데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새벽은 언제나 거룩하게 느껴지는 법, 그 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여전히 고요하고 성스러운 새벽이었다.

기숙사 식당에서 느닷없이 뛰어내려온 학생의 전갈은 학교주변에 국군이 쫙 깔려있다는 숨넘어가는 소식이다. 인민군을 국군으로 잘못 본 것이다.

학생들은 앞 다투어 본교 지하실로 대피했고 잠시 후 지하실 창문으로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비친 물체는 포복자세로 교정을 뒤덮은 인민군들이었다. 이때가 새벽 4시 40분에서 5시경이 아닌가 싶다.

인민군이 개성시내에 진입하면서 철도경찰과 약간의 전투를 벌인 것 외에는 별다른 큰 저항 없이 인민군은 개성을 점령했고, 날이 밝으면서 학생들은 모두 등교하라는 학교 측의 지시가 시내에 전달되었다.

학생들은 오전 10시경 인민군 환영대회에 참가했다. 거기서 학생들과 인민군 사이에 좌담회가 열렸다. 개성시내 한 복판에 10여명 식 모여앉아 인민군 장교와의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내가 앉은 자리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고급장교가 왔다. 얼굴엔 구레나릇 수염이 시커먼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틀림없는 인민군 군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자신을 연대장이라고 소개하며 “나는 팔로군(중공군)입니다. 우리가 개성시내에 들어올 때까지 한명의 희생자도 없었는데 개성시내에 들어와서 병사들이 개죽음을 했습니다”라며 울분을 토하는 것이 아닌가.

개성 송악산을 넘어온 方虎山(방호산) 少將의 인민군 6사단은 모택동의 팔로군 출신들로 구성된 부대다. 이들은 6.25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1950년 6월 18일 황해도 沙里院(사리원)에서 기차로 개성 북방에 배치된 역전의 노장들이다.

“나는 팔로군입니다”--- 부르스 커밍스 같은 수정주의자들과 김일성 추종자들의 북침론 내지 남침 유도설이 날조라는 사실이 한 순간에 폭로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엄청난 말을 듣고도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 채 건성 들었다.

하지만 6.25전쟁이 공산권 붕괴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세계사적 사실을 전쟁이 끝난 뒤에 알게 되면서 북한군 6사단 15연대장의 “나는 팔로군입니다”라는 말이 한국전쟁의 발발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주는 귀중한 증거라는 시실을 알았다.

모택동은 1949년 7월 약 2만 2천여 명에 달하는 팔로군 소속 조선인부대를 6.25남침을 준비하는 김일성에게 넘겨주었고, 이들은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인민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김일성은 이들을 6.25남침의 선봉부대로 삼았다.

한편 스탈린은 탱크 300대, 전투기 200대, 대포 1.300문, 군사고문 3.000명을 보내 김일성의 6.25남침을 적극 도왔다. 6.25전쟁은 이렇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의 치밀한 계획 하에 꾸며진 세계 공산화 전략의 일환으로 일어난 공산침략 전쟁이다.

6.25전쟁은 이처럼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의 철저한 한반도 공산화 전략에 따라 준비된 계획적인 침략전쟁인데도 중국공산당은 아직도 자신들의 음모를 철저히 숨기고 抗美援朝戰爭(항미원조전쟁-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구한다)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철저하게 준비된 모택동의 사전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習近平(시진평)은 “위대한 항미원조전쟁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며 “제국주의가 중국인민에게 강요한 것”이라고 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6.25 전, 1949년 7월에 모택동이 김일성의 6.25남침에 힘이 되도록 약 2만 2천여 명에 달하는 팔로군(중공군)소속 조선인을 김일성에게 넘겨주어 김일성으로 하여금 6.25남침의 선봉부대로 삼게 한 역사적 사실은 시진평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한 봉쇄정책을 처음 실행했다는 점에서 6.25전쟁은 20세기의 중대 사건’이라는 미국 역사학자들의 평가처럼, 6.25전쟁은 소련의 세계 공산화 야욕을 차단하고 세계질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한 전쟁이다.

6.25전쟁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주관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6.25전쟁에 미 공수부대 장교로 참전해 오른 쪽 팔과 다리 하나를 잃은 윌리엄 웨비 예비역 대령은 “2차 세계대전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전쟁이라면 한국전쟁은 세계를 공산주의로부터 구한 전쟁”이라고 평가했다.

사실이 그렇다. 6.25전쟁은 세계 공산화 전략으로 시작된 전쟁이었고,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의 야욕을 꺾기 위해 국군 사상자와 행방불명 99만, 미군 피해 15만, 남북한 민간 약 200만과 중공군 사상자 90만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그처럼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지닌 6.25전쟁의 기억이 서서히 61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 묻히며 빛이 바래가는 가운데, 공산권 붕괴를 지켜보며 6.25전쟁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느낀 존 톨렌드는 그의 저서 ‘6.25전쟁(IN MORTAL COMBAT KOREA, 1950~1953)에서 “비록 미국 국민에게는 인기 없는 전쟁이었지만, 6.25전쟁은 미국이 더 많은 번영을 구가할 수 있도록 국민경제에 큰 활력소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경제적, 군사적 힘이 남아 동만큼 국력이 신장됨으로써 국제분쟁도 미국의 관여 없이는 해결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6.25전쟁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탄생시킨 것이다.”라고 긍전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이한우 기자의 해석 참조)

잊고 싶은 전쟁, 잊혀 진 전쟁으로 ‘역사의 고아’가 된 6.25전쟁, 그런 가운데 미 해병 4천여 명의 희생자를 내며 세계 최악의 전투로 불리는 장진호 참전용사들은 “우리는 잊혀 진 전쟁의 잊혀 진 사람들이다. 이대로 역사 속에 묻힐 수는 없다”며 1995년 워싱턴에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미 해병동상 19개를 세웠다. 그런데 6.25전쟁의 직접 피해자이며 동시에 수혜자인 우리는 무엇을 했나?

그들은 그 기념공원 벽에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글귀를 새겨 넣어
자신들의 값진 희생을 역사에뿐 아니라 인류양심에 인정받으려 했다.

이처럼 6.25전쟁은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기에 결코 입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전쟁이다. 6.25전쟁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떻게 보면 6.25전쟁은 ‘비기기 위해 싸운 전쟁’ 같지만, 6.25전쟁은 한국 현대사뿐 아니라 세계사의 진로를 바꾼 대사건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았고, 공산주의와 시장경제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며 공산주의의 종식을 최대의 목표로 삼게 했다.

‘악의 제국 소련’이 붕괴되면서 6.25전쟁은 세계 공산주의 종식을 가져온 위대한 전쟁이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단순한 남북 간의 내전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사상적 대결장이었던 6.25전쟁은 확실히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 국제전이었다.

한편 페렌바크는 “한국전쟁은 힘을 시험한 전쟁이 아니라 의지를 시험한 기묘한 전쟁”이라고 했다. 사실이 그랬다. 물론 미국의 막강한 戰力이 절대적이었지만,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건국주역들의 국가수호와 국가미래보장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힘’이 전쟁참화 속에서 국가번영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역사해석이 아닐까.

세계전사(戰史)상 가장 참혹했던 후퇴작전으로 불리는 장진호 전투에 미 해병대로 참전했던 메링골로는 “왜 한국전쟁에 참전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조국의 부름을 받으면 어디든 간다. 나는 한국인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고 대답했다. 이런 기록을 읽을 땐 빚진 심정과도 같다. 빚을 지고 갚지 않은 죄인의 심정 말이다.

‘181일간의 치열한 전쟁의 흔적, 한국전쟁’의 저자 더들리 휴즈는 갓 결혼한 신혼의 단 꿈을 접고 한국전쟁에 장교로 참전한 동기를 “세계평화를 파괴하는 공산집단의 침략에서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태고자 낯설고 먼 한국까지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정작 한국국민들의 생활과 생각은 그들의 숭고한 정신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정말 이대로 대한민국의 미래가 건전할 수 있을까?

매사를 가슴의 금배지 관점에서 보고 생각하는 오늘의 저질 정치꾼들의 정신이 아니라 후손들의 미래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고 국가를 본 건국주역들과 호국선열들의 정신과 의지가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 되는 계기가 6.25전쟁 61주년을 맞아 이루어지기를 하늘에 빈다.

(2011. 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