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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냉전체제의 마지막 장소로서 인류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공산전체주의 시대의 종언을 마무리져야하는 무거운 의무를 지고 있다. 정치계는 물론이고 한국사회는 총체적으로 자유통일시대에 대한 준비를 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냉전시대 즉 분단체제의 정리와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업과는 거꾸로 가는 일들이 많다. 여러 번 지적했듯이 한국사학계도 이런 역행의 무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문제의 근본에는 한국의 좌파와 운동권에서 NL민족해방계가 압도적 지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PD계도 NL에 머리를 조아리는 현상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민족지상주의에 빠졌기에 또한 북한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존재했기에 NL계에서는 북한체제와 연계를 갖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분위기조차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직간접적인 연계와 협조, 심한 경우는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의 길로 갔던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중에는 드러나지 않은 인물들이 훨씬 더 많다. 충격적인 사례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NL계의 추종 또는 적어도 공조의 대상이었던 평양이, 즉 NL의 컨트롤타워인 북한체제가 오랜 전부터 흔들리고 있다. NL이라는 문화진지는 견고히 구축돼서 일반인들의 의식 속에 아직도 강하게 자리 잡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북한체제의 영속성을 믿는 집단은 아마도 NL운동권과 일부 정치권 정도일 것이다. 이제 기댈 곳이 사라지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로 가야만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소련과 동구권 공산체제가 무너지고 중국의 개방이후 쏟아져 나온 엄청난 양의 문서와 증거를 통해 인류는 큰 교훈을 얻었다. 일례로 동독의 슈타지(비밀경찰) 문서를 통해 얼마나 많은 반인륜 범죄가 동독에서 행해졌고, 많은 서독 인사들이 공산전체주의체제에 대해 부역했는지가 드러났다. 소련 및 동구 문서들의 공개와 미국의 대소련 방첩문서인 ‘베노나 프로젝트’의 공개 등으로 세계현대사는 완전히 다시 써지고 있다. 미 국무성의 고위관료였던 “양심적 지식인” 앨저 히스(Alger Hiss)가 억울하게 단죄됐다는 그동안의 주장이 무력화되고, 그가 실제로 소련의 일급스파이였음이 확실해 진 것은 이러한 문서들의 공개 덕이었다. 이런 흐름과 새로운 사실을 한국사회에 열심히 알리면서 잘못 기술된 역사의 교정을 주장한 인사가 당시 중앙대 교수였던 이상돈 의원(국민의 당)이었다. 문득 한국사 교과서의 현대사 부분이 그동안 제대로 기술됐는지에 대한 이의원의 의견이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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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개방”됐을 때에 나올 엄청난 증거들은 한국현대사를 완전히 다시 써야할 정도의 충격을 줄 것이다. 우리가 당연히 생각했던 여러 사건들도 완전히 다른, 또는 추악한, 진실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가 이제 해야 할 일은 북한의 공산통치시기에 대한 체계적 정리의 준비과정이다. 인류 최악의 전체주의 체제에 기생했던 남한 사람들의 민낯도 상세히 조사되고 기록돼야 할 것이다. 보복이나 단죄의 목적보다는 한 어두운 시대의 정리와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일단 북한인권법에 따라 통일부와 법무부에 한인권기록센터와 보존소가 설치될 예정이다. 서독이 사민당 빌리 브란트 정권 시절 잘츠기터에 동독인권기록보존소를 세워 참혹한 인권실태를 조사·기록한 것을 좋은 선례로 삼아야 한다. 동독 관료들이 여기에 본인들 이름이 기재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예방효과가 생겨났고, 실제로 이 기록에 근거해 통일 후 많은 동독 인사들이 기소됐다.
독일에선 1990년대에 동독공산당(사회주의통일당)독재청산연방재단이 세워져 소련점령지역(1945-49) 및 동독체제 독재의 원인·역사·결과를 정리하고, 독일 통일과정을 추적하고, 독재 청산작업을 지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대중에게 공산전체주의의 실상을 알리고 1989년(베를린 장벽 붕괴)의 평화적 체제 전환의 역사적 의미를 일깨우는 것이 목적이다. 우리가 통일 후 할 작업을 미리 보여주기에 이 기관을 필히 참고해야한다.
이글을 쓰는 와중에 중요한 문서가 발굴됐다는 뉴스를 들었다. 사이공 함락 시에 교민들을 끝까지 구출하려다 월맹에 억류된 이대용 공사 등 한국외교관 세 명을 구출하기 위한 비밀 협상이 1970년대 말에 진행됐었다. 북한은 1대70의 조건으로 남한에 수감돼있는 북측 인사들과 교환을 요구하다가 나중에는 1대7, 즉 3명대21명 교환으로 의견의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월간의 갈등과 북한의 친중노선에 분노한 공산 베트남이 세 외교관을 그냥 한국에 보내면서 이 교섭은 무산됐다. 그런데 이 교섭 중에 북한이 “인도”를 요청한 인사들의 명단이 있는 공식문서에 놀랍게도 (또는 전혀 놀랍지 않게도) 통일혁명당 사건의 주역으로 무기징역형을 살던 신영복 교수의 이름이 기재돼 있다. 당시 북한정권은 상당히 집요하게 신씨의 “북송‘을 요구했다. 역사의 진실은 의외로 빨리 모습을 드러낼 때도 있다. 통일 후 우리는 더 완연한 모습으로 그 실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 현대사)
2016년 8월 1일자 조선일보 칼럼 전제. 동 칼럼을 필자 자신이 수정·증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