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반민특위, 국회 프락치사건과 김준연, 장택상의 공산당 테러 진압 등...

건국기(建國期)의 정계(政界) 비화(秘話)--제71회 이승만 포럼

허도산 칼럼 | 최종편집 2017.01.19 10: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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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회 이승만 포럼 /2017. 1. 17. 정동제일교회(벧엘예배당)  건국기(建國期)의 정계 비화(政界 秘話)허 도산 /전사 연구원 원장


1.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해산한 적 없다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경과
본래 친일, 친미 등의 말은 나쁜 말이 아니다. 한일병탄 이후, 특히 8.15해방이 되고 나서 해외파나 공산분자들에 의하여 친일파 규탄이 시작되면서 ‘친일파’ 하면 매국노, 역적, 반민족적인 행위자들로 규정되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후 한 달도 안 되어 9월7일 이른바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 법안은 국회의원 출석자 141명중 찬성 103표, 반대 6표로 정해졌다.
 이어 10월에는 국회 안에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조직되고, 법원에는 반민족행위 특별재판부(특별재판관 15명)가 구성되고, 검찰에는 반민족행위 특별검찰부(특별 검찰관 9명)가 설치되었다. 이듬해 1월12일에는 각도 조사부 책임자까지 임명되어 본격적인 반민특위 활동이 개시된다.

반민특위 위원장에는 항일투사이자 당시 경신고등학교 교장이던 김상덕(金尙德), 부위원장에 김상돈(金相敦), 위원에는 곽상훈, 조중현, 노일환, 김동명 등 8명이 선출되었다. 반민특위와 특별재판부 인물들은 주로 3.1만세운동, 신간회, 임시정부 등에 참여하면서 항일투쟁을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어이없게도 친일분자와 공산분자도 끼어있었다.

일제식민지 36년만에 해방-건국된 신생국에서 친일파 청산은 시급히 처리할 문제였고, 부일(附日)책임자를 조사하여 정화해야 민족정기와 사회기강이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미국 군정의 혼란기에는 이 작업에 별로 진전이 없었고, 건국이 되자 더 이상 미룰 수 없었으므로 반민특위는 서둘러 1월5일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1월8일 화신(和信) 재벌 총수 박흥식(朴興植)을 연행함으로써 본격 활동에 들어간 반민특위는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정춘수, 박희도, 최린, 김대우, 김연수, 김갑순, 박중양(중추원 부의장), 이성근, 조병상, 배정자, 김태석(경찰), 노덕술(경찰), 이종형, 한상룡, 문명기, 김덕기(경찰, 사형언도 받음)등을 연행하여 구속하였다. 장직상은 광복군의 이범석, 지청천, 오광선 장군등의 비호로 구속이 모면되었다. 전봉덕은 조사를 피하기 위해 육군 헌병대에 들어갔으며, 박춘금은 재빨리 일본으로 사라졌다.

반민특위가 전면적 활동에 들어가기 전부터 방해공작이 연달아 일어났다.
대동신문 사장 이종형은 ‘은위병행(恩威幷行)’이란 사설(대한일보 1948.8.17.)을 통하여 “친일파 문제는 그 시대 우리 민족이 공동으로 질 책임성”이라고 주장하고 ‘보호조약’ 또는 ‘합병조약’에 책임을 질 매국적(賣國賊) 이외에는 대개 직업상 종사한자라며 일제 협력자들에게 동정적이었다. 이종형은 또한 법은 기강을 세우는데 그쳐야지, 반민법은 너무 광범위하여 “많은 희생을 내게 되므로 민심을 소란하게 하는 악영향을 끼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민법이 공포된 다음날 반공단체들은 서울 운동장에서 ‘반공구국 총궐기 및 정권이양 축하 국민대회’를 열었다. 반민법은 ‘일제시대 반장이나 통장까지 잡아 넣을 수 있도록 되어있어, 이것은 온 국민을 그물로 옭아매는 망민법이다. 국회내 김일성의 앞잡이를 숙청해야한다’는 등의 반민법 반대 구호들이 행사장 주위에 나붙었다. 또한 이 대회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을 채택하였다.

그 내용은 “진정한 민족반역의 현행범인 공산 매국노의 처단을 도외시한 채 극단 광범위에 소급적용하여 동포 이간과 동족상잔할 화근을 남길 반민법이 제정되었으므로 각하께서는 이 법의 실시를 보류하는 시책을 조속히 강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대회에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격려사를 하였고, 윤치영 내무장관도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반공대회는 해방후 처음 보는 애국적대회’라고 성원하였다. 이승만 대통령도 “악질 몇 명만 처단하고 480여명만 구속하라‘”고 주문하면서 ”처벌에 신중을 기하기 바란다’며 특위 위원들을 불러 당부하기도 했다.

반민특위에 대한 방해활동 중에서 경악할만 한 것은 백민태의 테러미수사건이다.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최관수와 전 수사과장 노덕술 등은 10월에 반민특위 위원중 강경파들을 제거하리고 모의하고 백민태에게 지령을 내렸으나 블랙리스트에 김병로 특별재판부장등 15명이나 포함된 것을 본 백민태가 태도를 돌변하여 자수해버림으로써 테러는 무산되고 말았다.
수도경찰청 노덕술을 특별경찰대(특경대)가 체포할 때 경찰은 양보하여 방관하였으나, 사찰과장 최운하(崔雲霞)를 연행하자 경찰측은 크게 분노하고 동요하였다. 최운하의 활동은 노덕술이나 김태석 등과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일반사람들이 다 하는 친일”이었다는 게 경찰측 주장이었다.
최운하는 뒷날 사재를 털어 부하들을 보살피고 6.25전쟁때는 정부고관들과 국군, 검찰등을 먼저 한강을 건너도록 도와준 뒤 자신은 한강교에서 생애를 마쳤다.

6월6일 경찰이 반민특위 산하 특경대를 기습, 출근하던 특경대원 35명을 체포하고, 지방에서도 도지부 특경대원들을 연행하였다. 이 6.6사건을 계기로 반민특위 활동은 사실상 무력화되고, 한민당이 ‘공소시효 8월31일’ 제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반민특위는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8개월동안 682건의 친일행위를 조사한 반민특위는 영장발부 408건, 검찰송치 559건, 기소 221건의 실적을 올렸으나 대부분 풀려나고 재판종결 38건, 실형 7명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오늘날까지도 이때의 친일파 청산 미결이 한국사를 왜곡시키고 역사적 허무주의를 국민들에게 안겼다면서 흔히 프랑스의 나치처벌 실적을 예로 들곤하지만, 비판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다.
프랑스는 나치 통치를 고작 4년정도 받았는데 반해 한국은 1894년 청일전쟁때부터 장장 52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을 뿐더러, 건국 직후 전국적인 공산 폭동 반란을 소탕하는 중인지라 친일파 청산보다 공산당 추방이 더 시급한 형편이었으므로 프랑스와 단순비교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며, 프랑스도 4만여명을 처벌하였으나 나중에는 유야무야되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였다.
“과거 오랜 세월 우리 국민이 일본 제국주의라는 적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살아왔고, 순종황제가 적군에게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나라를 내준 것인데, 애꿎은 국민들에게 가혹한 문책을 덮어 씌워선 곤란하며 너무 거론하지 않는 것이 독립국가의 도리일 것이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 특위를 직접 해산한 적은 없다.
국회 특위의 특별경찰대가 저지르는 불법적 과잉활동만 제어하라고 지시했다.
이 대통령은 “한 나라의 검찰과 경찰이 일원화되어야 하고 경찰권은 국회가 아니라 정부에서
행사해야 한다”면서 “특경대는 조사활동에 협력하라 했지, 구타, 고문등 월권행위까지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못 박았던 것이다.

당시 정부는 공산당의 전국적 테러로 치안 병력 확보가 다급한 실정이었다.
제주도 4.3반란으로 총선거도 못하였고 여수순천 군 반란사건, 대구 폭동, 빨치산을 진압하면서, 동시에 국회내 공산분자들, 남북협상파, 중간세력등 정치선동 공세에 대처하는 데도 신생국 정부는 숨가쁜 상황이었다.
 반민특위가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것은 특히 현실을 도외시하고 이상주의에 빠진 임정세력등 해외파의 성급한 무모함이 국가위기상황과 맞물리면서 친일파 청산작업을 오히려 좌절시키는 요인이 된것은 두고두고 반성해볼 일이다.

2. 낭산(朗山)은 국회내 공산당 활동을 정면 고발하였다.

◆국회 프락치사건의 진상과 김준연 의원의 활약 온갖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공산당의 공작활동이 시작되었다. 특히 국회내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교란작전은 김약수(金若水) 부의장을 비롯하여 노일환(盧鎰煥), 김옥주(金沃周), 이문원(李文源) 등 좌익세력이 미군철수를 주장하면서 양성화되었다.

이들의 행적을 정확하게 간파한 민족진영 지도자 낭산(朗山) 김준연(金俊淵) 의원은 그들과 투쟁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1949년 5월9일자 동아일보에 김의원은 ‘의정단상 1년 회고’라는 논설을 통하여 공산세력의 조종에 따라 행동하는 의원들을 공격하여 일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후 8월20일자 서울신문에 더 상세한 글을 기고하였다.) 주요내용을 소개한다.

 [5.10선거가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이 있을 수 없었다. 이 5.10총선을 방해하려한 분자들은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한 분자들이다. 작년 1월26일에는 김구, 김규식 양씨는 유엔 한국위원단에게 5.10총선거를 부인하는 진언을 하였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북한에 가서 김일성의 산하에 참집하여 남북협상 운운하며 이 5.10 총선거를 방해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삼천만 우리 민족은 그들 사이비 지도자들을 내어버리고 나아가서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5.10선거를 결행하여 국회를 성립시켜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을 선거하고, 정부 조직법을 제정하여 정부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대한민국은 작년 12월12일 유엔총회에서 48대 6으로 세계민주제 국가들의 승인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런 경사가 또 있겠는가. 그런데 국회 의정단상에서도 5.10 총선거를 부인하는 일파가 계속하여 나타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그대로 간과할 수 없다.

그들은 일견 가장 애국적인 언론을 하는 듯 하나 기실 그 내용을 세밀히 검토하여 보면 5.10선거를 부인한 사람들에게 따르는 것이니, 남북협상에 추종하고 김일성에게 따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자들은 거년(去年) 10월13일 금년 2월7일에 철병문제를 제안하였고 또 금년 3월19일에 유엔한국위원단에게 동일한 진언을 하였고 또 금년 4월30일에 예산총회 석상에서 퇴장을 감행하여 사이비한 애국성명을 발표하여 대한민국의 육성을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년 3월27일 동아일보 지상에 발표된 남로당의 선전방침에 추종하는 자들이라고 믿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나는 여기서 그들의 맹성을 촉구하는 바이고, 겸하여 우리 삼천만동포가 그들에게 대하여 엄중한 감시를 행하기를 요청하는 바이다. 그 선전방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 5항으로 되어있는 것이니 국회 내의 사이비 애국자들에게 그 실행을 남로당이 지시한 것이다.
1. 평화적-자유적 남북통일을 주장하며 미군철퇴와 유엔위원단 구축을 강조할 것.
2. 당(민족공화당)의 강령정책에 의한 인공(人共)개혁을 급속이 실시토록 주장할 것.
3. 반민처단을 적극지지 격려할 것.
4. 정부의 부패성을 폭로하되, 특히 국군, 경찰의 야만폭압에 의한 암흑정치성과 법이 없는 허울만의 법치정부라는 것과 제(諸)인공개혁의 지연으로 당연히 결론되는 정부의 반동성을 구체적으로 폭로 선전할 것.
5. 당 지시에 의한 선전요강을 철저히 실시하며 광범한 일반대중에게 남로당 정책의 정당성을 철저히 인식시켜 인공개혁에 총궐기하도록 선전할 것.

이 선전방침이 국회 내의 소위 소장파에 의하여 충실히 실행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에 나는 대한민국의 전도에 대하여 전율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지금은 우리 국가의 자주독립이 문제가 되는 것이며, 우리 민족의 흥망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국회 내에서부터 진정한 애국적 세력을 총집결하여, 5.10 선거를 부인하고 따라서 대한민국의 육성을 방해하려고 하는 차등파괴적(此等破壞的) 동향에 대하여 주도한 경계를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을 고조(高調)하는 바이다.(이상)

이 논문이 발표되던 그날 동 신문에 남로당 서모(徐某)사건이 발표되었는데, 국회 내의 소위 소장파에 속하는 좌익 국회의원이 관련되었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그 의원들은 남로당의 7원칙의 실행에 동의하였다고 한다. 7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외군 완전철퇴. 2. 남북정치범 석방.
3.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로서 남북정치회의를 개최할 것.
4. 남북정치회의는 일반, 평등, 직접, 비밀의 4대원칙에 입각한 선거규칙을 작성하여 최고입법기관을 선거할 것.
5. 최고입법기관은 헌법을 제정하고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6. 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할 것.
7. 조국방위군을 재편성할 것.(이상)

이 7원칙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할 수 있는 바와같이 5.10선거에 의해 성립된 국회, 그 국회에서 제정된 헌법, 그 헌법에 의하여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 유엔총회에서의 48개국 민주국가의 승인, 수십 개국의 단독적 정신승인 등등의 결과를 말살하려는 것이어서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을 부인하는 것이니 반역적 행동으로 보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새로 남북대표가 화합하여 선거규칙을 작성하고 총선거를 다시 실행하여 다시 국회를 만들고 다시 헌법을 제정한후 다시 대통령을 선거하여 중앙정부를 조직하라는 것이 현존의 대한민국 기구에 의하여 구현된 대한민국을 부인하는 반역행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6월 17일에는 김약수, 노일환 등 6인은 덕수궁에 가서 유엔한국위원단을 방문하고 미국 군사고문단이 한국에 설치되는 것까지도 반대하였었다. 이에 이르러 우리 민족은 누구나 다 국회내 소위 소장파의 의도가 나변에 있는가를 명백히 알게 되었다. 6월18일에 개성에서 국제 스파이가 검거되어 공산당과 국회의원들간의 관계가 더욱 명백하게 되었다. 작년 12월 12일에 48대6으로 대한민국이 유엔총회에서 승인되자 소련대표 비신스키는 비분하여 ‘우리가 프랑스 파리에서 패배한 것을 조선 안에 가서 회복하겠다!’고 말하였다.

국회 내의 남로당 프락치사건은 비신스키의 그 의도를 실행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의회의 1년을 회상함에 있어서 국회내 소위 소장파에 의하여 진행된 소련의 이 음모를 과소평가할 수 없는 바이다.

국회에서 지방자치법, 농지개혁법, 병역법 등 중요한 법안이 제정된 것은 또한 중요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고로 별로 언급하지 않거니와, 반민법의 개정은 특이한 사실인고로 일언하려고 한다.
반민족행위 처벌법은 작년 9월에 제정되어 쉽게 말하자면 명년 9월까지 시행하게 된 것인데 그 기간이 단축되어 금년 8월말까지에 결말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바이다.]

 1949년 5월18일 제2회 임시국회가 폐회되던 날, 제헌국회의원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의원등 3명이 구속되어 검찰의 조사를 받아오다가 사건이 확대되어 20여일후 국회부의장 김약수와 함께 노일환, 강욱중, 김옥주, 김병회, 박윤원, 황윤호 등 6명의 의원이 체포되었으며, 7월30일에는 서용균, 신성균, 최중혁 의원등 세명이 추가로 구속되었다.

당시 검찰총장 권승열(權承烈)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그들의 죄책은 북한공산당의 대남정치공작 7개원칙의 실현을 모의한 혐의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들 소장파의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미소양군의 완전철수, 남북정치범의 석방, 남북 정당단체대표의 정치회의 구성 등 남로당과 똑 같은 주장을 국회에서 발언해 왔다.
일제시대 김준연이 보성전문학교에서 법률을 강의하던 시절 노일환은 보성전문 학생이었는데,
그가 국회에서 공산당과 똑 같이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에 김준연은 노일환을 따로 불러 질책 훈계하였다. 낭산은 그전부터 줄기차게 소장파의원들의 주장이 공산당과 같다고 비판했다.

그는 성명을 통해 프락치사건 관련 의원들의 석방을 요구하거나 찬동하는 의원들은 대한민국을 부인하는 자라고 단정하였다. 이에 좌익소장파들은 낭산을 제명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사건을 조사했던 사상검사 오제도(吳制道)는 그의 서저 [붉은 군상]에서 소장파의원들이 처음에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남로당 프락치로 끌려들었다가 나중에 그것을 알면서도 행동한 것이 죄였다고 했다.

당시 판사, 검사 중에도 좌익에 동조하거나 좌익사상을 가진 자들이 있어 이 사건에 압력을 가하고 수사를 방해하려고 하였다. 그 예로 김영재(金寧在) 부장검사는 오제도의 상관이자 좌익분자였다. 국회 프락치사건은 1948년 9월 남로당이 ‘반동 프락치’라는 특수공작부를 설치하여 국회의원들에게 포섭공작을 편 것이다.
이 부서의 총책은 도상익(별명 조만, 조동룡)이고 부원으로는 하사복(별명 김사복, 이삼혁), 이재남, 정해근, 김우진, 유진원, 이병석 등이다. 이들은 종로4가, 충무로2가, 4가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사업가로 위장 행세하였다. 하사복은 이삼혁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1948년 12월부터 노일환 의원에게 접근하고, 하사복의 안내로 노일환은 남로당 비밀당원이 되었다.
하사복은 이문원 의원도 포섭에 성공하였다. 이들에게 포섭된 제헌국회의원들은 다음과 같다.
김약수 (경남 동래), 이문원(전북 익산), 김옥주(전남 광양), 이구수(경남 고성), 김병회(전남 진도), 배중혁(경북 봉화), 신성균(전주), 강욱중(경남 함안), 최태규(강원 정선), 황윤호(경남 진양), 박윤원(경남 남해), 서용길(충남 아산), 차경모, 김봉두 등이다.

결정적 단서가 된 것은 1949년 6월 중순 남로당 중앙 연락원 정재한(여, 42세)을 개성에서 체포하여, 그 여자가 휴대하고 있던 문서에서 남로당의 국회공작 문건을 발견한 것이다.
 이문원등이 제1차로 구속된 직후 국회프락치 동조의원들은 면책특권을 주장하며 구속의원 석방투쟁을 전개했다. 그런데 이 석방투쟁에는 어이없게도 이재형, 감장렬, 조국현, 김인식, 이원홍, 김우원 등 의원들도 동참하였다. 석방결의안은 재석184명중 찬성 88, 반대 95로 부결되었다.

4차에 걸쳐 구속된 국회의원은 총 15명, 13명이 기소되어 1950년 3월15일까지 진행된 재판결과 노일환과 이문원에 징역10년, 김약수 박윤원 징역8년, 김옥주 김병회 강욱중 황윤호 징역6년, 최태규 이구수 서용길 신성균 배중혁 징역3년이 각각 선고되었고, 전원 항고하였으나 북한의 6.25남침으로 전원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서용길만 고양(高陽)의 농가에 은신중 수복후 자진출두 하였다.

 3. 장택상, 좌익 ‘학병동맹(學兵同盟)’을 격멸하다

장택상이 미군정 수도청장이 된 이유

1945년 9월 미군정이 실시되고 남한 주둔군 사령관에 하지 중장이 취임하였다. 어느 날 하지 사령관의 참모장 윌리엄스 대령이 국민대회 준비위원회 위원장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선생을 찾아왔다. 윌리엄스 대령은 경찰 총수인 미군정 경무부장에 누가 적격자인지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는 낭산 김준연에게도 후보 추천을 부탁하였다. 그때 한민당에서는 원세훈을 내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준연의 강력한 천거로 조병옥이 경무부장이 되었다. 그 무렵 언론인출신 김동성이 송진우를 찾아와 장택상을 경기도 경찰부장으로 제안하자 송진우는 “창랑(滄浪)은 장관이나 국무총리감”이라며 반대했다. 그러자 김동성은 “그래도 자주독립을 하자면 치안확보가 우선이오”라며 항변하였다. 그러던 중에 경기도 경찰부장에 조계옥이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30일 한민당위원장 겸 국민대회 준비위원장 송진우가 피격, 암살되었다.
조계옥 경찰부장은 “너무 힘들고 생명의 위협을 받아” 사표를 내고 2개월이나 공석이 되자 미군정 스톰씨가 장택상을 찾아와 경찰부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하였다. 장택상은 고향 칠곡에 내려가 쉬려 했으나 주위에서 만류하던 참이었다.

 장택상은 미군정에 조건을 제시하였다.
*경찰 인사에 미군정이 참견 말 것. *경찰예산을 요청하는 대로 무조건 들어줄 것. *경찰 자주권을 최대한 인정해줄 것등 14개항을 요구하였고, 미군정이 응락함으로써, 1946년 1월13일 서울과 경기도를 총괄하는 경기도 경찰부장에 취임하였다.
18일 국일관 음식점에서 장택상 경찰부장이 출입기자단을 초청한 만찬에는 인민보, 조선통신, 해방일보 등 공산계열 신문사의 기자들도 참석하였다.
밤 11시경 장 부장은 수표동 집으로 돌아온 뒤 경찰부로부터 다급한 보고를 받았다.

 [경기도 경찰부장 각하. 오늘 저녁 수천명의 반탁학생들이 데모를 하던 중
종로네거리에서 무장 괴한들로부터 습격을 받았음. 총격전이 벌어지고
패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되었음. 학생측 사상자 15명 발생. 범인 수사중.]

장택상은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날 오후 2시 반탁 전국학생연맹 주최로 좌익성토대회가 열렸고, 대회를 마친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가 저녁에 유혈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함박눈이 내린 전차 길에는 혈흔이 낭자하고 경기여고 학생들이 쓰러진 채 난장판이었다.
장택상은 습격자들이 ‘학병동맹’ 일당이며 그중 6명은 이미 체포하였다는 보고를 들었다.
총기난사의 주범은 ‘학병동맹’ 군사부장 박진동(朴晉東이었다.
일제시대 학도병으로 나갔던 사람들중 좌익계열이 조직한 ‘학병동맹’은 1945년 8월 해방당시
전국에 3천명이 넘고 서울에만 2천여명을 차지하는 큰 단체로서 우익세력을 공격하는 무장테러 활동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 참에 이 조직을 발본색원하기로 결단을 내린 장택상은 무장경찰 5백여명을 진두지휘하여
심야에 삼청동 학병동맹 본부로 쳐들어갔다.
“순순히 손들고 나오라” 투항을 권고하는 방송에고 불구, 무차별 난사를 받아 경찰들이 쓰러졌다. 경찰도 즉시 반격에 나서 새벽 6시까지 삼청동일대는 총격전이 계속되었다.
장택상은 학병동맹원 800여명을 체포하고 200여명은 도주하여 잡지 못하였다.
끝까지 반항하던 박진동은 결국 현장에서 절명하였다.

 장택상이 ‘학병동맹’을 격멸하고 나서야 한국인 경찰의 위신과 체면이 서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서울은 물론 전국에 걸쳐 질서가 잡혀갔다. 또 이때부터 경찰은 마음 놓고 경찰정복을 입고 다닐 수가 있게 되었다. 중부서 서장 같은 사람은 습격이 겁나서 출퇴근 때도 사복을 입었고 경찰서 안에서만 정복을 입어야 했다. 그전까지 경찰은 권위도 신뢰도 갖지 못했던 것이 당시 현실이다. 장택상의 결단력으로 인하여 국민도 경찰의 공권력을 인정하고 두려움마저 갖게 되어
 “수백만원 현금을 지닌 여성도 밤길을 다닐 수 있다”는 말이 이때 생겨났다.

이후 경기도 경찰부는 수도관구 경찰청으로, 전국을 3개의 경찰 행정구로 개편하게 되니,
장택상은 경기도경찰부장에서 미군정 제1경무총감부 총감 겸 수도관구 경찰청장이 되었다.
‘수도 청장’ 장택상은 그해 10월 대구 폭동사건, 정판사 위폐사건 법정 난동, 용산의 철도 파업사태등 공산당의 파괴투쟁을 모조리 진압하였다.
또한 김두한(金斗漢)이 태릉의 좌익군대학교에 쳐들어가 장교를 처치한 사건으로 오끼나와 형무소로 쫓겨가자 장택상은 적극 구명운동을 벌여 석방시키기도 하였다.

이승만 박사의 생활비 돕기 운동
이런 일도 있었다. 학병동맹을 괴멸시키고 나서 며칠 후 장택상은 낭산 김준연을 청향원(淸香園) 음식점 뒷방으로 초청하여 만났다. 그 방에는 동대문 창신동 부자 백낙승(白樂承)이 나와 있었다. 백낙승은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좌파 여운형을 지원하고 있던 참이었다.
장택상은 단도직입적으로 “지금 백사장이 우리와 같이 살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오.
이승만 박사를 도와야 우리가 살 것이오.”라고 말하고, 이승만 박사의 생활비를 대어 드리도록
설득하였다는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 ‘우남 선생 조양회(雩南先生調養會)를 조직하였고,
회장에 김준연을 지명하였다. 백낙승은 이때부터 매월 8만원씩 이승만 박사에게 직접 제공하였고 물가가 오르자 16만원씩으로 올려, 이승만이 대통령 될 때까지 지원하였다고 한다.
장택상이 일찍이 미국에서 독립운동 할 때부터 이승만 박사에게 거금을 지원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지만, 경찰부장으로서 사재를 털어 부하 경찰들은 물론, 대한청년단원들까지 장기간 지원했던 일은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뒷이야기이다.

 ◆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9차례 습격 당하다
경기도 경찰부장과 수도청장을 지내면서 장택상은 미군정 기간에 9번이나 피습을 경험한다.
 그 중에서도 두 차례는 특히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일발의 순간들이었다.
남로당 정판사 위폐사건이 발생한 한달 후 1946년 11월 13일 아침 8시반경, 수표동 자택을 나와 출근하던 자동차가 을지로 2가 중앙극장 건너편을 지날 때였다. 괴한 2명이 갑자기 나타나 자동차 정면 유리에 수류탄 2개를 던지고 권총을 난사하였다. 바로 뛰어내린 장택상이 권총을 뽑아들었고 유리창을 깨고 들어온 수류탄은 운전사가 밖으로 밀어냈으나 폭발하여 자동차에 불길이 옮겨 붙었다. 동승했던 하(河)경사가 범인들을 추격하여 한명을 잡았다. 모두 일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파편에 부상한 장택상이 피를 흘리며 성모병원에 달려갔으나 간호원이 놀라 떨기만 했다. 상처는 크지 않아 곧 회복되었다.

 두 번 째 당한 사건은 학병동맹 괴멸에 보복하기 위해 남로당이 지령을 내린 테러이다.
5.10선거를 앞둔 1948년 1월24일 오전 10시 반경, 을지로 입구 장교동을 지나던 장택상의 차가 잠복했던 괴한들의 소이탄 투척을 받았다. 차창을 쨍그렁 부수며 들어온 소이탄은 장청장의 팔을 때리고 발 앞에 떨어졌다. 그는 재빨리 뛰쳐나가며 권총을 쏘았다.
안에 떨어진 소이탄은 다행히 불발탄이었으나 밖에서 또 폭발한 소이탄에 경호원 2명이 화상을 입었다. 붙잡힌 범인은 장 청장을 비웃으며 다음과 같이 자백하였다.
“장택상 총감은 학병동맹사건 이래 좌익 탄압이 극심하여 도저히 활동할 수 없었다. 나는 장총감을 처치하라는 당의 지령대로 수행하였다. 장택상을 죽여 남한 경찰을 무너뜨리는 것이 우리 목표이다.”
장택상은 항상 머리맡에 권총을 두고 잤다.
어느 날 밤 가정부에게 밤참을 가져오라 시켰을 때 괴한이 담을 넘다가 도주한 일도 있었다.
이렇게 연달아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가족들은 경찰 사직을 원하였고, 둘째형 장직상(張稷相)도 “무엇이 부족하여 경찰하느냐. 당장 그만두라”고 강력히 권고하였으나,
장택상은 “고하 선생의 원수도 갚아야 하고 이승만 박사등 지도자들을 보호하여 독립건국을 완수해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 일부 인사들의 무분별 ‘친일파’ 주장내용은 사실 아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박모씨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 인물이 장택상이라며, 장택상의 부친 장승원이 친일파라는 어이없는 발언까지 하였다. 두 가지 모두 사실이 아니다.
또한 안기부장을 지낸 이모씨는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元勳)들인 이승만, 장택상, 김준연, 이범석, 조병옥 등에 대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전혀 당치않은 비판을 해왔다. 이 두 사람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여 역사적 진실을 밝혀보고자 한다. (발표내용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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