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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권에 들어간 민주노총은 썩기 시작했다. 위기를 잘 넘기면 바르고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지만 잘못하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름보다‘골리앗 전사’로 기억한다. 이갑용이란 이름은 그가 1998년 민주노총 위원장이 되고 나서부터 익숙해진 이름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중심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그는 올해 쉰 두 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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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가 자신의 23년 노동운동을 회고한 책에서 한때 자신이 이끌었던 민주노총에 직설적 언어로 비판의 비수를 들었다.
그는 “사람으로 치면 열다섯 살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민주노총은 제도권에 들어가 썩기 시작했다”며 “오늘날 민주노총이 왜 이렇게 됐는지 위원장을 했던 내부자로서의 경험과 조직 밖에서 경험한 외부자의 시선으로 냉정하게 진단해보고자 했다”고 자신이 비수를 꺼내든 속내를 밝혔다.
비수가 비집고 들어가 보여준 민주노총의 속내는 가히 충격적이다. 썩을 만큼 썩었고 곪을 만큼 곪았다. 악취가 요동을 친다.
이갑용 씨가 ‘철수와 영희’에서 펴낸 380쪽 책 ‘길은 복잡하지 않다’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97년 민주노총과 전국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엽합)이 공동으로 ‘국민승리21’이란 선거조직을 결성하고 권영길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을 후보로 내세운다. 권 후보가 30만6000표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낙선하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섰다. 김대중 정권은 IMF를 만든 재벌은 놔둔 채 ‘국민’이라고 불리는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정부에서 떠드는 대로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나라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해고된 남편 대신 생계를 위해 접대부 생활을 해야 했던 어느 여성 가장이 목격한 것은 고급 술집에서 강남의 부자들이 술잔을 부딪치며 외치는 “이대로”라는 환호였다.
김대중 정권은 당선되자마자 민주노총 지도부를 만났다. 그러나 그 자리는 수구집단에 당해온 노동자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김대중은 정리해고의 필요성만 내내 강조했다.<책 본문 171,172쪽>
이 씨는 책에서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남도 회고했다. 그는 민주노총 위원장 시절 세 번 만났다는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자기 이야기를 하는 데 시간을 다 보내 학생들을 가르치려는 선생님의 느낌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어 민주노총의 복잡한 인맥과 구조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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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민주노총 위원장에 출마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구조였다는 것을 출마하고 나서야 알았다. 기성 정치판 못지않게 운동 판에 존재하는 학연, 지연, 정파, 서울 중심주의 등에 의해 굴러가는 복잡한 조직의 구조를 알게 됐다. 민주노총의 위원장이라는 게 알 만한 사람들이 모여 작당하고 후보군을 뽑아 품평하고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후보를 섭외해서‘세워지는’것임을, 보이지 않는 손이 운동 판에도 있음을 미처 몰랐다. <책 본문 174,175쪽>
이 씨는 이 같은 정파의 존재가 민주노총을 갉아먹는 암 같은 존재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김대중 정권에 대한 애정과 무비판적 수용은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에서 절정을 이뤘다. 노동절 대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몰아붙이는 김대중 정권 퇴진’을 넣은 것 때문에 난리가 났다. 나는 심하게 공격을 받았다. 그때 공격에 앞장을 선 사람이 민주00연맹의 위원장이었다. 한국노총 소속이었다가 민주노총으로 넘어왔는데 2004년 수석부위원장을 맡았다가 수천만원의 뇌물을 받아 민주노총 집행부를 총사퇴하게 만든 인물이다. 그들은 “출범한지 1년도 안된 대통령에게 퇴진하라고 하는건 안 된다. 더 지켜봐야 한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인데 우리가 욕해서 되느냐”라고 생각도 못한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민주노총 후보인 권영길이 아니고 김대중 대통령을 “우리가 뽑았다”고 맞섰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정권을 두둔하는 발언이 나올 줄은 몰랐다. <책 본문 197,198쪽>
이 씨는 곪아터진 민주노총의 비리도 지적했다. 1997년 민주노총 재정위원장 채모 씨가 공금 수억 원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날린 이른바 ‘재정위원회 사건’의 조사과정에서 목격한 민주노총의 무책임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씨가 조사를 시작하자 일부 연맹과 지역 본부에서‘투쟁하라고 뽑아 줬더니 투쟁은 안 하고 분란만 만든다’며 난리가 났다. 재정위 실무자를 불러 조사를 하니 자료가 없다고 잡아뗐고 통장을 다 가져오라고 하니 불태우고 없다고 말했다. 검찰에 고발해서 조사를 하려고 하니 유독 이때만큼은 좌우도, 중도도, 노선과 상관없이 일치단결해 막았다. 이씨는 “평소 앙숙이던 이들이 이렇게 단결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고 회고했다. 그는“민주노총이 총체적인 비리집단으로 불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조직 돈 수억 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고 비판했다. -
책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언급도 있다.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 당시와 울산 동구청장 재직 때 만난 노 전 대통령은‘악법은 투쟁으로 깨야 한다’는 연설로 노동자들을 설레게 했지만 이듬해 골리앗 파업 때는 골리앗에 올라와‘그만큼 했으면 됐으니 내려가서 투쟁하자’며 태도가 달라졌다. 이 씨는 그때 크게 실망했다고 기억했다.시인 오도엽 씨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이갑용은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의 치부를 고스란히 세상에 말한다. 국민파니 중앙파니 하며 정파’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며 ‘정파’의 패악을 리얼하게 고발한다. 진보세력이 존경해야 할 숱한 지도자들을 실명까지 들먹이며 부패를 까발린다. 여기엔 좌도 우도 가리지 않는다. 때론 듣기 싫을 정도로 까칠하고 때론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는가 싶어 욕이 나올 정도다. 허나 어쩌랴! 이 부끄럽고 아픈 흔적이 모두 사실인데. 그리고 ‘그때’가 아닌 ‘지금’인데.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사라질 부스럼이 아니라 더욱 심하게 곪아갈 상처인데. ‘절대 읽지 말아야 할’ 이야기지만 꼭 한번은 듣고 반성하고 반드시 뜯어 고치지 않으면 안 될 오늘의 이야기다”라고.
김경욱 전 이랜드 일반노조 위원장의 지적은 보다 직설적이다.
그는“이갑용 전 위원장은 이 책을 통해 노동운동의 감추어진 종양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조직검사 결과를 내놓았다. 검사 결과는 악성 종양이다.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오래 못 간다. 노동운동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단순한 약물치료가 아니라 악성 종양 전체를 들어내는 대수술이 필요하다. 과연 그 수술을 누가 할 수 있을까? 성공할 수는 있을까?”라고 말했다.이 씨는 지난 15일 가진 출판기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기록하고 반성할 것은 반성하자는 차원에서 책을 발간하게 됐다, 실제로 잘못한 것이 많았고 반성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민주노총의 경우 비리사건, 성폭행사건 등은 그냥 덮어버리고 끝날 것이 아니었으며, 당시 해결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그동안 뭐가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이렇게 책을 발간해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찾으려 한 것이다”라고.
이 책으로 평소 사회의 약자를 대변하고 인권과 도덕성을 내세우던 민노총이 좌파세력들의 대표 주자로서 자신들이 내세우던 도덕과 가치관과는 이율배반적이고 만성적인 모럴 해저드에 젖어 있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제 민노총의 실체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우리 사회의 균형적 발전을 고민하는 단체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좌파세력들의 세 확산에만 몰두하는 전문 시위집단이라는 사실 역시 명백해졌다.
노동운동의 순수성을 잃어가고, 그래서 결국 국민과 노동자들이 등 돌리는 현실에서 이 씨의 충고가 얼마나 민주노총에 크게 들릴 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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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용씨는 1958년생이다. 1984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해 노조 사무국장과 위원장을 지냈다. 1990년 5월 노조 비상대책위원장 자격으로 조합원들과 함께 골리앗크레인에 올라가 14일간 ‘골리앗 농성’을 주도했다. 1998년 4월~1999년 9월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냈다. 2002년 7월부터 민주노동당 소속으로 울산 동구청장을 지내다 파업 공무원에 대한 징계 거부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2006년 5월 사퇴했다.