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고리 5·6호기 원전과 관련한 이른바 '공론화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원장에는 노무현정권 시절 '독수리 5형제'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진보 성향의 김지형 전 대법관이 임명됐다.
위원회가 구성되고 위원장이 임명되는 등 일련의 '속도전'이 결행되고 있지만, 이 모든 과정에는 아무런 법적 수임도, 선거를 통한 민주적 정당성의 부여도 이뤄지고 있지 않다.
"공론조사를 하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 한 마디에 '공론화위원회'라는 거창한 명칭을 단 임의의 사설단체·사조직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사설단체는 앞으로 시민배심원단을 조직해 최종 의견을 도출한다고 하는데, 공론화위원회 구성에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으니 이들이 조직하는 시민배심원단 또한 최종 의견을 도출할만한 법적 권한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말이 좋아 공론화위원회일 뿐, 위원이며 배심원단이 논의하는 모든 일련의 과정들은 일개 사론(私論)에 불과하다. 사론화위원회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동안 이러한 임의단체를 구성해 자칭 공론 해결을 모색해본 사례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경부고속선 건설 과정에서 사패산터널·천성산터널 공사가 문제됐을 때 공론조사를 통한 해법이 제안됐지만, 위원회의 구성 자체가 무산되거나 위원들 간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공론조사를 한답시고 시간을 끌면서 경부고속선 동대구역 이남 공사가 지연됐는데, 2단계 개통에 따른 지금의 부산역 KTX 이용 인원이나 신설 KTX울산역의 승하차량을 감안하면 국가적 손실이 어느 정도인지 집계하기조차 어렵다.
시민배심원단은 울산 음식물쓰레기 재활용장 입지 선정 때도 등장했지만, 선정된 입지는 아파트단지 한가운데로 민원이 쇄도해 결국 2년 만에 정책 실패로 귀결됐다. 예산만 낭비한 것이다.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한 기관에서 책임있는 내부 논의를 통해 결정했다면, 추후 결과를 통해 국민이 직접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절차적 정당성도, 민주적 정당성도 갖추지 못하고 권력으로부터의 명령받아 구성된 위원들이나, 이들이 '길가던 사람들' 붙잡아오는 식으로 구성하는 시민배심원단이 나라의 미래를 오도하면 훗날 그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겠는가.
사론단체에 국가의 백년대계인 에너지수급정책의 미래를 결정하도록 맡길 양이면, 뭣하러 절차적 민주주의의 틀에 따라 총선을 치르고 국민들이 대의대표인 국회의원을 선출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애초부터 이런 문제는 국민으로부터 정당하게 권력을 위임받은 국회가 나섰어야 한다.
행정부는 국회가 의결한 사항을 집행하면 되는 집행기구인데, 집행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집행 방향을 결정할 기구를 마음대로 제안하고 정하는 것은 순서가 거꾸로된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유신 때의 비상국무회의나 5·18 때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도 비판할 방법이 없다.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구성됐고 국민이 선출하지도 않은 사론화위원회에 원전 정책에 관한 최종결정권이 위임됐다고 보는 것은 극히 위험한 논리다. 이 위원회에서 어떤 사론이 도출되든 간에 최종결정을 할 수 있는 기관은 국회 뿐이다.
국회 또한 '웰빙' '통법부' '거수기' 등의 오명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찬반이 엇갈리는 민감한 쟁점과 거리를 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책임있는 자세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결국 이 건은 국회 산자위의 소관이라고 볼 수 있다.
국민의당 장병완 산자위원장은 경제부처 장관에 국회에서도 예결특위 위원장 등 행정부와 입법부의 요직을 두루 섭렵했고, 정당에서는 정책위의장만 여러 차례 지낸 최고의 정책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정책 문제를 다루기에 가장 적임자라 할 수 있다.
산자위의 자유한국당 간사인 이채익 의원은 지역구가 울산이다. 신고리 5·6호기는 행정구역상 울산광역시에 위치해 있고, 산업도시인 울산은 전력의 최대 수요처이기도 하다. 국회가 중심되는 논의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봄직하다.
나아가 국회에 주어져 있는 여러 권한을 동원해, 상임위간 연석청문회를 비롯한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문재인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탈(脫)원전 정책과 관련한 국민들의 궁금증을 해소해주고 올바른 사실을 규명해낼 필요가 있다.
에너지수급정책은 기본적으로 산자위 소관이라고는 하지만 여러 분야에 걸쳐서 복잡한 쟁점이 얽혀 있다.
탈(脫)원전하기 위해서는 화력발전소나 신재생에너지를 더 확보해야 하는데, 우리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을 내용으로 하는 파리기후협약을 준수하기로 한 마당에 화력발전소를 늘리는 게 적절한지 외교통일위원회에서의 논의도 필요하다.
또, 신재생에너지라고 하면 조력발전·풍력발전 등을 생각할 수 있는데, 서해안에 건설하려던 조력발전소가 갯벌 파괴를 이유로 백지화됐고, 풍력발전도 꿀벌이나 조류 등의 생태계를 교란한다는 비판이 있는 상황에서 과연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지 환경노동위원회에서의 문제제기도 요구된다.
경주 지진으로 원전의 안전성이 문제됐다는데, 과연 원전의 위험성이라는 게 괴담 수준이 아닌, 실존하는 위험성인지 이것은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전문가를 불러 청문해볼 문제다.
제왕적 권력의 어명(御命)으로 급조된 임의 사설단체에서 대충 뽑아 만든 '시민배심원단'이 과연 이 모든 쟁점에 대해 불과 2~3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충분히 숙고하고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국회가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는 게 요구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