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3월 27일에 이뤄진 저의 간절한 소망, 대한민국 입국에 각별한 관심을 돌려주신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입니다. 1937년 생으로 저의 부친과 동갑인데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죠. 사진은 3년 전 모 단체 행사장에서 찍은 것입니다. [사진 = 림일 작가]
    ▲ 1997년 3월 27일에 이뤄진 저의 간절한 소망, 대한민국 입국에 각별한 관심을 돌려주신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입니다. 1937년 생으로 저의 부친과 동갑인데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죠. 사진은 3년 전 모 단체 행사장에서 찍은 것입니다. [사진 = 림일 작가]

    김정은 위원장! 오늘은 제가 왜 서울로 오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이야기하죠. 1968년 평양의 한 건설노동자 가정에서 출생한 저는 ‘대동강남자고등중학교’(대동강구역 탑제동 소재)를 졸업하고 ‘사회안전부 13처’(보통강구역 보통강2동 소재)와 ‘대외건설기업소’(보통강구역 붉은거리2동 소재)에서 건설노동자로 근무했습니다.

    ​제가 사회생활 10년째인 1994년 7월, 김일성 수령이 사망했는데 그의 유해는 2억 달러짜리 ‘금수산태양궁전’(대성구역 미암동 소재)에 안치되었고 그 여파로 이듬해 5월부터 평양시 식량배급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죠.

    매일처럼 이제나 저제나 하고 식량배급소에 길게 줄을 늘어선 시민들 속에서는 “미국과 남조선의 경제봉쇄 정책으로 우리가 시련을 겪는다”는 유언비어만 나돌았습니다. 당시 제 월급이 120원이었는데 그걸로 시장에서 쌀 1kg 사면 끝입니다. 하여 불법적으로 술·담배·의류 장사를 하여 겨우 밥을 먹고 살았죠.

    참 생각되는 점이 많습디다. 정부에서 인민들에게 식량공급을 못하면 자체로 장사든 뭐든 해서 먹고 살라해야 하는데 ‘장사는 자본주의 산물’이라며 강력히 통제했으니까요. 국가에서 식량을 주면 먹고 안주면 말라는 소리죠.

    그래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쌀값이라도 벌어보겠다고 1996년 11월 쿠웨이트 건설노동을 자원했습니다. 결혼으로 생긴 처자식의 미래도 근심이었지만 1년 뒤 직장에서 연로보장(정년퇴직) 받을 부친의 생활도 심히 걱정스러웠죠. 당시 부친이 하루 두 끼 멀건 죽을 드시며 직장에 출근하는 걸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본 외국의 현실은 정말 환희로웠죠. 미국만큼 잘 사는 쿠웨이트 시내대로에 남조선승용차가 뻐젓이 달리는 걸 보고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평양에서 당국의 허위선전에 속아 살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서남아시아의 뜨거운 사막에서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 5개월간 고된 노동을 하고도 월급을 한 푼도 못 받았는데 “당에서 월급을 지급하라는 지시가 없다”는 지배인의 발언에 아무 항변도 못했습니다. 조선노동당은 곧 수령이고 공화국에서는 2천만 인민 중 누구라도 수령의 지시에 토를 달면 총살되죠.

    이후 고민을 거듭하며 제 고향 평양에 더는 미래가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수십 만 시민이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상황에서 수령의 시신보관 궁전을 최고급으로 건축하는 조선노동당의 만행을 보며 치를 떨었고 분노했지요.

    평양을 등지는 일이 그 곳에 남겨진 가족과 천륜을 끊는 무서운 행위임을 알면서도 과감하게 실행했습니다. 당신은 공화국을 탈출한 나를 배신자라고 하겠죠? 맞습니다. 나는 수십 만 인민이 굶어죽어도 눈썹하나 까딱 않는 잔인한 수령을 배신했지 결코 사랑하는 가족과 2천만 인민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1997년 3월 현지 UN사무실에서 해외망명절차를 밟았는데 굳이 대한민국을 최종망명지로 선택한 것은 이 나라도 내 조국이라는 신념이 확실했기 때문이죠. 선조들이 우리에게 평화로이 행복하게 살라고 물려준 이 땅입니다.
     
    2017년 3월 27일 - 서울도착 20주년을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