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이승만史(1) 부산정치파동⑪ 자유당 창당, 첫 직선제 개헌안 제출

“나는 ‘쌍놈당’ 만들겠다” 이승만, 노동자-농민의 자유당 결성

인보길 기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6.10.23 18: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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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승만史(1) 부산정치파동⑪ 자유당 창당, 첫 직선제 개헌안 제출

“나는 ‘쌍놈당’ 만들겠다” 이승만, 노동자-농민의 자유당 결성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건국이념보급회 회장

“나는 쌍놈당을 만들겠네.” 방문객들의 얼굴을 둘러본 이승만이 거침없이 말했다.

‘쌍놈 없는 나라’를 세운 그가 쌍놈이라니...주름 진 얼굴엔 그 소년 같은 미소가 흘렀다.

“자네들은 노농당을 조직했다지? 진정한 노동자 농민 정당을 하고 싶거든
돈푼이나 있는 떼거리 양반들 말고 힘이 없는 약한 사람들로 해야지.
우리나라 국민의 대다수는 농민들일세, 예전 지주들 앞에서 아직도 꼼짝 못하는
착한 쌍놈들을 모으게. 그 국민들이 진정한 나라의 힘이라네.”

이날 부산 경무대 도지사관사에는 대한노농당(大韓勞農黨)을 결성한
노동총연맹과 농민총연맹의 간부들이 모였다.
신당 창당을 구상하는 이승만이 노동자-농민 대표들을 부른 것이었다.

전쟁 중임에도 아랑곳없이 갈수록 집요한 야당의 당쟁 공세를 보다못한
이승만 지지세력들은 그동안 산발적으로 정당조직을 추진해 왔으나,
해방 직후부터 정당무용론(政黨無用論)을 고집하는 이승만의 눈치를 보던 중인지라
대통령의 입에서 정당 소리가 나오자, 반가운 듯 알았다는 듯 힘차게 손을 잡았다.


그런데 왜 하필 ‘쌍놈당’인가,
또 대통령이 줄곧 주창해온 일민주의(一民主義)는 어찌되나.

8.15 독립기념일 기념사에서 ‘새로운 큰 정당’을 만들어 힘 없는 국민들의 뜻을 모아
정당정치를 하겠다고 밝혔던 이승만은 열흘 뒤
 “새 정당은 일민주의를 표방해야한다”고 강조하는 담화도 발표하였다.
그러니까 이승만은 그의 정치이념 일민주의를 포기하기는커녕
새 정당이 바로 일민주의를 실천하는 정당이며, 그 정당 이름이 ‘쌍놈당’이란 말이 된다.
 

‘쌍놈당의 일민주의’--"나의 50년 독립운동의 출발이자 종착역이다"

“나는 일민주의를 제창한다. 이로써 신흥국가의 국시(國是)를 명시하고저 한다. 

우리 민족은 하나다. 국토도 하나요. 생활에도 하나요, 대우에도 하나요,
정치상 문화상 무엇에고 하나다. 하나가 미처 되지 못한 바 있으면 하나를 만들어야 하고,
하나를 만드는 데에 장애가 있으면 이를 제거하여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의 일념이 일어날 때에 하나에 위반되는 바 있거든 곧 버려라.
행여 분열을 가지고 일체(一體)에 더하려 말라.
알라! 헤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

이것은 이승만이 직접 써서 보급용으로 낸 [일민주의 개술(槪述)] 책자의 시작 글이다.
국회프락치사건이 일어나 ‘미군 철수-평화통일’을 외치던 1949년 봄,
이승만은 KBS(당시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일민주의를 몇 차례 강연하고
그 내용을 간추려 국민용 책자를 펴낸 바 있다.


“이 ‘일민’이란 두 글자는 나의 50년 운동의 출발이요 또 귀추(歸趨)이다”라고 단언한다.

이승만은 일민주의가 신생 대한민국의 국시, 평생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자 종착점,
 본디 하나인 단일민족이 38선으로 나뉘어선 안된다, 38선을 없애기 위해 먼저 대한민국
모두가 ‘일민주의=하나주의로 뭉쳐야 한다’면서
 ‘네가지 평등’이란 대원칙을 전제로 내세워 설명하였다.

계급평등, 분배평등, 남녀평등, 지역평등, 이중에 가장 강조한 것이 지역평등이다.

500년 당쟁의 뿌리 ‘동인 서인’ 지역별로 갈라져 권력투쟁 왕권장악등 국가의 자기파괴를
되풀이 하면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청일-러일전쟁을 불러왔고 급기야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기에 이르렀으므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50년 동안 부르짖었던 이승만이다.

★<장면 1> 1898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인기 연설자는 23세 이승만.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문을 세운 서재필의 독립협회가 민권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인 것이
가두집회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이다. 집회에 모인 인파가 만명이나 된다해서 붙여진 이름,
당시 19만명 도시 한성(漢城: 서울)인구를 감안하면 그 민중적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3월10일 첫 공동회에서 명연설로 급부상한 23세 이승만은 연말 고종황제가 강제해산 시킬 때까지 왕정개혁과 러시아등 강대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이끄는 청년지도자가 되었다.

종로 네거리, 경운궁(현 덕수궁) 정동길, 광화문 육조 앞, 경찰서 재판소 등등
이슈에 따라 장소를 이동하며 벌인 수많은 시위집회는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민중들의 정치참여 운동이다. 어느 덧 정부 대신등 고관들이 참여하여 ‘관민공동회’가 되고
여기서 채택된 사항은 경운궁 고종황제에게 보냈고, 황제가 불응하면 철야농성을 계속하는 등
‘옥외 국회’와 같은 정치기구, 고종에게 직소하는 압력단체, 이름 없는 민중들의 국가기관처럼
되어 갔다. 

10월 어느날 종각앞, 만세와 박수소리가 요란한 군중 속에서 박성춘이란 사람이 나섰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하고 무지 몰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애국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천하다는 그는 ‘백정’이었다. 소 돼지 잡는 도살꾼이 대신들 앞에서 연설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일, 그뿐인가, 다방골 술집의 기생도 나와 연설하였다.

만민공동회는 이렇게 만민평등회로, 500년 계급사회를 타파하여 국민통합을 이루는
신분혁명으로 변질되고 그 혁명적 시위를 앞장서 선동하는 청년이 이승만이었다. 

‘국회 개설’을 요구하는 낮밤 철야농성은 경운궁 정문 앞에서 한달 가까이 계속되었다. 

“이러다가 프랑스 혁명 같은 사태가 난다”며 수구파는 고종에게 군대 동원을 재촉하였다.
이런저런 조치에도 듣지않는 만민공동회에 마침내 고종이 수락의 뜻을 전하자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며 흩어지려 할 때, 밤샘 연설에 지친 이승만이 또 뛰쳐나왔다.

“여러분, 지금 헤어지면 안 됩니다. 우리가 속은 것이 몇 번입니까.
약속이 시행되는 걸 볼 때까지 뭉쳐서 싸웁시다.”
일민주의 키워드-‘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는 유명한 말은 이때 벌써 이승만이
목이 쉬어라 되풀이 연설하면서 탄생한 말, 대중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고종은 대궐 문밖에 나와 외국공사들까지 불러놓고
약속이행을 다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제야 군중들은 ‘황제폐하 만세’를 부르며 해산하였다.


1898년 한해동안 만민공동회가 이뤄낸 성과는 대단하다.
러시아의 국토매수와 조차계약을 파기시키고 한러은행 설립 백지화,
황궁 경비 외인부대 철수 등등 아관파천 이래 고종을 사로잡은 러시아의 이권탈취 야욕을
줄줄이 막아낸 일은 독립협회와 청년지도자 이승만의 역사적인 승리의 기록들이다.
미국공사 알렌은 이를 ‘피 흘리지 않은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왕족이자 양반의 6대독자 이승만은 그리하여 천대받던 ‘쌍놈‘들의 조직자이자
민중정치의 리더로서 이미 반소주의자로서 강대국 배척자로서 독립국가 이념을 키워나갔다.
이해 3월부터 연말까지 쉬지않고 만민공동회를 이끈 이승만은 그래서
 ’근대적 시위를 처음 보여준 운동권의 원조‘라 부르는 학자들도 있던데,
좌익 운동권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공화주의 운동‘이므로 혼동해선 안될 일이다.

당시 이승만은 한국최초의 민간일간지 <매일신문>과 잇따라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만민공동회의 목표와 활동을 기사와 논설로 쓰면서 입체적인 투쟁을 벌였다.

(이 부분은 [언론인 이승만] 편에서 다룰 예정.)


★<장면 2> 1899~1904년, 한성감옥 사형수...죄수들의 ‘구원자’가 되다

 

23살에 의관(관선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전면개각 운동을 벌이던 이승만은
갑신정변의 반역자 박영효를 영입한대서 반역죄로 몰려 한성감옥에 투옥된다.
사형수로 가장 큰 칼을 쓰고 혹독한 고문을 받아 고통에 신음하던 어느 날 밤
"이 나라를 구하소서" 기도하던 그에게 ‘뜨거운 성령’이 벼락치듯 내렸다.
“그 순간 나는 온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그의 고백처럼
온몸이 꽁꽁 묶인 피투성이 이승만은 완벽한 기독교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종신형으로 감형된 그는 감옥에 도서실을 만들어 좀도둑부터 살인강도 강력범들까지
글을 가르치고 성경과 찬송가를 함께 부르고 예배를 드리면서 죄수들은
자연스레 기독교인이 되었고, 사형되는 죄수들은 ‘마지막 기도’를 부탁하였고
‘이승만 만세’를 부르며 사형장으로 끌려나가면서 '이승만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콜레라가 전국을 휩쓸었을 때 선교사들에게 부탁하여 약과 식량으로 환자 죄수들을 간호한
 이승만은 하루 최고 열 일곱명이나 죽어나갔다고 써놓았다.
함께 옥살이하던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宰)가 “위험하니 조심하라”하자
이승만은 “한번 죽었던 목숨인데 무엇이 아깝습니까” 몸을 돌보지 않았고,
여름내내 기승을 부리던 콜레라가 지나갔을 때 “용케도 살아남았으니 하나님의 은혜”라며
설교 전도하는 이승만의 모습에 감복해버린 이상재도 성령을 체험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감옥에서 이승만에게 감화되어 기독교인이 된 사람은 수없이 많지만
양반계급 개화파들만 이상재등 43명, 이들은 평생 이승만의 동지가 되어서

3.1운동, 임시정부, 건국 후까지 이승만의 애국 신앙동지로서 활동한다. 



1904년 러-일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이 울면서 집필한 옥중저서 [독립정신]은
국민을 가르치는 역사와 국가정신 교과서, 독립운동가들의 필독서였다.
통상과 수출입국,  자유, 인권, 법치, 국제외교등 여섯가지 독립국가 청사진을 그려놓고,
“이 모든 것은 기독교정신으로 무장되기만 한다면 우리도 미국 영국과 대등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다. 그는 [독립정신]에 쓴 그대로 평생 실천에 옮겼다.
오늘날 김구의 ‘백범일지’는 김대중 정부이래 각급학교 필독서가 되었는데, 
오늘의 대한민국을 그려놓은 놀라운 책 [독립정신]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장면 3> 1910~12년, 전국에 YMCA 조직...총독부, 이승만을 쫓아내다

1905년 조지 워싱턴 대학부터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 미국 아이비리그 명문대에서만
5년 동안에 국제정치학 박사까지 마친 이승만이 귀국한 것은 한일병탄 직후 1910년 10월이다.
미국대학들의 교수직 제의를 거절하고 돌아온 이승만은 조선YMCA 학감을 자원하여
특히 청년 학생들 교육과 토론회에 집중함으로써 이름 높은 ‘장안의 인기강좌’가 되었다. 

강연과 번역등 동분서주하는 그를 사람들은 ‘온몸이 정열덩어리(渾身都是熱)라고 불렀다.



2년후 망명 떠날 때까지 그가 집중한 일은 농촌 젊은이들의 조직화 운동이다.
조선 13도 방방곡곡을 누비며 기독교계 학교마다 청년조직 YMCA를 구성하고
“배움에는 노예가 없다” “밤낮으로 노력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들자”는 순회교육을 강행한다.

이때 여행거리는 3천700㎞, 이승만은 9가지 교통수단 기차, 선박, 말, 나귀, 인력거 등등을
이용한 거리를 꼼꼼히 적어놓았다. 전국 순회의 마지막은 개성의 윤치호 설립 한영서원,
여기서 전국학생 하령회를 크게 열었는데, 사립학교를 폐쇄하던 일본 총독부는 

학생들이 기독교학교로 몰리고 이들은 조직화하는 이승만이 눈에 가시였다.
미국 감리교 본부에서 보호하는 그를 잡을 수도 없다. 총독부는 사건을 날조한다.
'기독교인들이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만들어 교계지도자들을 일제 검거,
재판에 넘긴 것이 105명이라 ‘105인사건’이라 부르는 기독교 탄압 선풍이었다.

감리교본부는 이승만을 급히 미국으로 피신시켰고 1912년 3월26일 그의 생일날
이승만은 부인과 헤어지고 다시 제물포에서 33년이란 길고 긴 망명길에 오른다.

일본에 들른 보름동안 이승만은 또 큰일을 해낸다. 유학생들의 조직화이다.
“한국 유학생들에게 거는 기대”등의 강연에서 “애국운동과 신앙은 불가분”이란
이승만의 열변에 감동한 참석자들은 그동안 미뤘던 도쿄의 조선YMCA회관 건축기금을
너도나도 내놓았으며 양반집 자제들 40여명이 교인이 되었다.

당시 유학생들은 조만식, 송진우, 이광수, 안재홍, 신익희, 최린, 조용은, 김병로, 현상윤, 이인.
전역택, 윤백남 등인데, 그들은 “국제적 인물 이승만에게 감동과 존경과 큰 기대"를 가졌다. 

오랜기간 출신도별로 찢어져있던 유학생 조직도 이때 비로소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7년후 ‘도쿄 2.8 독립선언’에 앞장섰고,
국내 YMCA들은 이승만의 영향력에 힘 입어 3.1운동을 일으켰으며
임시정부와 민족운동의 주요역할을 맡는다.

<장면 4> 1913~1939년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독립운동


이승만이 오래 머물렀던 하와이 독립운동 이야기는 별도의 연재를 필요로 한다.

다만 한 가지, ‘일민주의 쌍놈당’의 원형의 하나가 여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을
끌어안은 이승만의 독립운동이요, 노동자들의 자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모아서 

학교를 세우고 ‘최초의 남녀공학’을 실시하였으며, 기숙사 건물공사까지 도맡아 하였다.
노예국가나 다름없는 조선왕국에서 살 수 없어 떠났던 한인들은 대부분 하층 백성들이다.

이민 10년이 되어 교민 수가 4천5백여명, 농장에서 전업하여 자립한 사람도 많았다.
하와이 여러 섬에 흩어져 사는 교민들은 똘똘 뭉쳐 '진짜 지도자' 이승만에게 충성을 다 했던
애국운동은 세계독립투쟁사에 유례를 찾기 드문 '아름다운 공동체' 운동 그것이었다.
이미 조직된 안창호의 흥사단 중심 단체나 박용만의 무장투쟁노선과 달리,
기독교 정신으로 기독교 공동체를 이끄는 이승만의 독톡한 영적 리더십에 감복하여

교민들은 ‘동지회’를 조직하고 학비 외에 독립운동 자금을 기꺼이 제공하였으며
이승만은 하와이 큰 섬에 ‘동지촌’을 건설, 자주자립을 위한 ‘동지회사’까지 공동운영 하였다.
 ‘하와이 8도는 조선 8도’라며 상해 임정과 별도로 ‘하와이 기독교공화국’이란 컨셉을 바탕으로
이승만은 미국 감리교단의 압력에서 탈퇴하여 한국감리교단을 독립시켰고,
교민과 자녀들에게 한국독립사상을 ‘머리에 심어 넣는’ 독자적 교육을 진행하였다. 

건국 후에 이승만이 하와이 동지촌 땅을 처분하고 교민들이 성금을 보태어
 “한국의 MIT를 만들자”며 인하(仁荷)공대(현 인하대학교)를 창립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인하’는 인천과 하와이의 합성어다.

특히 주간지 [태평양 잡지]를 발행하여 소련 레닌의 공산혁명 5년후 1923년 공산주의를
 조목조목 비판한 논문은 당시 세계가 공산주의에 열광하던 때 최초로 발표한 ‘반공’ 논문이다.
임시정부 대통령과 구미위원부 외교활동 등 30년 가까이 펼친 이승만과 하와이 교민들의 남다른 독립운동은 깡그리 잊혀진지 오래다. 대만민국 정부가 그동안 수여한 건국공로 훈포상을 받은
사람이 1만 명을 훌쩍 넘었으나 하와이 교민은 손꼽을 정도라고 한다.



***‘쌍놈당’과 ‘일민주의’ 이해를 위하여 이와 관련된 것들만 골라서 젊은 날의 이승만의 행적을 몇 개만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사실은 그의 삶 전체가 '백성과 일민주의'로 일관하였다.

▶ 이승만의 핵심 <성령 받은 리더십>...이를 모르면 이승만을 말하지 말라

<장면 2>에 나오는 ‘성령 받은 이승만’에 대하여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성령’이 인간 이승만의 일생을 결정지은 ‘하나님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성령 받으면 목회자가 된다는데 이승만은 교회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목회자가 되었다.

이승만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때의 ‘성령’을 무시하고 그냥 ‘기독교 개종’ 정도의 fact로서만
취급해 왔다. 이래서는 이승만의 각종 역사적 행위에 대한 심층분석과 평가가 나오기 어렵다.
성령으로 융합된 그의 국가철학을 모르면 대한민국 현대사도 4.19도 모르게 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수많은 ‘성령’ 개념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흔히 성령은 하나님의 활동력 즉 영적 능력이며 하나님은 원하는 곳 어디에나 자신의 에너지를 내려주어 하늘의 뜻을 이룬다고 성경 곳곳에 되풀이하고 있다. 그의 호칭도 한국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고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이듯이 교파와 학파에 따라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한 이론들이
많지만, 결국 어느 인간을 택하여 ‘하늘의 힘’을 전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력(靈力: Spiritual Power)이라고 정리하면 맞을는지. 기독교측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 성스러운 에너지를 받은 24살 사형수 이승만은 하나님의 ‘영적 창조물’로 재탄생하였다.

“온 세상이 환해지고 내 가슴은 불같이 뜨거웠다”라고 그가 말했듯이
성령의 불덩어리에 낙인찍힌 순간부터 혁명가 이승만의 영혼과 삶의 모든 것은
영적 에너지가 함께한다. 세상을 꿰뚫는 그의 영적 관찰은 그래서 더 넓고 더 깊은 것이다.

그가 꿈꾸던 자유민주주의 미국 같은 나라 세우기는 바로 하나님의 부름받은 명령
 ‘소명’(召命:Mission)이 되어 미국과 싸우고 소련과 싸우고 공산당과 타협하는 정치인들과
싸운 불굴의 ‘1인 투쟁’을 통하여 마침내 대한민국을 건국해 내는데 성공하였다.
 타고난 두뇌와 친화력, 동서양을 통달한 학문적 통찰력과 예지력, 신비한 카리스마까지
강대국 패권주의와 역사의 전개를 선수치는 그의 영적 리더십이 이뤄낸 창조의 능력이다.

자칭 기독교인 정치인들에게도 신념의 화신 이승만의 불같은 돌파력은
때로는 ‘왕고집’ ‘독선자’ ‘독재자’로 비치는 게 어쩌면 당연했을 지도 모른다.
부산정치파동 역시 ‘성령 받은 이승만의 50년 독립운동’을 염두에 두고 봐야겠다.

"정객들은 가입시키지 말라" 이승만 8가지 지침 엄명

 정당 무용론을 주장하던 이승만이 시기를 앞당겨 정당을 창당하려는 목적은 명백하다.

그를 비난하는 세력은 ‘지가 대통령 해먹으려고’ 정당 만들고 헌법 고쳤다고 욕하지만
이것은 하나만 알고 나머지는 모르는 정파적 이야기이다.
‘지가 대통령 하려고’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이승만은 할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눈에는 한민당, 민국당, 대한국민당, 무슨 당 등 모두 몇몇 세력가 개인이 주무르는
사당(私黨) 내지는 조선당쟁시대의 추잡한 양반 무리들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구한말엔 청파(淸派) 아파(俄派:친러시아) 왜파(倭派)등으로 싸우더니 이젠 친공파, 친미파가 득세하여, 미국과 짜고 국회의 간선(間選)을 악용, 휴전을 반대하는 대통령을 바꾸려 하지 않는가.
이승만은 창당 준비 팀에 다음과 같은 실천지침을 엄명한다.

①개인의 이해득실을 떠나 정의와 공익을 위해 신의로 뭉친 단결을 목적하고 

  정당의 규례에 복종할 것.

②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소위 정객들은 참가를 허락지 않고 오직 근면충직한 정신으로
  입당을 신청한 중에서 성실한 결심을 본 뒤에 입당을 허락할 것.

③정당은 대부분 노동자 농민과 근로대중으로 구성, 실로 대다수 국민의 권위와 이익을
  보호하며 혹 권력을 잡아서 전제주의를 사용하거나 압제적 구습을 행하려는 자의 수중에
  정부가 들어가지 않을 것을 보장해야 함.

④단체가입은 인정치 않고 오직 개인자격의 가입을 허락할 것.

⑤정당의 명칭은 곧 발표할 것.

⑥다른 정당의 잘못을 적발해서 시비를 하여 악감을 사는 등 언사는 극히 피할 것.

⑦당원은 자기의 품행과 사상을 공명정대 하고 부패 기만의 행동을 삼갈 것.

⑧재정출납은 오직 정식으로 인정한 재정위원만이 담당하고 부정한 물품의 수수와
  투표의 매수등 부정사실을 절대 금할 것.

당비 운영문제까지 8가지 지침을 주면서 이승만은 “나는 직접 관여치 않고 뒤에서 돕겠다”고
말하고, 당 이름은 우선 가칭으로 ‘통일 노농당’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노동자와 농민의 힘을 뭉쳐 반드시 통일을 이룬다는 신당의 목표를 정한 것이다.

창당 전위조직은 한발 더 나가는 성명을 발표한다.
 “신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노동자와 농민대중과 정치인으로 조직되는데
공산당 외에는 신당을 지지할 것이며, 반대하는 부류는 신흥자본가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특권계급의 정권야욕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이는 민족을 분열시키고 국가위신을 훼손하여
그 과오는 공산당과 동일하다.” 

이들 신당 운동은 뜻밖의 복병을 만난다. 원내 일부 국회의원들이 똑 같은 신당조직에 뛰어들어

이승만지지를 내세우며 신당의 주도권 다툼에 나선 것으로 출발부터 분열상을 노출한다.
이들도 같은 ‘자유당’이란 이름을 내걸었다. (통일노농당 당명은 자유당으로 바꿨음).
원내-원외 세력은 장기간 통합 협상을 벌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원외세력이 단연 규모가 컸다.

결국 연말에 가서 ‘두개의 자유당’이 각각 창당대회를 열고 간판을 따로 달았다.

이 과정에서 일체의 개입을 거부하는 대통령에 대한 충성경쟁과 헤게모니 싸움은
역시나 “정당정치는 시기상조”라는 이승만의 지론을 다시 한번 증명해준 셈이었다.

노동자-농민-여성 중심의 원외자유당은 당수에 이승만, 부당수에 이범석을 추대하였다. 

다음해 1952년 벌어진 부산정치파동에서 제각기 역할을 수행한 두 세력은
3대 총선(1954)을 앞두고서야 하나의 자유당으로 통합된다.
원내 자유당의 상당수는 이승만 반대세력이었음이 금방 드러났다.

▶ "국회가 장면을?" 놀란 허정은 직선제 개헌안을 상정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총회에 참석하러 장면 총리가 떠나자 이승만은
허정(許政)을 총리 서리로 임명한다. 사회부장관을 겸한 허정은 ‘막중한 명령’을 받았다.
이승만이 직선제 개헌안을 서둘러 만들라는 것이다.
10월16일 허정의 국무회의는 정-부통령 직선제와 국회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 요령을
확정하고 법제처에서 최종안을 마련하도록 결정하였다.

누가 봐도 국회 통과는 불가능한 ‘직선제 개헌’이기에 난감한 허정은 이승만에게 말했다. 

“직선 개헌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니 차라리 국회 선거에서 원만하게 재선되시도록
국회의원들의 등 좀 두들겨 주세요. 그들도 선량이라는 자부심이 있는데
그동안 선생님이 너무 무시해 왔지 않습니까? 선생님이 허락하신다면 제가 나서서
타협이 되도록 힘써 보겠습니다.”

대통령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국무총리, 이승만보다 21세나 아래인 허정(1896~1989)은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신문도 발간하면서 이승만의 신임을 얻어 독립운동을 함께
하였던 사제지간이나 다름없는 사이다.

이승만은 ‘사랑하는 제자’ 허정의 간곡한 반대 의견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총리도 여태까지 내 뜻을 모르나? 내가 재선되고 말고가 아니지 않는가.
간선제 헌법을 놔두고는 미국의 간섭만이 아니라 일본의 간섭이나 공산당의 침투 공작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나. 국회의원들이 포섭되어서 만약에 친공 대통령이 선출된다면
남북통일은 거꾸로 되고 마는 게야. 우리민족은 어떻게 되나, 공산당 노예로 다 죽어야지...”

이승만의 어조는 점점 제자에게 강의하는 선생님의 열변으로 변하였다.

허정은 뒷날 회고록에 그때의 이승만에 대하여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이 대통령은 국민이 자신의 재선을 바라고 있으며 자신의 계속 집권은 일종의 당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이 대통령이 재선을 바란 것은 개인적인 집권욕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통일을 이룩하려면 자신의 계속적인 영도가 꼭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남북 분단이 고정된데 대하여 대단한 책임감을 느끼고 통일에 대해 비장한 의무감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힘으로 반드시 통일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집념 때문에 대통령 재선을 일종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다.> (허정 회고록, 내일을 위한 증언)

국회의원 중에 당초 이승만을 지지하다가 건국후 반대세력으로 돌아선 중진들은 많기 때문에,

허정은 그들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자신감을 갖고 은밀히 만나면서 개헌안의 상정을 지연시키고 나름대로 타협작업을 벌여나갔다.

그런 중에 어느 날 허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라고? 장면을?” 이미 국회에선 은밀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민국당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국회 본회의를 열어 전격적으로 장면 국무총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계획을 추진중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는 것이었다.

“개헌안은 어찌 되었나? 안될 때 안 되더라도 빨리 제출하시오.” 대통령은 계속 독촉한다.

허정이 미루던 직선제 개헌안은 이렇게 11월27일 각의를 거쳐 30일 공고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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