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이승만史(1) 부산정치파동⑰ 계엄40일만에 직선제 개헌전쟁 승리

고독한 대통령의 1인 투쟁...마침내 야당이 무릎꿇다

제헌 4년만에 대통령 직선제 헌법 탄생...이승만 "민중이 이룩한 무혈혁명"

인보길 기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6.12.04 17:3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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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승만史(1) 부산정치파동 계엄40일만에 직선제 개헌전쟁 승리


고독한 대통령의 1인 투쟁...마침내 야당이 무릎꿇다 ‘개헌 성공’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건국이념보급회 회장


드디어 마지막 무대의 막이 올랐다.
대통령 이승만이 총연출 하는 ‘직선제 드라마’의 무대 부산 임시국회는
이틀 동안 유회(流會)를 거듭하다가 3일 점심때서야 성원을 채울 수 있었다.

비상계엄 직전에 이승만이 캐스팅한 개헌내각 국무총리 장책상이
 뒷날 ‘발췌개헌의 1등공신’으로 불린 평가에 걸맞게
다재다능한 정치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한 덕분이었다. 

꼭 한달전 이승만에게 제출했던 ‘절충안’을 손질하여 원내 조직 신라회와 삼우장파등을 통하여
직선제 지지세력을 확장한 결과, 이제 재적의원 3분의 2를 넘는 숫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문제는 지지서명을 하고서도 안나오는 의원들을 출석시키는 일인데
등원한 의원들이 이 문제를 앞장서 해결해주었다.
 “결석자 명단을 공개하라” “경찰을 동원해서라도 끌어내라”는등
국회의원들이 ‘중앙방송’을 통하여 국회출석을 독려하였고
신문들도 호외까지 발행하여 거리에 뿌렸다.

호외내용-[2일 국회 비밀회의에서는 중대시국을 타개코자 오늘부터 철야로 속개중인데
출석하지 않는 의원에 대하여는 국립경찰관으로 하여금 국회의사당까지 안내토록 했으니
이를 양찰하고 의원은 빠짐없이 출석하기 바란다]

이리하여 국회에 등원한 의원들은 비공식회의를 계속하면서 성원이 될 때까지 모두 기다리기로 하였던 것이다. 직선제 찬성파는 하루 빨리 ‘절충안’을 확정짓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범석 내무장관은 국회의 요구에 따라 경찰을 동원하여 숨어 지내거나 계엄지역 밖으로
돌아다니는 의원들을 찾아내어 부산 국회로 안내하는 일을 독려하였고,
공보처에서는 밤 새우는 의원들을 위하여 식사와 간식, 담요등을 제공하였다.
바둑을 두고 술도 마시는 의원들은 손바닥에 도장을 찍고 출입시켜 의원들이 도망가지 않도록
단속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 단속을 맡은 이가 삼우장파 남송학(南松鶴)의원,
체구가 건장한 그는 그때부터 ‘국회 수문장’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구속의원들 석방, 본회의에 합류...“미군정 보다야 이승만 통치가 낫지”

출입문도 닫아걸고 비공개로 전원위원회(국회의원전원 참석회의)를 열고 있던 의사당에
갑자기 10명의 의원들이 나타났다. 5월26일 계엄령과 함께 버스로 끌려갔던 의원들이다.

‘국제공산당의 비밀자금을 받아 장면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 위해' 정부혁신위원회를 조직했다는 혐의로 구속 수사 받던 이들이 나오자 회의하던 의원들은 박수를 치고 환영하였다.

한 의원은 “경찰이 여기까지 데려와서 석방이라 하니 석방된 줄 알았다”고 말하며
“그동안 조사도 받지 않았고 기소도 않고 잡아두니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고 투덜거렸다.
또 다른 의원들은 “국사의 토론에 참여시키기 위해 가석방해 준 것”이란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결국 이승만은 ‘미국의 장면 대통령 만들기’ 음모를 깨부수고 나자
이들을 개헌과정에 동참시킴으로써 직선제헌법의 정통성 강화와 함께
사후 반헌법 소동을 사전에 예방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개헌후 이들 구속의원들이 몇 차례 공개재판을 거쳐 모두 공소취하로 방면된 것을 보아도
이승만의 숨은 뜻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모처럼 국회는 127명의 성원으로 전원위원회란 이름에 걸맞는 본회의를 진행하였다.

안건은 세 가지, 야당의 내각제 개헌안과 정부의 직선제 개헌안, 그리고 절충안이다.

이들을 각각 심의하는 것은 번거롭고 불필요한 것으로 합의한 회의는
신라회가 내놓은 절충안을 놓고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 논의를 거듭하였다.

등원한 국회의원들은 절충안의 ‘대통령 직선제’ 조항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난 한달 넘게 겪고 듣고 느낀 정치파동의 결과는 뻔한 것, 어느 새 그들의 속마음엔
“미 군정보다야 이승만 대통령의 계속집권이 백번 낫지 않느냐”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시비꺼리는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권과 정부의 국회 해산권 문제였다.
소위원회의 논란을 거친 후 각파 대표들의 협상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창밖엔 오늘도 비가 내리는 장마철, 국회는 오랜만에 진지한 열기에 휩싸여갔다.

▶미국 대사의 최후통첩 “미국은 한국국회를 더 이상 지지 못하오” 

7월4일 오후, 국회부의장 김동성의 방은 또 다른 긴장감에 무겁게 갈아앉았다.

민국당과 원내 자유당등 내각제개헌파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마지막 결단을 내리는 순간.

내각제를 끝내 포기해야 하느냐, 발췌개헌안 표결에 응해야 하느냐 등등
저마다 일장연설로 선명경쟁을 하는 듯, 그러나 이들의 속내도 대세는 이미 결판나서
결론도 뻔한 것을 알면서도 누가 먼저 결말을 낼까 미루는 묘한 심리전을 벌이는 회의였다.

처음 서명자는 123명이건만 지금 남은 의원은 65명으로 반토막, 58명이나 돌아서 않았는가.
그들은 조병옥을 기다리는 듯 연신 출입문을 쳐다본다.
민국당 사무총장 조병옥은 미국대사 무초를 만나러 갔다.
소문만 무성한 ‘유엔군 계엄령’도 감감, 미국의 속내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려는 것이다.

오늘은 미국 독립기념일, 해마다 대사관에서 초저녁 축하파티가 열리는 날이다.

조병옥은 무초에게 연락하여 축하연을 하는 지, 그리고 참석해도 좋은지를 물었다고 한다.

미국이 금명 비상조치를 내린다던데 과연 그런지 어떤지 기대감에서 찔러 본 것이었다.

“축하연은 열린다. 정세는 이미 기울었지만 축하연에 참석하는 건 무방하지 않겠느냐”

정세가 기울었다고? 무초의 주저없는 대답에 조병옥의 충격은 컸다.

무초는 이 날의 상황을 20년뒤 어느 기자와 회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날 오후 4시 반쯤 조병옥이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우리에게 와서
”정부관계자들이 오기전에 축하인사 하러 왔소“라고 말했다.
나는 음료수를 들면서 그 일행과 잠시 환담하였다. 조병옥은 나를 옆으로 끌고 가더니
“오늘 아침 클라크 장군이 발표한 성명은 이승만에게 더 이상 기대를 않겠다는 뜻이냐?”고
물었다. 나는 “미국은 할 말이 있으면 분명하게 하니까 그런 추측은 필요없을 거요”라고
말해 주었다. 조병옥은 “잘 알았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이승만에 대한 기대란 클라크의 압력으로 계엄을 해제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날 아침 클라크가 무슨 성명을 발표하였는지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다만 무초는 회고담에서 클라크에 대애 묵은 불만을 다시 한번 쏟아내고 있다.
“클라크는 이승만이 일선의 군인들을 방해하지 않는 한,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달리 말하면 우리(미국무성)의 행동은 정말 비생산적이었다.
이승만이 개헌을 단념하도록 하지 못한 우리의 실패나 이승만의 성공적인 저항 때문에....
조병옥과 그의 그룹은 이승만을 교체시키려는 운동을 미국이 돕거나 적어도 너그럽게
돌봐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대리대사였던 강경파 라이트너도 그날 ‘미국의 후퇴를 전했다’는 회고담을 남겼다.

“나는 7월4일 축하연에 나온 육군참모총장과 국회의장에게
 ‘미국은 더 이상 한국 국회를 지지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것으로 국회는 이승만에 대한 싸움을 포기하였다.”

그때까지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과 신익희 국회의장은 또 어떤 충격을 받았을까.


민국당이 기다리는 회의장에 조병옥이 무슨 말을 전했는지는 알려진게 없다.

무초의 최후통첩, 건국 이래 4년간 미국을 믿고 이승만을 밀어내려 싸워 왔건만
미국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 순간 민국당은 맥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한바탕 울분을 터뜨린 이들이 회의장을 나서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책임정치를 위해 버텨왔으나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우리는 통곡 속에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 기왕 발췌개헌안에 찬성하기로 한 이상
조건없이 표결에 참여한다.” 짧막한 즉석 발표를 한 이들은 의석으로 향하였다.

이것으로 표결하나마나, 내각제 개헌파가 ‘항복’을 결정하였으니 사태는 끝났다.

1952년 7월4일 부산의 미국독립기념일 축하파티는 이렇게 해서
부산정치파동의 폐막을 고하는 행사가 되었다.
무초와 라이트너의 ‘통첩’에 민국당이나 육군참모총장은 ‘외세의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내각제 개헌도 쿠데타 음모도 미국의 한마디에 이슬처럼 증발하고 말았으니,
미국은 ‘공모자’가 아니라 한국 야당의 상전이었단 말인가. 

미국 독립기념일은 한국의 정치적 독립에 큰 힘을 보태주는 결과가 되었다.

건국때 미뤄졌던 직선제 헌법 탄생...‘발췌조항’ 기립표결로 통과

‘직선제 개헌’이라는 결론을 내려놓은 국회는 그 절차를 밟는 과정에 분주하였다.

저녁 8시, 국회의장 신익희가 마침내 본회의 개회를 알리는 의사봉을 세 번 두드렸다.

전원위원회 위원장 지청천이 그동안 진행한 결과 보고서를 읽었다.

“전원위원회는 7월 3일 4일 양일간 진지한 토의를 한 결과 다름과 같이 결정하였습니다. 

① 신라회에서 입안한 양 개헌안의 종합발췌안을 중심으로 토의할 것.

② 동안 중 상원 하원을 참의원, 민의원으로 개칭하고 부칙 제3항 ‘상원은 본법 시행후 지체없이 구성하여야 한다’를 삭제할 것. ③ 국회의원 제출 개헌안 중 70조2항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은 국회에 대하여 국무원의 권한에 속하는 일반 국무에 관하여는 연대책임을 지고 각자의 행위에 관하여는 개별책임을 진다는 현행 헌법 70조 제3항으로 삽입할 것. ④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거하자는 문제는 불문에 부칠 것. ⑤ 발췌안 제70조 제2항 민의원으로 자구수정한다.
이상입니다."

이 안대로 즉시 표결하자 아니다 절차문제 시비가 금방 일어났다.
전원위원회가 만든 안을 제3의 개헌안이라 한다면, 다시 공고절차를 밝아야 하므로
 “이것은 안이 아니라 두 개헌안에서 발췌한 요령 또는 요강으로 하자”는 주장을 받아
신익희는 ‘발췌 조항’으로 표결에 붙여 통과시켰다.

질의순서도 끝나고 대체토론의 순서로 들어가자 “필요없어요”라는 소리에 생략되었다.

헌법 심의절차는 까다롭다. 제2독회까지 끝내고 마지막 표결 방법으로 또 시끄러워졌다.

“이 개헌안을 우리 국회가 신중히 하였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서는
제3독회의 가부는 기립으로써 합시다.” 한 의원의 동의를 받아 기립표결이 가결되었다.

1952년 7월4일밤 9시 반, 신익희는 역사적인 직선제 개헌조항 기립표결을 선포하였다.

“그러면 표결한 결과를 보고해 드리겠습니다. 이 개헌안을 표결한 결과는
재적의원 3분의 2이상, 즉 166명 출석으로 가에 163명, 부에는 한표도 없이
찬성이 되었으므로 헌법 제98조 제3항의 규정에 의해서 이 개헌안은 가결된 것으로
선포해 드립니다. 그러면 밤도 늦고...” 땅땅땅.


출석의원 중 3명은 일어서지 않았다. 끝까지 반대한 이들의 이름은
무소속 김범부와 민국당의 변광호, 윤담이었다. 이들의 의견도 묻지 않고 신익희는
‘반대 없다’고 발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만큼 난산에 난산을 거듭한 장기진통을 거쳐
드디어 족쇄에서 풀려나는 개헌의 해방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헌국회에서 헌법이 제정 공포된 후 4년만에 마침내 최초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한민당이 두 번 내각제개헌안을 내고, 정부가 두 번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한 뒤,
제3의 발췌개헌으로 대한민국 헌법은 드디어 ‘대통령 직선제 헌법’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국회사무처는 사흘동안 철야하다시피 지친 국회의원들을 위해 즉석 연회를 마련하였다.

탁자와 의자를 몰아놓고 다과를 차렸지만 긴장이 풀린 의원들은 잠시 서성이다가 흩어졌다.
공보처는 40일간의 강행군에서 승리한 기쁨을 담아 즉각 개헌성공을 발표하였다.

“국회 전원위원회에서 가결하여 본회의에 회부한 정부와 국회의 양 개헌안의 발췌조항을
신익희 임시의장 사회로 기립표결한 결과 재석 166명중 163표로 가결하고 산회를 선포하였다.

이 역사적인 개헌안 통과의 위업을 마친 국회의원들은 연일 철야의 분투의 결실을 축하하는
자리를 베풀어 축배를 올리고 하오10시경 산회하였다.“


이승만, 국회와 국민에 담화...“민의를 존중해준 의원들의 공로 치하”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되던 날 일선 장병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날 5일 아침 대통령관저로 찾아온 지방의회대표들과 민중자결단부터 만났다.
장기간 ‘민의관철’과 ‘국회해산’ 투쟁을 벌인 전국지방의원 투쟁위원회와 민중자결 시군대표자 100여명은 ‘앞으로도 민의를 위해 계속 투쟁하겠다’는 결의문을 대통령에게 전달하였다.

“그동안 여러분이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해온 보람이 크다.
지방에 돌아가더라도 정부나 국회에서 잘못이 있거든 방관하지 말고
제일처럼 알고 계속 노력해주기 바란다.”
결의문을 받고 격려한 이승만은 이들과 함께 다과를 나누며 등을 두드려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공식담화를 발표하였다.

“대통령 직선과 양원제 문제로 정계에 다소 분규가 있었으나
국회에서 거의 전수(全數)로 통과시켰으니, 지금부터는 선후책을 강구해야겠다.
지방의 여러 대표들이 부산에 와서 많은 시일을 경과하여 거의 풍찬노숙(風餐露宿)하고
견디기 어려운 곤란을 겪으면서도 불법하는 일이나 망행(妄行)하는 일이 없이 조리있게 노력한
성충(誠忠)과 국회 내에서 민의를 존중하여 이 문제 해결책에 협력한 의원 여러분의 공로를
치하하는 바이다.”

★ 이범석 내무장관, 대리대사 라이트너의 뺨을 후려치다

이날 저녁 동래온천의 요정 송해관에서 개헌성공의 축하연이 벌어졌다.

술상에 둘러앉은 발췌개헌의 주역들은 장택상 총리, 이범석 내무장관, 백두진 재무장관,
이교선 상공장관과 국회의원 임영신 등 여럿이었다.
외국인으로는 백두진이 초청한 미국 대리대사 라이트너가 끼었다.

이범석이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하여” 축배를 선창한 뒤
화제는 자연스레 개헌파동의 우여곡절을 회고하는 이야기로 줄줄이 흘러나왔다. 

술이 거나해진 강경파 라이트너는 벌개진 얼굴로 목청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한동안 라이트너의 말을 잠잠히 듣고 있는 좌중을 둘러보던 이범석이 소리를 질렀다.

“이것들 봐요. 당신들 뭐라고 말 좀 해야될 거 아니오?
지금이 어느 때라고 대통령을 욕하는 말을 듣고도 못 들은척 하는 거요?
 나야 당신들보다 영어를 못해서 대꾸할 수 없소만 이런 무례한 말을 듣고만 있을 거요?”
그 순간, 라이트너의 뺨에서 철썩 소리가 났다. 

마주앉은 이범석이 그 큰 손으로 냅다 후려친 것이었다.

이 술판이 어떻게 수습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범석은 회고록에 딱 한줄 적어놓았다.

“이 박사와 우리나라에 대하여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욕을 해서 나한테 맞았다.”

참석자들은 이 사건을 쉬쉬하기로 입단속을 했지만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겠는가.

이 사실을 알게 된 비서가 이승만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였다.

“그 친구, 철기를 건드렸으니 혼 좀 났겠군”
싱긋이 웃은 이승만은 이범석이 나타나자 직접 확인하는 것이었다. 
“장군, 장군이 그 친구를 정말 때렸오?” 
'철기'로 부르는 이범석을 '장군'으로 부를때는 못마땅하다는 표현이다.

본능적으로 폭력을 싫어하는 이승만, 나라 체면이 걸린 문제 아닌가.


발췌개헌의 미국쪽 공로자 무초는 유엔신탁위원회 미국대표로 전임되었다.

건국후부터 6.25때 대한민국을 돕기위해 큰 일을 해낸 고마운 무초,
라이트너와 함께 이승만 제거를 위해 애쓰다가 클라크 등 군부의 비협조로 실패한
 ‘국회 쿠데타’를 체념하고 당당한 이승만의 개헌 성공을 지켜본 무초가 떠날 때
정부는 그 산해관에서 송별잔치를 열어주었다.

감개에 젖은 무초의 고별사는 “한국 청년들의 투지를 보며 앞으로 이 나라는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룰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떠난다”는 덕담을 남기었다.

장택상 총리는 그에게 고려청자 항아리를 선물로 주었고,
서울시는 미국대사관이 있던 반도호텔 앞길을 무초로(路)로 지정하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미국을 활용하는 용미(用美)의 전략가 이승만은 자신을 축출하려던 미국 외교관을
한단 높은 따뜻한 배려로 품어안으며 ‘한국을 위한 미국의 힘’을 저축하는 것이었다.

 

민중의 ‘무혈혁명’...이승만이 20대때 시작한 '국민 동원' 방법

이승만의 오래 된 목표중의 하나가 또 이루어졌다. 대통령 직선제 민주주의.

“알다시피 이것은 민중의 무혈혁명이오”라고 이승만은 미국인 고문 올리버에게 말했다.

‘애국심의 화신(化身) 이승만 박사가 또 하나의 혁명을 성공시켰다’고 올리버도 첵에 쓰고 있다. 올리버가 뒷날 집필한 책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vement in Korea 1942-1960]은 [이승만과 대미투쟁]으로 번역되어 팔리고 있다.(비봉출판사, 2013)

무혈혁명의 생애...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이승만의 혁명 스토리는 반세기를 거슬러오른다.

여기서 잠시 1898년 대한제국 출범2년 고종황제시절로 역사의 올레길을 걸어가 보자.

23세 이승만 황궁앞에서 열이틀 철야농성, 민권승리를 얻어낸 '평화혁명'
여기는 경운궁(慶運宮:덕수궁)의 인화문(仁化門) 앞,
10월의 초가을 바람이 선선한 거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앉아있다.
(인화문은 황제궁 남쪽 정문, 그후 없어지고 동문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뀌었다).
이 인화문 앞에 연좌한 사람들은 개화파 인사들과 그들을 지지하여 몰려든 한양시민 들이다.
독립협회가 시작한 시민집회는 이미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란 이름이 붙어
거리정치세력으로 성장한지 2년째, 여기서 요구하고 결의되어 황제궁에 상소하여
고종이 마지못해 수락하여 실행에 옮긴 일들이 어디 한 두가지이던가.

오늘의 이슈는 ‘잔학한 나륙법 철폐와 수구내각 전면 개편'이다.
만민공동회의 단골 지도자 23세 이승만이 열변을 토하고 있다.

“백성들의 생명이 자기들 물건입니까? 나륙법과 연좌법의 부활을 막읍시다. 여러분!”

“옳소! 옳소!” 박수치는 시민들도 부르짖는다. "나륙법 반대. 수구내각 물러가라“

나륙법(拏戮法)이란 대역죄인을 참형에 처하여 시체를 토막내고 전국에 보내 전시함으로써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면서 죄인의 가족을 연좌하여 노비로 만드는 조선시대 형법이다.

갑오개혁때 폐지된 이 법을 왕실 정부가 다시 시행하려는 것은
그때 김홍륙(金鴻陸)의 독다(毒茶)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러시아 공사관 통역 김홍륙은 고종의 아관파천이래 러시아 세력을 이용하여
온갖 이권을 챙기다가 고종이 경운궁으로 돌아오면서 ‘고종의 최순실’로
인사문제등 국정농단을 부리며 자신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서울시장)에 오르는 등
횡포를 자행하였으나 독립협회의 국정감사로 쫓겨나서 흑산도에 유배된 인물이다.
앙심을 품은 그는 궁중의 심복을 시켜 고종과 황태자의 커피에 아편을 타서 올리게 하였으며
이를 마신 고종이 구토하고 태자는 인사불성이 되는 충격적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수구파 내각은 없어진 나륙법과 연좌법을 다시 시행할 것을 고종에게 상소하고
죄인들을 잔혹하게 고문함으로써 국내외에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독립협회는 이 반역사건을 규탄하면서도 나륙법과 연좌법은 야만적인 국민탄압 악법이라며
수구내각 추방운동으로 확대하여 그동안 벌여왔던 민권운동의 일환으로 집회를 열었다.

인화문 앞에서 농성을 벌이는 독립협회는 7대신(大臣)의 부정부패를 낱낱이 비판하고
전원파면과 전면개각 하라는 상소를 고종황제에게 거듭 올렸다.
이번에도 황제가 쉽사리 들어 줄 리가 없다. 고종은 ‘경고만 하겠다’고 답하였다.
그러면서 중죄인 김홍륙은 나륙형이 아니라 교수형으로 사형에 처했다.

시위는 더욱 확산되어 철야투쟁이 계속되었다.
서울과 지방에서 성금이 몰려들고 학생들과 상인들이 줄이어 합류하였다.
경무청(경찰)이 상가를 강제로 열게 하였지만 상인들은 거부하였다.
“우리도 자유권리가 있으니 다시는 이따위 짓 하지 말라”며
음식물과 의복까지 들고나와 밤새우는 시위대를 돌보며 함께 농성하였다.

외교단에서도 인권탄압을 항의하는 각서를 보냈고 시위는 국제적 파문을 일으켰다.

고종황제는 결국 7대신을 파면하고 독립협회가 미는 박정양(朴定陽)을 서리의성사무직에,
민영환(閔泳煥)을 군부대신에 각각 임명하는 호의적 대응을 취하였다.
독립협회와 민중의 요구에 또 황제가 무릎을 꿇자, 군중은 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지난 달 9월엔 외국인 용병부대를 황실경호대로 만들려고
비밀리에 외국병사 30명을 데려왔다가 독립협회의 시위 압력에 밀려
닷새 만에 1년치 월급을 주어 용병들을 돌려보내야 했던 고종이다.

이때 이승만이 쓴 논설을 보면 고종을 경멸하는 표현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슬프도다. 우리의 처세함이어. 동양 경계(經界)를 말하여도 삼강오륜에 벗어난 사람들이오,
서양 경계를 말하여도 의리에 틀린 사람들이라. 아프리카 인종같은 야만이나 되었으면
오히려 용서나 하련마는 우리 입으로 동방예의지국이라 하는 나라에 나서 성인의 경서도 읽고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안다는 사람들이 되어....어찌 세상에 용납하기를 도모하리요......임금이 그 백성을 믿지 못하여 외국사람을 청하여다가 대궐을 보호하는 일이
세계에 나라 되고서야 어디 있으리오. 이는 신하도 없고 군사도 없고 백성도 없음이라.
상하가 함께 부끄러운 큰 괴변이라. 이런 일은 마땅히 신민이 일심으로 주선하여
결단코 시행이 못되도록 하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일이라....”

이승만은 4월 창간한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 ‘매일신문’에 이어 8월에 다시 창간한
‘제국신문’ 주필로서 민권운동 문제를 날마다 논설로 주창, 언론투쟁도 겸하고 있었다.
독립협회 간부, 언론인, 만민공동회 지도자로 1인3역으로 뛰고 또 뛰는 청년 이승만은
이제 왕정개혁 개화파의 선두주자로 변하였다. 그의 논설이 그대로 상소문이 되었다.
왜냐하면 지난 5월 서재필이 국내외 압력에 못견뎌 미국에 가버렸기 때문이다.

나륙법 실시가 포기되고 전면 개각까지 이루어지자 미국 공사 알렌은 본국에 보고하였다.

“한국 내정 개혁에 성공한 이들의 운동은 ‘평화 혁명(Peaceful Revolution)’이다.”

새파란 이승만이 주야농성 열이틀만에 이루어낸 평화혁명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가 배재학당 재학때부터 한성감옥 투옥까지 3년간 벌인 왕정개혁 투쟁사는
한국 근대정치사에 남을 ‘한국최초’의 기록들이 수두룩한 것이었다.
3년치 운동사만 제대로 쓴다 해도 몇 권의 책이 될 것이다.

진정한 ‘민권의 나라’ 대한민국 만들기는 "이제 시작이다"

"정부수립만으로 건국이 완성된 것은 아니요, 건국작업을 시작할 정부를 만든 것 뿐이다."

헌법을 만들 때 정치꾼들은 권력이 품안에 들어온 양 ‘권력 나눠먹기’ 내각 책임제 헌법 만드느라 부산을 떨었지만, 이승만은 독립운동기간 줄곧 미국보다 나은 민주주의, 즉 대통령 직선제 헌법을 구상해 놓은지 오래였다. 어렵사리 유엔 감시하에 국회의원 총선을 끝내자마자 또 대통령 선거를 치를 시간이 없었기에 내각제 헌법을 대통령 중심제로만 고치고 직접선거는 미루었던 것이다.

이제 궐기한 민중의 힘으로 그 헌법을 직선제 헌법으로 바꾸는데 성공하였으니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 무혈혁명”이라는 이승만의 말이 과언만은 아니다.

한달동안 ‘민중 데모’에 시달린 정치권과 언론은 ‘관제 민의’를 동원한 독재자로 비난한다.

대통령 주도로 동원된 민중, 대통령이 원하는 직선제를 외치는 민중, 그래서 관제(官製)라는

주장인데, 그러면 그들은 ‘민제(民製) 민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는 말하지 않는다.

민의(民意)는 투표로서 결정되는 것이 대의민주주의. 그럴진대 지난 4월 5월 두 차례 시행한
지방의회선거에서 나타난 민의, 즉 정당별 득표분포가 바로 ‘민제 민의’ 아니던가.

이승만의 자유당 압승, 김성수의 민국당 참패, 이 민의를 존중하라는 투쟁이 민중자결단등
시위대의 외침이거늘, 내심으론 그것을 잘 알기에 주눅 들어 미국 도움만 기다렸던 민국당은
 미국이 손을 떼자 역시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민의는 그들 편이 아니었다.

민의란 투표만이 아니라 ‘침묵하는 다수’가 평소에 말하지 않는 국민 다수의 뜻이다.

이 침묵하는 다수의 뜻을 조직화하고 국가의 동력으로 만드는 역할을 누가 할 것인가.

그것이 민권 지도자의 할 일, 정치지도자들이 이를 외면하고 권력쟁탈 당쟁에 빠져있으니
대통령이 직접 나서 명실공히 민권국가를 만들려고 민의를 동원한 것이 부산정치파동이다.

이승만은 국회 앞에서 ‘민의 배신 말라’며 시위하는 민중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반세기전 자신이 지휘하여 왕정개혁을 실현했던 조선백성 만민공동회를 보았을 것이다.
“이것만 이루면 내 평생의 목적은 달성된다”고 정치권과 국민과 미국에게 호소했던 이승만.
그 직선제가 민중의 힘을 얻어 지금 헌법을 개정시킨 새 역사의 현장에서
비로소 독립국가 국민의 힘을 재확인한 노대통령은 자신의 꿈이자 국민의 꿈인 대통령 직선제를
하루 빨리 실천해 보여줘야 할 책임감에 조바심치며 자신감에 넘친다.

“반공정신으로 뭉쳐서 공산군과 싸우는 우리 청년들이 참으로 믿음직하오.
그 정의로운 용기를 우리 정부가 실망시키는 일을 해선 절대로 안될 것이오.
앞으로 새 헌법도 민의가 요구한 대통령 중심제로 차질없이 운영해주기 바라오”

국무회의에서 이렇게 당부한 이승만은 대통령 선거일정 준비를 지시한다.

선거일은 한달 뒤 8월5일로 결정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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