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기념 국제학술회의
  • ▲ 매헌 윤봉길 의사.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
    ▲ 매헌 윤봉길 의사.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된 배경에, 1932년 4월29일 일어난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가 있다는 학계의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이런 견해는, 16일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매헌윤봉길의사 상해의거 85주년을 기념해 연 국제학술회의에서 나왔다.

    이번 국제학술회의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가 한국의 독립과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이뤄졌다. 

    황길수 국제회의집행위원장은 개회사에서 "25년 짧은 생을 산 윤봉길 의사는 독립정신 하나로 목숨을 바친 사림이다. 자유와 독립, 정의와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를 인류에 떨쳤다"고 평가했다. 

    황 위원장은 "상해의거로 일제 강압통치로 죽어가던 민족의식이 되살아났다. 약소국에게는 큰 고무가 됐다. 특히 윤봉길 의사에게 감동받은 장제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이끌어냈다.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가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고 분석했다. 

    김진우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장은 "윤봉길 의사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이라며, 상해의거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 ▲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는 1943년 카이로회담 공동성명에서 한국의 독립을 언급하게 된 계기가 바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였다고 말했다. 

    그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감동을 받은 중국 국민당 장제스 총통이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코리아 조항'이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김학준 교수에 따르면, 카이로 회담의 '코리아 조항' 삽입을 누가 주도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다.

    하나는 일제강점기 미국 중심으로 외교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우남 이승만 박사가 미국 행정부를 상대로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역설하며 루즈벨트의 마음을 움직였고, 카이로 회담에서 코리아 조항으로 나타났다는 학설이다. 

    다른 하나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감동받은 장제스 총통이, 카이로 회담에서 코리아의 독립을 옹호하고, 조항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제의해 연합국 대표들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김학준 교수는 "장제스 총통은 매헌 윤봉길 의사가 상해에서 일본 군부와 외교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던져 성공한 것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장제스는 당시 ‘중국의 100만대군이 하지 못하는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으니 참으로 놀랍다’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재정적, 군사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윤봉길의 의거에 감명 받은 장제스의 인식이 ‘코리아 조항’을 옹호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직접 루즈벨트와 처칠을 상대로 조선독립을 옹호하는 발언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리아 조항은,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에 감동한 장제스의 꾸준한 설득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밝혔다.
     

  • ▲ 제임스 매트레이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제임스 매트레이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제임스 매트레이(James I. Matray)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는 "우선 카이로 선언에 코리아 조항이 들어가게 된 된 것은 조선인들이 일제 치하에서 전개했던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열정과 투지가 만들어낸 결과"라며, 일제강점기 내내 이어진 한국인들의 헌신적인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했다.

    제임스 매트레이 교수는 카이로 선언이 탄생한 배경에는, 일본 패망 후 동아시아에서의 세력 균형을 고려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의중이 숨겨져 있다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이어 그는 카이로 선언을 통해 중국이 처음으로 강대국 지위를 얻게 됐다고 부연했다. 

    그는 루즈벨트가 일본 패망 후 동아시아에서의 세력 균형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장제스가 이끄는 중화민국을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문구에는, 일정 기간 동안 한국인들이 정치적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여긴 루즈벨트의 생각이 깔려있으며, 러시아가 한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중국을 강대국 대열에 합류시켰다"고 덧붙였다.

  • ▲ 16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85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16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85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서상문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는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와 중화민국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을 주제로, "상해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금을 받게 된 것은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성공이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서상문 교수는 중국정부가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역시, 1932년 4월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 때문이라며, 윤봉길 의사가 독립운동을 부흥시켰다고 평가했다.

    서 교수에 따르면, 윤봉길 의사 의거 후인 1932년 4월 말부터 같은 해 10월9일까지 김구선생이 중국의 각계각층으로부터 받은 현금지원액은 2만9천200달러에 이른다.

    당시 중국정부는 1933년부터 중국화폐로 매달 1,500원을 상해 임시정부에 지원했다. 중국 근로자의 월 평균임금이 6원이었음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을 지원한 것.

    이후 중국정부는 1941년 12월 6만원, 1942년에는 매월 20만원, 1944년에는 매월 50만원, 1945년에는 매월 300만원의 돈을 상해 임정에 지원했다.

    서 교수는 "중국 화폐가치 하락과 함께 치솟은 물가를 감안하더라도, 중국정부의 지원 규모는 상당했다"며, "1941년부터 1945년 8월까지의 지원금은 달러로 환산하면 15억 달러 이상의 거금"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