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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들은 왜 학살되었는가?

골드하겐 교수, 저서 통해 반(反)유태인 의식 굳혀진 배경 설명

조갑제 칼럼 | 최종편집 2017.12.08 10: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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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히틀러의 자발적인 사형집행인들

기자가 하버드 대학에 머물고 있을 때인 1996∼97년에 이 대학교수가 쓴 두 권의 책이 세계적인 화제가 되고 있었다. 사무엘 헌팅턴 교수가 쓴 「문명의 충돌」과 다니엘 J.골드하겐 교수가 쓴 「히틀러의 자발적인 사형집행인들-보통 독일인들과 유태인 학살」이란 책이 그것이었다. 기자는 헌팅턴 교수가 진행하는 세미나식(式)수업인 「정치와 문화」를 수강했고 골드하겐 교수와 대담할 기회를 가졌다.

기자가 소속한 니만 프로그램에는 21명의 현역기자들이 있었고 12명이 미국인, 그 가운데 네 사람이 유태인이었다. 우리 기자들 사이에서 총무 역할을 하던 ABC 방송의 특집프로 담당 여성 프로듀서 테리도 유태인이었다. 그녀가 어느 날 밤 자신의 아파트로 골드하겐 교수를 초청하여 우리 기자들과의 비공식 세미나를 주선했다. 골드하겐 교수는 30대 후반의 부교수급(級)으로서 「학살(Genocide)」이란 학부강좌를 개설하여 인류 역사에서 있었던 대학살의 사례연구를 하고 있었다.

얌전하지만 고집이 센 인상을 준 골드하겐 교수는 독일에 번역되어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킨 자신의 저서(著書)를 소개하면서 『독일인에 의한 유태인 학살의 책임을 히틀러와 나치분자들 에게만 전가(轉嫁)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도 물론 유태인.

『6백만의 유태인들을 죽이는 데 소수의 나치분자들만이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보통 독일인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독일 사회에서 오랫동안 전해오던 반(反)유태인 전통에 물들어 있던 독일인들은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유태인 도살(屠殺)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보통 독일인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당신들도 학살의 공범자이다』고 소리친 이 책은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반(反)유태인 의식이 굳혀진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유태인들은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다」라는 편견 : 예수를 이단이라고 몰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태인들은 지금도 예수(그도 유태인이지만)를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떠받드는 예수를 「가짜 메시아」로 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와 유태인들은 성경 중 구약(舊約)을 공유(公有)하고 있지만 예수의 정통성 문제로 해서 숙적이 되고 말았다.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가 국가까지 지배하는 암흑기를 연출하고 있을 때 유태인은 개종(改宗)을 거부하다가 종교재판에 걸려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죽인 민족의 후예들」을 죽이는 것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은커녕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종교개혁을 주장한 마틴 루터도 유태인들에 대한 증오심에서는 구교(舊敎)와 다름이 없었다.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던 곳은 기독교 세계였다. 이슬람 교도들은 유태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서(西)유럽에서 추방된 많은 유태인들은 이슬람 세계의 패자(覇者)오토만 투르크 제국으로 옮겨 살았다. 이 때문에 지금도 이스라엘과 터키는 사이가 좋다.

▲「유태인들은 만악(萬惡)의 근원이다」는 편견 :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는 페스트나 패전(敗戰), 경제불황 같은 것이 생기면 정치인들이 「유태인의 음모」라고 선동하여 이들을 학살함으로써 불만을 해소하는 전통이 이어져 왔다. 중세 독일에서는 페스트가 확산되자 이것이 유태인들이 퍼뜨린 것이란 음모설이 번져 수많은 유태인 마을이 멸종되다시피했다. 이런 박해 때문에 16세기 중엽까지 서(西)유럽의 유태인들은 거의가 추방되어 박해가 덜한 동(東)유럽과 오토만 투르크로 이주했다.

▲「유태인들은 생산적인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금리(金利)나 챙기는 사회의 기생충적 존재다」는 편견 : 중세때 유태인들은 가정내 교육으로 해서 문자해독률이 높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세리(稅吏), 금융업, 법률가, 전문직, 기술자로 일한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서민들에게는 유태인들이 권력층의 비호 아래 못사는 사람들을 착취한다는 오해를 불렀다.

▲「독일 유태인들이 1차 세계대전중 입대를 기피하고 전쟁특수(特需)를 이용하여 돈벌이만 했다」는 편견 : 이것은 유태인들의 사보타지가 독일의 패전을 불렀다는 식으로 과장되었다.

독일사람들은 알았다

유태인들에 대한 이런 뿌리깊은 역사적 편견을 정당의 정책으로 들고 나온 것이 히틀러의 나치였다. 히틀러는 1933년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잡았다. 골드하겐 교수는 반(反)유태주의를 정책으로 삼고 있는 나치당에게 표를 몰아준 독일 유권자들이 바로 유태인 학살의 공동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골드하겐 교수는 독일인들이 자주 쓰는 변명 『우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유태인들이 학살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는 말을 반박했다. 유태인들에 대한 학살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년간 독일사회에서 공공연하게 진행되어온 유태인 탄압과정의 종결판이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수많은 독일 마을 입구에는 「유태인 출입금지」「소매치기와 유태인에게 경고」「유태인들은 이곳에 들어올 때 위험을 각오할 것」이란 푯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삭소니 지방에서는 나치당이 주최한 반(反)유태인 집회가 2주간에 1천3백50회나 열렸다. 1938년 11월9∼10일에 독일 전역에서 유태인 습격, 방화,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한 유태인이 독일 외교관을 살해한 사건에 대한 보복이었다. 선전상(宣傳相) 조셉괴벨스가 유태인들에 대한 공격을 선도(先導)했다. 유태인들의 상점이 주로 공격을 받고 산산조각 난 유리조각이 거리에 깔렸다고 하여 이날을 「크리스털의 밤」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유태인 약 1백 명이 살해되고 약 3만 명이 집단수용소로 쫓겨갔으며 수백 개소의 유태교 성소(聖所)가 파괴되고 7천5백이 넘는 상점들이 공격을 받았다. 골드하겐 교수는 이런 사건이 있었는데 어떻게 보통 독일사람들이 유태인 학살을 모르고 있었다는 변명이 있을 수 있느냐고 말했다.

독일의 신, 구교는 모두 유태인 탄압에 협조했다고 골드하겐 교수는 주장했다. 덴마크, 네덜란드, 프랑스의 교회들은, 비록 독일의 점령하에 있으면서도 공개적으로 유태인 탄압에 반대했는데 독일의 교회는 침묵하든지 협조했다는 것이다. 독일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독일이 먼저, 하느님은 그 다음」이었다는 것이다. 골드하겐 교수는「히틀러의 자발적인 사형집행인」에서 한 독일여자의 수기(手記)를 소개하고 있다.

<1942년 10월 슈투트가르트에서였다. 나는 전차를 탔다. 만원이었다. 늙은 부인이 탔다. 할머니의 발이 부어 구두 바깥으로 삐어져 나올 정도였다. 옷에는 유태인임을 가리키는 다윗의 별이 붙어 있었다. 나는 일어나 할머니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그 순간 어떤 승객이 갑자기 유태인 할머니를 향해서 『나가라!』고 소리쳤다. 이 소리는 곧 합창으로 변했다. 전차운전사가 차를 세우더니 말했다. 『당신네 두 사람 모두 내리시오』>

골드하겐 교수는 「반(反)유태인 전통과 문화 속에서 자라난 보통 독일사람들이 유태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서 독일 101 경찰대대의 행동을 사례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이 경찰대대는 나치당 소속도 아니고 비밀경찰(SS)소속도 아닌 치안경찰대 소속이었다. 우리나라 전투경찰과 비슷한 개념으로 창설된 조직인데 「유태인들이 몰려 사는 곳을 순찰하면서 집단수용소에 가지 않고 남아 있는 유태인들을 처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대원들도 골수 나치당원이 아니고 보통 독일인들 속에서 선발되었다. 골드하겐 교수가 조사한 대원들의 사회적 배경은 주로 중산층이었다. 99%는 기혼자, 약 4분의 3이 자녀를 둔 아버지였다. 보통 독일사람 5백1명으로 구성된 101대 대원들이 폴란드 점령지에서 유태인들을 사냥하러 다닌 이야기가 골드하겐 교수의 책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기꺼이 학살에 참여

대대원들은 게토(유태인 집단 거주지)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을 끌어 모아 수용소로 보내는 임무를 맡았다. 집을 뒤져서 유태인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집합장소까지 데려다주는 일이었다. 대대원들은 저항하는 유태인들과 수용소로 보내기 힘든 늙은이, 어린이, 병자들은 현장에서 사살해버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보통 독일인들 출신인 대대원들은 이 명령을 자발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다.

 병원에 들어가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들을 사살하고 지하실에 숨어 있는 유태인들에게 수류탄을 까던져 넣었다. 모든 유태인들은 비(非)무장이고 무저항이었다. 숨어 있다가 발견된 유태인들은 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따로 모아서 사살했다.

어느 날 101대 대원들은 1천2백 명을 숲으로 데리고 가서 사살했다. 한 대대원은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는 대부분이 여자와 어린이들인 유태인 무리를 숲으로 데려가서 눕혀놓았다. 한 60세 되는 할머니는 나에게 애걸했다. 제발 빨리 죽게끔 잘 쏴달라고. 우리는 누워 있는 유태인의 뒷머리를 향해서 8인치 거리까지 총구를 갖다댄 다음 쏘도록 지시받았다. 내 옆에 있던 코호는 열두 살쯤 되는 어린이를 쏘게 되었는데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총격을 받고 터진 어린아이의 골수가 나의 팔뚝에 튕겨 묻었다. 이것을 보고 동료들이 웃었다. 코호는 그것을 가리키면서 자랑스럽게 「그건 내가 쏜 거야」라고 말했다』

또 다른 대원의 증언 :『그나데 중위는 잡혀온 유태인들 가운데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 25명을 뽑아냈다. 노인들에게 옷을 벗도록 명령했다. 그리고는 파놓은 무덤까지 기어오라고 시켰다. 그나데는 주변을 둘러보고 소리쳤다. 「하사관들, 몽둥이를 가져와」하사관들은 몽둥이를 들고와서 기어가는 유태인들을 개패듯이 두들겼다. 그리고는 사살했다. 아마도 모든 대원들이 다 몽둥이질에 참여했을 것이다』

이들이 유태인들을 자신들이 판 묘혈(墓穴)에 몰아넣고 학살하는 방법도 독일인답게 기계적이었다. 그들은 유태인들을 시켜 한 변이 30m와 50m인 직사각형에 깊이 2m 가량의 큰 무덤을 파게 했다. 그리고는 유태인들을 차례로 불러들여 무덤의 바닥에 열을 지어 눕게 했다. 보통 독일인들인 101대대원들은 누워 있는 이들의 뒷머리를 쏘았다. 그 다음 불려들어온 유태인들을 죽어 있는 시체 위에 포개진 상태로 눕게 한 다음 똑같은 방법으로 사살했다. 때로는 총알을 맞고도 즉사하지 않은 유태인들이 있었다.「자비의 총격」이라고 하는 확인사살을 해야 하는 데 이날은 그런 선심(善心)을 쓰지 않기로 했다.

고통으로 절규하는 생체(生體)위에 살아 있는 유태인이 포개어지고 그를 쏘고… 이런 식으로 무덤이 시체로 꽉 차 오르는 것이었다. 이 무덤에서는 지하수가 솟기 시작했다. 대대원들은 피로 물든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임무를 계속했다. 이런 식으로 101대 대원들은 1942년과 이듬해 폴란드에서 수 만 명의 유태인들을 처형했다. 이게 성실하기로 이름난, 더구나 처자식을 둔 보통의 독일인들이 한 일이라고 골드하겐 교수는 주장했다. 그렇다면 히틀러에게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그는 그 독일인들의 후예인 지금의 독일인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모든 학살은 선동적 정치인의 책임

1942년 9월25일 101 경찰대대의 한 중대는 폴란드 레지스탕스 전사(戰士)들의 공격을 받고 한 하사가 사망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트랩 중대장에게 무조건 폴란드 사람 2백 명을 사살하도록 명령이 떨어졌다. 트랩 중대장은 무고한 마을 사람 3백 명을 인질로 잡았다가 그 가운데 78명을 골라내 사살했다. 이 일을 한 다음 트랩 중대장은 괴로워했다고 한다. 울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수만 명의 유태인들을 죽일 때는 자발적으로, 때로는 즐겁게 일하던 그가 왜 폴란드 사람을 죽이고는 고민했는가. 골드하겐 교수는 보통 독일사람들이 오랫동안 반(反)유태인 교육을 받아온 때문에 「예수를 죽인 유태인」을 죽이는 데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지만 다른 민족 사람들을 죽일 때는 인간으로 돌아갔다는 해석을 했다.

101 대대의 한 중대장인 울프강 호프만 대위는 대대장의 명령에 반항한 적이 있었다. 그는 「나는 도적질과 약탈을 하지 않겠다」는 요지의 서약서를 중대원들로부터 받도록 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독일인으로서의 공덕심에 충실한 우리 중대원들의 명예심을 손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골드하겐 교수는 유태인을 죽일 때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을 보이던 호프만이 다른 일에 있어서는 도덕과 명예를 추구하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묻고 있다. 「히틀러의 자발적인 사형집행인」의 결론부에서 골드하겐 교수는 유태인 학살의 요인을 세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는 독일사회에서 이어져 내려온 반(反)유태인 문화가 보통 독일인들을 히틀러의 자발적 협력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협력 없이도 히틀러는 유태인들을 학살할 수 있었겠지만 6백만이나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둘째는 유태인 멸종을 공약으로 내건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이를 국가시책으로 추진한 점이다. 민중들이 반(反)유태인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학살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학살을 이념화하고 정책화한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

셋째 독일의 군사적 우월성이 6백만을 죽일 수 있게 했다. 학살된 유태인들의 대부분은 폴란드, 러시아 등 독일의 점령지에 살고 있었다. 독일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많지 않았다. 독일의 군사적 정복이 독일 이외 지역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에게까지도 죽음을 내렸던 것이다. 

골드하겐 교수는 학살의 책임을 집단적으로 추궁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집단으로서의 독일인들의 책임이 아니라 학살에 가담한 개인으로서의 독일인이 책임질 문제라는 것이다.

이 책은 1996년 말 주간 타임지(誌)가 선정한 1996년의 화제작 가운데 두 번째로 뽑혔다. 이 책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케나다 휴론 대학의 로버트 겔라틸리 교수는 서평(書評)에서 독일만이 특별히 강한 반(反)유태인 문화를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골드하겐이 주장한 히틀러와 독일인들의 교감설(交感說)에 대해서도 의문을 나타냈다. 골드하겐은 히틀러가 독일 사람들의 민족성을 통찰하고 있어 어떻게 하면 그들을 유태인 학살에 동원할 수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겔라틸리 교수는 히틀러가 유태인 학살을 진행시키고 있으면서도 한번도 공식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측근들에게도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꺼려 했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反問)했다. 겔라틸리 교수는 또 히틀러는 슬라브족(族)에 대해서도 멸종정책을 추진했고 아마도 유태인들보다도 더 많은 슬라브인들을 죽였을 것인데 독일 사회에서 반(反)슬라브 감정이 그토록 강한 것은 아니지 않았는가 하고 되묻기도 했다.


憎惡의 과학

겔라틸리 교수는 골드하겐 교수가 「독일인들은 유태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그런 학살을 자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고 주장한 데 대해서도 반박했다. 겔라틸리 교수는 독일군 안에서 군기(軍紀)위반으로 처형된 군인들이 1차 세계대전 때는 50명도 안되었는데 2차 세계대전 중에는 1만5천 명이나 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요컨대 겔라틸리 교수는 유태인 학살이 가능했던 결정적인 원인은 역시 히틀러와 나치라는 특수한 정권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니만 프로그램에 소속된 기자들 가운데 골드하겐의 주장에 대해서 체험적 평가를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기자는 두 사람이었다. 세르비아, 즉 구(舊)유고슬라비아에서 온 드라간 치칙 기자와 나. 보스니아 내전(內戰)과 인종청소를 취재한 경험에서 드라간 기자는 『같은 슬라브 사람들인데 종교에 따라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계열로 나뉘어져 죽고 죽이는 내전을 벌일 이유가 반드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제까지도 평화롭게 공존하던 이웃들끼리 적이 되어 싸우게 된 것은 순전히 정치인들이 당파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순진한 민중을 선동한 결과이다』라고 했다. 나도 드라간 기자와 같은 견해였다. 역사상 대부분의 학살은 정치인들에 의한 선동의 결과란 말이다.

우리나라는 서양에 비교해서 학살의 역사가 거의 없는 편이다.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인종분규에 따른 학살이 있을 리가 없었고 종교에 따른 학살로는 조선조 말에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있었던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빚어진 동족상잔의 학살은 우리의 민족성과 문화, 전통에 비추어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우리 현대사를 얼룩지게 만든 학살은 공산주의라는 「증오의 과학」이 들어온 때문이었다.

공산주의 이론은 「계급의 원수」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지주(地主), 자본가들을 때려죽이는 일은 이 「계급의 원수」를 타도하여 노동자 계급을 해방시키는 혁명과업이고 정의로운 행위로 되었던 것이다. 「유태인들은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고 정의(定義)를 내려놓으면 그들을 학살하는 일이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대구폭동,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4.3제주도 폭동, 그리고 6.25사변 중에 좌익들이 보여준 동족학살은 우리 역사상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잔인한 수법이었다. 좌익들의 이런 학살에 대한민국이 대응하는 과정에서도 무리가 빚어졌다. 6.25남침 때 서울에서 피난 가지 못한 수천 명의 부상병들이 병원에서, 병상에서 인민군과 공산당에게 학살되었다. 남로당 전력자(前歷者) 모임인 보도연맹원(保導聯盟員)은 인민군의 서울 입성 이후 설치고 다니면서 우익, 애국인사들을 잡아죽이는 데 앞장섰다. 이런 소식을 들은 이승만(李承晩) 정부는 후퇴하면서 후방의 보도연맹원들을 예방적으로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부와 국군측의 이런 무리는 국가의 생존본능이 발동한 결과이자 공산당의 학살에 대한 조건반사적인 대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학살의 원인제공자는 공산당이었다.

학살에는 반드시 증오의 논리가 있다. 유태인들은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선동, 자본가는 계급의 원수라는 선동, 가진 자는 타도대상이란 선동, 기득권 세력과 수구세력은 청산되어야 한다는 선동, 어느 지역 사람들은 안 된다는 선동, 이런 증오의 논리가 사회적으로 확산되면 피를 부르기 쉽다. 증오심을 북돋우는 것을 장기로 삼는 정치인들은 위험하다. 청산, 타도, 숙청, 거세, 제거, 음해 등 살벌한 용어들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정치인들도 위험하다. 살벌한 용어로써 하는 선동의 정치는 인간이 가진 증오심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양심을 마비시키고 이성을 마취시키는 것이다.

증오의 논리는 선동정치인들에 의해서 학살로 비화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유태인학살, 르완다 학살, 공산당에 의한 학살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정한 문민정치인은 문민(文民)이란 말에 걸맞은 교양과 양식을 가진 사람이어야지 증오심을 부채질하는 선동전문가일 수는 없다. 문민이란 말은 글을 아는 사람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글을 아는 사람은 점잖은 말과 글을 써야 할 의무가 있다.
[조갑젣닷컴=뉴데일리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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