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 등에 업은 언론, 칼자루 휘두르는 판관(判官)으로 변신
  • ▲ 검찰 출석하는 최순실 ⓒ 뉴데일리 정상윤
    ▲ 검찰 출석하는 최순실 ⓒ 뉴데일리 정상윤


    새해 벽두부터 한국판 '매카시 광풍'이 정치·언론계를 휘몰아치고 있다. 최순실 일가(一家)가 공공의 적으로 대두되면서 '여론 재판'으로 특정 인사들의 유죄 여부가 가려지는 '공포정치'가 자행되는 모습이다. 단순 의혹을 사실로 부풀리는 이도 여론이요, 이들을 단두대에 올리는 '집행자'들도 여론이다. 정치권과 언론이 대중 여론에 휩쓸려 누군가의 특정 행위를 문제 삼으면 일반 시민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돌팔매질을 하는 식이다. 이때 언론은 여론몰이의 불쏘시개가 되기도 하지만 때론 직접 심판의 칼자루를 휘두르는 판관(判官)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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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완영 덴마크 출장?…네티즌 "우연일까, 필연일까"

    2일 오전 포털사이트 뉴스란에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덴마크에서 체포된 사실이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이 덴마크 출장 중인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는 '카더라식' 기사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정유라가 이날 새벽 덴마크 북부 올보르에서 불법체류 혐의로 현지 경찰에 체포된 사실이 국내 언론에 타전되자, 이완영 의원의 '거취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른 것.

    발단은 지난해 12월 28일 보도된 JTBC '비하인드 뉴스'에서 비롯됐다. 이날 보도에서 리포트를 맡은 이성대 기자는 "위증 공모 의혹의 당사자인 새누리당 이완영 의원이 조만간 상임위 차원에서 유럽으로 해외시찰을 떠날 예정"이라며 "이 의원이 국조특위 간사를 맡고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고 밝혔다.

    이 기자는 "'국정조사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간사직까지 맡고 있는 이 의원이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우는 것이 적절한 것이냐', 'AI가 이미 엄청난 피해를 일으키고 있는데 이제가서 뭘 보겠다는 것도 좀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들이 있다"며 AI 방역 제도 시찰을 명목으로 내세운 이 의원의 해외 순방 일정이 의도적인 것일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실 JTBC의 보도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앞서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가 6박 8일간 덴마크와 프랑스 등 유럽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고, 해당 계획안을 담은 문건을 입수해 보도한 것이라, 간사직까지 맡고 있는 이 의원이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우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이냐는 JTBC의 지적은 일견 타당성이 있었다.

    문제는 정유라의 체포 소식이 전해진 직후, '이완영 의원이 정유라를 만나기 위해 덴마크 출장을 잡은 게 아니냐'는 추측성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 것.

    가장 먼저 '아주경제'는 2일 오전 9시 51분 <이완영 덴마크 출장? 정유라 체포되자 구설수…네티즌 "우연일까, 필연일까">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온라인상에 퍼진 갖가지 루머를 액면 그대로 소개했다.

    네티즌들은 "이완영은 참 공교롭다. 정유라 덴마크에서 잡혔는데 이완영 AI 방역 제도 관련 해외시찰 위해 12월 31일부터 덴마크-프랑스 6박 8일행 ㅎㅎㅎㅎ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필연인가(mo*****)" "이완영 의원이 유럽을 방문한다는데 행선지에 덴마크도 있던데 우연일까요?(ls****)" "이완영 새누리 의원 프랑스 덴마크로 출장정유라 덴마크에 있는 걸로 확인 이완영 최순실 부탁으로 정유라 만나러 간 거 아닌가 추정 그곳에서 이완영 정유라 역적모의 중이라고 추정 그 인간이라면 가능함(jj*****)" 등의 댓글을 달았다.


    아무런 근거도,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추측성 글들이었지만, 이 매체는 "네티즌의 발언"이라며 괴담에 가까운 '황색 루머'를 마치 주요한 여론인 양 보도하는 모습을 취했다.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온라인에 퍼진 네티즌의 글만 갈무리했을 뿐, 사실 확인을 위한 그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근거로 내세운 것들도 자신이 직접 확인한 내용이 아닌, 타사에서 이미 보도한 내용들이었다. 정유라의 체포 소식은 YTN 보도를 참조했고, 이완영 의원의 해외출장 계획은 JTBC에서 밝힌 내용을 그대로 전재했다.

    같은날 오전 10시 1분에 송고된 '매일신문'의 <정유라 체포 "이완영도 덴마크 해외시찰 갔다던데" 의혹 일파만파…>라는 기사도 형식은 마찬가지였다.

    이 매체는 아예 출처는 생략한 채 "정유라가 불법체류 혐의로 체포됐다고 알려진 가운데, 이완영 의원의 해외시찰이 새삼 재조명되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 두 가지 사건을 기정 사실로 단정짓는 기사를 내보냈다.

    YTN와 JTBC의 보도를 밝혀진 '사실'로 간주한 이 매체는 곧바로 "정유라가 덴마크에서 체포된 것과 관련해 이완영의 덴마크 방문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며 네티즌들의 관련 댓글을 장황하게 소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누리꾼들은 “이완영, 덴마크 간 이유 있었네”, “뒤봐주고 있었다”, “이완영도 같이 체포하자”, “아오 이완용”, “정유라 이제 한국을 오는 거?”, “새해부터 기쁜 소식이네”, “정유라 청문회 안오기만 해봐라”, “정유라 불법체류라니? 무슨말?”, “정유라 독일로 압송되면 어떡함?”, “드디어 정유라” 등의 반응을 내놓고 있다.


    이외에도 '비주얼다이브', '서울경제', '국제신문', '스포츠경향', '폴리뉴스', '한국스포츠경제', '부산일보', '서울신문', '메트로신문', '불교닷컴', '데일리한국', '더팩트', '브릿지경제', '에너지경제', '아시아경제' 등 수많은 매체들이 타사 보도 내용과 네티즌 반응을 한데 묶어, 갖가지 루머와 의혹을 부추기는 기사들을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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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영 의원의 행선지를 덴마크로 단정짓는 온라인 매체들의 '묻지마식 보도'는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 이어졌다. 말만 조금씩 바꿨을 뿐, 내용도 별반 다르지 않은 '어뷰징 기사'들이 쏟아지는 동안,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을 중심으로 이들 기사를 '팩트'로 받아들이는 여론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 의원의 덴마크 시찰을 기정 사실로 확신한 네티즌들은 "사실상 이 의원이 정유라의 뒤를 봐주고 있었던 게 아니냐"며 "이완영도 같이 체포하자" "이젠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오셔야" "뼈속까지 최순실 사람이더구만" "순실이네 똥개 이름이 이완용이던가?? 이완? 머시기라던데" "정치생명 끝나셨어요" 같은 인격말살적이고 악의적인 글들을 각종 게시판에 토해냈다.

    이때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침묵을 지키던 이 의원이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해외시찰 의혹'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 이 의원이 각 언론사에 보낸 보도자료에는 언론사들의 종전 보도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저는 덴마크 공식 시찰에 가지 않았습니다. 사실관계를 확인한 후 보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의원실 측은 "이 의원은 현재 국내 모처에서 머리를 식히겠다며 쉬고 있는 상태"라며 "지난 주말 (농해수위 측에)불참 통보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농해수위 관계자도 "이번 시찰에는 더불어민주당 김현권·위성곤 의원만 참가했다"며 이 의원이 이번 해외시찰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전했다.

    전화 한 통이면 이완영 의원이 당초 계획대로 해외 출장을 떠났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이날 오전 11시까지 해당 의원실이나 농해수위 측에 연락을 취한 매체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저 앵무새처럼 JTBC와 YTN의 기사만 인용보도할 뿐, 그 내용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행태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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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상호 "박지만 수행비서 죽음..다른 살인사건과 연관있을 수도"


    이완영 의원에 대한 '인격말살적 보도'가 쏟아지던 시각,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박지만 EG회장의 수행비서가 숨진 채 발견된 것을 두고 사인에 대한 전면적 재수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도대체 몇 번째 죽음입니까? 이 문제만큼은 철저히 수사해야 합니다. 박지만씨, 박근령씨, 박 대통령 주변의 5촌 조카 죽음까지 참으로 희한하게 숨진 이 사람들에 대해 전면적 재수사를 해야 합니다. 대통령 주변에 왜 죽었는지 원인도 알 수 없고, 초동수사에 실패해 진실을 밝히지 못한 죽음이 너무 많습니다. 산지기 노인부터 5촌 조카들 북한산에서의 이상한 죽음, 중국에서 신동욱씨를 추격하던 그 조직, 박지만씨 수행비서 죽음까지 모든 것이 미스터리입니다.


    우 원내대표는 "이 사건이 다른 살인사건과 연관이 있는지도 수사해야 한다"며 고인의 사망이 어떤 범죄와 연관됐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이는 지난 1일 시사인 주진우 기자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박지만 회장의 수행비서 주모씨의 사망소식이 담긴 기사와 함께 "저는 자살하지 않는다"는 글을 남긴 뒤, 고인의 자살 가능성을 거론하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는 것을 지적한 것.

    "(자신은) 자살하지 않는다"는 주 기자의 글은 지난달 30일 자택에서 숨진채 발견된 주모씨의 생전 상황이 (박근혜 대통령 5촌 조카 살인사건 관련한 취재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받아온 자신의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는 말처럼 들렸다.

    주 기자의 말을 부연하듯, 사건 현장을 조사한 경찰 관계자도 "고인의 유서가 없고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며 사실상 고인의 자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소견을 전했다.

    이에 온라인상엔 주모씨의 사인을 자살로 단정짓고, 고인에게 압력을 행사한 개인이나 조직이 있을 것이라는 음모론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JTBC의 보도만 믿고 이완영 의원의 '덴마크행'을 보도한 언론과 여기에 부화뇌동한 네티즌들의 모습과 흡사했다.

    사인 규명은 둘째치고, 고인의 생전 상황을 유추할 만한 근거가 전혀 제시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성급한 네티즌들은 사실상 주모씨의 '사망 배경'에 박지만 EG회장이 있을 수 있다는 위험천만한 음모론을 늘어놨다.

    이같은 음모론을 공신력 있는 국회의원이 거론하자 그 파괴력은 더욱 커졌다. 우상호 원내대표의 발언 직후 온라인상엔 주씨의 사망을 둘러싼 각양각색의 시나리오가 떠돌았다. 대부분 소설과 진배없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이를 하나의 '팩트'로 인지하는 여론은 점점 커져갔다.

    논란이 일파만파로 퍼져갈 무렵, 이철성 경찰청장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우상호 원내대표가 음모론을 공식 제기한지 3시간여만에 이철성 경찰청장이 "박지만 EG회장 수행비서의 사인은 심근경색으로 추정된다"는 입장을 밝힌 것.

    고인이 옷을 벗어놓고 샤워를 하고 나와서 수건 들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저희가 본 것은 심근경색입니다. 정확한 것은 부검결과가 나와야 하겠지만 의혹을 가질 만한 사항은 전혀 아닙니다.


    이철성 청장은 이날 점심께 서울 서대문구 청사에서 가진 출입기자간담회에서 "원래 고인이 고혈압이 있었고, 사망 전날 오후 송별식이 있었는데 몸이 안 좋아서 못 가겠다고 통화한 내용이 확인됐다"며 사인을 자살로 단정지을 만한 요소가 없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보고된 내용 자체가 명확합니다. 기록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부검결과에서 다른 의혹이 나온다면 추가 조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청장의 구두 브리핑에 이어 서울 수서경찰서는 이날 오후 주모씨의 사인은 관상동맥경화로 인한 허혈성 심근경색으로 밝혀졌다는 '부검 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주모씨는 12월 30일 낮 12시 55분 주씨의 아내와 아들에 의해 최초 발견됐고, 119로 신고해 경찰에 통보된 시간은 12시 58분으로 확인됐습니다. 주변 CCTV를 확인한 결과 외부 침입 흔적은 없었고, 원래 있던 지병으로 인한 사망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씨가 12월 29일 낮까지 아내와 통화하고 30일 오전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검 결과를 기다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사인에 대한 의혹 제기는 경찰의 공식 입장을 듣고 난 뒤 제기해도 충분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상호 원내대표는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일말의 가능성만 갖고 특정 세력을 배후로 간주하는 듯한 주장을 전개했다. 일반 시민과 국회의원의 발언은 공신력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우 의원은 원내 제1당의 원내대표가 아니던가?

    언론 기사와 네티즌이 올린 댓글도 마찬가지. 네티즌들이 자신의 '사념'을 게시판에 올린 것과 수차례 데스킹을 거친 언론 기사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순 없다. 그런 면에서 시중에 떠도는 소문을 함부로 기사화하고 입에 올린 언론과 일부 정치인들의 행보는 엄연한 '책임 방기'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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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정도 대표 "확인되지 않은 사실도 가치 있는 정보다"

    홍정도 중앙미디어네트워크 대표는 지난 2015년 9월 21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중앙 미디어 컨퍼런스'에서 "확인되지 않은 사실도 가치 있는 정보"라는 주장을 전개해 눈길을 끈 바 있다.

    예를 들면 원빈과 이나영이 사귄다는 얘기가 카카오톡에 떠돌아 다닙니다. 아직 확인 되기 전의 얘기라는 것도 정보고, 나중에 확인해서 거짓이라는 게 밝혀져도 정보입니다. 이것을 다 확인한 뒤에 맞다라고 밝히는 언론 보도의 자세는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언론사가 자체 기준에만 신경쓰다보니 뒷북 기사만 내보내는 것"이라며 "온라인에 흐르는 여론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한 홍 대표는 "마감 시간과 기준에 맞춰 뉴스를 가두면 그 뉴스는 생기를 잃어버리고 만다"고 강조했다.

    온라인에 흐르는 여론이라면, 그것이 설령 확인되지 않은 루머라 할지라도 보도할 수 있어야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언론사'가 될 수 있다는 게 이날 홍 대표가 강조한 언론관이었다.

    그렇다면 지난 2일 포털사이트 뉴스면을 도배한 이완영 의원에 대한 각종 오보들도 홍 대표 기준에선 온라인상 흐름을 충실히 반영한 '가치 있는 정보'라는 얘기.

    홍 대표가 강조한 '가치'가 무엇인지는 파악하기 쉽지 않지만, 수많은 언론사들이 그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판박이 같은 기사를 쏟아내는 동안, 이완영 의원은 "순실이네 똥개 이름 같다"는 치욕적인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

    이른바 최순실 사태가 국내 최대 현안으로 부상하면서 각 언론사에 포진된 '온라인뉴스팀'은 연예 기사 대신 '정치 기사'를 실시간으로 내보내고 있다.

    그러나 초 단위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단독' 혹은 '속보'라는 타이틀로 신문·방송사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기사들이 '오보'로 귀결되는 이변이 속출하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꼬집기 이전에 이를 자신의 역량 확대의 기회로 삼으려는 하이에나성 광기(狂氣)를 다스리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